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을 만나다」
- 김동명 시인 생애와 시세계
엄창섭(김동명학회회장,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고문)
1. 바람의 초상과 시혼의 정체성
새삼스런 문제의 제기는 아니나 우리현대문학의 자리매김에 크게 공헌한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은 민족적 저항시인, 전원파 경향의 서정시인, 낭만적인 은유시인, 자유분방한 종교시인 등 다채롭게 일컬어지는 존재감 빛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다. 그 자신은 문학과 경제, 교육과 정객으로서 의 면모를 보여준 한 시대의 예언자적 실체로서 삶의 현실상황에 용기 있게 대처했다. 특히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 노동하리 71번지에서 빈궁한 소작농인 경주김씨 제옥(濟玉)과 평상 신씨 석우(錫愚)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또 하나 그의 탯줄을 묻은 향리는 지정학적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백두대간이 뻗어 내린 오대산의 동쪽 끝자락으로 조선조의 반항아인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출생지다.
유년시절에 서당을 다녔던 그 자신은 1908년 무학인 부친과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흥남 부둣가에서 생선장수라도 하는 게 낫겠다.’는 모친의 강한 의지에 이끌려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를 한다.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억척스런 생활도 마다하지 않은 모친은 궁핍한 생활로 아들에게 입힐 옷가지조차 없는 형편이었지만 친정을 오갈 때는 초라한 낌새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또 한편 그렇게 모친은 어린 아들에게 종종 ‘설화와 고담, 심청전이니 장화홍련전을 포함’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처럼 생활력이 강한 모친은 미래를 예견하는 안목을 지녔기에 어린 아들을 가난하고 무지한 농군이 아닌 시대정신에 걸 맞는 동기를 부여한 진정한 모성으로 깨어있는 의식의 실체였다. 비교적 초허의 삶은 전반적으로 묘한 인연의 매듭이 술술 풀려지듯 자신의 의지에 의함이 아닌 어떤 운명에 손에 이끌려 '살아진 인생이라’는 예감이 절감된다. 모친의 손에 이끌린 유년시절도 그렇거니와 영생고보 졸업 후 주위의 도움은 무론하고 세 번의 결혼생활이지만 현명한 부인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의해 인위적인 제도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이다.
그 같은 삶의 양상은 그 자신도 운명적으로 수락한 듯 <三樂論-女人과 술과 바둑과>에서 “「세상에 만일 女人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하고. 이럴 때마다 한량없는 신의 恩寵에 가슴 벅차도록 감격해 보는 것이 이젠 즉 내게는 버릇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神은 곧 智慧요, 사랑이다 함을, 나는 女人을 意識할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보는 경우는 없다.”라는 여성 예찬론에서 극명하게 확증되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식이 커서 강릉군수가 되라.’는 자존심 강한 모친은 아들의 정신적 나약함을 심히 우려해 ‘칭찬과 격려’에 다소 인색했으나 건강한 비평정신의 소유자로 훌륭한 스승이었음은 주지할 바다. 이처럼 미셀러니인 <어머니>에서 “저 놀라운 긍지와 자부심의 한 끝은 여기에서도 엿보이는 듯, 예수를 믿어 석 달이면, 전도부인이 될 수 있으리라 하던 어머니. 내게도 고질처럼 따라다니는, 大言壯談을 즐기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도 필경은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슬픈 遺産의 하나인가!”라는 반문은 이 지상에서 ‘가장 빛나고 위대한 이름 어머니!’는 가슴 뭉클한 감회다.
각론하고 그는 가정형편상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월반하여 3년 만에 영생(永生)고보를 졸업한다. 그 후 1년 뒤에 동진소학교(東進小學校)교사로 취업했으나 기구한 사주팔자 탓인지 한 학기 만에 해직된다. 기실 그 원인은 모친을 닮은 강직한 성품 탓에 3ㆍ1운동 찬양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강변한 탓이다. 두 번째 해직은 평양숭실대학 선배의 강력한 도움으로 취업한 서해안 남포 인근의 소학교 재임 중에 가을학기도 끝내지 못하고 당시 교육정책을 지나치게 비난한 결과다. 그나마 소일거리로 대동강 변을 거닐며 즐겨 시구를 읊고 다듬었기에 시고(詩稿)를 챙겨들고 또 하직하였다.
한편 초허는 강기덕(姜基德)의 적극적 도움으로 1925년부터 28년의 일본 유학시절 기간에 도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과와 니혼대학(日本大學) 철학과에서 주야로 수강하고 졸업하는 행운을 얻었다. 특히 이 시간대에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거부한 초허의 항일의식에 관한 조명은, 기질적으로 우직한 강원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정신작업과도 맞물려 있다. 그렇다. 저항시인과 교육자로서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였고, 투철한 민족의식은 우리문단의 어떤 인물보다도 강직함으로 최후까지 우리글을 지켜낸 <파초 解題>, <술 노래 解題>를 통해서 입증된다. 그 자신은 운명적인 삶을 곰씹으며 때로는 서러운 삶을 자처하면서 천덕꾸러기의 사주팔자를 타고났다는 자탄도 하였으나 놀랍게도 우연히 서러움을 상쇄할만한 도움의 손길이 있어 그렇게 한세상을 유유자적하였다.
