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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찬론
-서라벌(徐羅伐), 마침내 자신을 찾은 구도의 길
김우연
1. 천 년을 울릴 에밀레종
서석찬의 첫 시조집인『서라벌』(2018)은 모두 250편으로, ‘서라벌’의 연작시조집이다. 30여 년간 끊임없이 서라벌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조집은 한마디로 ‘서라벌 역사박물관’이다. 시의 소재는 절, 석탑, 석불, 스님, 유적지, 유물, 왕릉, 신라의 풍속, 신라 인물, 향가, 전설, 경치, 조상 및 자신의 삶, 기타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중에서 절, 석탑, 석불, 스님과 불교와 관련 내용이 98편으로 약 40%이며, 유적지(왕릉 포함)와 유물 52편으로 21% 인물은 41편으로 16%이다. 시간적으로는 청동기 시대부터 현대 인물에까지 걸쳐 있으나 주로 신라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백수 선생은 “경주에 가면 시가 걸음걸음 밟힌다.”고 말씀하셨지만, 경주에 산다고 다 시를 밟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소재가 그 자체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소재는 흔히 설명, 교훈, 찬탄, 기행시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으나 시적 성취를 이루기는 어렵다. 모든 역사는 그 당시로서는 현대였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소재가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녹아서 자신의 새로운 눈으로 보거나 자신의 삶이 무르익어 향기를 풍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서라벌』은 시인의 새로운 눈과 삶이 반영되어 ‘서라벌’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현대시조단에서도 크게 주목할 작품집이라 할 것이다.
서석찬 시인은 1979년에 창립한 맥시조(당시 비화문학회)의 창립회원이다. 그 동안 작품들은 ‘서라벌’과 ‘꽃과 사랑’이라는 두 줄기로 흐르는 강물이었다. 그래서 ‘꽃과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은 별도로 출간하기로 하고 있다고 한다. 서석찬 시인이 그토록 끊임없이 서라벌을 노래한 원동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서라벌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앞으로도 살아갈 시인은 30여 년 전에 연작시「서라벌」서시「문열 열면서」에서 “외롭거나 아니면 잊히는 것의 두려움”, “혹시나 천 년을 울릴/ 에밀레종 소리가 될지”라며 서라벌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데 이것이 시를 쓰게 된 첫 번째 원동력으로 보인다. 뿌리를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시조집을 펼쳐드니 에밀레종의 소리가 들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리는 세상의 고통을 잠재우는 범종소리가 될 것이다.
2. 구도자(求道者)의 길
파란 머리 하늘빛 허주 스님 그립다
쿵후의 고수이며 화교이신 그 분은
출가를 여쭙는 내게 제자리에 살라셨다
부모와의 인연 끊는 그 죄가 첫 번째요
두 번째 더한 죄는 이루지 못하는 도(道)
마지막 가장 큰 죄는 널리 도를 못 펼침이라
내 머리에 부어주신 가르침 큰 물줄기
적시며 또 적시며 처자식을 거느린 나
오늘도 눈을 감으면 온 혈관을 흐르는 피
오십의 하늘빛이 푸르지만 않은 것은
그래도 못다 닦은 말씀의 씨앗들이
제대로 움트지 못해 마음 밭을 헤집은 탓
새벽녘 이슬 되고 뜨는 해 빛이 되어
붉게 탄 단청 사이 한 자락 바람 되어
날마다 불국사 뒷담 그 스님을 그려본다.
