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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여태천
매일매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 헤맨다.
신문을 훔쳐보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점심나절 붐비는 구내식당에서
그것을 숨길 수가 없으니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그것이 피우는 냄새는 치명적이나
운명이라고 하기엔 가혹하고
일일이 이름 부르기엔
지독히도 많은 그것.
엄살과 내숭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하찮은 그것.
치명적인 오역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거나
그것의 기록을 찾아 헤맨다.
버려진 개처럼 우리가 쓸쓸해질 때
불쑥 그것이 찾아올 거라고
그래서 우리의 안쪽이 따뜻해질 거라고
우리는 믿으면서.
- 리토피아, 봄호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일종의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은유를 해석하는데는 독자가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시 속에서 은유를 사용하는 시인은 어떤 것에 대한 정의를 이미 내리고 있으며 독자는 그 정의를 알아맞히도록 요구받는다.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이름 짓기부터 시작된다. 대화 또한 호칭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진대 여태천은 수수께끼를 풀듯 애매모호한 그 무엇에 대해 이름조차 숨기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름을 지니고 있지는 않으며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연애, 또는 사랑이라고 해 두자. 시라고도 해 두자. 아니면 동정심 등등. 감정의 파동을 느낄 만한 그 무엇. 일상적인 공간 안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는 인간이 순간순간 느끼는 그 무엇. 시인은 그것을 굳이 어떤 감정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다. 무언가 모호하여 마치 누보로망 영화에서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처럼 화자는 ‘그것’을 슬쩍 숨긴 채 독자에게 숨바꼭질을 시키고 있다. 짐작은 되지만 실체 없는 그것을 무엇으로 이름 할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이미 ‘지나갔’어도 ‘치명적인’ ‘오역’으로 기록되었거나 아직 ‘기다리’는 무엇에 대해 당당히 ‘연애’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의 존재를 그럼, 시인은 정확히 알고 있는가? 시 속에서 명명되지 않은 ‘그것’의 가장 적절한 이름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불충분한 의미부여는 안개 속을 헤매게 만들며 그 이름 또한 혼돈의 영역에 머물게 한다. 시인이 시 전체를 통하여 애둘러 말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이름 불러준다고 해서 정말 ‘그것’이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연애는 어떠한 것인가, 그 대상은 수많았던가, 그것은 올바르게 명명되었던가, 그동안 ‘연애’라는 명사에 대한 의미부여를 다시 뒤적거려본다. ‘연애’라는 명사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차원에 속하는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 재현물이 없고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연애’를 현실에서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것을 ‘연애’로 부르는 것이 과연 적당한가? 이 시가 은유하는 대상인 ‘연애’에 대해 의미의 전이가 생기기를 기대하면서 다시 읽는다. 시적 상황은 친근하나 그 상황에서 찾아내는 ‘그것’을 통칭하여 연애라 할 것인가? 그것을 찾는 행위를 ‘연애’라 할 것인가? 기표와 기의가 허공 속에서 서로 미끄럼을 타며 따로 떠도는 것은 아닌가. 이 행위를 지칭하는 언어의 구성물에 대한 중얼거림을 부디 헛소리라 비하하지 말기를…
야생의 비 소리
허만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은 태어나고 부서진다
하늘을 쥐어짜며 뛰어내린
1억년 이전의 빗방울 자국
어둠의 극한에서 빛이 터지듯
땅바닥에서 부서진 자욱한 빗소리
초록색 식물의 왕성한 번식력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파충류 피부
짐승의 눈은 조용히 바라볼 뿐
따지지 않는다
짐승의 혀는 배고픔을 핥을 뿐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로 오염되기 이전의
야생의 순수
발자국이란 말을 넘어서서
백악기 비의 발자국 송송 드러내는
고성 계승사(桂承寺) 바위 벼랑 단면에서 부서지는
21세기 5월의 싱싱한 햇살
-유심, 5.6월호
문자를 사용하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의적 해석으로 사물에 대해 명명하고 의미 짓고 규정한다. 사회를 구성하고 소통하고 발전시키는 언어의 공헌은 때로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사물의 본모습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이 시에서 ‘빛’과 ‘비’는 동일한 자음 ‘ㅂ'을 쓰고 있으며 발음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또 사이시옷이 사용되는 ‘빗방울’이나 ‘빗소리’에서 ‘빗’은 ‘빛’과 동일하게 대표소리인 ‘빋’으로 발음된다. 전혀 다른 두 물질이 똑같이 발음되는 현상을 통하여 언어에 의해 오염되는 사물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사물의 본모습은 정말 본모습으로 언어화되고 발음되고 있는가. 시인은 1억 년 전에 형성된 빗방울 화석을 바라보고 있다. 1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낮과 밤의 자연현상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은 ‘태어’나고 ‘부서’진다. 빗방울 화석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에게 문득 빗소리 자욱하게 들려온다. 시인은 문득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 야생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세치 혀로 ‘따지’고 ‘말’하며 ‘야생’과 ‘순수’를 ‘오염’시키는 동안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짐승’은 그저 조용하게 ‘눈’으로 ‘바라보고’ 배고픔을 ‘핥을’ 뿐이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그동안 사물에 행해온 언어의 폭력성이 언뜻 반추되는 부분이다. ‘발자국’이라는 말을 넘어서 ‘비’의 발자국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21세기에 ‘빗’방울 화석을 비추는 태양‘빛’은 ‘빛’이라는 언어 이전에 이미 ‘빛’이며 빗방울이라는 언어 이전에 이미 빗방울이다. ‘빛’이나 ‘빗’방울이나 사람이 만든 언어와 상관없이 이미 존재해 왔으므로. 언어 이전의 사물은 그 근원이 어디일까.
