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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만든 틀에 갇혀 사는 이. 세상을 세상으로 살아내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한 세상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이. 어쩌면 정말로 그것이, 정말 그것이 나일지도 모른다. 내 본질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한 번 생각 해 보아라,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시절까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스스로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내가 못난 놈인 것만 같아서. 내가 잘난 놈이 아닌 것만 같아서. 거기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열등감을 품고 살던 나에게, 철학적 시각은 나를 잘난 놈인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반하에 가서, 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확실한 나의 길이라 받아들여지는 선택을 통해. 나는 어떠한 의심도 없는 완벽한 형태의 삶을 완성했다고 스스로 느꼈다. 남들이 뭐라 하던, 나의 세계관은 강철의 요새와 같았다. 그것이 분명한 나의 이상세계였다. 내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형태. 거기서 직접 살아 숨 쉬며, 그 속에서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만끽했다. 설령 아파도, 힘들어도, 정말 짜증나고 화가나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나의 완성된 이상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내 삶을 통틀어 가장 뚜렷한 형태로 삶을 영위하는 나로서 지내는 시간을 만끽했다.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나의 이상세계라는 것에 그 어떠한 반론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이는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나의 세계관을, 이상주의적 관념을 하반하에 덧씌워 삶을 살아갔다. 그리고, 나는 정말 처참하게 실패하고야 말았다. 밑바닥까지. 내가 상정하지 않았던 곳까지 떨어져 나갔다. 왜냐하면 나의 이상세계를 이루는 기축이 되는, 기둥이 되야 되는 써니쌤이, 아무리 보아도 나의 세계관으로 보았을 때 잘못된 모습을 내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겠다.
사건은 서울 여행때, 밤에 하민이가 서은이의 가슴을 만지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이 일은 시간이 지나 해외 여행을 떠나고, 시즌이 되어서 써니쌤이 합류했을 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 해결의 중제자로서 써니쌤은 하민이의 편을 든다. 하민이조차 인정했던 부분을 변호하였고, 이에 당시 채은쌤은 써니쌤께 맞대응 하여 언성을 높이며 서은이의 편을 들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튀르키예에서의 여행이 끝이 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넘어,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야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저 일상적인 저녁 식사 자리. 나는 하반하 친구들의 입을 통하여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한결형님에게 그날의 일을 말씀해 주시는 채은쌤의 이야기를 통하여, 나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채은쌤께서 하신 말씀이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는 윤쌤이 함께 일 하자 그러면 하겠지만, 써니쌤이 같이 일 하자 그러면 하지 않을 거야. 세상에는 그런 어른도 있는 거야.”
세상에는 그런 어른도 있는 거야. 이 말이, 이 말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박혀 나를 옥죄어 왔다. 끅, 끅.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뭔가 버겁고 벅찬 감각이 느껴졌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너무나도 힘들었다. 정말,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내 방에 돌아 와 홀로 누워서 이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 나의 이 아픔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 미치도록,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 고통을 도대체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내 마음 속에 위치한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선생님들, 학생들, 친구들. 열심히 내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았으나,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할 수 없었고, 이내 팀의 리더이신 윤쌤을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때, 나는 속으로 통곡했다.
‘근데 윤쌤은 써니쌤 아들이잖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아픈 이야기를, 아들에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당시 나는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감정의 자극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선택했다. 오로지 내가 품기로, 내가 감당하고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너무나 선명하게, 언어로 표현되지도 않는 자리에서 내가 너무나 강렬히 말해오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앞으로 이전의 삶으로는 되돌아 갈 수 없다고. 더 이상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큰 순간중 하나에서, 사실 내가 느끼기로 가장 큰 순간에서 말하지 않고 지니는 것을 선택했다. 사실 이제 와 되돌아 보면, 그때 나는 누구나 마주치는 사람을 붙잡고서 내 이야기를 했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나 잔혹하게도, 언제나 내일은 찾아왔다. 끊임없이,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도 내일은 찾아왔다.
나는 달라진 삶을 살았다. 이 지점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나는 어떠한 어색함에 대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를 너무나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도대체 다음 날 아침에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우선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나의 겉으로 들어나는 삶의 모습은 일반적이었다. 크게 바뀐 점은 없었고, 나는 평소대로 아침에는 일기를 내고, 그 다음에 아침 운동을 하고, 영어 시험 준비를 하고, 수업을 하고, 외출을 나가고, 숙제를 계속 하고, 사람들과 떠드는 등 일련의 과정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막연하게 흘러가서 우리는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 프라하로 넘어갔다. 여기서도 기억에 남는 사건은 있다. 어느 날 아침, 어김없이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축구장에 모였을 때였다. 그날은 English Day로 영어만 말 하는 날이었다. 그때, 윤쌤이 운동장 중앙에 서있던 나에게로 웃으며 다가와 말씀하셨다.