-「徐羅伐2 198-불국사 회상」전문
어디로 가야 하나 질풍노도 이십 대
갈등의 마음 앞에 등대 같이 귀한 말씀
깊숙이 마음에 새겨 노를 저어 건너왔네
버림으로 얻으라신 비움으로 채우라신
한 마디 한 마디가 뼈가 되고 살이 되어
그리움 까맣게 타서 앙금 되어 남은 말씀
잘 못 끊은 인연은 모진 피 흘릴지니
마음에 때 묻은 칼로 자르지 말라 하신
수 십 년 등불이 되어 마음의 불 밝혀왔네
-「徐羅伐 221-빈 배는 떠나가도」전문
서석찬 시인에게 평생의 등대요 나침반은 불국사 허주 스님으로 받은 가르침과 화두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멸망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6.25)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대유학자 집안의 주손(冑孫)으로서 어깨도 무거웠으며, 선친께서는 독립운동가이며 유학자인 김창수 선생을 모시기도 한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남보다 꿈과 갈등도 컸으리라 본다. 그리하여 인생의 큰 의문을 풀기 위해서 불국사에 가서 출가의 포부를 밝혔는데 스승 허주 스님께서는 더 넓고 밝은 눈으로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살아가는데 혜안(慧眼)이 되는 가르침과 함께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의 화두(話頭)를 주신 것이다. 자상한 허주 스님의 가르침은 “수 십 년 등불이 되어 마음의 불 밝혀왔네”라고 고백하고 있다. “내 머리에 부어주신 가르침 큰 물줄기/ 적시며 또 적시며 처자식을 거느린 나/ 오늘도 눈을 감으면 온 혈관을 흐르는 피”라며 그의 가르침은 평생 동안 ‘혈관을 흐르는 피’라고 비유하였다. 원래 석가 당시의 가르침은 출가 여부를 막론하고 가르침을 펴시었다. 세월이 흘러 현재에는 출가승 위주의 승단이 되었지만 진정한 깨달음과 정진은 승속이 따로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석찬 시인은 속가에 있으면서도 불가의 수행을 끊임없이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승속(僧俗) 불이(不二)의 실천을 속에서도 그 끝이 없기에 “오십의 하늘빛이 푸르지만 않은 것은/ 그래도 못다 닦은 말씀의 씨앗들이/ 제대로 움트지 못해 마음 밭을 헤집은 탓”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늘빛이 푸르지만 않은 것”은 선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禪家龜鑑) 첫머리에서 “고불미생전(古不未生前)에 응연(凝然) 일상원(一相圓)이라”(옛 부처도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라고 한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한(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자리를 언젠가는 찾겠다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불국사 뒷담 그 스님을 그려본다.”라며 자신의 스승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자리를 맑히겠다는 표현이요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꿈을 밝힌 것이다.
이처럼 서석찬 시인의 시들은 이번 첫 시조집『서라벌(徐羅伐)』의 소재가 불교가 관련된 것이 약 40%인 것은 단순히 역사의 유물이거나 문화유산이어서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화두를 놓지 않고 있음을「석굴암」에서도 나타난다.
머리는 어지러이 고요를 넘다들고
칼자욱 말(言)자욱에 열리며 닫힌 시간
부스스 눈뜨는 얼굴 설움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뉘 불러서 동행의 기쁨 누릴까
갈기갈기 헝컬린 혼자락 추스릴까
토함산 무거운 그늘 툭툭 털고 일어날까
솔바람 바닷내음 생각의 눈을 뜨니
불현듯 생각나는 내 화두(話頭)의 대답 같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徐羅伐 33-석굴암(石窟庵)」전문
시인에게는 허주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은 ‘불국사’가 그의 불교 사상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불국사와 관련된 첫 작품에서도 스승의 화두를 품고 깨달음을 얻어 불국토에 가겠다는 것을 “청운교 백운교의 불국토 긴 긴 강을/ 흔적 없는 마음에 침묵의 노를 저어/ 건넌다 홀로 건넌다 주인 없는 배를 저어”(「서라벌 40-비 오는 불국사」에서)라고 노래하고 있다. 결국 시인에게 불교란 인생의 등대를 밝히는 지혜를 얻는 길이요, 그 가르침을 주신 허주 스님을 평생 동안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서라벌』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시조를 쓴다는 것은 구도(求道)의 길임을 알 수 있다. 정진(精進)이 끝이 없기에 노래 또한 끝이 없을 것이다.