특히 초허는 두 번에 걸친 부인과 사별하는 뼈아픈 고통을 겪으며 세 번째의 연을 맺었다. 뒷날의 일화로 가까운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동명은 처복이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대화가 심심찮게 주어졌다. 첫 부인(池貞德)은 동진학교시절 하숙집의 딸이었다. 그녀는 용모에 견주어 재능과 인품이 출중해서 장모의 소개로 연이 맺어졌다. 후덕한 성품의 그녀는 영생여고 출신으로 1남2여를 낳고 살았으나 10년 남짓한 결혼생활 후에 사별한다. 한편 1942년에 강신앙(성악가 김자경의 모친)의 소개로 이화여대음악과 출신으로 영생여고 음악교사인 이복순(李福順)과 재혼하였다. 이 결혼은 우여곡절 끝에 맺어져 초허 자신이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산문 <轉換 180도>에도 이처럼 기술되고 있을뿐더러, 무척이나 쌀쌀맞던 부인이 천하에 극진한 현모양처로 변했다는 술회(述懷)는 고려할 바다. 그 소중한 인연의 매듭은 재혼한 부인의 몸에서 출생한 월정(月汀)을 분신처럼 끔찍이 아낀 탓에 그 자신은 딸의 이름자 해명을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 불운은 1959년 여름 화진포 해변의 이화여대 하계수련회에 예체능계 학생들과 동행한 이복순(음악과) 교수가 파도에 휩쓸린 휴유증으로 죽음을 맞는다. 아내를 잃은 그 참담한 심정을 <도처사>에서 “그대 늙은 모양/내 못 봄이/내 늙은 꼴/그대에게 못 보임이/더욱 설워'에서 입증되듯 사랑하는 여인과 해로하지 못한 상실감을 무척이나 느꺼워하였다. 그 같은 충격에서 초허는 헤어나지 못하다가 뒷날에 카페를 운영하는 하윤주(河潤珠, 본명 복동)와 다행히 깊은 연이 맺어져 노년의 삶에 위안을 얻게 되고 가난과 실의 또 병고(病苦)에 시달리던 말년에 그나마 극진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2. 영원한 삶의 본향, 그 인연의 매듭풀기
어디까지나 초허의 삶의 여적은 남포지역에서 거처를 옮겨 평남 안주군에 소재한 유신보통학교에 취업하면서 1923년 10월『開闢』에 <당신이 만약 내게 門을 열어주신다면> 외 2편을 발표하고 또 1년 뒤 파면을 당하지만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1913-2009)과의 소중한 인연을 맺는다. 안주군 출생인 김동진은 유신학교 재학 당시에 담임교사인 초허와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고, 1929년~부36년에 이르는 시기에 미국선교사 말스베리에게서 ‘바이올린, 피아노, 화성법, 대위법 및 작곡법 등’을 폭넓게 사사받았다. 또 한편 그 자신이 장춘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던 중에 우연히 백석과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이렇게 가곡 <芭蕉>(1934), <내 마음>(1940), <水仙花>는 김동진이 만주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던 1941년 전후로 작곡된 곡이다. ( * 파초 시낭송)
모름지기 초허의 시편을 삶의 일상에서 즐겨 읊던 나머지 작곡가 김동진이 즉흥적으로 건반 위에서 작곡을 하였다지만 1937년 『조광』에 발표된 <내 마음>은 오랜 산고를 걸쳐 작곡을 끝낸 곡이다. 종종 그 자신은 당시 거처하던 만주 남호의 호숫가를 산책하며 유년시절에 매료된 스승의 <내 마음>에 악상을 담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불현듯 떠오른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의 멜로디를 입속으로 읊어내며 작업실로 달려와 오선지에 옮기고야 한숨을 돌렸다고 술회한 바다. 반면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곡이 완성될 무렵 마침 순회음악회에 참가 중이던 성악가 이인범이 채 마무리가 안 된 <내 마음>의 초고를 갖고 귀국한 계기로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전국적으로 파급된 정황은 신선한 충격이다.
차제에 초허의 대표시격인 <수선화>는 1939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했던 백석(1912~1995)을 위해 쓴 시편이다. 그 무렵 백석이 여성문제에 별 관심을 갖지 않은 점을 지켜본 초허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시와 결혼하였다.”는 백석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그를 노란 ‘수선화’에 견주어 마침내 시작 모티프로 그 같은 시편을 마무리한다. 비교적 가깝게 친분을 맺으며 지육부(문예반)에서 교지『영생』을 편집하였으나 백석이 감독을 맡아 지도하던 축구부에 문제가 생겨 이 사건으로 교직을 끝내고 길림성의 장춘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곳에서 강릉출신으로 2019년 기미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 시인으로 확정된 청송(靑松) 심연수(沈連洙, 1918-1945)가 1940년 4월 <대지의 봄>, <旅窓의 밤>을 포함한 5편의 시를 발표한 『滿鮮日報』에 우연의 일치랄까? 그 또한 한글로 쓴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처럼 민족사의 격동기에 치열한 삶의 여적(餘滴)을 시혼으로 불사른 초허의 경우, 일제강점기 북간도지역에서 조선의 대표음악가로 자리를 굳혀가던 상황과 심경을 작곡가 김동진은 가곡집 <목련화>(김동진 가곡집,『목련화』(가고파 전 후편), 세광출판사, 1978년(초판) 330면)를 통해 다시 회고하며 어둠의 그늘에 가려진 의미 있는 일들을 언급하였다. 여기서 김동진은 저항시인 초허의 제자라는 자긍심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지대하였다. 또 <내 마음>은 대중들에게 폭 넓게 애창되었으나 상대적으로 <水仙花>가 유명세를 얻지 못한 연유는, 평소 제자에 대해 애정이 각별한 초허지만 김동진의 친일행각에 엄격하게 선을 긋고 못내 배신감을 극명하게 토로한 까닭이다. 그렇다. 초허의 시편 중 절창(絶唱)으로 평가되는 <내 마음>에 비교적 청순가련형의 수동적 시적 질료가 한껏 사용된 편이다. 여기서 ‘호수, 촛불, 나그네, 낙엽 등’ 나열된 대상은 연약하고 피동적인 상징물임도 그렇지만 ‘흰 그림자, 비단 옷자락, 피리, 뜰’은 모두 여성의 표징이다. 그 자신의 시 의식에서 여성은 이 지상의 위대한 존재인 ‘어머니’의 상징으로 심지어 제자들에 관한 지극한 관심의 표징임에 무관치 아니하다. 또 초허가 모친을 존경한 만큼 주위의 모든 여성을 진정성 있게 수락한 자세의 결과물로 내면의식의 발현이 독자의 감응을 폭넓게 불러 일깨웠음은 당연지사다.
대다수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어느 날, 김동진은 한순간 그 시편에 매료되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작곡에 몰입한다. 다만 가사를 악상의 흐름과 의미의 강조를 위해 2연의 마지막 행의 “가여운 넋은 아닐까”를 한 번 더 반복하였고, 애상적인 멜로디의 흐름을 위해 마지막 행의 "나도 그대를 따라서 눈길을 걸으리"를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로 깔끔하게 처리하고 또 마무리 과정에서 <수선화>의 가사는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를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으로 마무리 지었다. 후일담이지만 백석이 수정했으리라는 유추는 당시 장춘에서의 삶이 그러한 까닭이다. 이처럼 조국을 상실한 예술가의 고뇌를 민족적인 서정성과 독특한 시 의식으로 표출한 <水仙花>를 가곡으로 작곡한 김동진은 스승의 인간적인 풍모를 존경하면서도 낭만적이며 애국적인 서정시의 담백함에 매혹되었음을 술회하였다.
