중국 미녀의 치명적 유혹(조창완)
조창완
“성벽을 두른 자는 망하고,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노마디즘의 대표적인 주창자 자크 아탈리의 말이다. 그는 이 말로 유목민과 정착민 간에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말하고, 미래 사회는 떠돌면서 머무르고 정착하는 노마드적 속성을 가진 이들이 주도한다고 역설한다.
과연 노마드가 무엇이길래.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말할까. 그 옛날 중국에도 이런 노마드적 속성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흔히 오랑캐로 알려진 중국 서북향의 기마민족이 바로 그들이다. 토번, 말갈, 선비, 몽고, 여진 등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 민족들도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기마민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심지어는 말 위에서 태어나고, 말위에서 자라고, 말과 함께 시험받고, 말과 함께 죽어간 기마민족들이 많다. 거기에 대부분의 변방 민족은 기골이 장대해,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중원에서 농사를 주로 짓던 한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한족들은 농한기가 끝나서 북쪽에 식량이 떨어져 남하할 때가 되면 대문에 식량과 고기를 걸어두고, 제발 사람만은 해치지 말아줄 것을 염원했다. 물론 지도력 있는 이가 지도자로 나서 튼튼한 왕조가 만들어지면 북방에 맞서기도 했지만 그런 시기 보다는 북방에서 스스로의 분열이 있어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방 기마민족들에게도 치명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그 근원적인 배경에는 여자와 사상이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기마민족들을 말에서 내려오게 하고, 순하게 만든 데는 몇 명의 여인이 있었다. 또 그 흐름을 바탕으로 이들은 중국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됐다. 궁극적으로 기마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빚게 했던 몇 여인들을 살펴보자.
한 화가가 형성화환 왕소군
중국 4대 미녀(西施、貂蟬、王昭君、楊玉環) 중 하나인 왕소군도 그런 여인 가운데 하나다. 왕소군은 한원제(漢元帝 BC48-BC33년 재위)시기의 궁녀로 알려졌다. 이 시기만해도 한은 강력한 변방 민족을 달래기 위해 황녀들을 변방 민족에게 시집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한원제도 그런 여인을 뽑기 위해 궁정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릴 것을 지시한다. 차갑고 힘든 북방 행을 피하기 위해 궁녀들은 모두 뇌물을 바치지만 자신에게 당당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가장 못생긴 얼굴로 그려졌다. 그리고 흉노의 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갈 여인으로 선발된다. 그녀를 데리러 가기 위해 선우가 찾아온 날 한원제는 마지막 배웅인사에서 왕소군이 날아가던 기러기의 날개 짓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연수를 처형했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몸이 약해질 정도였던 미모를 가진 왕소군은 먼 북방으로 건너가 생활한다. 그녀가 생활하던 지금의 네이멍구는 여름에도 밤에는 차가운 기운이 도는 곳이다. 차가운 날씨로 인해 창지앙(長江) 중류에 있는 고향 마을이 한시도 잊혀지지 않았을 왕소군은 호한야선우가 죽은 후 풍습에 따라 선우의 아들과 재혼하는 여정을 가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는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한다.
바로 가장 강했던 흉노(匈奴)족이 농경을 배우고, 정착하게 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2대 호한야선우는 후한(後漢)에 투항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투항을 계기로 흉노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고, AD 1세기 말 주변 부족에 족속되어 버렸다. 흉노의 멸망에는 대 기근 등의 원인도 있었지만 흉노의 중심인물인 호한야선우가 주도해 유목의 기질을 버리고 한자를 배우고, 중원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큰 역할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서쪽으로 동(東)투르키스탄까지 영역을 넓힌 흉노족은 훗날 허망하게 분열하고 만다. 왕소군의 이런 역정은 이후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에서 오르내렸고, 시인묵객들은 다양한 시편으로 그녀를 이야기했다. 특히 이백의 시가 구슬픈데 이백은 시 ‘왕소군’에서 “한나라의 달은 여전히 동해에서 떠오르고 있건만, 명비(왕소군)는 서쪽 땅으로 시집을 가 돌아오지 않네//연산은 언제나 추워 눈이 꽃을 이루고, 미인은 초췌하여 오랑캐 땅에 묻히리//살아선 황금이 모자라 초상화를 잘못 그렸으나, 죽어서는 청총을 남기어 사람들을 탄식케 하네.”(漢還從東海出 明妃西嫁無來日 燕支常寒雪作花 蛾眉憔悴沒胡沙 生乏黃金枉圖畵 死留靑塚使人嗟)라고 읊었다.
한나라의 궁정사람에서 오랑캐의 첩이 된 불행한 운명이지만 왕소군의 여정은 최근에 중국 소수민족 융합정책과 맞물려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여인이 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연거푸 영화나 드라마로 부활해 그녀의 줏가를 높이고 있는 셈이다.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티벳으로 들어가 중국 문화의 전도사가 된 문성공주 역시 티벳 민족에게는 중국과 끈을 만드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이세민이 통치하던 당정관(唐貞觀) 14년(640년) 한 여인이 서쪽으로의 먼 여정을 떠난다. 바로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다. “혼인관계 한번이 10만 강병과 같다”(一檣婚姻就相 當于10万雄兵)는 당태종의 취지로 16살의 문성공주가 25살의 송찬캄포(松贊干布)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당시 토번은 송찬캄포가 이끌면서 지금의 시장자치구는 물론이고 인도북부까지 영토를 넓힌 강성한 민족이다. 특히 시장의 서쪽은 당의 수도 장안과도 멀지 않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만큼 화번공주의 역할도 중요했다.
그런데 문성공주의 역할도 단순한 화번공주에 그치지 않았다. 이미 경전에도 밝았던 문성공주는 모셔간 불상과 불경, 유교 경전 등으로 토번을 문명화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녀는 라싸의 메인 불교사찰인 조캉사원에 모셔져 있다.
아름다운 두 여인의 길은 중국에게는 문화를 전파하고 국경을 넓히는 동기를 부여한 의미있는 길이었다. 반면에 용감한 변방 민족들에게는 그들을 말에서 내려오게 하고, 민족을 잃어버리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빚었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미녀는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도 불려 나라를 기울게 하는 주된 인물로 인식됐다. 실제로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망친 말희(妺喜),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망친 달기(妲己), 주(周)나라 유왕(幽王)을 망친 포사(褒姒) 등은 대표적인 망국의 여인들이다. 중국에서는 여기에 중국에서는 여기에 진(晋)을 망친 려희(驪姬)를 넣어 4대 요희(四大妖姬)라고 이름 짓는다.
또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西施) 역시 월(越)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범려의 지시로 나라를 구한 마타하리라고 볼 수 있지만 오(吳)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부차(夫差)를 유혹해 나라를 파탄으로 이끈 망국의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양귀비도 당 현종대의 위기를 불러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초선 역시 동탁, 여포 등을 위기로 몰았던 독소가 존재했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일 뿐 그토록 아름답다는 과거의 여인들의 실물은 정말 물고기가 비늘짓을 멈추게 하고, 달을 부끄럽게 하고(拜月), 기러기가 날개 짓을 멈추어 떨어지게(落雁)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들 모두 무덤 속에서 편안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그녀들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통치 이념에 따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하는 문화 기획자들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통합을 위해서 청총에 묻힌 미녀들도 현대판 미녀들로 다시 부활하는 지금의 세태를 무덤 속 주인들은 어찌볼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