3. 시인(詩人)의 길
서 시인은 사춘기에 방황하던 마음은 경주의 목월 선생님의 시를 통하여 평온을 되찾게 된다. 일찍 시에 대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시인이란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남다른 시선과 생각들을 묘사와 진술로 적절히 표현할 때 뛰어난 시적 형상화가 이루어진다. 이번 시집의 여러 작품에서 이와 같은 특징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시조란 서정 갈래요 서정시의 본령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연하게 감물이 든 한복을 걸친 총각
터벅터벅 더딘 걸음 걷다가 쉬는 모습
스치는 한 점 바람도 감히 범치 못할 고요
발그레 귓불까지 수줍은 시골처녀
살포시 치맛자락 날릴 듯 말듯하며
설익은 산골처녀의 젖가슴이 뵐 듯 말 듯
-「徐羅伐 158-장항사지 5층 석탑」전문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의 장항사지에는 동서에 각각 석탑이 있다. 장항사지의 서쪽 5층 석탑은 국보 제239호이다. 서탑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웅장하며 동탑은 지붕돌만 낮게 쌓아두고 있다. 원형이 파괴된 모습이다. 장항사지는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뒤쪽이며 토함산에서 넘어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장항사지는 7세기 후반 신라문화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으며 소불 정양호 선생이 경주에서 가장 잘 음미해야 한다는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 수는 서탑을 초장에서 “연하게 감물이 든 한복을 걸친 총각”이라고 묘사하였으며 천 년을 이어오는 우리 전통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중장에서는 ‘터벅터벅 더딘 걸음’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를 연상케 한다. 종장에서는 “스치는 한 점 바람도 감히 범치 못할 고요”라며 도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이미 승속의 구별을 넘어선 선(禪)의 경지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주변에 흔한 남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둘째 수는 장항사의 동탑을 “수줍은 시골처녀”라며 전체적으로 묘사를 통하여 탑의 아름다움과 관능적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다.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사실 동탑은 서탑에 비하여 볼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동서탑을 연인으로 상상이 되면서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설익은 산골처녀’가 된다. “젖가슴이 뵐 듯 말 듯”이라며 관능미와 상상력이 고도로 비약되면서 이 작품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장항사지 동서탑을 처녀와 총각으로 표현한 것이 낯설게 하기의 표현이며 시인의 개성적인 눈에서 시적 형상화를 이룬 것이다. 특히 관능적인 표현은 다음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어 서석찬 시인의 개성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호흡이 꽉 멈춘다 심장이 멈추면서
살짝 숙인 이마에 향기가 피어나는
감은 눈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나를 본다.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낮게 선 콧잔등과 투박한 입술 사이
합장한 미소가 번져 부처 되는 나의 육신
참아내기 힘든 건 말 없는 유혹이다
비치는 속살마다 흔들리는 몸뚱아리
다시 또 눈을 감으며 더운 피를 잠재운다
가서 한 번 느껴보라 사랑이 무엇인지
들리지 않는 말을 눈빛에 담아보면
지금쯤 열반에 들다가 돌아오는 그를 본다
-「徐羅伐 93-남산불곡석불좌상1」전문
남산불곡석불좌상은 보물 제198호이며 경주시 인왕동 남산 동쪽에 있다. 일명 할매불상이라고 불린다. 이 불상은 큰 바위에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입가에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으며,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적인 불상을 보는 순간에 “호흡이 꽉 멈춘다 심장이 멈추면서”라며 충격을 받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합장한 미소가 번져 부처 되는 나의 육신”이라며 종교적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러나 셋째 수에서는 “참아내기 힘든 건 말 없는 유혹이다/ 비치는 속살마다 흔들리는 몸뚱아리/ 다시 또 눈을 감으며 더운 피를 잠재운다”라며 불상을 두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빠진다. 