이 노래 <水仙花>는 金東鳴 詩人의 성격처럼 차가운 것 같지만 따사롭고, 약한듯하면서도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불멸의 영혼”이라 노래한 그의 愛國的 生活이 보여주듯 “조국”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분은 늘 나라 일로 苦惱했고, 또 詩도 그런 바탕 위에서 씌어졌으니까요.
(* 가곡, 水仙花 / 김동진 작곡, 조수미 노래)
한편 1960년대를 전후하여 초허는 『東亞日報』를 중심으로 정치평론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종전과 달리 사소한 일상의 변화로 전에 없이 택시를 불러 타고 간다든지 잦은 외출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삶의 일상에서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싱긋이 웃어 보이는 모습만은 여전했다.’는 것은 김병우의 회고담이다. 이처럼 소박한 심성의 소유자에게 정치란 한갓 가슴에 훈장 같은 금배지의 위력이 아니라 한 시대의 강직한 지조를 지닌 저항시인과 교육자, 예리한 비평정신을 지닌 정치평론가와 맞물린 것이 또 다른 일면이다. 특히 퇴폐적인 세기말 사상의 상황에서도 온전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 그에 대한 홍성암의 지적은 못내 유의미하다. 더구나 정치평론가로서 사회정의의 실현에 노력하고 특히 참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백은 후대의 문학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김동명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적 저항시인으로, 해방 후에는 후진을 양성하는 훌륭한 교육자로 그리고 군사정권 시기에는 불의 앞에 항거한 진정한 종교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자신의 변명처럼 자유분방한40대 중반부터 정치색이 짙은 정당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구체적 보기로 조선민주당 흥남시지부 당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최용건(崔鏞健)에게 배척당한 뒤 갖가지 수모를 겪는다. 그러던 차에 1947년 4월 어느 날 신문지에 세면도구를 싸서들고 '어슬렁어슬렁' 동해안 금강산 산기슭을 걸어 서울행을 결단하고 단신으로 월남한 후에 가까스로 가족들을 이주시킨다. 서울에서 김사익(金士翼), 김재준(金在俊), 송창근(宋昌根) 등 신학계의 동기들로부터 조력을 얻게 되어 이화여대 교수직에 몸담는 한편, 정치인의 기질을 살려내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과 민주국민당의 문화부장을 각각 역임한다. 그 후 4ㆍ19 직후에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지만 5.16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가까스로 잡문을 쓰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갔다. 또 한편 이승만 정권에 대응하는 정치평론을 『東亞日報』에 발표하고 1960년에는 신춘문예 심사(정진규 당선)도 담당하였다. 그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가 이화여대 부총장이 마침 동향이라 작은 지연을 맺게 된다.
차제에 2010년 5월 7일 「5월 가정의 달」에 정종배 시인이 경주김씨 강릉 사천수은공파 9대 종손인 김회기와 “어머니 사랑으로 일제, 북한, 제1공화당의 독재에 까칠한 시인 초허의 망우리공원 묘지 터”에서 봄비를 맞으며 이장한 뒤, 다소의 시차를 두고 2010년 10월 10일 고향선영에 납골 봉안했다. 몇 차에 걸쳐 망우산의 능선을 오가며 ‘만약 서울시 조례를 바꿔 이장한 분의 묘역을 다시 복원한다면 재고해 보겠다.(묘지번호 204707)’는 약속도 다짐받았다. 늦게나마 초허의 유해가 선영에 봉안된 것은 당시 묘지의 풍수지리에 뒤따른 좋지 못한 설(큰 손자 요절과 작은 손자 신부)이 문중에서 설왕설래하던 끝에 지금의 구리둘레길(솔샘 약수터와 설태희 가족묘지 사이) 능선의 부인 이복순 옆에 안장됐던 묘비는 정황상 부득이 묻고 이장을 하였다.
3. 시문학의 추이(推移)와 다양한 삶의 차별성
비정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21세기 지역의 문화구심주의의 시간대를 맞아 ‘더불어 함께(inter-being)’라는 공동체인식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까닭에 물질문명의 발달로 현대사회가 각박해지고 적자생존만이 강조되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강원인의 품격은 새삼 선양되어야할 가치이며, 또 발전시켜야할 전통이다. 이처럼 극단적 이념의 대립과 이분법에 의한 소모적 갈등으로 지친 사회현상에서 누구보다 존재감이 빛나는 초허의 심성인 ‘근면성과 청렴함, 신의’는 한국사회가 지향할 인적가치이다. 일차적으로 시대적 배경을 전제하되 “파초(芭蕉)와 호수(湖水)의 시인” 김동명의 시적 이미지의 상징성에 견주어 존재감의 특이성은 결단코 외면할 수 없다. 까닭에 「식물성 이미지의 관계층위와 상관성」의 논의에 있어 개념상 이미지의 사전적 의미는 ‘영상(映像)을 포함한 심상(心象), 사상(寫像) 등’에 해당한다. 또 한편 시어(poetic-diction)는 음악성과 회화성을 지니는데 보편적으로 회화성은 또 이미지와 연계성을 맺는다. 이 같은 점에서 루이스(Lewis, Cecil Day)가 이미지를 ‘시어에 의한 회화적 표상이라’ 정의했듯이 한편의 시는 창조가 아닌 재현으로 개성적이며 독창성이 강조되기에 즉물적 대상을 시적 이미지에 형사(形似)하여 ‘재현, 모방(模倣), 복사하는 것임’은 유념할 바다. 우리현대문학사의 초기에 초허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였으나 “꿈과애조의 가락이 호소하듯 하는 <芭蕉>를 비롯하여 오늘날 널리 애송되고 있는 <水仙花>는 그가 민족정서 구현의 유수한 詩人었음”에도 단순히 목가적 전원시인으로 분류된 까닭에 “古人의 詩境을 본받은 하나의 歸去來辭였다.”로 평가되어 ‘소박한 感性과 牧歌的인 서정이 그 主調를 이룬 인상비평적인 평가’는 그에 관한 보편적인 양상이다.
