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쑤는 여자 / 남태희
“이것 좀 먹어봐 동서, 어서”
도리질 치는 내 입에 억지로 숟가락을 넣었다. 며칠째 물만 마시고 있던 내게 형님은 울 듯한 표정으로 다그치고 있었다. 멀리서 녹두죽 한 냄비를 쑤어 달려온 정성과 진정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면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껄끄러운 입안에 부드러운 죽 알갱이들이 퍼져갔다. 슬픔의 덩어리들을 꾸역꾸역 같이 삼켰다. 어린 것을 잃고 널브러진 스타킹처럼 누워 있던 난 그날 이후 다시 얼어서고 있었다.
죽은 곡물 음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쌀, 보리, 녹두 등의 곡물에 물을 대여섯 배 부어 무르게 만든 음식이다. 오래 끓여 부드럽고 무르게 된 음식이기에 정상인보다는 기력이 쇠한 환자가 먹기에 좋다. 이렇게 고마운 음식이건만 죽에 관한 속담은 그렇지가 못하다. 죽 쒔다, 죽도 못 먹는다, 죽 쒀서 개 줬다 등이 그것이다. 그 깊은 뜻은 모른다. 하여도 좋은 의미로 쓰이는 말은 아니라고 짐작이 간다. 죽 쒔다란 원래는 밥을 하려 했는데 죽이 되었다는 의미니 본래의 목표한 대로 되로 되지 않고 망쳐 버렸다는 뜻이다. 죽도 못 먹는다는 말은 각종 채소나 나물에 조금의 쌀이나 녹말가루를 넣어 끓이는 죽조차 먹을 형편이 못 된다는 곤궁한 처지를 나타낼 때 쓴다. 죽 쒀서 개 줬다는 말은 죽을 끓이려면 쌀을 불리던, 감자나 옥수수 등을 갈아 빻고 앙금도 내려야 하는 등의 일이 많은데 열심히 노력한 공이 남에게 가벼렸을 때 흔히 사용한다.
죽이 예전에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 된 것은 별미음식이나 보양식, 회복식보다는 어려운 시절 땟거리를 늘려 먹는 구황식으로 먹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지금은 각종 죽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여서 직장인들이 많은 빌딩가나 병원 인근에는 죽 전문점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죽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듯이 속담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위에 부담 없는 죽 한 그릇이면 건강은 식은 죽 먹기’ 같은 속담은 어떨까.
죽에는 뜨거운 어머니의 마음이 있다. 어린 시절이면 누구나 일 년에 한두 번은 앓아눕게 된다. 꼼짝없이 누워 있어도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잠결에도 마음이 놓인다. 언뜻 잠들었다 깨면 머리맡에는 흰 죽 한 그릇이 놓여 있다. 죽을 삼킬 때면 쓴 맛과 함께 목울대가 뻣뻣해 온 것은 이마의 열보다 더 어머니가 가슴을 태웠음을 알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하며 열이 나는 게 어머니의 잘못인 것만 같이 쌀을 불리듯 당신의 잘못을 부풀렸을 거다.
죽이란 마음을 다독이는 음식이다. 어른을 모시고 살아 본 여자는 안다. ‘어머니 진지 드세요.’ 했을 때 반응이 없거나, ‘너나 먹어라.’ 하는 미지근한 반응이 오면 어른의 몸이 편찮던지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말이다. 이럴 때 며느리는 부엌으로 가서 우는 아이 등짝을 밀 듯 쌀을 퍽퍽 씻어 문지른다. 쌀바가지는 어디다 화풀이냐는 듯 뱅그르 돈다. 뿌연 뜨물을 버리다 마음에 일던 서운함도 조금씩 녹아내린다.
냉동실 구석에서 돌담치 한 주먹 꺼내 잘게 다져 참기름에 달달 볶는다. 불려둔 쌀을 같이 넣어 볶다가 물량을 잡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쌀알들이 퍼진다. 녹녹해진 알갱이들처럼 여자의 마음도 점점 펴진다. 주걱을 젓고 있는 동안은 자신을 다독이고 재우는 시간이다. 쌀알들이 끈기를 내고 구수한 냄새를 피워 돌리면 안방 한구석에 웅크렸던 어른의 우렁잇속도 봄날 언 시래기 녹듯 조금씩 눅눅해져 간다.
소반에 받치고 간 죽 한 그릇은 무언의 대화다. 화해를 청하는 자는 당연히 빈손일 수 없는 법이다. 헛잠 자는 어머니를 일으켜 죽을 한 술 떠서 넣어 드린다. ‘아’하고 어찌 낼름 받아 드실까. 거듭되는 재촉 끝에 못이기는 척 한 술을 잡수신다. 처음 한 숟가락이 어렵지 다음은 순순히 당신의 손으로 드신다. 화해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방금 쑨 죽처럼 부드럽고 온화해진 낯빛이 된다.
죽이란 나보다는 남을 위해 만드는 음식이다. 가족이 호박죽을 좋아한다면 열일을 제쳐 두고라도 무거운 호박 한 덩이를 쪼개고 단단한 껍질을 벗겨 내지만 저만을 위해 그런 수고를 하는 이는 드물다. 언젠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는 지인의 문병을 간 일이 있다. 빠른 회복을 바라며 죽이 식을까 봐 보온병에 담아 달려갔을 때, 김이 나는 죽 한 숟가락을 채 삼키지도 못하고 눈길이 더워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입보다 가슴이 먼저 죽 맛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곡물들이 죽이 되기까지 쌀알들은 퍼지고 으깨지면서 자기를 허물어서 맛과 형태는 다양하고 풍부해진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 혹은 어디에 좋은 음식이냐에 따라 죽은 무궁하게 변할 수 있다. 수술 후의 회복 환자에게는 영양이 풍부한 전복죽, 산모나 부종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늙은 호박죽, 공부하는 수험생에게는 호두나 잣죽 같은 견과류의 죽을, 체중 조절하는 아가씨들에게는 각종 야채죽을, 처음으로 하는 이유식에는 죽보다 더 고운 이음이 좋겠다.
요즘 나도 여러 가지 글감으로 죽을 쑨다. 어설픈 언어로 쑤어대는 글죽은 걸쭉하니 죽도 밥도 아닌 꼴이다. 욕심껏 많은 재료를 넣어 무슨 맛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죽을 글벗들은 묵묵히 먹어준다. 기교를 많이 부린 날은 많이 나무라기고 하고 좀 더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멋이었으면 하는 이도 있다. 기껏 열심히 만들었더니 서운하게도 ‘죽 쒔다.’란 말이 나올 때도 더러 있다.
수필이란 죽을 쑤기 시작한지 어느덧 몇 해, 물 대중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이런저런 재료들만 널어놓아 글 문 앞만 어지럽힌 허릅숭이 꼴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낙낙하고도 알맞게 퍼진 죽처럼 사물을 오롯이 녹여내어 독특한 빛깔과 향을 가진 글 한 줄 적고 싶다. 형님이 주셨던 죽처럼 오래도록 뭉근해져 누군가의 가슴을 덥혀 주는 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진다.
수필이란 뜨거운 죽 한 솥을 제대로 쑤어 많은 이들과 나누는 날이 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