초장에서는 말 없는 유혹이란 중장에서 눈으로 보면 속살마저 다 비치는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종장에서는 눈을 감으며 더운 피를 잠재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 그 뜨거운 마음이 눈을 감는다고 식을 것인가. 결국 넷째 수에서는 “가서 한 번 느껴보라 사랑이 무엇인지”라고 외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육신을 떠난 정신적인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떠나서 그 합일되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이라도 불상 앞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연상한다면 불경스럽게 여겨질 것인데 하물며 불자로서 얼마나 외람되며 돌발적이고 도전적인 생각들인가? 그러나 서석찬 시인의 장점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장점이다. “지금쯤 열반에 들다가 돌아오는 그를 본다”며 진정한 사랑은 열반 그 자체라고 승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탐구하고 사랑을 추구해온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출가자들이 가장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 성(性)의 문제이다. 시인 또한 저 열반의 경지에 들면서 세속적 애욕을 다 끊어버려야 하는 고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애욕이 그대로 열반의 세계임을 확신했기에 부처도 열반에 들다가 돌아온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갑옷과 투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억새가 일어선다
붉은 피를 흘린다
은장도 끝에 매달린
여인의 정절과 같이
하늘에 그려지는 전투기의 꼬리 같은
임신한 억새들의
새 하얀 그 출산들
하늘로 승천하는 꽃
꼬리가 흰 수정란들
-「徐羅伐 247-무장사지 억새꽃」전문
이 작품은 서정시의 본령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장사지에서 억새꽃을 바라보고 있다. 불교의 성지에서 불교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억새꽃을 노래하고 있다.「서라벌」의 250편의 마무리 단계에 와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불교와 불교 아닌 것의 구별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불법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시는 말하기가 아니고 보여주기라고 한다. 설명이 아니라 묘사를 동원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작품의 첫째 수에서는 가을에 태풍이나 센 바람에 서걱거리는 억새들이 꺾이고 일어서는 것을 옛 무사들이 백병전을 연상케 한다. 둘째 수에서는 하얀 씨앗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하늘에 그려지는 전투기 꼬리 같은”이라고 표현한 것도 독특한 발상이다. ‘갑옷’, ‘투구’, ‘전투기’ 이런 용어들을 사용하면서도 내용을 살펴보면 “하늘로 승천하는 꽃/ 꼬리가 흰 수정란들”이라면서 생명의 신비를 아름답게 독창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서정시의 진수를 찾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시인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다음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석굴암 가는 길목 토함산 타는 사랑
애절한 몸부림에 하늘은 배가 불러
붉은 피 토해내면서 순산하는 가을 단풍
「徐羅伐 73-가을 석굴암 가는 길」부분
세 수의 연시조 중에서 둘째 수이다. 시조란 압축, 절제미가 돋보여야 하는데 단시조가 시조의 본령이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단시조로 처리해도 무난한 작품이라 본다. 토함산의 단풍을 사랑으로 표현한 것은 개성적인 표현이며 절창이라 할 것이다. 시인의 시 중에는 사랑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작품이다. 토함산 단풍을 보면서 가슴이 크게 설레고 그 감동 또한 매우 컸으리라 짐작이 간다. “애절한 몸부림에 하늘은 배가 불러”라는 표현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관능미와 사랑을 순수 그 자체로 보는 시인의 순수한 고운 심성이 바탕이 되어 이런 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주 보문호의 벚꽃을 보면서도 청춘 남녀의 사랑을 연상케 한다.