감기의 고향
박남희
그날 이후 몇 달 동안
감기는 콧구멍 속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부터 지금까지 병원이나 약국들은
감기의 고향을 찾아 헤매었으나
아무도 감기의 고향을 모른다 그런데도
감기는 왜 콧물과 기침을 여태껏 해방시켜주지 않는지
콧구멍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기를 왜 고뿔이라고 불러서
불이 나는 코를 연상케 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감기는 다시 콧구멍 속으로 돌아왔다
매년 꽃들이 제 고향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듯이
감기도 끝내 제 고향을 찾지 못했나보다
감기가 노숙을 즐기는 것은 제 속의 불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시와 인식, 봄호
지금 이곳에 있는 나는 진정한 나인가?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존재론적 인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위 시에서 읽히는 것은 현상계에 위치한 지금 이곳은 결코 존재의 근원적인 고향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곳이라는 직관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 준 대표적인 예이다. 플라톤은 실재적인 세계는 가시계(可視界)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계(可知界)라 하였으며 가지계(可知界)는 영원한 이데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감기나 꽃들의 고향은 원자나 분자의 미립자 너머 결코 닿을 수 없는 이데아의 세계 속에나 존재하는 것인가. 진지한 주제를 가벼운 농담조로 일관하면서 이 세상 모든 근원에 대한 날카로운 직관을 은유하고 있다.
ㄲ에 대한 형이하학적 자가 진단
정선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갖춰야 할 ‘ㄲ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다.
꿈, 하수구 속에서도 대가리 꼿꼿이 치켜들어 징했다
끼, 조맹이는 매연을 빨아먹고 보도블록 틈에 꽃을 피웠다
꾼, 한판 걸지게 놀 광장도 구경꾼도 보이지 않았다
깡, 몸에서는 오기가 아토피로 돋았다
끈, 빌딩 유리창닦이가 몸 맡기는 나일롱줄도 부러웠다
요즘에는 꿈끼끈깡끈으로는 부족하다나
꼴, 눈 코 입 두루뭉수리 붙은 것만도 감사할 따름
꾀,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지 꾀꼴꾀꼴
자빠지고 뒹굴다 터득한 오어사 땡중의 설법같은
아스팔트길을 맨발로 걸으니 부풀어오르네
공갈빵을 먹었네
눈치코치 없이 배가 부르네
공갈씨 한 알 싹트고 영글려면 빛과 거름은 공짜더냐
똥그란 요거 하나면 만사오카이
요거 하나 없이 몽이로 버텨온 나는 대략난감
꿈 하나 품고 끼 하나 믿고 까불다 밑동 빠진 사람 한 둘 아니니
오, 大~患悶國은 大歡, 民國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메워지고
맨발이 부르트도록
너와 나의 챙피헌
- 시와사람, 봄호
모든 언어는 선택과 조합에 의해 구성된다. 선택과 조합이란 언어가 의미를 낳는 필연적인 두 개의 축이다. 언어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행위는 순전히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몫이다. 선택과 조합에 의해 수행되는 동안 언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언어는 절대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한 언어 체계 안에서 관계들에 의해 수행되는 자의적 체계이다. 이러한 약속에 의해 정해진 언어이기에 그 부호인 기표와 의미를 담는 기의관계는 절대적이 아니고 약속에 의한 자의적인 것이다. 정선은 위의 시「ㄲ에 관한 보고서」에서 자의적 약속의 소산물인 ‘꿈’, ‘끼’, ‘끈’, ‘깡’, ‘꾀’, ‘꼴’이라는 언어에 담긴 의미를 올바르지 못한 자본주의에 농락당하고 있는 부정적인 사회상을 비아냥거리는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비틀기 작업은 그동안 통용되던 사전적 의미에 변형을 주어 작품 안에서 개인적 상징기호로 그 시적 의미를 새롭게 획득하도록 한다.
