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에도 병원에는 단 몇 분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환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 존엄한 목숨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더라도 결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해행위로 업(業)이 되어
윤회의 사슬이 되고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자살은 자해의 업만 추가하는 일일 뿐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은 업이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처럼 습관이 되고 업력(業力)이 되어
업장(業障)으로 이어집니다.
자살 충동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원인이 고뇌에 갇혀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고통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유동적이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외부적인 여건뿐 아니라 생각도 변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절망감도 한 때입니다.
얼마 전 자살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도
막막한 한때의 덫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인간사를 널리 살폈다면
그 외골수의 생각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시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길이라는 외골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때의 생각에 갇혀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은 고정돼 있지 않고 늘 변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혼자서는 일방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거나 그런 친구가 없다면
절이나 교회를 찾아 짐을 부려놓아야 합니다.
절이나 교회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종교는 그런 자문에 응하라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살하기 전에 좋은 친구나 스승을 만난다면
그러한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제 목숨이 다하면
누구나 몸을 바꿉니다.
부처가 됐든 부처의 할아버지가 됐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때 극단적인 충동으로 지금의 몸을 버리면
더 좋은 삶이 있을 것 같아도,
사실은 그 업의 찌꺼기가 다음 생까지 따라옵니다.
업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