특히 자의식이 강한 초허는 첫 시집 『나의 거문고』(新生社, 1930)를 뼈아픈 자기통찰 뒤에 “창피한 詩集”이라 술회하였다. 이 시기의 문학사가나 일부 연구자들은 심층적인 검증 없이 안이하게 습작기의 유치한 즉흥시로 이해한 것은 명백한 인식의 오류이다. 무엇보다 초허는 일관된 집념을 지니고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끝에 조국상실의 아픔과 직결됨을 강조하였다. 까닭에 그 자신의 삶과사회적 환경, 작품 및 정신세계에 관한 심층적 논의는 가치 있는 생산적인 정신작업으로 창조적 행위와 결부되는 것이다. 일단 시작행위란개인의 생활과 사상·감정의 생산물이기에 한 편의 시를 이해하는 것은 화자(persona)의 인간성과 정신세계를 폭넓게 아우르는 선행 작업이다. 따라서 퇴폐적 감상과 파토스적 사유로 문학의 지평을 열어 보인 초허의 경우, 시적 발상은당대의 문예사조를 배제할 수 없기에 그 자신의 등단시편을 통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여야 한다.
각론하고 그의 담백한 시격과 내면인식을 포괄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부득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삶과 연관성을 지님은 물론이거니와 비교적 의지적이고 생명적인 사람이나 심상에 관한 시어의 빈도수가 높은 편이다. 한편 소재의 다양화를 의도한 시적 작위의 수용성에 연계지어 “그의 이미지는 또한 선이나 색채보다도 심정적인 회화를 잘 그리고 있다. 이러한 회화는 섬세한 표현이 아니고 간결한 터치로서 선명한 연상을 일으킨다.”라는 지적은 유념할 바다. 일단 초허의 대표시격인 <水仙花>에서 확인되듯 일제강점기의 유일한 탈출구로 문학의 길을 택한다. 또 그에게 고독이란 안수길의 지적처럼 ‘남달리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열정의 발로’이기에 <수선화>는 단순한 연애적 감상이나 민족의 정한을 읊은 서정시로 단정할 수 없다. 이 시편은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민족과 조국 의 혼을 시적 대상으로 형상시킨 절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독교의 부활론을 큰 축으로 한 불멸의 영혼과 점철된다.
그 같은 맥락에서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견고한 묘사에 치우치지 아니하고이미지와 관념의 연쇄적 흐름에 의존하는 무의 존재론이다. 차제에 조국상실의 비애와 불행을 식물인 파초에 견주며 ‘나→너→우리’라는 삼각대위(三角臺位)로 대비시켜 시인의 감정이입을 시도한 이 시는 표현상의 묘미로 시인이 바라는 조국은 남성적이며 절대적이다. 짐짓 파초를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그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다룬 점은 확인될 것이다. 이철범(李哲範)이 '소낙비를 그리는① 너는 정열의 여인② 나는 샘물을 길어① 네 발등에 붓는다②'의 시행에 담긴 언어구사의 기교, 유익한 뉘앙스, 이미지 등에 관한 실제는 가늠할 바다.이처럼 시집『芭蕉』(新聲閣, 1938)에 수록된 <芭蕉>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편은 전원을 제재로 ‘향수와 고독, 자연과의 친화, 생활의 단상’ 등이 주류를 이룬다. 비교적 짧은 호흡의 단시에 해당하는 그의 첫 시집에 수록된 <섬>이나 <버들>은 서경적 묘사가 원근법에 의해 비교적 아득한 서정감이 한 폭의 수채화로 변형되어 독자의 시선을 자극한다. 다분히 그 자신의 시편을 통하여 은유, 의인, 영탄법을 포함한 시적 수사를 자유로이 구사하며 즉물적 현상인 ‘꽃과 정원, 그리고 사람(人間)’을 헤아리는 따뜻한 그의 인간미가 확인된다. 이처럼 등단 직후부터 아름답고 참신한 메타로 단조로운 문단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문단외적으로 활동한 그 평가가 바르게 이행되지 못함은 못내 아쉬운 점이 남는다.
이처럼 현대문학사에 다양한 족적(足跡)을 남긴 초허의 문학관은 명상적·사색적 태도로서 비유적 이미지와 회화적 기법으로 즉물적 현상을 시적 형상화하였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존재감이 빛나는 이 땅의 저항시인으로서 민족적 비애를 절창하며 교육계에 투신하였고, 공산치하에서는 압정(壓政)을 배격한 점은 비중 있게 논의될 항목이다. 또 한편 종교 시인으로서 작품에 기독교의 부활을 축으로 생명의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사실은 그만의 당위성을 지닌다. 차제에 선행연구의 과정에서 해결되어야할 문제의 여지라면 우리시문학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성채(城砦)와 같은 존재임에도 그에 관한 연구가 그간에 심도 있게 수행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세계의 확장을 위한 식물성 이미지인 <芭蕉>, <水仙花> 등에서 시적 상상력은 특이성을 지니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초허의 시문학에 있어 또 다른 「물의 이미지와 시적 차별성」의 관계에서 원형상징으로서의 ‘물(水性)’은, 정화기능과 생명을 지속시키는 복합적 속성에서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까닭에 물은 순결과 생명을 상징하며 기독교의 세례의식에서 원죄를 정화시키는 행위와 영적으로의 재생인 부활을 뜻한다. 이 점에 미뤄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이미지와 상징』제5장 '상징체계와 역사'에서 물의 상징성을 원천으로 모든 가능성의 저장소이고,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창조를 받쳐주는 재생의 함축의미로 해석하였다. 특히 물의 속성은 형태를 해체, 소멸시키고, 정화와 재생의 기능으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뿐더러 속죄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타당성이 주어진다.