“Hay Jeongha, don’t be sad.”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무런 앞뒤 맥락 없이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냥 자연스럽게, 너무나 어이없게도 말의 의미가 알아차려졌다. 저 말의 의미는 소정형님과 세연이가 사귀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하, 진짜. 진짜.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제법 마음에 들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사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워 하지를 않아.’ 정말,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고통스럽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지금 내가 마주한 이 아픔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저 변화의 영역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망가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거. 살아있는 게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거. 마찬가지로 나는 이러한 마음을 당시에는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삶, 일상적인 감정들도 소소하게 느끼며 살았던 거 같은데.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나 확실하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확실히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때 내가 느낀 고통. 나의 이상세계가 정말 당연해서 그 안에서의 삶이 자연스럽게 영위되었듯이, 그 안에서 모든 감정들이 결국 나의 세계관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아프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내 삶의 기정 사실로 둔 상태로 나의 일상적인 삶을 영위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난다. 내가 윤쌤에게 소정형님이 세연이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날도 나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날 나는 워커였었고, 여자 방으로 리조또를 가져다 주고 있었다. 방을 들어가 주방으로 향하니 여자애들과 선생님들이 모여있었다. 채은쌤이 내게 물었다.
“오늘 메뉴가 뭔가요?”
“조또 조또 리조또.”
여자애들이 웃고, 이날 일은 꽤나 자주 기억이 날 때마다 애들 입에서 오르 내렸다. 나도 그때 웃엇고, 심지어 기분이 좋아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제기랄. 아니, 아무튼. 나는 정말로 아침에 소정형님과 세연이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아까 끄적인 문장도 나중에 가서 그때를 회고하며 쓴 말이지, 그때의 있는 그대로의 감상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식사로 리조또를 운반하며 아침 메뉴를 물었을 때 조또 조또 리조또 하고 답할 수 있던 거였다. 기분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기분이 좋은 게 좋은 게 아님을 나는 알았기 때문에, 슬펐다. 이후로도 시간은 정말 매정하게 흘러만 갔다.
나는 일상을 살았다. 끊임없이 내가 마주한 현실로부터 도피를 지속했다. 이미 나의 이상세계는 완전 개 박살이 났음에도, 아직 남아있는 찌꺼기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마저 놓았을 때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끊임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리, 그 부질없는 자리를 지키느라 상처받았다. 상처 받았을 때 기댈 수 있던 기둥에 의해 상처받고 나서는, 온전히 내가 상처받아야 했다. 내 이상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다른 모습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절대선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봤고, 그들은 절대선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었고, 아직 애들이었다. 그리고 애들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뒷담을 까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가 서로를 깎아 내리고, 헐뜯고, 욕하고, 저주하고,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역겨웠다. 그들을 모두 절대선으로, 하반하라는 공동체 내에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친구들로 본 거는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필터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아파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아픈 시간을 보냈다. 자꾸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고. 길을 가다가 문득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혹은 외로워 보이거나 허한 숲풀을 볼 때면 거기로 숨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절벽을 보면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고, 그렇게 내가 이 고통을 끝내는 상상을 계속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있었던 건 바로 매주 주말이 되면 하는 부모님과의 통화였다. 하반하에서는 늘 말 하는 게 있었다, 괜한 엄살로 부모님 걱정시켜드려서 좋을 거 하나 없다고. 내가 힘들더라도 웃으며 전화 드리고 꾹 참았다가 여행 끝나고 얼굴 보고 힘들었다고 말하는 게 훨씬 더 낮다고. 왜냐하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식이 머나먼 외국 땅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통화로 힘들다고 하는 게 좋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나는 부모님 앞에서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사랑해요. 물론 진심이었다.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 그것도 진심은 진심이었다. 여행 다니다 보면 내가 부모님께 얼마나 많이 베품 받고 살았는지 느낄 때가 많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때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단지, 전부가 아니었을 뿐.
이후 독일 베를린을 지나, 프랑스 파리를 지나, 드디어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고대해 오던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25kg 가량의 짐을 짊어지고서 20일 동안 300km를 걸었다. 그 과정에서도 일이 하나 있었는데, 독서 토론 수업중 내가 아몬드 책을 읽고 있을 때 한결형님이 무심코 한 말을 내가 너무나 마음 깊이 새긴 일이었다. 아몬드 책을 보면, 거기에는 식물인간이 된 주인공의 어머니가 나온다. 이를 보고 한결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식물인간이면 물 줘야 되는 거 아니야?”
