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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무상함에 대하여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니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니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 시편 9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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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에는 무언가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찬양과 한탄, 생각과 기도, 우울과 희망이 오르내립니다.
우리가 이 시편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시인이 느꼈던 것을 느끼면서, 그가 보았던 것을 보려고 하면서,
마치 우리의 삶이 그의 강력한 말들을 통해 해석되기라도 하듯 그의 비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을 살피면서 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시편의 말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전해온 것이지만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모든 미래를 향해 말을 겁니다.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시편이 지니고 있는 비교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그들의 느낌을 이 시편을 - 오직 이것만을-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던 모세에게 돌리는 것으로써 표현했습니다.
성경의 리얼리즘
성경의 여러 다른 구절들처럼 이 시편 역시 심원할 정도로 비관적인 말들을 사용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시편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 하는 듯합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이런 말이 지니고 있는 우울함을 강화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현대의 염세주의자라도 욥이 그의 도덕적인 친구들에게 맞서며 했던 말, 즉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욥 14:1,7,12)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비통함을 강화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나이다."(19-20절)
현대의 자연주의자들은 그들이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할 때 전도자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9). 그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21절)는 이상주의자들의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전도자는 인간이 자기 일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22절)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그것이 고대인들의 무드(mood)였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얕은 기독교적 이상주의는 그런 비전이 갖고 있는 어두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은 성경도 견디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무상함과 불행에 관한 오래된 지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혼 불멸에 관한 유창한 진술로 인생에 관한 진리를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황을 진지하게 다룹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관한 태평스러운 위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거리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시편 90편을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거기에서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찬양의 노래로 시작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묘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는 밑을 보기 전에 위를 봅니다. 그는 인간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오직 무한한 무언가를 보고 나서야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오직 영원한 것을 볼 수 있을 때만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동물의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을 때만 우리가 동물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에 관한 우리의 우울은 그런 무상함 너머를 보는 우리의 능력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현대의 염세주의자들은 그들의 작품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유한성, 불행 그리고 비극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인간의 실존을 헤아리고 정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은 종종 그들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리스의 시인들이 인간을 "필멸의 존재"(the mortals)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인간의 필멸을 헤아리는 잣대가 되는 신들의 불멸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일시성을 헤아리는 잣대는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비극을 헤아리는 잣대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바로 그것이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대대에 우리의 거처"(1절), 즉 모든 시대와 세대의 변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자신의 가장 심원한 우울을 표현하는 노래를 주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강력한 비전을 통해 묘사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2절).
세상의 움직일 수 없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산들조차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산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은 산들이 죽은 후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시간을 측량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그것과 다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4절).
그분은 그분의 척도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은 시간의 소멸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간들과 시간의 순환, 그리고 모든 과거와 미래의 창조적인 통일입니다. 영원은 영원한 삶이지 영원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바라보고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어서 시편 기자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
죽음이라는 운명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정하신 운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연의 법칙, 즉 흙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법칙에 종속시키셨습니다. 아무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원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모든 선하고 악한 힘들에 관한 지식을 얻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을 때 그들은 그 지식을 얻었습니다. - 낙원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렇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의 눈이 열렸고 그들은 자신들의 참된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 상황은 낙원의 꿈결 같은 순진무구 속에 있던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얻은 지식이라는 선물에는 성교의 결과 및 노동과 죽음이라는 운명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깨어나서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보았습니다.
인생의 짧음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은 짧습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의 놀라운 비전은 직유법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묘사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 밤의 한 순간(a watch in the night)같을 뿐임이니이다"(4절). 즉 천년이라도 하나님께는 하룻밤을 구분하는 세"경(更, night watch)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5절).
우리는 무한한 잠에서 깨어납니다. 밤의 1/3동안 우리는 깨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차례입니다. 이 시간은 길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곧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이 도착하고, 우리는 다시 무한한 잠속으로 빠져 듭니다. 밤에서 낮으로, 낮에 자라는 풀의 삶으로 눈을 돌리면서 시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니이다." (5-6절). 그 첫번째 햇살로 풀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태양은 정오에는 그 풀을 달구고 저녁에는 그것을 완전히 말려버립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짧습니다. - 그럼에도 그렇게 길어 보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 많은 이들이 그 나이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나이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게 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거나 따라갈 수 없는 새처럼 날아가 버린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시인은 어째서 우리의 인생이 짧은 것에 대해 그토록 무서운 인상을 받았던 것일까요?
분명히 그는 인생의 짧음이 참된 성취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거의 아무도 자신의 삶을 반복하기를 원치 않지만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경험을 갖고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올바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내 인생은 이런 깨진 조각, 이런 파편, 그리고 이런 좌절된 시도-실제로 내 인생은 그것밖에 안돼-이상의 것이 될텐데"
그러나 인생은 우리가 그것을 다시 시작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그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혹은 우리의 삶이 가장 완벽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이 될지라도 우리가 그 삶이 끝난 후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이 시인처럼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선하고 창조적이고 기쁜 시간들- 이 끝없는 수고 위에 놓여 있고 그 후에는 실망이 따른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 앞에서 우리의 모든 판단이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이것이 이 시편을 썼던 시인의 무드였습니다.
죄책과 진노
이런 생각에는 한 가지 위험이 따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우울에 대한 감상적이고 천박한 기쁨, 자신의 슬픔에 대한 탐욕스러운 집착, 그리고 비극에 대한 왜곡된 갈망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0편에는 그런 느낌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인은 현대의 염세주의자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근심스러운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7-8절).
이런 말들은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적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다른 질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흙에서 흙으로"라는 자연법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 법에 묶이게 된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곳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모든 존재들-산, 꽃 그리고 짐승들-과 함께 종속되어 있는 자연법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죄책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들과 달리 우리 인간이 종속되어 있는 도덕법입니다.
