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최재천)
저는 어려서부터 글쟁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의 고백치곤 좀 어쭙잖겠지만 아홉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큰 삼촌이 검은 끈으로 묶어준 하얀 백지 묶음을 끼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찾곤 했습니다. 학교 교지에 '동시' 몇 편 실은 걸 빼곤 어디 변변하게 시를 썼노라고 떠들 수 있으랴만 단 몇 줄의 시를 쓰기 위해 며칠씩 가슴을 졸인 경험 정도는 있다는 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동안은 조각에 푹 빠져 미대에 가려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이과에 배치된 이 불행한 소년에게 그래도 가장 문과 냄새가 나는 자연과학 분야는 생물학뿐이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지만 방학이란 방학은 대부분 대관령 기슭과 동해 바닷가 사이의 고향 할머니 댁에서 보낸 제게 동물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었습니다.
문학도의 꿈을 접은 지 여러 해가 지난 오늘 저는 동물 행동학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어느 문인 못지않게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모두 생명이 그 주제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늘 생명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려 했고 생명의 모습을 깎아보려 하다가 이제는 아예 그 속을 헤집고 있답니다.
저는 제가 자연과학을 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과학자치고 제법 글 흉내를 낸다고 생각해주시는 덕에 여기저기 겁 없이 글을 뿌리며 삽니다. 또 자연과학중에서도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공부한 덕에 그냥 평생 글만 써온 이들에 비해 소재가 풍부한 편입니다. 저 광활한 자연에서 퍼오는 제 글의 소재는 아마 쉽게 마르지 않을 듯싶습니다.
이 책에 모아놓은 글들은 제가 지난 몇 년간 신문이나 잡지에 실었던 것들입니다. 일일이 어디라고 밝히지 않겠지만 지면을 허락해준 그들의 너그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입니다. 잡지는 덜한데 신문에 실었던 글들은 그대로 책 속에 쏟아 붇기 어려웠습니다. 책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도록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우연히 어렸을 때 써두었던 일기장을 펼처보는 듯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제가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이려니 하며 스스로를 달래기로 했습니다. 낡은 일기장을 등 뒤에 감추고 끙끙거리는 저를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신 효형출판 식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언론매체에 담았던 것들이라 제 글들은 종종 시사성을 띱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동물들도 그런데 우리도 이래야하지 않느냐는 식의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되도록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때로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떨 때는 정말 우리가 동물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위선의 탈을 벗고 지극히 동물적으로 살아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울화가 치밀 때가 언뜻언뜻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에 맞아 싼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러야만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심성입니다.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으로 이 글들을 썼습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앎에 대한 열정이라면 우리 인간을 당하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줄곧 동물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런 저런 모습들을 그리렵니다. 그러다 보면 생명도 제 앞에서 하나둘씩 옷을 벗고 언젠가 그 하얀 속살을 내 보이겠지요.
2000년 겨울 관악산 기슭에서
최재천
첫댓글 정말 좋은 책입니다. 저자가 고백한 것처럼 보통의 글쟁이보다 많은 소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신비로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식과 안목이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참 부러운 부분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