2022년 4월 십 몇일인가에 우리 친할머니께서 3년 8개월간 누워계시다가 가셨다. 여기서 이 3년 8개월은 할아버지가 기억하시던 날짜였다. 그리고 난 한결형님의 말을 듣고 불같이 화가 났다.
“이런 미친,”
그러나 이 다음에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일에 욱하는 게, 마치 우리 할머니 얼굴에 먹칠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일 운운하며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쏟아내는 거 같아서,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쟤 왜저래?”
나는 등 뒤로 들리는 말들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산티아고 길의 알베르기가 한 공간 안에 2층 침대가 무수히 있는 구조였어서, 나는 내 침대로 가 그날 일기에 내용을 추가했다. 전부 한결형님에 대한 욕이었다. 직접적인 욕설만을 배제한 욕. 나는 이 일기를 쓰고 난 후 담당 코멘트 선생님께 혼이 났다. 나를 세워놓고 찬중쌤은 내가 써놓은 일기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애초에 찬중쌤께 좋은 마음이 없었고,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 또 솔직히 찬중쌤의 이런 행동이 같잖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읽고, 한바탕 혼이 나고, 잠시 후 하윤쌤께 불려 나갔다. 하윤쌤은 일기 담당 선생님으로서 어쨌든 네가 이런 내용을 쓴거에 대해서 윤쌤께 말씀을 드렸고 지금 윤쌤께 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하윤쌤이 그런 말씀을 하시기도 전에 벌써 꾹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이 일에 대한 나의 응어리 같은 감정을 풀어냈다. 이에 하윤쌤은 좋게 좋게 말씀하시며 나를 윤쌤께 보냈다.
윤썜은 자신의 침상에서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중 나를 맞으셨다. 아마 나를 한 번 거하게 혼내실 예정이셨던 거 같은데, 내가 눈물 범벅이 된 상태로 들어오니까 윤쌤도 좀 당황하신 거 같았다. 윤쌤은 침착하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찌됐든 네가 한결이의 그런 가벼운 말을 듣고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거잖아. 너는 가벼운 말이면 가볍게 반응하면 되는데 이렇게 네가 힘들어 하면 이건 네 손해잖아. 네가 이런 거는 구분을 하는 게 좋아.”
그렇게 나는 예상치 못하게 조언을 들었다. 솔직히 혼날 줄 알고 겁이 났었는데, 나의 모습에 따라 진솔하게 말씀해 주시는 윤쌤이 감사했다. 그 시간은 내 상태가 어쨌든 그 자체로서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인도 마테란에 가서는 나의 생활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테란에 도착한 첫 날, 시차가 맞지 않아 늦은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일기 제출 시간은 6시였다. 그리고 우리 방 인원 세 명은 단채로 일기 Time miss를 받게 되었다. 그때, 아침에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서 잠시간 절망과 허탈, 허무에 휩싸여 앉아있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겪기 싫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때 이후, 나의 일상 또한, 내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무너진 내 이상의 잔해물조차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점차 Time miss가 늘었고, 영어 시험도 No pass가 늘었다. 일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금은 고스란히 내 마음의 금을 투영했다. 아야, 아프다. 이게 아니었다. 인도 마테란에서의 시간이 끝이 나고 인도 오르빌로 갔을 때, 나는 일상이 무너지는 것 또한 그 끝자락에 이르렀다. 마치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예정된 미래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 천장에 매달린 인도 양식의 1인용 해먹 의자에 끼익 끼익 앉아 어두캄캄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영어 시험 시간은 잔인하고도 정갈하게 내게로 다가왔고, 내 심장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공허. 이상이 무너진 이후로 언제나 느낄 수 있었던 내 마음에 뚤린 구멍이, 공허한 그 빈 공간이 나 삶을 잠시 장악하는 느낌이었다. 일주일 하고도 4일 5일. 내가 하반하에서 여행을 다니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다. 내가 정말 미친듯 외면해 오던 아픔이 나를 올가매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찾아오는 기분. 그 순간은 정말 다른 어떠한 마음도 들지 않고 오로지 아픔이었다. 새삼 하늘이 참 어두컴컴했다.