눈이 온다 하얗게 송이송이 떨어진다
보문호 둘레길에 흩날리는 눈송이
청춘의 이야기 같이 남기는 봄발자국
흐드러진 꽃잎들 어디 갔나 하였더니
달빛으로 떨어졌다 지난 밤 내린 비에
비 그친 오늘 밤에는 하늘로가 달빛이다
-「徐羅伐 147-보문 밤 벚꽃」전문
넘치는 사랑 앞에 부족함이 없지만
봄비는 참을성 없이 잰걸음을 걷는다
이 밤도 벚꽃은 진다 비명 없이 떨어진다
물살에 떠내려가 헤엄치는 꽃잎 하나
이미 온 달빛에게 빼앗긴 입술흔적
호수는 잔잔한 물결 마음에는 거친 파도
-「徐羅伐 225-벚꽃 피는 보문호」전문
<147>, <225> 두 편 다 보문호 벚꽃을 소재로 하면서 모두 청춘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실 봄의 경주 보문호 벚꽃을 보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큰 호수와 벚꽃과 현대 문명의 찬란한 불빛과 호수의 환성적인 만남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출렁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을 관념적인 시로 표현한다면 좋은 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감정만 토로한다면 역시 좋은 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자제하고 묘사와 진술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서정시의 진수를 보인 것이다. 절창이다.
<147>은 환상적인 연가이다. 벚꽃을 노래하면서 이토록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노래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첫째 수 초장과 중장에서는 벚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눈송이에 비유하였다. 종장에서는 비약하여 ‘청춘의 이야기 같은 봄발자국’이라고 표현한 것이 독특한 표현이다. 둘째 수에서는 간밤의 비로 인하여 떨어진 꽃잎을 ‘달빛’이라고 하였다.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랴. 그러나 그 아픔을 달빛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놀랍다. 그리하여 비가 와서 벚꽂잎은 졌지만 맑은 달밤의 그 환상적인 달빛이 보문호에 비치고 연인과 함께 있는 밤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비 그친 오늘 밤에는 하늘로가 달빛이다”이라며 벚꽃잎이 달빛이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이며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자아는 달빛과 하나가 되어 자신마저 잊게 되는 환상의 세계 그 자체가 되고 있다.
<225> 작품도 역시 벚꽃잎이 지는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둘째 수에서는 시적 자아는 “물살에 떠내려가 헤엄치는 꽃잎 하나”라며 아주 작은 벚꽃잎 하나에 주목한다. 중장에서 “이미 온 달빛에게 빼앗긴 입술흔적”이라는 낯설게 표현하기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주 작은 벚꽃잎 하나를 첫사랑의 입맞춤으로 상상하게 한다. 달빛은 남성으로 표현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종장에서는 “호수는 잔잔한 물결 마음에는 거친 파도”라며 벚꽃잎과 호수가 동격이다. 그래서 달빛에게 마음을 빼앗긴 입술 때문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마음은 거친 파도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 개인에게는 온 우주가 출렁이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사랑이란 이처럼 엄청난 기운으로 온 세상을 출렁이게 하는 힘이 있음을 파악하고 있는 시인의 예리한 눈과 사랑에 대한 사상이 집약되어 나타난 절창이며 서석찬 시인의 개성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흔히 벚꽃을 바라보는 평범한 감정 노출이나 허무적인 관념을 넘어서서 구체적이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통해서 시적 성취를 높게 이루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양남 주상절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아득히 멀고 먼 날 뜨거운 심장의 피
지축을 뚫고 솟구치며 바다에 홀로 빠지다
한 송이 굵은 돌 꽃을
부채로 활짝 펼치다
하얀 파도에 새까만 입맞춤을 하면서
두 팔을 활짝 벌려 온 몸을 드러내다
마침내 세상을 보다
주상절리 자유를 찾다
-「徐羅伐 212-양남 주상절리1」전문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에 소재한 주상절리는 2012년 9월 25일에 천년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주상절리군(柱狀節理群)은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 시는 매우 시적 형상화와 시인의 개성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활짝 펼친 부채 모양의 양남 주상절리(柱狀節理)를 한 개인이 사랑을 완성한 것에 비유하였다. 작품의 구성도 탄탄하며 개성인 표현도 돋보여 현대시조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서석찬 시인은 이 한 작품만으로도 한국문단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긴 것이다. 시인 자체가 추구해온 현대시조의 과제를 이 작품으로 완성하게 된 것이다. 