각론하고 물의 총합인 바다(海)와 인간의 감성이 투영된 해양문학에서 바다 자체의 관조는 하나의 요건이다. 무엇보다 ‘생명의 원천으로 상생과 끌어안음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일체의 대상물은 바다라’는 무대의 내연이다. 일단 일차적으로 논제의 해명을 위하여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묵시적으로 말하면 물은 한 인간의 체내를 혈액이 순환하듯 우주의 체내를 순환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확증되어야 한다. 또 한편 그 자신은 시문학사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민족적 울분을 역사의 정체성으로 정화시킨 존재감 있는 저항시인, 맑은 영혼으로 기독교 신앙을 당당하게 지켜내려는 종교 시인으로서의 치열한 역사성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절제된 감정은 <내 마음은>에서 '호수요, 촛불이며 나그네요, 또 낙엽임'을 상기시켜 당시 상황을 은유로 처리하고 있다. '바람이 불면 나그네 같이 떠나리라'는 그 집념은 조국의 슬픈 현상에 기인(起因)한 자아의 체념이다. 이처럼 그의 초기시편은 떠남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는 양상이다. 유랑과 죽음은 불행했던 유년의 기억에서 연유한 암담한 현실도피를 뜻하기에, 세계와 사물은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처럼 끊임없는 변전이고 흐름이다. 그렇다. 그의 시편인 <죽음>에서 다소 시의미의 확대해석에 견주어 질 것이나 ‘고향’은 평생을 통하여 그토록 추구했던 ‘영원한 천국’이며 또 ‘강’은 영원한 나라의 지향으로 영적 이스라엘의 ‘요단강’과 맞물림하고 있음은 유추할 바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시편에서 ‘떠남과 흐름의 표징’인 물의 이미지는 상실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유년의 고향을 등진 유랑과 접맥될뿐더러 물의 예술적 미감을 동력으로 종교적 신비성을 교시로 한 일깨움이다. 따라서 소재의 다양성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초허 시편의 특이성이 ‘공포의 대상인 무녀나 마녀(Siren)’를 일체 수용치 않고 ‘어머니(母親)나 성모(마리아)’로 변형된 점이다. 여기서 ‘바다(mer)'와 '어머니(mere)'의 관계성을 우리말 다시 읽기에서 ’받아‘가 ’바다‘가 되듯이 바다가 물(水)의 합일인 ’생명의 본원‘이기에 스키마(schema)로 기억할 점이다. 편의상 <湖水>, <하늘>, <밤>의 시편과는 시적 모티브가 상이한 “...생략.../저 푸른 물결 위엔 어느새 찬란한 불길이 오른다.(珍珠灣)”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 포기 수련화’에 견주어진 진주만은 1951년 12월 8일 일본제국주의가 국제법을 거슬린 무차별 침공으로 ‘폭음, 불기둥에 엉키는 분노’로 이행되어 ‘황홀한 광경이냐!’는 역설은 푸른 물결마저 광란의 격랑으로 격변케 한다. 일단 그의 시편 중 <海洋頌歌>는 무론하고 독자의 심중을 사로잡은 <내 마음>은의 추상적, 정신적인 원관념이 '湖水/촛불/나그네/落葉'과 같은 구상적, 관념적 보조관념으로 치환됨으로써 전혀 다른 상상력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음은 주지할 바다. ( * 내 마음 / 김동진 작곡, 대금연주 김용욱 연주)
모름지기 자연친화적인 색채가 강한 초허에게 <내 마음은>에서 시적으로 발아시킨 물이라는 매개물과의 상호교감이다. 이와 같이 대상과의 내밀한 합일을 전제로 그리움의 정조는 이별의 단면이기에, 단순한 사랑의 호소가 아닌 시적 대상과의 만남을 지향한 절박한 열망이다. 그 자신이 물의 이미지를 호수와 결부지어 ‘①대상의 기다림 ②대상과의 합일 ③떠남의 미학’의 통로로 차용하여 선명하게 이행시킨 보편적 경험은 공존의 모색이다. 또 “네 가슴 속에는 푸른 하늘이 깔려있고(海洋頌歌)”에서도 명증되듯이 이채롭게도 물의 총합인 바다(海)를 하늘(宇宙)조차 포용하는 거대한 실체로 인식한 점은 특이한 편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선행연구의 일환으로 초허 자신이 인식하고 즉물적 대상으로 일관성을 지니고 다룬 ‘물의 총합과 시문학의 연계성을 융∙복합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해양문학은 양적으로 빈약하고 질적으로 수준이 낮으며, 그나마 기존의 작품은 고대사회로부터 어업생활과 관련하여 나타난 경험, 지식, 습관, 기원 등 현존하고 있는 민속 등을 활자화 한 것들로 상상력이 배제된 것이다. 그 같은 연고로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평자의 지론도 그렇지만, 그의 시편 <힌모래우에>의 보기처럼 백사장에서 뒹굴면서도 ‘밀려오는 고요한 바다물결도 끝내 탄식이나 그리움’의 서정감에 느꺼워하는 진정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몸담은 장소성과 시간대에 느꺼움과 관심을 지니고 이처럼 천진무구한 시의식이 맑게 깨어있는 실체다.
여기서 초허가 고향이라는 기본 골격의 틀에서 한국적인 자연(호수, 강, 바다)을 시적 대상으로 즐겨 다룬 점은 대륙의 심장에 한·일간의 치열한 정치적 이슈가 되는 현상에서 울릉도(于山國)를 정복한 ᄒᆞ슬라 군주 이사부(異斯夫)의 패기의 반영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와 시상의 관념화, 그리고 시적 처리와 기법의 문제 등’을 다시 검토하려는 긍정적 시도는, 21세기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의 시간대에서 대륙의 심장을 지닌 따뜻한 감성과 예감의 시인은 시대적 소임을 재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다를 조망하는 새로운 인식은 무론하고 모름지기 우리시문학의 밝은 미래의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실험과 도전정신은 끊임없이 천착(穿鑿)되어야할 과제다.
그 같은 관점에서 김병우가 1992년 3월 초에 정리하여 4․6배판 체제로 편집하여 묶어낸 120페이지 분량의 『작은 풀꽃의 한국현대사 체험이야기-비탄과 희망』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철학」에 묻는 제 말에 아버지는 그것은 학문의 왕이라고 답해줍니다. 후일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 그 말을 다시 접하게 됩니다. 아들에게 답해준 그에게 철학은 신학과 같이 궁극적인 존재와 진리를 찾는 학문이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30쪽)”의 보기나 또는 “6학년을 다시 다니게 된 학교는 전의 공립학교와는 달리 교실 분위기가 편안하고 느긋하여 모처럼 제 마음은 한가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책읽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입니다.『죄와 벌』을 읽다가 살인 전후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감내하지 못하여 중단했다가 다시 읽는 일도 이 때 있게 됩니다.『죄와 벌』은 이런 책으로 기억 속에 남게 됩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읽을 책을 청하자 아버지는 서가의 세계사상전집에서 톨스토이의『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뽑아주십니다.(31쪽)”와 같은 서술은 못내 거부감이 없다.