젖감전
이대흠
공장생활을 하는 햇어미들은 아기 젖 줄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퉁퉁 불은 젖을 감추고 일을 하는데 그래도 아기가 배고플 즈음이면 어미가 먹었던 밥이 모조리 젖으로 와서 강 흐르듯 자연스레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데
그 강에 닿아야 할 풀뿌리 같은 아기 입이 없어서 쏟아져 나오는 젖을 플라스틱 통이 먼저 맛보고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몇 리나 떨어진 집에 있는 아기가 어미 젖 짜는 그 시간을 용케도 알아서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울어댄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은 미시시피강이나 아마존강이 아니라 어미의 젖내 흐르는 젖강인 것을
마흔 넘어 바다 건너 온 내가 바닷가를 서성이는 것은
두고 온 늙은 어미의 젖내가 갯바람에 몰아쳐서 자꾸만 자꾸만 눈이 아려서
- 천년의 시작, 봄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했다. 하늘이 주신 핏줄이 나의 몸을 통해 자식의 핏줄로 흐르는, 혈연의 강으로 맺은 인연인 천륜은 몇 마디 말로 표기되기 이전에 이미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먼저 젖먹이 아기를 떼어놓고 일터에 나와 있는 젊은 ‘햇어미’들의 모습을 전경화시키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러 나와 있지만 아기에게 젖을 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넘쳐흐르는 젖을 플라스틱에 짜 담고, 집에 있는 아기는 그 시간을 용케 알고 감전된 듯 울음 운다는,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시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은 비교적 담담하게 진술되다가 ‘감전된 듯’ 을 두 번 되풀이 하면서 그 안타까움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시인은 객관적 제시어로 세상에서 가장 긴 강들을 서술하지만 다음 행을 보면 그 강들은 어미와 자식 간에 흐르는 주제어인 ‘젖강’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현실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시적 사유는 마지막 연에 이르면서 시인 자신에게 닥친 정서적 감전으로 표면화 된다. 고향을 떠난 시인이 바다 건너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이미 전경화 된 ‘젖강’에 의해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까지 긴 강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햇어미’, ‘아기’, ‘젖’, ‘젖내’, ‘젖강’, ‘감전’, ‘강’, ‘바다’, ‘늙은 어미’ 등이 어울려 어미와 자식을 잇는 근원의 강에 대한 정서를 더욱 끈끈하게 한다.
소리의 사다리
조용미
아래층 방에 가 있을 때 들은
어딘가 다른 물소리,
저 물소리가 아래층에서 듣고 올려 보낸
다른 이의 몸을 한 바퀴 돌고 온
내가 처음 듣는 새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지면서
먼저 들은 이의 큇바퀴를 쓰다듬고 나온
저 아롱다롱한 소리
손때 묻은 소반처럼은 아니지만
반짝이며 윤기가 도는
위층에서 듣는 개울물 소리,
누군가 종이접기 하듯 올려 보낸 물소리
나도 접어
옥상으로 올려 보낸다
오늘밤 은하수 건너는 뭇 별이 들을
내가 어루만진
저 나선형의 물소리가 가 닿는 곳은,
소리가 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밤
- 현대시학 4월호
소리를 어떻게 문자화 시키는가. 조용미는 소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개울물소리’라는 구절로 독자로 하여금 제 각각 청각적 이미지를 연상 하도록 한다. 이렇게 연상된 소리는 듣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소리가 생겨나는 곳에서 듣는 것과 낮은 곳에서 듣는 소리, 높은 곳에서 듣는 소리는 음감에서 미묘한 차이가 난다. 이러한 과학적 진실을 시인은 경험에 의한 자신만의 정서로 승화시키고 있다. 흔하게 듣는 개울물 소리이지만 아래층과 이층에서 듣는 소리는 다르다. 시점의 높낮이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듯 소리 또한 듣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현상을 시인은 섬세한 시적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층에서 듣는 시인의 귓바퀴에 와 닿는 개울물 소리는 아래층에서 듣던 그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종이접기 하듯’ 접어서 올려 보낸 소리이다. 누군가 종이접듯 접었기 때문에 그 소리에서 또 다른 결이 생기고 시인 자신도 그 소리를 접어서 위로 올려 보내고 드디어는 은하수에 닿게 된다는 전개이다. 다소 천진해 보이는 이러한 시적 전개는 나에게 문득 새롭게 들린다 하여 그것이 정말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세상에 새로울 것은 이미 없지만 있어온 것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종이접기 하듯’ 어루만진다면, 그 종이접기가 편지가 되든 종이배가 되든 새가 되든 거기에 담긴 의미나 마음의 결들로 인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겠는가. 의미의 전달 또한 더욱 곡진해 지지 않겠는가. 이미 누군가의 둥근 귓바퀴를 거쳐서 당도한 소리들은 나의 귓바퀴를 거쳐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부드럽게 건너간다는 것은 우주적 삶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생활 속의 발견을 돌올하게 포착하여 점층적으로 확장시키는 조용미의「소리의 사다리」는 그 특유의 온화하고 투명한 아우라를 형성하여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고 안정된 정서와 순수성을 맛보게 한다.