맥시조(비화)문학회의 시작으로 40년을 써온 결과 <212>같은 시조의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작품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 수에서는 초장에서 마그마에 아직 땅 속 깊이 있지만 ‘뜨거운 심장의 피’라며 모든 생명체의 ‘무명(無明)’의 원초적인 힘에 비유하고 있다. 중장에서는 드디어 화산을 일으키며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때가 되면 사랑을 느끼고 짝을 찾고 생명을 이어가는 뭇 생명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우리 인간은 사춘기 되면서 마음이 출렁거리게 되고 사랑할 존재를 찾게 된다. 그것은 용암이 바다에 빠지듯이 그 사랑에 빠져들게 됨을 상징하고 있다. 연못도 호수도 강물도 아닌 바다라는 것은 끝없이 넓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닌가. 사랑은 목숨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모든 예술과 문학의 주제가 사랑으로써 지금껏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인생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종장에서는 “한 송이 굵은 돌 꽃을/ 부채로 활짝 펼치다”라며 무생물인 돌이 한 송이 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났으며 그것은 신비롭게 부채처럼 펼치고 있다고 하였다. 끝없이 평화로운 파도만 끊임없이 그 눈부신 완성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 초장에서는 “하얀 파도에 새까만 입맞춤을 하면서”라며 사랑의 노래가 계속되고 있다. 중장에서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온 몸을 드러내다”라며 완성된 사랑은 더욱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찬란한 사랑을 온몸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것으로 사랑 그 자체는 이 지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세상과 우주는 사랑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다는 것은 시인의 가슴에 사랑이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종장에서는 시적 화자가 직접 “마침내 세상을 보다/ 주상절리 자유를 찾다”라고 독백을 하게 된다. 화자는 겉으로는 관찰자이다. 그러나 주상절리(柱狀節理) 그 자체가 시의 화자와 일치되고 있으며, 화자 역시 시인과 일치하고 있다. 서석찬 시인을 ‘사랑의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모든 작품의 바탕에는 사랑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런 생각들이 이 작품에 와서 꽃을 활짝 피우게 된 것이다. 이 절창에 크게 박수를 보낸다. 또한 시란 함축성이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은 역시 화두(話頭)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자의 구도 과정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첫째 수에서는 무명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둘째 수에서는 작은 깨달음 이후에도 끊임없는 정진을 통하여 큰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자유’를 얻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감상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는 화자가 ‘대자유인’이 되었다기 보다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대자유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친 비약적인 해석보다는 ‘사랑’이라는 전자의 해석이 좀 더 타당할 것이라 본다.
어쨌든 자유시로 출발하여 시조로 꽃피운 서석찬 시인은 이제 일기마저도 시조로 쓴다고 한다. 정형시인 시조가 형식으로 인하여 구속받는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참 시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이 다른 허황된 욕심이나 명예욕을 버렸기 때문에 얻은 길이리라 본다. 다음에 살펴볼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서라벌(徐羅伐)’은 시인에게 하나의 이상향임을 알 수 있다.
5. 불국토(佛國土)인 서라벌
낭산 남쪽 봉우리 도리천이 있었네
아무도 몰라보는 부처님의 우주를
죽어서 신라를 위해 꾸며 놓은 수미산
스스로 몸을 묻어 육신공양 이루고
때 기다려 예측한 문무왕 사천왕사
하늘 땅 아우르면서 꾸며 놓은 선덕여왕
-「徐羅伐 97-낭산을 보다」전문
낭산은 경주시 보문동,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걸쳐진 산으로 높이 108m의 낮은 산인데 남북으로 누에고치처럼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낭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하게 겼다고 한다. 이곳 남쪽 산자락에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 터가 있다. 또한 이 낭산 기슭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 선생이 살았으며, 최치원 선생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이밖에도 절터와 석탑, 마애불들의 중요한 유물들이 있는 곳이다.