4.운명적인 유랑과 다양한 삶의 추이
어디까지나 1945년 해방직후 함흥 서호중학교 재직 중 흥남학생 의거사건(1946년)에 동조한 혐의로 며칠 간 교화소에 연금을 당한 경력이 있는 초허는, 정치활동에 뜻을 둔 연유로 조선민주당 함남도위원장을 지냈다. 또 그 자신의 세 번째 시집『하늘』을 간행한 1947년 정치탄압을 피해 단신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을 걸쳐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문화부장으로 활약하면서 과거의 시풍인 서정성과는 별개로 현실과 정치, 사회풍자와 관념적인 색조의 정치평론과 에세이 집필에 한층 전념하였다. 마침내 자유당의 부패가 극심한 1960년 이화여대를 사직하고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군사정변 직전까지 정치에 몸담았다. 그 자신이 월남이후 정치에 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화여대 교수 재임 중에도 『東亞日報』를 중점적으로 삼고 정치평론의 지평을 여는 활동과 함께 신춘문예 심사(1960년 조지훈 * 정진규의 <나팔 抒情>)도 담당하였다. 그 같은 경력은 그 자신이 시대를 거슬려 도쿄 유학시절 무렵에도 도산(島山)의 집회에 줄곧 참석하며 사회문제를 또 다른 시적 세계로 인식한 시각을 키워나간 양상은 조국과 민족애가 남다른 기질적 차별성에 맞물린 결과다. 비록 4.19혁명 이후 민주당 후보로 참의원에 당선되지만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6개월 남짓 정객의 길에 몸담게 되었다. 이후에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지만 생계와 의료비를 걱정하며 곤궁한 처지를 이어가는 삶의 일상은 슬픈 자화상 그 자체였다.
차제에 청빈한 삶의 일상에서 물욕을 각별히 견제했지만 자연의 입법에 거역함이 없는 따뜻한 미소와 지극선의 심성을 소유한 고매한 품격의 시인이었다. 여기서 필자와 오랜 날 인간관계를 맺어온 황금찬 시인은 초허가 교수 재임 중에 중절모자를 즐겨 썼고 왈츠 곡인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나 윤심덕의 <死의 讚美>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다는 지적은 인상적이다. 또 대조적으로 강단에서는 강한 어조와 서슬 푸른 시선으로 비판의식을 지니고 "관조와 행동이 공존해야 비로소 시대적 예술임"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그 자신은 부조리와 굴욕에 맞서 예리한 비판정신을 곧추 세우다가도 학업에 열중하는 제자들 앞에서 밝은 표정과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 초허의 그 멋스러운 인간적인 풍모를 항상 기억에 담아둔 허미자 교수는 「이화에서의 超虛 선생님」 회고에서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현대시, 문학창작, 비평문학 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생략...마치 좁은 강의실을 벗어나 무한히 넓은 창공을 훨훨 자유롭게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이 자유로운 상념의 비상을 하면서, 선생님은 침묵으로 저희들에게 조용함속에 날카로운 눈과 발톱을 가진 독수리처럼 강인한 비판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라며 그렇게 ‘맑은 눈을 지닌’ 자상한 스승에 관한 감회를 토로하였다. 비교적 명상적 태도로 즉물적 대상을 비유적 이미지와 회화적 기법으로 형상화한 초허는 한국현대사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긴 실체이다. 그 자신이 고뇌와 갈등 끝에 50대 후반, 정치평론이라는 장르의 지평을 열어가며 지적인 정객(政客)으로 변신하여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대처하였다. 한 시대의 암울함을 신앙심으로 굳건히 지켜내면서 밝은 꿈을 확신했던 미래지향적인 저항시인이었음은 수긍할 바다. 까닭에 민족의 혼인 조선어가 말살된 격동의 와중에서도 1942년 봄까지 <狂人>, <술 노래>, <종으로 마다시면> 등과 같은 불멸의 시혼을 올곧게 토해냈다.
특히 그의 유년시절에 정주(定住)와 이주(移住)의 반복은 역사의 변곡점에 해당한다. 그의 모친은 기질적으로 단호하고 강한 결단력을 지닌 존재감이 강하고 냉철한 성품인 반면에, 초허는 ‘평범하고 내성적이나’비교적 무학의 부친(金濟玉)보다 강인한 모친(申錫愚)의 성품을 이어받은 편이다. 이 같은 환경조건에 관한 이미림의 “이데올로기의 혼효(混淆)는 그의 문학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동하여 공동체에서 벗어났던 작가의 운명은 장소애(場所愛, topophile)로 그려지며 정원을 가꾸는 일과 꽃과 나무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난다.”와 같은 지적은 새삼 유의미한 편이다. 어디까지나 ‘위대한 조선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지난 2012년 지역의 언론사인『江原日報』가 「강원랜드」후원으로 기획한 <강원의 역사인물 심포지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땅의 누구보다도 저항시인으로 평가받아 마땅할 그 자신은 <水仙花>, <파초>를 통해 ‘불멸의 영혼’으로 천명되었듯 강직한 품격의 소유자임은 일체의 정치악과 불의를 거부한 것으로 정체성이 입증된다. 또 한국문학사에서 새로운 서막을 장식한 정치평론집 『나는 證言한다』(新雅社, 1964)에서 “이 책은 겨레에게 보내는 제7시집이다.”라는 주장은 그 자신이 대륙의 심장을 지닌 지사적 존재임을 입증한 결과다.