얼굴
김수우
칫솔질하다 깜짝 놀란다 삼십년 전 입관 때 본 푸릿한 할매가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다 머리를 빗다가도 문득 지난봄에 죽은 시인이 보여 소스라친다
생선장수로 아홉 남매를 키워낸 무지렁뱅이 할매였다 착해빠져 늘 목소리
작던 무명시인이었다 짜증스런 연민으로 내 척추는 노상 꾸부정했는데
가끔 누군지 모를 낯선 표정
열여덟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어디선가 객사했을 거라는
옛 소문 속 사내가 분명하다
싫고 싫던 할머니 틀니 덜걱거리는 소리나 속으로 경멸하던 시인의 술주정도
다 내 안에 집을 지었으니, 얼굴이란 매일 덧칠되고 있는 오래된 벽화임을 깨닫는 지천명,
화장이 잘 묻지 않는다
흘러흘러 끝내 내게 닿고 만 섬뜩한 그리움
성실하다
- 작가세계, 봄호
서정시의 미적 정서는 시인이 가진 개성에 의해 재구성된다. 마흔 이전의 얼굴이 생득적 모습이라면 마흔 이후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알게 모르게 흔적으로 남는 다고 한다. 그 흔적을 바라보는 감회가 자신만의 특수한 심리적 과정을 거치면서 남다르게 의미화 되고 있다. 살아가는 생활태도에 따라 변화되는 얼굴 모습을 보며 마음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남에게 들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어느 순간 거울 속에 되비치는 나의 얼굴을 통하여 내 기억 속에 깃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신을 타자화시켜 객관적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 바로 그 즈음이 아닐까. 오래 전 사건으로 잊고 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이 문득 마주 본 거울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은 시인의 무의식 어느 곳에 그들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겠다. 온갖 감각의 화려한 물결을 지나 시인은 지천명이라는 나이감각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착각 속에서 바라보던 자신을 이제 비로소 제대로 마주하게 된 것은 아닌가. 내가 생각하던 나는 거울 속에 마주하고 있는 내가 아니다. 자신을 투영시킨 대상들은 하나 같이 중심이 되지 못한 고단한 주변인들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은 그들의 세월이 곧 나의 세월임을 말해주고 있다.
해가 지면
이승훈
해가 지면 “이정현!” 아파트 마당에서 아이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도 “이정현!”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도 “이정현!” 목소리가 들린다. 난 정현이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 저녁에 들리던 소리가 가을 저녁에도 들리고 매일 저녁 해가 지면 “이정현!” “이정현!” “이정현!” 세 번 부르고 조용해진다.
-현대시학, 3월호.