그렇게 오르빌에서의 시간도 겨우 끝이 났고, 우리는 드디어 여행 마지막 종착지, 인도네시아 발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총 5주간의 시간 동안 지난 여행에 대한 총 소감문인 문집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A4용지 10장 분량의 글을 써와야 했으며, 나는 이 일에 착수해 나갔다. 그리고 이때쯤 되니까, 이제 아프지 않았다. 이제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편할 수 있었다. 다시 아픔을 아픔으로, 슬픔을 슬픔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이상이 무너진 아픔을 나는 끝끝내 외면해 냈다는 말이다. 이때 하반하 13기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고, 심도 깊은 고민으로 써니쌤과도 통화를 나누고 부모님과도 통화를 나누었다. 내 스스로를 비꼬는 기분이지만, 이때 나는 지난 시간의 힘들었던 일들도 말했다. 아파하면서. 슬퍼하면서.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을 힘들었다고 말하며 나는 지난 일을 회고했다. 이것이 그냥 끝이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에 끝이다. 이 이후로 별일 없었다. 나는 이후로 그때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낀 감상은 하나였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말 그대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게나 선명했던,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내가 어떠한 무언가를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그 시간의 감정이, 이제 와 나는 전혀 공감이 되지를 않았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의 맥락이나 그때 왜 그랬을까와 같은 것들이 딱히 공감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힘들었어요. 이게 끝이었다. 외면의 업보이거나 결과랄까나. 사실 지금 쓰고있는 이 글이 내가 이 이야기에 대하여 제대로 서술하는 첫 이야기이다. 이제 와 겨우 다시 맞닥트리는 그날 그 시절의 감정이다. 그래도 나름 거리낌 없이 썼다. 이게 내게 있었던 일이고, 뭐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맨 처음에 서술한 바와 같다. 이야기를 쓰던 도중 이야기의 주제가 좀 달라졌으나, 이 또한 이야기의 속성이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라도 다시 초심대로 시작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 보겠다.
이 이후 나는 정말로 별 일이 없었다. 하반하 13기를 가려고 했고, 주변에 약속도 많이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갈등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첫 번째로 방학 기간 동안 하반하를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옅어진 게 있었고, 두 번째로는 좀 어이 없을 수 있으나 내가 소개해 준 책을 보고서 삼무곡에 입학하겠다고 하는 소정형님의 모습을 본 것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감정이 내 마음에 작용을 했는데, 하나는 소정형님과 같이있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였고, 또 다른 하나는 선택을 번복하는, 다른 길을 가는 소정형님의 그런 면에 자극을 받은 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삼무곡을 갔고, 현곡 선생님을 만나 나름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때 느꼈던 감상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그때 ‘이거면 됐다.’라는 감상을 가졌었다. 말 그대로, 그때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그 감정에 대하여, 이거면 무엇이 어찌 될지라도 되었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라면 이곳에 몸 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이때 삼무곡에 오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런 생각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부모님은 참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의사를 존중해 주셨다. 새삼 이러한 일들이 겹치고 겹쳐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우러 나오게 된다.
그리고 숙소에서 하룻밤 묵고 난 이후, 우리는 하반하에 갔다. 하반하에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여기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해도, 실재로는 정말 죄책감이 극에 달했었다. 나는 하반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모든 사람들에게, 여행 잘 다녀 오겠다고, 여행 잘 다녀 오자고 이야기 했다. 정말, 나는 가볍게 꺼낸 내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모두를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분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내 행동이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결정이었을지라도, 이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하반하 13기에 입학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전하러 하반하에 찾아갔을 때, 웃으며 나를 반겨주시는 선생님들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꾸만 시선을 깔게 되었고,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말 꼬리를 트는 건 우리 아빠가 대신 해주었다.
