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승만 대통령은 6·25가 발발하자 ‘서울은 안전하니 생업에 종사하라’고 방송하고는 본인은 서울을 버리고 부산으로 탈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강교를 끊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왜곡과 날조로 구성된 것이다.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연구했다는 이들도 이 문제에 적지 않은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본다. 당시 미국의 대사관 기록과 온창일 전 육군사관학교 전사학(戰史學) 교수가 집필한 이승만 대통령의 당시 행적을 검토하면 진실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다르다. 우선 이승만은 6·25가 발발한 당일 밤 10시 대전으로 정부 이전을 결심하고 그 내용을 무초 주한 미대사에게 통보했다.
이 사실은 미 대사관 기록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일 밤 대전 이동을 결심한 것은 100% 외교적 전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정황이 존재한다. 이 대통령은 그날 아침 무초 대사와 대화에서 미국의 신속한 탄약과 무기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초 대사로부터 ‘지금으로서는 미군의 지원 없이도 한국군이 잘 버티고 있다’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6·25 당일 오후 북한의 YAK 전투기가 김포 비행장과 용산역을 폭격하게 된다. 그러자 이승만은 무초 대사를 밤 10시에 다시 불렀다.
이승만의 정부 이전은 탁월한 외교술
이승만은 무초 대사와 마주한 그 자리에서 ‘만일 내가 북한군에 포로가 된다면 한국과 미국은 대단히 불행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가장 크게 놀란 이는 배석한 신성모 국방장관 겸 총리서리였다.
이승만의 이 말은 본인이 북한군에 포로가 되면 한국 정부는 항복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체포되면 전쟁을 종식시켜서 국민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지를 무초 대사에게 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이만 저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이어 ‘이를 위해 대전으로 정부 인사들과 내려가겠다. 이는 나의 탈출이 아니라 정부를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6·25 당일 밤 10시 상황이었다. 이에 무초 대사는 한국군은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그는 ‘저는 서울에 남겠다. 남아서 미국 시민들을 피난시키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이승만은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내 진작 미국이 F51 등 한국에 무기 지원을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들어 주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된 거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무초 미대사로서는 한국 대통령이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힐 경우 항복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를 피해 대통령이 대전으로 내려간다면 서울에 남은 미국 시민들의 피난과 안전 문제를 자기 혼자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 면담 후 신성모 국방장관 겸 총리서리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그는 ‘나하고도 의논한 바가 없어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무초로서는 걱정이 이만 저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다음날인 6월 26일 새벽 4시 무초 대사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의 F51 폭격기와 비주카포, 36문의 105mm 곡사포, 75mm 대전차포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기가 막힌 말을 남겼다. ‘내가 직접 맥아더와 통화하려 했는데 통화가 안 되더라.’ 무초는 다급하게 본국에 연락했고 맥아더는 당일, 한국인 전투기 조종사 10명을 수원에서 일본으로 실어 나른 후, 1시간 정도 F51기 훈련을 시킨 후 이 전투기들을 몰고 서울로 돌려보냈다. 그 밖에 본격적인 무기 공수 지원이 이뤄졌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6월 27일 새벽 4시 이승만은 신성모 국방장관 겸 총리서리와 주변 정부 인사들의 권유에 의해 대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강 다리는 그 다음 날인 28일 새벽에 이승만의 의사를 묻지 않고 채병덕 장군의 결정으로 폭파됐다. 이승만은 이 결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전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미국 대사와 공사의 권유였다. 이승만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겠다고 버텼다.
미국이 이승만의 부산 피난을 권고한 것은 맥아더가 수원에서 시찰 중 북한의 공습을 받은 바, 대전도 함락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고, 만일 이승만이 북한군에 잡히면 한국은 전쟁을 포기할 거라는 이승만의 배짱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서울 사수, 이기고 있다’ 방송은 국방부 선무방송 내용
이승만의 서울 탈출은 미국에 자신이 포로로 잡히면 전쟁은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경고하며 미국의 신속하고 대량적인 무기 지원과 참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외교적 행위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안심하라’, ‘서울 사수’와 같은 방송의 진실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에서 ‘안심하라, 이기고 있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이승만은 6·25 당일과 다음날 새벽 연거푸 무초 대사에게 미군의 신속한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가운데 자신이 포로로 잡혀 전쟁이 종료되는 것에 대비해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렇게 해서 6월 26일 맥아더로부터 F-51과 기타 무기 공수가 결정되어 이뤄졌고 이승만은 대전에서 27일 라디오 방송을 하게 된다. 이 방송을 일본의 미군 감청기관이 잡아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면 이승만은 ‘안심하라’든지, ‘이기고 있다’, ‘서울에 있다’ 와 같은 말을 한 기록이 없다.
대신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물리칠 것이다’와 같은 내용이 전부다. 그러면 왜 이승만이 ‘이기고 있다’라든지, ‘의정부에서 승리했다’, ‘안심하라. 나는 서울에 있다’와 같은 하지 않은 말들이 지금도 전해지는가? 이유는 그러한 내용은 당시 국방부가 당일 오후 4시 선무 공작 차원에서 이승만에 앞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방군이 현 전선 (서울)을 고수할 것’이라는 특별 발표로 방송한 내용들이 이승만의 대전 정부 이전과 혼합되어 와전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