시인은 시의 주석에서 “도리천(忉利天)은 불교에서는 우주관이 수미산 아래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 사천왕이 지키는 문이 있다. 선덕여왕이 생전에 유언으로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고 신하들이 몰라서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 봉우리라 했다. 선덕여왕이 죽은 뒤 10년 뒤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선덕여왕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으니 후세 사람들이 선덕여왕의 지략에 감복했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 여기 산 입구에 누에고치를 가공하는 공장이 들어서니 이것 또한 기가 막히게 연결되는 신기한 이야기라 여겼다.”라고 하였다.
<97>은 선덕여왕의 예지력에 감복했다는 내용의 시이다. 그런데 사천왕사에 주목하면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웅장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있어 시의 상상력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서라벌(徐羅伐)의 어원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불교를 국교로 한 신라는 서라벌이 지상의 극락 세계를 이루고자 하였음을 볼 때 ‘금강경’ 첫머리에 나오는 ‘사위국’을 뜻한다고 보인다. 불교의 명칭을 따 온 것은 통도사 뒷산인 영취산과 금강산, 큰 산 봉우리가 비로봉으로 된 것 등 수없이 많다. 결국 ‘서라벌’은 석가 당시에 가장 강대국인 코살라왕국의 수도인 서라벌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인도에서 불교가 가장 성행하였고 석가 역시 이곳에서 교단을 형성하여 크게 활동하고 있었던 곳이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불국토 사상을 건물로서 불교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기단석은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난 돌들로 이루어 화엄의 원융회통의 조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청운교와 백운교를 건너서 불국토에 들어가는데 서석찬 시인 역시 청운교와 백운교에 주목하고 있다. 불국사 허주스님으로부터 직접 화두를 받았으니 불국사 모든 곳이 시인에게는 불국토로 가는 길이었으리라.
불국으로 가는 다리 첫발길이 열리는
이 다리 건너가면 모든 게 없어지리
하루 해 뜨고 지는 길 의미조차 발 아랫니
마음을 비워내면 세월도 같은 의미
하얗게 새는 머리 인내를 빼 닮아서
밟히는 한 발 한 발에 다가오는 불국의 문
하얗게 물안개가 법문 같이 흐르고
청운교 백운교로 폭포 같은 깨우침
지금은 물이 없어도 마음으로 듣는 폭포
-「徐羅伐 83-백운교」전문
<83>은 첫째 수에서 “이 다리 건너가면 모든 게 없어지리”라며 불국토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불국의 문에서 그 불국토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노래하였으며, 셋째 수에서는 물안개가 법문처럼 흐른다고 하였다. 법문만이 법문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이 법문 아님이 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에서 “폭포 같은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불국토를 건너가기 위한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 이러한 시인이기에 안개, 억새 등 모든 것이 깨달음을 주는 것이요 불국토를 이루는 것임을 노래하였으리라. 결국 고통뿐이란 사바세계가 깨닫고 보면 불국토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 같다. 그리하여 「徐羅伐 56-만파식적(萬波息笛)」에서는 “만백성의 고통소리를 잠재우는 피리소리”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徐羅伐 76-금관보기 2」에서는 “백성의 고달픈 이가 누우렇게 한 점 한 점”이라고 백성들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徐羅伐 77-금관보기 3」에서는 이러한 고통의 세계를 끊기 위해서 자신이 당시의 왕이라면 이러한 윤회의 고통의 세계를 끊어버리고자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약자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徐羅伐 92-지증왕」이 있다. 개국 이후 다양하게 불리는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한 왕으로 순장 제도를 없애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다.