새삼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실지 딸기 스무디를 마실지 고민하는 것과, 하반하를 갈지 삼무곡을 갈지 고민하는 것과 결국에 서로 같은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그 선택에 얽힌 나의 책임이며 마음 등을 얼마나 깊게 자각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울음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런 나의 눈물을 보고 나니, 나를 설득하시던, 내가 하반하에 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써니쌤도 그만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는 얼마 후 윤쌤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하반하 13기를 이끌 실질적인 리더인 윤쌤과의 아무런 이야기 없이 하반하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써니쌤과 말씀을 나눈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윤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솔직히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깜빡 빠트리고 넘어간 이야기가 있었는데, 원래 하반하 13기 모집은 10월달에 이루어 졌다. 당일, 10분 이내로 모든 모집은 마감이 되었고, 당시 하반하 13기를 내가 가리라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나는 당연히 응모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2월, 발리에서 써니쌤과 통화를 하고, 윤쌤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나는 하반하 13기를 가기로 결정되었던 거였다. 본래 안되는 거였지만, 오로지 정만으로 끼워 넣어주신 거였다. 본래 메뉴얼을 따르는 가치를 매우 중요시 하는 윤쌤이시고, 그런 윤쌤이 정에 겨워 넣어주신 거였기에 내게 죄책감이 더 컸다. 이외에도 내년에도 잘 해보자 하셨던 하윤쌤, 올해는 별로 교류를 많이 못해 봐서 아쉬웠다던 종은썜, 나한테 번호 1번 넘겨주려 한 나영이, 내가 올줄 알았던 소중한 인연들, 이러한 의미에서 윤쌤과의 전화 연결음이 울리고, 이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마음도 턱 내려 앉는 기분이 들었다. 윤쌤은 내가 어느정도 예상했던 말들을 하셨다. 윤쌤 입장에서도 당혹스럽고, 원망스러울 수도 있고,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걱정도 되셨을 테니 그 마음에 내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래서, 아까 말 했던 대로 나는 윤쌤과의 통화 도중에도 울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새어 나오는 울음 소리를 전화 너머로 들으며, 윤쌤도 거칠게 하시던 말씀을 멈추시고 이내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이셨다. 오히려 내게는 그런 윤쌤의 반응이 더 마음을 후벼 팠다. 내가 어느 입장이 된다고 울고, 그 울음에, 그 어떠한 명분도 없는 울음에 마음 약해지시는 윤쌤께 너무 미안했다. 여러므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자각하며, 그렇게 나는 삼무곡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게는 정말, 어느 면에선 다 내던지고서 오게 된 삼무곡이기도 했다.
이후 삼무곡에서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 소정형님을 계속 좋아하고, 번번히 차이고, 방학에 하반하 시즌을 가 어색한 인연들을 만나 즐거웠던 때로 되돌아 간 것처럼 즐기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소정형님에게서 다음 학기에 삼무곡에 안 갈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후 소정형님한테 연락처 차단 당하고. 그리고 이외에 이야기는 삼무곡 학교 내에서의 배움 이야기이다. 그렇게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살아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나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 안에서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분명하게 와닿는 배움의 순간들이 자주 있던 건 사실이지만, 실은 근본적인 내 삶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움의 질이 향상되고, 더 그럴싸하게 배운다고 해서, 그 배움이 내 생활 양식을 판 뒤집듯 뒤집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은 오늘 저녁에 샤워를 하다가 문득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세계관에 갇혀 산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이 내가 품고 있던 어느 마음과 같은 것들을 너무나 명려하게 설명해 내는 알맞은 언어로서 작용해서, 솔직히 이게 참 불쾌했다. 그리고 화가 막 났다. 내가 예나 지금이나 못난 놈이기 싫어서, 겁이 너무 많아서, 온전히 받아들이질 못해서, 내 못난 모습을 남과 비교해 열등감을 느껴서 자꾸만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산다는 게 그 꼴이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또 사소하게는 민혁이 형이 종종 내게 말하는 네가 네가 만든 틀을 벗어나질 않는다는 둥, 그게 월권이라는 둥, 하는 말들이 또 들어맞는 거 같아서 내심 재수가 없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민혁이 형이 있다면 오해하지 마라. 내가 이런 얘기를 대놓고 잘 안 하는 이유는 그냥 괜히 말했다가 놀림당할 거 같아서 그렇다. 물론 민혁이 형은 그게 문제라고 되받아칠 수도 있고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결국은 그러하다.
어쨌든 아까 글을 쓰기 전까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우선 현곡을 찾아갔었는데 현곡이 주무시고 계셨다. 밖에서 포개져 누워있는 가을이와 눈을 마주친 후 그렇게 방에 들어가 10시부터 지금까지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내가 외면한 감정을 깊이 공감하고 마주하기만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컸다. 이를 문자로 표현해 내지는 못하겠고 방향성을 특정하기도 어렵지만, 한결 기분이 가뿐해진 듯한 느낌이다. 사실 이 글을 거의 다 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느끼는 건 나름 잘난 글을 쓴 거 같다는 뿌듯함과 이 글을 누군가 읽고 잘 쓴다고 칭찬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의 출처를 떠올려 보면 결국 내 열등감이 있는 거 같아서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사실 더 쓸 말은 없다. 이제 그만 양치하고 자야겠다.
첫댓글 좋다!^^ 재미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민혁이형은 오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얘기 했다면 놀렸을 것 같다!
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