두가지 법 모두 실제입니다. 둘다 성경의 모든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시인이나 다른 성경기자들에게 이 두가지 법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처럼 그들 역시 죽음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또한 부자연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그것에 맞서 저항합니다. 우리는 시신앞에서 오싹해집니다.
우리는 어린이, 젊은이 그리고 한창 때의 남자와 여자들의 죽음에 대해 몸서리칩니다. 심지어 오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인격을 지닌 노인의 죽음에서도 비극의 요소를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분명하고 피할 수 없는 특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듯이 그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비록 얼마간 우울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런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반항합니다. 그리고 그런 반항은 무익하기에 결국 체념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반항과 체념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두가지 태도를 통해 우리가 죽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된 일입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9절, 표준새번역). 우리의 인생은 한숨처럼 짧고 한숨처럼 슬픔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에는 낯선 것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격노한 폭군, 즉 격정과 갈망을 지니고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로 보이게 만드는 종교를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삶의 법칙의 왜곡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교만과 오만에 대한 빠져나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반작용을 의미합니다. 그런 반작용-인간은 그것으로 인해 그의 한계 속으로 되던져졌습니다. -은 하나님의 징벌이나 복수라는 성마른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맞서 자신을 높이려 했던 것으로 인해 흐트러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균형의 재정립을 의미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은밀한 죄를 그 분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다는 진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심원한 이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도덕적 결함, 즉 그분의 명령에 대한 특별한 불순종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의 비밀, 즉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것-우리의 비밀-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행위라는 영역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불행과 비극-를 겪을 만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비밀들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 비밀들은 그분에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를 부정하는 힘, 즉 우리를 쇠약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힘 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단지 어떤 특별한 실패와 특별한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날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날동안 그 밑을 통과해야 할 진노입니다.
지혜로운 마음
이것이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1-12절).
시편 90편은 우리 인간의 상황, 일시성, 그리고 죄책에 관한 진실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들이 수행했던 일을 수행합니다. 고대의 비극들은 극장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사람들 모두가 필멸이라는 비극적인 법과 저주 아래에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비극들은 인간의 비극적 상황, 즉 신 앞에서의 그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인간은 위대해지고 오만해져서 신의 영역을 건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파멸과 절망 속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자기 나라의 의롭거나 의롭지 않은 백성들-그들은 그런 존재였고,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모두에게 알려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인간은 비록 잠시 동요는 할지라도 곧 그들의 운명을 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헤아려 보라고, 우리의 날들이 얼마나 빨리 끝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말해온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인간을 절망 가운데 던져 넣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통찰이 우리에게 지혜의 마음-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만 속한 위대함과 지복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마음-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는 마음이며 거짓된 안전이나 냉소주의로 도피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위엄과 겸손과 불굴의 정신을 갖고서 용기 있게 이런 지식을 견뎌 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지혜는 이 시편의 모든 말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고대 세계에서 삶의 비극을 느꼈던 한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지혜입니다.
새로운 존재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는 기도가 끝난 후 -시인의 기도는 지식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편의 새로운 부분이 시작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유대교 후기에 원래의 시에 덧붙여진 부분일 것입니다.
이 새로운 부분은 이스라엘 나라와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일을견고하게 하소서:(13-17절).
이 말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즉 과거와 미래의 의미,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기도, 그리고 미래에 있을 행복과 기쁨,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의 성공을 위한 기도 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단지 영원한 하나님에 불과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또한 미래의 하나님이십니다. 흙에서 흙으로, 죄에서 진노로 돌아가는 순환은 깨집니다. 모든 불행의 시대가 끝난 후 성취의 시대에 대한 비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비전은 하나님의 종들-선택된 나라와 그 나라 안에 있는 참으로 그분의 종인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은 더이상 하나님 앞에 홀로 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른 종들, 즉 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새시대의 삶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희망이 비극을 대체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신앙이 도달한 가장 높은 지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신은 이것 이상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역사적 희망은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일시성과 죄책으로부터 해방시킬까요?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역사는 모든 인간을 과거 속으로 내던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인이 갈망하는 성취의 시대에 이르지 못합니다. 역사가 그 성취에 가까운 듯 보일때마다 그것은 뒤로 내던져지고 전보다 훨씬 더 그 성취에서 멀어집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에서 불가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비극이 희망보다 강한가? 과거가 미래를 정복하는가? 진노가 자비보다 강력한가?"
우리는 우울과 기대 사이에서 이리저리-비극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비극으로-쫓겨 다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a new being)- 단지 희망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죄책이 궁극적으로 정복되는 현실이기도 한 새로운 경험- 에 관한 메시지를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자신을 무상함과 진노에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메시지의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6절)
우리가 그 메시지를 수용하던 하지 않던, 바로 그것이 시편 기자가 대답하지 않고 놔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모든 환결에도 불구하고 헛된 희망에 집착하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의 앞부분에 나오는 경건한 체념에로 돌아가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의 삶을 들의 풀의 그것과 우울하게 동일시하는 데로 돌아가려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이런 방식들 중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 중 하나를 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삶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실재에 관한 메시지를 수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메시지가 쉬운 답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그 어떤 영적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계속해서 우리의 상황 - 그 안에서는 비극과 희망이 아무도 승리하지 못하는 싸움을 계속합니다.- 에 비추어 이해할 때만 그것이 참된 해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승리는 그런 비극과 희망을 초월합니다. 그 승리는 "여호와여 돌아오소서"(13절)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가 응답될 때 이루어집니다. 이 기도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드리는 기도이며 모든 인간의 영혼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기도입니다.
*** 폴 틸리히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중 "인생의 무상함에 대하여"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