까닭에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내 기억은 물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방안에 앉아서도 그윽히 들려오는 물소리!”라는 아련한 기억 흔적과 함께 맑은 영혼을 적셔주는 물의 흐름처럼 가슴 저려오는 전별(餞別)과 운명적인 행적(行蹟)은 맞물려 있기에 산문집『모래 위에 쓴 落書』처럼 그 자신의 서러운 인생의 여정은 사주팔자처럼 그렇게 시작될밖에 없다. 그와 같이 ‘망향의 꿈, 102년 뒤 선영에 묻히다.’라는 기사의 보도처럼 그 자신의 수필집 『세대의 揷話』(日新社, 1958)는 다양한 삶의 여적은 흥미로운 무채색의 정신풍경화인 에피소드(Episode)다. 또 하나 초허의 봉안식이 지난 2010년 10월 10일, 그가 탯줄을 묻은 사천면 노동하리 산 322번지의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종중영원(靈園)에서 거행되었다.(*필자 기념사) 가을햇살은 투명하였고 자유로운 바람처럼 그의 맑은 영혼은 솔 내음에 묻어 모두의 가슴에 저려왔다.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사천 종중은 서울 망우리 문인공원묘지에 안치된 유해를 102년 만에 이장하였다. 모처럼 문화의 지역구심주의가 관망되는 현실에서 스토리텔링의 의미는 지대하다. 한편 강릉시에 의해 그의 생가 터(대지 600평, 임야 2000평 확보)에 생가와 문학관이 2012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답하기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유랑을 시작했던 그의 디아스포라의 삶은 부모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난 그 시간대에서 비롯되기에 강원도에서 함경도로의 이주는 어린 그에게 특이한 삶을 체득케 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자유당 부패→군사독재’라는 시대 상황에 당당하게 대응하며 격변하는 한국현대사에 온 몸을 던져 현실개혁을 몸소 실천궁행한 민족의 지도자로 국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지니고 정신작업에 종사한 한 시대의 진정한 지사적 인물로서 ‘시, 소설(越南記), 수필, 평론’의 다양하고 폭넓게 문학의 장르를 넘나들며 문학의 외연(外延)을 한층 더 넓혀간 지조 있는 문사임에 틀림이 없다. 앞서 기술하였듯 이 같은 주의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절제된 감정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며 일관되게 피력한 논조의 동일성을 유지한 과정에 견주어 『초판본 김동명 시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의 출판사 서평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론의 타당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 초허의 시세계는 시적 대상과 시 정신으로 볼 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자연물과의 회감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순수서정의 세계와 사회현실에 대한 응시를 언어로 승화시킨 현실 지향적 시세계가 그것이다. 순수서정과 현실지향의 두 세계는 김동명의 시에 공존하면서 서로 교차하기도 하며 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문학을 향한 열정과 현실에 대한 참여의지 사이의 길항과 조화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순수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의 내면에서 현실적 고뇌를 발견하게 되고, 현실참여를 향한 의지에서 순수한 인간의 정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초허는 민족이 처한 격랑 기에 몸담으면서도 문단이라는 울타리 속에 안주하거나 머물기를 원치 않은 탓에 정치인들에게는 ‘문단 밖의 낭인(浪人)으로’ 소외되었고, 또 일부의 문사들에게는 ‘카인의 말예(末裔)’로 소외된 탓에 그가 처한 시대상황에 문제의 여지는 있으나 동시대 처했던 문인에 견주어 심층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모처럼 자녀교육에 각별한 관심이 주어진 「시인의 눈부신 이름, 모국어의 사랑」에 결부지은 초허의 삶에서 “우리 아가는 곧잘 말과 문법을 창조한다.(아가의 말)”에서나 또 다른 초허의 시편에 해당하는 <우리말> 또한 우리의 역사이며 민족의 정신적 자산인 국어의 상실에 따른 지각과 미래의 염원, 그리고 결의를 다짐하는 내용을 뜻하고 있다. 그 자신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희망의 대상인 ‘우리말’에 향유(香油)를 부어주거나 ‘황금의 목걸이’를 걸어주는 대신 오히려 ‘가시관을 얹었다’는 뼈아픈 자책감은 시적 자아가 그간에 우리말을 통해서 ‘불멸의 소곡’을 읊어내며 ‘보이지 않는 영광’에 심취한 결과에 해당한다. 각론하고 신사참배의 조짐이 사회도처로 파급되는 시기에 기독교 교세의 확장을 위해 명분상 교파간의 분파조성보다 통합을 다져야하는 힘의 역동성을 언급하며 시대를 앞서나간 기독교계에 본격적인 논문 「長監兩敎派合同可否問題」(『眞生』54호, 1929. 6)를 발표한 결과는 중시할 당위성을 지닌다. 비록 임종 직전에 천주교로 개종(영세명 프란시스코)하였지만 생전 장로교에 교적을 두고 1923년 도일하기 전 서호(西湖)에 머무를 때 한 달에 1회 꼴로 교회에서 설교한 행적에 비춰 자유분방한 종교성도 무관치 않다. 아울러 1947년 4월 김재준 목사의 사택에 거주하며 한국신학대 교수로 재임하고 1948년 5월~1960년 6월까지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였음은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 같은 정황에 비춰 한남대학교에서 정년을 마친 김병우의 부친에 대한 회상은, ‘그 자신은지사적이며 날(刃) 푸른 선비정신의 품격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모국어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 구체적 정황의 실례로 「아버지 金東鳴에 관한 書翰」에서 “詩人이 생명을 불어 넣는 말에 귀 기울임으로써 사람은 원래 그 말 속에 간직된 조상들의 얼이 숨 쉬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통하는 겨레가 現存하는 세계의 주민이 되는 것입니다.”에서 입증될 것이나 초허는 일어사용을 거부하며 절필하였다. 이처럼 그의 시편에 울분과 비애가 종종 등장할뿐더러 일제강점기에는 저항의 나날을 보냈고, 해방 이후에도 독재정권에 맞서 필주의 칼을 휘두른 것은 못내 극명하다. 어디까지나 ‘정치는 제2의 詩임’을 역설하며 1960년에 이화여대의 교수직을 사임한 뒤에 곧 이어 정객(政客)으로 변신한 그 자신의 신념을 격조 높게 참여적인 시적 형상화로 표출하였다. 그는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고,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을 훈장삼아 넌지시 차고 늙음의 대도(大道)를 성큼성큼 걸으리라.(자화상)”처럼 가난과 병고로 시달리다 1968년 1월 21일 오후 서울남가좌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처럼 분망하되 잠시 뒤돌아보면 느꺼운 삶의 양상이다. 여기서 “날이 새이면 나는 결코 그대의 길을 더디게 하지는 않으려네. 허나 그대가 떠나기가 바쁘게 나는 다시 돌아오는 그대의 말방울소리를 기다릴 터이니.('손님)”라는 시문처럼 푸른 해풍을 전신으로 맞으며, 1985년 사천면 미노리 7번 국도변의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여’와는 상이하게 주인의 더디지 않은 귀향을 역사의 격랑을 헤치며 한 시대를 후회 없이 살다간 초허의 시비가 정태영 명주군수의 각별한 관심 끝에 완공되었다. 현재 그의 시비는 생가 터인 김동명문학관 부지에 이전되었으나 ‘민족적 수난의 시대에 태어나 잃어버린 조국의 저항시인으로 교육자로 광복을 맞아 의연한 정치가로서의 족적’을 남겼음은 자명하다. 한편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서 한국문인협회(이사장 황명)는 ‘한국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김동명시비공원」에 ‘초허의 표석판’을 세웠다.
