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닭 호텔 하우스의 비극
김명림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눈에 들어온 사진 몇 장에 숨이 멎는 듯하다. 인물 사진도 어느 멋진 풍경도 아닌 어미닭과 병아리 모습이다. 7년 전 그 사진 속에 담긴 가슴 아픈 사연이 섬광처럼 떠오른다.
남편은 퇴직 후, 전원생활을 꿈꾸며 땅을 매입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며 그렇게 노후를 보내고 싶어 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되어 신축 아파트를 지을 때마다 이사하는 세대가 많았다. 우리도 옮겨 볼까 하고 잠시 생각했었다. 농사에 문외한인 나는 좋았지만, 남편의 꿈과 멀어질 거 같아 결국 새 아파트 대신 땅을 사기로 의견을 모았다.
몇 달 발품을판 덕에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남편이 원하는 땅을 살 수 있었다. 투자가치를 떠나 남편이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꽤 넓은 땅이었다. 우리에게 과분한 거 같아 몇 번을 망설이다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해 늦은 가을, 지인의 조언으로 에메랄드그린 묘목을 4500그루 심었다. 5~6년 정도 지나면 제법 나무가 커서 판매할 수 있고. 특히 조경수로 적합해 판로가 좋다고 한다. 닭장을 지어 가축시장에서 알을 낳는 닭과 중닭, 그리고 제법 자란 병아리를 샀다. 암탉 20마리에 수탉 1마리를 닭장속에 넣어야 위계질서가 잡힌다는 말을 닭장수 아저씨한테 들었다. 닭장을 지킬 개도 한 마리 길렀다. 개는 닭장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쥐와 고양이를 얼씬도 못하게 했다. 고라니 발자국만 눈 위에 수북이 찍히던 농장의 겨울은 생명의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봄을 맞이했다.
봄이 되자 왕매실, 대추, 자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상추, 시금치, 호박과 오이, 가지, 들깨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채소를 심고 본격적으로 농사에 돌입했다. 초보인 나는 풀 대신 채소를 뽑고, 쪽파를 거꾸로 심는 우를 범하는 시행착오를 걸치면서 조금씩 농사일을 배웠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닭은 점점 식구가 늘었다. 병아리가 크면서 닭장이 좁아지고, 날씨가 추워지자 남편은 하우스 안에 또 다른 작은 하우스를 지어 어미 닭과 병아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꼬꼬닭 호텔 하우스’라고 문패까지 달아주며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 계절은 급한 걸음으로 늦가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어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하우스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어미 닭을 먼저 하우스로 옮겼더니 병아리와 떨어져 불안했던지 '꼬꼬댁 꼬꼬댁' 큰소리를 내고 날개를 퍼덕이며 안절부절못했다.곧이어 병아리들을 옮겼는데 겁에 질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병아리들이 엄마가 부르자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기고 등에 올라타며 이산가족 상봉을 방불케 했다.
하우스의 또 한 편에선 상추, 쑥갓, 배추, 무, 등 여러 가지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어인 일인지 어미 닭은 병아리들에게 땅 파는 일을 제일 먼저 가르쳤다.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도록 낚시하는 방법을 학습시키는 거 같았다. 아둔한 사람에게 닭대가리라는 말을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이 시키는 대로 눈을 반짝이며 잘 따라 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엄마 말에는 관심이 없고 딴청을 피는 녀석도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닭장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활기차게 쏘다니며 먹이를 먹었다. 그런데 비닐하우스 안에 들여놓으니 분위기가 낯설어선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사료만 쪼아 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 만에 채소 먹는 법을 습득했다. 이때부터 채소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난히 모정이 강한 암탉은 꼼짝하지 않고 병아리들을 품고 돌보느라 자신은 먹지도 못하고 비쩍 말라 가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가 하면 병아리들을 돌보기는커녕 주둥이로 마구 쪼아대며 못살게 구는 비정한 암탉도 있다. 하우스에서 병아리를 돌보고 있는 암탉은 병아리가 부화할 때마다 유모를 자처하는 듯 헌신적이며 희생적으로 병아리들을 보살폈다.
어미 닭은 흰색인데 병아리들은 각각 색이 다르다. 족보야 어찌 되었든 어미 닭의 남다른 모정은 눈물겨웠다.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다급한 소리로 날개를 활짝 펴서 비상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열 마리나 되는 병아리들은 잽싸게 어미 품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느 병아리는 미처 숨지 못해 다리가 보이는가 하면, 빼꼼히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꼬꼬닭 호텔 하우스야말로 지상낙원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새벽에 농장으로 갔다. 여느 때는 농장 입구에 들어서면 병아리들이 삐약 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는데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설마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우스 문을 여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수라장이 된 하우스에는 어미 닭의 깃털이 여기저기 뽑혀 그때의 사고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었고, 병아리들은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하우스 안을 살펴보니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을에 떼 지어 몰려다니는 유기견이 있어 이웃에서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가 당하긴 처음이었다. 닭장이 허술한 틈을 타서 족제비나 쥐, 가끔은 뱀도 들어와 닭을 해친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닭장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나서 그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농장과 집이 떨어져 있어 그 난리를 쳐도 몰랐으니 어미 닭과 병아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살기 편하고 안락한 곳으로 옮겨 준다는 게 닷새 만에 참변을 당하게 한 죄책감으로 남편은 식욕을 잃을 정도로 마음 아파했다. 녀석들의 행동을 일기 쓰듯 사진으로 남겼던 나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어미 닭의 깃털을 수습해 땅속에 꼭꼭 묻어 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주인에게 버림 당한 유기견이 인간에게 복수한 거 같아 착잡했다. 반려견으로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인간의 몰인정이 불러온 안타까운 사건이 된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종이를 찢기는 쉽지만, 붙이기 어렵듯 인연도 찢기는 쉽지만 붙이긴 어렵다. 어미 닭과 병아리, 우리의 인연은 거기 까지었나 보다 생각하다가도 그때의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비극을 막아주지 못해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무지근하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인연이 소중한데 이렇듯 인연을 놓치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첫댓글 잔잔하지만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아고-- 마음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