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렌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지음, 김수현 옮김, 미메시스)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와 얘기가 얼마나 심각한지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으며,
친근한 사이라고 해서 자신을 모두 까발릴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친해서 더 입을 닫게 될 때도 많다. 27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할 때 조언(다르게 말하면 설교)을 받는 게 괴롭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언을 받음으로써 자기 얘기에 어떤 평가가 발생해 버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듣는 측은 딱히 조언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괜찮네>, <그거 재밌겠다> 같은
긍정적 평가조차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어 쌓일 때가 있다고 한다.
그 마음은 나도 조금 안다. 나도 남에게 고민을 말할 때 상대방에게 <괜찮을 거야> 같은 대답을 듣는 게 싫다.
자기 내면에 안고 있는 고민을 정확하고 남김없이 상대방에게 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민의 지극히 일부분을 언어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괜찮다> 또는 <괜찮지 않다>로 판단하는 건가 싶다.
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 얹지 말았으면, 하는 기분이다. 29
<동행>, <동석>, <지켜보기> 등이 될 텐데, 이러한 의뢰는 기본적으로 딱히 내가 없더라도
의로운 본인의 힘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얘기를 들어 달라>는 의뢰도 나는 그냥 맞장구만 치는 거니까
이론적으로는 의뢰인 본인이 혼잣말하는 형태로 알아서 해결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없어도 좋지만 거기에 누군가 한 명 있는 것만으로 의뢰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촉매> 같은 구실을 하는 게 아닐까. 31
어느 쪽이든 이러한 <공헌>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핸디캡을 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일을 할 때는 그 점이 플러스가 된다.
일반적 공헌과는 다른 형태로 그럭저럭 많은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에
나름의 이바지를 하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앞에서 말한 일명 <동행> 같은 의뢰도 그중 하나다.
의뢰인 당사자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나는 단순히 곁을 따를 뿐.
거기에 깊은 관여는 요구되지 않으며 개성도 필요 없다.
말하자면 회사원 시절과 지금 사이에 역전된 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55
사회사업가들과 '욕구'를 공부할 때,
사회 속에서 역할을 이루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때 꼭 역할이 있어야 하는가, 꼭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질문을 예상했습니다.
그때 이 책이 떠올랐습니다.
저자는 일본 사람. 일본에서 자신을 빌려주는 렌털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빌린 사람 곁에서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그를 빌린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행복해하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사람 구실이란 게 무얼까?
자기 결과 다른 일이 맡겨지고, 그 일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해내야지만 사람 구실 했다고 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렌털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존재 자체로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
이를 렌털 서비스로, 자신을 대여한 사람들의 만족을 통해 증명합니다.
청년세대를 이해하고 싶어 읽었습니다.
특히, 고립되어 살아간다는 청년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걸 이렇게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가 싶은 내용도 있습니다.
새롭게 깨닫고 이해한 내용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