특히 1985년 11월 명주군 사천면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고 그 정체성이 학술적으로 조명되었으나 뒷날인 1997년 강원도가 ‘우리 얼 선양사업’의 대상인물로 초허가 선정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업적의 평가는 미진한 실상이었다. 뒤이어 「강원일보사」가 강원의 인물로 선정하여 초허의 업적을 논하는 학술세미나를 진행하였다. 마침내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강릉시의 시책인 문화관광 프로젝트로 추진됨도 그렇지만 ‘생가복원과 연계성을 지닌 학술작업의 활성화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임이다.’ 모름지기 격동의 한 세기인 우리사회의 현상에서 기인적 삶을 영위한 초허는, <피어린 역사에의 반성-한글 간소화문제를 말함>에서 “大抵 外國語文을 배우는데 十年이고 二十年이고 아낄 줄 모르면서도 제 것-한글 맞춤法-을 알기 爲해서는 單 몇 週日의 품도 들이기를 싫어하니 이런 세상에도 珍貴한 國民性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라고 항변하였다. 이처럼 ‘민족문화의 건설을 떠난 어떠한 건설도 2차적인 것으로 자기의 위치를 주장하고 이유를 내세울 수 있는 길은 오직 문화의 앙양임’을 강조하며 정신문화를 경시하는 세태를 질책하였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그 자신의 신념을 격조 높게 시적 형상화로 대처하며 수필 <自畵像>의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고,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을 훈장삼아 넌지시 차고 늙음의 대도를 성큼성큼 걸으리라.”는 그 직언처럼 극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각론하고정치인에게 지조가 생명처럼 소중한 것임을 천명한 그의 심성은, “유별나게 긍지와 자존심이 강한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다. 비록 만년에 정객으로의 변신은 자아의 결단에 의한 것이나 자유당의 부패와 부정, 그리고 4·19 의거가 정치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나 시 창작으로 일관했다면 우리현대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평가받았을 것이라는 여지 남지만, 그것은 루이스가 즐겨 인용한 W. 오웬의 ‘진실한 시인이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로 대변된다. 이와 같이 그 자신의 문학에서 시대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순수한 면에서 “예술은 엄격히 자기를 통제할 때 비로소 존속한다.”는 지적 또한 고독한 자아의 추구는 응당 예술로 파악될 것이다. 특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시사적 보편성은 한국적인 것을 간직한 세계인이 되라는 가르침이기에 외국어의 수용문제는 교육과 노력으로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으나 합리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모래 위에 쓴 落書』에 수록된 수필의 특징은 글맛이 담백하되 지나친 꾸밈이 없는 경수필로 그만의 품격이 절로 배어난다. ‘불멸의 혼이고 역사인 국어가 위기’에 처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국어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는 학자들의 몫으로 ‘자성과 애정의 결핍, 그리고 문인의 가슴에서 국어에 대한 소명의식이 소멸되고,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대안 없이 강변하는 한국사회가 자초한 결과’는 경계할 바다.
한편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고, 내 연륜의 선물인 ‘고혈압’을 훈장삼아 넌지시 차고 늙음의 대도(大道)를 성큼성큼 걸으리라.(자화상)”처럼 가난과 병고로 시달리다 끝내 1968년 1월 21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의 낡은 가옥에서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할 무렵까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 5:8)”는 그 좌우명처럼 ‘그의 삶은 끝내 청렴하였을 뿐더러 직업도, 한 푼의 수입도 없는 말 그대로의 ‘빈손’이었다. 이 같은 일면은 2014년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류의 정신적 스승인 헤르만 헷세’의 <꺾어진 나뭇가지>와도 비견되어지듯 그의 시편 “시간은 갈매기 같이 날으고(술노래)”와 같이 타계하기 6일 전까지 붓과 원고지만큼은 내려놓지 않은 의지가 강한 존재였다. 그 자신의 유일한 유품이 친필원고와 아내가 선물한 초침이 멈춰 선 회중시계뿐이기에 고뇌에 찬 세월은 그 같이 허망하다. 차제에 그 자신이 1968년 1월 21일 오후 자택에서 숙환으로 삶을 마감한 날은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에 의해 스산함이 짙은 어둠처럼 적막했다.1월 25일 한국 문인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에서 신학자 김사익의 조사와 성악가 김천애의 「내 마음」이 조가로 불려졌다. 또 『江原日報』는 1월 22일자의 <고이 잠드소서!>라는 부제로 ‘鄕土가 낳은 詩人 金東鳴씨 25일 영결식’을 기사로 예고하였다. 여기서 그의 생가 터에 늦은 감이 있으나 2013년에 호수면의 배(船)를 설계모형으로 한 『김동명문학관』이 완공되어 화강암에 부조된 초허의 흉상과 주옥같은 시편을 접할 수 있다. 여기서 “문단 밖의 낭인(浪人)이라.”는 혹자의 지적도 있으나 격동의 시대적 상황에 신념을 지니고 현실에 대응했기에 문학의 길에 전념하지 못한 문제의 여지는 아쉬울 따름이다.
* 약력 : 강릉출생, 현재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대학원장 및 총장 대행 역임), 사) k 정나눔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