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3: 17-21
---------------------------------------------------------------------
*** 진리를 행함
"진리를 행하는 자!(21절, He that does the truth, KIV. 한글 성경에는 "진리를 따르는 자"로 되어 있다.-역주). 이것은 아주 놀라운 단어들의 조합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때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행할 "수 있을까요?
진리는 참된 이론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실천의 측면에서 그 이론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은 두개의 서로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를 행한다"라는 구절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은 너무 진지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를 따라 행동하다" 정도로 해석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해석이 옳다면, 역시 요한복음에서 발견되는 "내가 곧 ... 진리요"(14:6). "진리가 ...이 되다"(the truth has become, 1:14에 대한 틸리히의 합성 본문-역주), 그리고 "진리에 속한 사람들"(people who of the truth, 8:32에 대한 틸리히의 합성 본문-역주) 같은 진술들은 어떠합니까? 만약 진리가 단지 이론의 문제일 뿐이라면, 이런 진술들 중 아무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의 일치
때로 사람들은 말합니다. "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옳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음과같이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틀리고, 따라서 실제로도 틀리다" 실제로는 틀린 것이 될 수 있는 참된 이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이런 대조는 어렵고 철저한 사유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고안한 것입니다.
그들은 익숙한 관습이라는 얕은 곳과 경험이라는 표면 위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거나 믿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만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오랜 관습에 도전하고 그것을 뒤흔드는 진리에 대한 질문들만이 근본적인 변혁을 초대합니다.
이것은 과학과 도덕과 종교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모든 이방종교의 주장, 즉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특정한 국가의 존재와 능력과 동일시된다는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 했을 때 온 세계의 이방의 관습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추방된 자들의 선지자가 한 나라의 고통은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의 종의 고통이 모든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인류 역사는 새로운 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메시야가 세상의 통치자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측면에서 설명했을 때 오래된 가치체계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과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이론에 도전했을 때, 루터가 교회의 성례전적 중재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공격했을 때, 그리고 현대의 역사학이 축자영감설이라는 기계적이고 미신적인 교리를 파괴했을 때 세상의 큰 부분을 지배하던 관습이 변화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진리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 이론과 실제에 대한 잘못된 대조로 인해 문제에 빠지지 않게 해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특별히 기독교의 진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철저한 사고를 하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발생하고 수행되는 진리
"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진리는 숨어 있으며 따라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표면 밑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의 표면은 대양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대문에 기만적입니다. 깊은 곳에 영원하며 그렇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헬라어를 사용하여 그 헬라적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것은 그 개념을 변화시킵니다. "진리를 행함", "진리가 됨', "진리가 ...이 되다", "내가 ...진리요"-이 모든 단어들의 조합은 기독교의 진리가 "발행하는"(happen) 그 무엇, 어느 특정한 장소와 시간과 인격에 묶여 있는 그 무엇임을 보여 줍니다. 진리는 새로운 그 무엇, 즉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수행된"(done),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삶에서 수행되는 그 무엇입니다.
헬라적 사고에서처럼 기독교에서도 진리는 숨겨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진리의 신비는 발생한 그리고 거듭해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삶, 개인의 삶, 관계 그리고 결단입니다.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고, 그분과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실현되며, 하나님의 회중인 교회에서 제도화되는 삶의 흐름입니다. 헬라적 사고에서 진리는 오직 발견될 수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진리는 그것이 행해지면 발견되고, 발견되면 행해집니다. 헬라적 사고에서 진리는 사물들의 영원하고 움직일 수 없는 본질의 드러남입니다. 기독교에서 진리는 역사 안에서 그 자신을 실현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진리를 향한 결단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진리에 반대하는 것은 헬라적 사고에서처럼 하나의 "의견"(opinion)이 아니라 "거짓말"(lie) 입니다. 진리를 위한 혹은 진리에 맞선 결단은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은 그리스도를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결단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분에 관한 어떤 의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그분을 따름으로써 진리를 행하거나 아니면 그분을 부인함으로써 거짓을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진리에 관한 여러 교사들 중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설령 그것이 그분을 이런 이들 중 가장 높은 분으로 만드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그분에게서 분리하는 것 그리고 진리를 향한 결단과 그분을 향한 결단을 분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마치 플라톤의 가르침을 향한 결단이 플라톤을 향한 결단과 동일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리는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 ...이 되신 진리"(truth which has become)라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진리에 속한 자들"(who are of the truth)이라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행할(do the truth) 수 있는 자들이라고 부를 때 부정됩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론과 실제 사이의 틈을 인정하지 않는 진리 개념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구원을 이루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그 안에서 대부분의 주변적 요소들- 가령 역사적, 교육적, 철학적 주장들-이 그것의 중심, 즉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향하는 하나의 원이 되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구원을 이루는 진리를 포함하지 않은 그 어떤 진술도 신학적인 진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는 진리"란 수행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진리를 행하는 자" 안에 있습니다.
----- 폴 틸리히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중 "진리를 행함"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