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1일, 먼저 간 친구 재찬이의 큰아들 건욱이의 결혼식이 있었다.
작년 동생 슬기의 결혼 때는 마누라를 보냈으나, 이번 수원 결혼식엔 나와 마눌이 함께 참석했다. 저녁에는 현종이네 결혼식이 있어서 겸사하기에 좋았다.
나와 재찬이, 그리고 근국이 셋이서 죽어라고 붙어다니던 때는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어떤 동기로 가까워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자애들이 잘 따랐던 근국이, 그리고 의리의 사나이 재찬이, 다소 이기적인 나,
이런 이질적 성격의 세놈이 뭉쳐서 매일 어울려 놀았다.
풍기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나에게 자전거 타는 걸 가르쳐 준 것도 재찬이었다.
어디서 고물 자건거 하나를 구해와서 뒤에서 잡아주면서 가르쳐 줬다.
'야,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고 패달만 계속 밟아, 그럼 안넘어져'
그의 말을 따라 핸들을 꺾어가며 부지런히 패달을 밟았더니 어느 결엔가 뒤에 따라오는 재찬이는 없고 나혼자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재찬이는 나에게 바둑을 갈쳐줬다.
아다리가 뭐고, 축이며 패가 뭔지, 죽은 자리에 또 놓으면 안된다는 규칙까지 열심히 가르쳤고 난 습득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친구도 바둑 실력은 왕초보였다.
배운지 사흘만에 내가 그 친구를 이기니 그넘은 자존심이 상해서 나와 더 두려하지 않았다. 결국 그게 내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둔 바둑이었다.
그후로 나는 바둑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태생이 기박(棋搏)을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바둑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의 형님(재철)을 통해서 이번에 전해들은 바로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되었다는 매형이 한분 대구에 계셨다. 누님도 80이 넘어 병석에 계신단다.
그 매형이 계급이 소령쯤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월남에서 커피를 가져오셨다.
그 매형덕에 제법 여러가지의 군용품이 재찬이네 집에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휘발유 바나(버너)였다. 석유 바나는 많이 보았지만 휘발유 바나는 그게 마지막이었다.아마도 미제로 기억한다. 노란 놋쇠로 되어서 휘발유를 넣고 펌핑을 하고 불을 붙이면 파아란 불꽃이 일면서 화력이 끝내줬다.
저녁이 되면 농협 앞 주씨네 (후배 주정례-왕자고무신집)에서 휘발유 한홉을 4원에 사서 넣고, 삼거리 안씨네 가게에 가서 흑설탕 10원어치 사고, 새마을 담배 10원주고 한갑사서 넣고 학교로 향했다.양초도 두어개 챙겼다.
학교에 대한 설명은 구태어 하지 않으련다.
노천 시멘트 복도요, 문단속도 하지 않는 교실은, 그야말로 우리들 세상이었다.
우선은 사과서리 부터 했다.
의리의 재찬이가 늘 앞장을 서고 근국이는 언제나 건달이었다. 겁많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여차하면 도망갈 태세였다.
사과는 매번 따지는 않았지만, 따서오면 늘 무용담이 늘어졌다. 주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는 둥, 그집 개하고는 이제 친해졌다는 둥, 개를 짖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개처럼 기어서 접근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는 등.
큰 냄비에 커피를 끓였다.
커피라는 물건이 한량들이 다방에 앉아서 마담을 희롱해가며 거드름도 피우고, 그렇게 우아하게 마시는 물건인지는 정말 몰랐다. 풍기 지서 앞에 다방이 하나있는 것은 고등학교 때 알았다.
진한 커피향에 섞인 달콤한 설탕맛이 좋아서, 휘발유 바나에 한 냄비를 끓여서 너도 한 사발, 나도 한 모금 이렇게 돌아가며 마시고는 담배도 한대 폼나게 피웠다.
To be continued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내일 계속예정)
열두시가 되면 재찬이는 의자를 붙혀놓고 자고 근국이와 나는 공부를 했다.
커피를 마신 덕에 졸음은 오지 않고 머리는 얼음처럼 맑았다.
머리는 스폰지가 되어 무엇이든 읽기만 해도 다 외워졌다.
책이라야 교과서 밖에 없었으니 중 2때 이미 중3 영어책도 다 외워버렸다.
나중에는 사전 외우기도 시도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자력으로 공부라고 한 것은 나이 오십줄에 들어서 동양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다.
영어가 좀 되는 덕에 이번 호주 여행에서도 양넘에게 술 얻어마신 놈은 나밖에 없었다.
가을 소풍은 순흥 소수서원에 갔는데, 자전거에 라면과 냄비를 싣고가서 맛있게 라면을 끓인 건 좋았는데, 우리 삼총사는 거의 한 젓가락도 못먹었다. 당시에는
라면을 처음 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 그 냄새에 환장한 친구들에게 다 빼았겼지만 기분은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중학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뿔뿔히 흩어졌다.