불러주는 목소리 없는 줄 알면서도 불러 줄 목소리가 못내 기다려지는,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은 때로 세상 천지에 홀로 남겨진 듯 아득하다. 작고 푸른 종지에 담긴 맑은 물처럼 오롯해지거나 아니면 물 위에 뜬 한 방울 기름 같거나 맑은 물 같은 하늘에 일찍 떠오른 물방울 같은 달이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외로움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 살뜰히 나의 이름을 불러 준다면 내 존재는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부르고 대답하는 행위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통하게 한다. 우리는 이름이 곧 존재가 되는 명명의 원리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시에서의 부름은 다르다. 부르는 사람도 불리워지는 대상도 그 실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소리만 거듭해서 매일 들린다. 이처럼 일상적인 어휘, 정돈된 문장은 시인이 처한 공간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곳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매일 되풀이 되는 ‘여자 목소리’ “이정현!”에 대한 이정현은 반응이 전혀 없다.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세 번씩 부르는 소리만 일방적으로 존재한다. 마치 이상하고도 다른 세계를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처럼. 일상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지리한 부름은 종내 비현실감을 느끼게 하고 부르는 목소리와 이름의 주인공에 대해서도 일순간 의심하게 한다. 부르는 소리는 귓전을 따라 끊임없이 출렁이며 생각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 부름의 대상은 현실에 정말 존재하고 있기는 있는 것일까? 어느 순간 커다랗게 뚫려있는 구멍.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이질성을 경험하게 하는 그 구멍을 통해 생생하고 지루하던 현실세계가 비현실적이고 일탈적인 세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이고도 생생한 세계의 제시는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져 내리는지 그 허무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닌지…… 그 세계로 흘러드는 것은 독자 마음대로, 그 세계의 무한한 펼침 또한 독자 마음대로 상상하도록 제목부터 ‘해가 지면’으로 설정해 둔 것은 아닌지……
내용 없는 부름으로 구멍 뚫린 밤을 수없이 보낸 나날들이 책상 위에 어지럽다.
검은 계단을 오르는 엘리베이터
황성규
구름 잔뜩 낀 하늘 아래 메마른 바람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린 눈동자 하나 삐걱거리고, 주머니 속에 웅크린 칼을
쥔 손가락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늘엔 모래 냄새가 가득했다.
끝없이 갈라진 길 위에서 발가락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을 긁었지만
햇빛은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태양에서는 부패한 시체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팽창한 구름이 뱉어낸 바람은 비린내를 품고 있었다.
늘어진 머리카락은 소리없이 흩날렸고, 움켜쥔 적 한 번 없는 손톱만
자라고 있었다. 상처로 얼룩진 바람은 쉬지않고 비명을 지르고 태양의
썩은 살점이 소문처럼 흩날릴 때 거리에는 시궁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야비하게 웃음짓는 바람이 뒹구는 길모퉁이에는 창백한 달이 떠올랐고
달을 잡아 쥔 손이 주머니 밖을 내달릴 때마다 목잘린 기억들이 툭, 툭
굴러 떨어졌다. 무거운 빗방울이 쏟아지고 그는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싸늘하게 내리는 빗방울이 흐르고 목졸린 달의 얼굴을 밟으며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이 쭈뼛거렸고 시간이 멈춘 틈 사이로 표정없는
얼굴을 돌려 쳐다본 곳에는 피에 젖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앉아 있었다.
-시와세계, 봄호
마치 드라큘라나 뱀파이어가 출현할 것 같은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끔찍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공존하며 이루는 부조화야말로 그로테스크 미학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점이야말로 그로테스크 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감정의 균열이 발생하기도 한다.
흔희 검은 색은 하강을 생각나게 한다. 하강의 이미지가 강한 검은 색을 바탕으로 시인은 ‘검은 계단’을 ‘엘리베이터’로 ‘오르’고 있다. ‘검은 계단’이 수직으로 오르는 곳은 아찔하게 높으나 진정으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오르는’ 의 상승과 ‘검은’이 상징하는 하강의 이미지는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높은 곳에서 존재하고 발생하는 태양과 구름과 바람은 온전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틀리고 왜곡된 모습으로 시를 읽는 내내 불편하게 한다. ‘태양이 썩어서 소문처럼 흩날’린다. ‘소문처럼’은 거짓과 풍문이라고 치부했던 있을 수 없는 일이 목전에 생겨버렸음을 전제하는 말이기에 도저히 썩지 말아야 할 ‘태양’에 대한 기괴한 허탈감과 배반감을 가져다준다. 이는 낯익고 든든했던 것이 갑자기 이상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소외 효과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썩지 말아야 할 ‘태양’마저 썩은 상태에서 모여들고 설치는 것은 ‘시궁쥐’들뿐이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바람마저 상처로 괴로워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눈부신 태양이 빛나할 자리에는 ‘피에 젖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현실에 대해 절망적이고 비관적이며 불안과 공포로 신음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하던 이미지들이 전복되고 파괴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고정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기이하고 끔찍한 모습에 잠시 당혹스러움을 느끼다가 곧이어 그 기괴한 모습을 현실은유의 기호로 환치해 보면 어느새 머리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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