근국이와 나는 함께 안동고에 진학했으나, 내가 먼저 때려치우는 바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근국이는 안동고를 졸업도 하지 않고 때려치고는 사과장사를 나섰다가 안동 과부가 사준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죽었다. 나이 서른도 못채우고.
내가 다시 재찬이를 만난 것은 1980년대 후반기 태백에서였다.
어느날 우리 약국으로 그가 찾아와서 경동광업소에 다닌다고했다.
그동안은 청주에서 자전거방을 운영했단다.
한번은 장물취득 혐의로 입건이 되었는데, 권상주와 박병규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튼 그 사건으로 그 일을 접어치우고 광산에 들어왔단다.
내가 살던 철암에서 멀지 않은 통리에 있는 탄광이었다.
우린 다시 거의 매일 만나 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였다.
마누라 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당시 아이들은 취학전으로 어렸다.
그러던 어느해 가을, 재찬이는 우리집에서 준 배추를 오토바이에 싣고 백산쪽으로 가다가 앞바퀴가 철길에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앞머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때는 저녁때라 연락을 받고 황지에 있는 병원으로 갔더니 거기서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노라 하면서 엑스레이 찍고 붕대만 칭칭 동여주곤 나가라했다.
하는 수 없이 밤길을 도와 원주 기독병원을 향했다. 자가용도 없어서 십만원을 주고 봉고차를 빌려서 갔다. 기독병원에서의 하룻밤도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 아이들과 보냈지만, 이튿날 진단 결과는 심각했다.
두개골 앞부분이 깨어졌고 뼛조각에 시신경도 손상되었단다. 더욱 나와 그의 마누라를 슬프게 만든 것은 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노임이 더 많은 선산부(채광를 위하여 앞장서서 굴진하는 인부-사끼야마라는 일본말로 불림)로 일한 때문에 그의 폐는 이미 작은 돌덩어리로 점령된 규폐가 확연히 보였다.
그렇게 얼마간 입원과 치료를 받고 다시 만나서 나와 재찬이와 그의 마누라가 함께 자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하루라도 빨리 광산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몇 개월만 열심히 벌어서 그걸로 어찌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3개월 일을 한 평균치가 총 퇴직금에 적용이 된다.
그러나 시신경을 다쳐서 재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찌 어찌해서 가라(가짜)로 진단서를 만들어서 어렵게 경동탄광에 재취업을 하고, 그렇게 다시 몇 개월을 더 다닌 후 서울로 떠나 공사장에서 전기일을 하다가 사고로 추락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장에 간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살기가 힘들어 일부러 사고를 낸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황망중인 그의 마누라에게 뭐라 위로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낳는다.
사고로 얼마 받은 보상금이 그의 마누라와 건욱, 슬기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 되어
안양에 집을 마련해서 한복집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어렵게 키웠단다.
그리고 다시 이십여년이 흘러 이제 작은 아들에 이어 큰 아들도 다 살림을 내었다. 작년에는 재찬이 마누라와 우리 마누라가 그렇게 오랫만에 만나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단다. 슬기 결혼식장에서.
나도 이번에 건욱이가 '신랑 입장!'하는 소리에 만면에 웃음을 띄고 씩씩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간 왠지 모를 눈물이 피잉 돌았다.
재찬이 마누라를 만나서도 이심전심으로 손을 잡고 위로해 주었다.
참으로 장한 여자였다.
남편이 죽을 때 아이들은 아직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는 철부지라 장례식장에 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그놈들을 저토록 씩씩하게 키워서 일가(一家)를 이루게 하다니! 장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살며시 안아주었다.
재찬아!
내 친구 재찬아!
이제 자네 마누라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
아이들은 다 커서 어른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벌써 예쁜 딸 아이를 낳았더구나!
자네도 할애비가 된거야.
이번 주말에는 우리 친구들이 먼저 간 넘들 회갑연도 열어준데.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 이 친구는 너와 근국이를 먼저 보내고 오늘도 감자 부치게에 소주를 마시네.
이제는 자네가 나보다 났네.
편히 쉴 수 있으니.
그리고 끝으로, 거기서 정학이하고 복식이가 사귄다는 말이있던데 잘 되어가고있는지 좀 알려주게.
이제는 잊어도 좋을 친구 순복이가
2013년 6월 豊江
|
첫댓글 정학이는 수년전에 폐암으로 죽은 넘이고, 복식이는 그보다 먼저 대장암으로 죽은 앤데, 남학생들로 부터 최고인기였음.
물론 정학이도 걔를 좋아했지. 술 취하면 '복식아, 복식아!'하며 울기도 했고.
아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네요. 왕자고무신, 삼거리 안씨네...재찬이란 분은 모르지만...새삼 옛날 일이 생각나서 혼자 추억에 젖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호주는 잘 다녀오셨나요? 사진 좀 올여주시지요*^^* 건강하시고, 마나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 가끔 연락이라도 하라 하셔요. 저 작년, 강릉갔을 때, 냉면집이 생각나네요. 참 맛있었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