이 밖에도「徐羅伐 222-용담정」을 노래하였는데, 시인의 생가 가까이에 동학의 발상지이자 천도교의 성지인 최제우 선생의 생가와 그가 공부하여 득도한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용담정은 무지개산으로 불리고 있는 구미산 중턱에 있다. 또한 「간묘」는 경북 기념물 제31호로 경주시 황성동에 있으며 신라충신 김후직의 묘이다. “굶주린 백성들의 흘리는 눈물들을/ 사냥터의 화살로 허공으로 날리는/ 진평왕 어리석음에 홀로 맞선 김후직// 하나뿐인 목숨을 감히 걸고 간하고/ 사냥터 가는 길에 자신을 묻어달라/ 임금님 발걸음마다 돌이 되어 채이도록”(「徐羅伐 101-간묘」전문)이라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목숨을 걸고 간하는 김후직을 예찬하며 그 정신을 따르고자 하고 있다. 오늘날의 위정자들을 바라볼 때 자신을 위한 권력인지 국민들을 위한 권력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약자에 대한 사랑과 불교의 자비심은 불교, 천도교, 유교 등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의식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분단에도 시선을 돌리게 된다.
가만히 눈 감으면 무열왕의 가피로
남북통일 그날이 눈 앞에 다가 온다
철조망 걷히는 소리가 귓전 가득 울리는 듯
-「徐羅伐 194-무열왕(武烈王)」5수 중 마지막 수
시인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간절하며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 남과 북의 오랜 불신이 신뢰를 향한 길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밖에도 향가를 시인의 눈으로 다시 해석하였으며 신라의 3기 8괴 등 다양한 곳에 시선을 돌렸으며 독창적으로 바라보았으니 지면상 다 언급하지 못함이 아쉽다.
6. 일광문(一光門)을 열다
자신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흔히 핏줄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한다. 부모만큼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자신을 찾는 것을 십우도(十牛圖)에 비유하며 마지막 단계가 입전수수(入鄽垂手,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이다. 깨달은 도인의 궁극적 경지는 세속의 중생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세속에 사는 우리들은 부모와 고향이 결국 출발점이자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일 것이다.
울 할배 깨친 흔적 한 권의 책 부족하나
솟을 대문 아니어도 칭송 받는 그 자리
가난한 선비의 정신 닫혀 있는 일광문아!
시 한 수 물려 받아 가문의 뼈대 삼고
문전옥답 맞바꾼 책 한 권 지붕 삼아
아들 딸 기둥을 삼아 열고 싶은 일광문아!
-「徐羅伐 250-일광문(一光門)」전문
문(門)이란 열기 위한 것인가? 닫기 위한 것인가?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집착할 때 문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문의 기능은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곳이다.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인은 한동안 닫혀 있었던 일광문을 다시 열고 싶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 때는 수많은 묵객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는데 자신은 주손(冑孫)으로서 그렇지 못했는데 앞으로 그 정신을 본받겠다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인에게 시(詩)는 단순히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흘러오는 문(文)의 물결과 한 몸이 되겠다는 것이다.
첫째 수 초장과 중장에서는 할아버지가 학문과 학덕으로 칭송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과거를 준비한 마지막 세대의 대유학자였다. 그러나 선비는 물질보다는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하였다.
둘째 수에서는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가문의 뼈대로 삼고자 하고 있다. 선비가 공부를 위해서 문전옥답도 책과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할아버지 정신세계가 물질보다 중요함을 확실히 깨닫고 있다. 그래서 “아들 딸 기둥을 삼아 열고 싶은 일광문아!”라고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두 자녀 역시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고 이해할 날이 있으리라 본다.
할아버지의 유고집으로 하봉잡초(下峰雜抄)가 있다. 이것은 서석찬 시인의 선친이 쓰신 발문(跋文)을 읽어보면 30 년만에 발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문집 초안을 친히 다 만들어두고서도 절대로 문집을 내지 말라는 유언들 받들기를 30년이었다고 한다.
하봉이란 호는 서석찬 시인의 생가가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의 하(下)에서 봉(峰)을 붙여서 겸양의 덕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하봉잡초에는 운문과 산문과 국가의 큰 사건까지 자세히 다방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번역본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책 분량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큰 책이다. ‘손아석찬생조(孫兒碩燦生朝)’에는 손자 서석찬 시인에 대한 큰 사랑과 기대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조상들을 모신 구산서원에는 정민공(서필), 양경공(서유), 귀봉공(서일원), 모암공(서사적)의 네 분의 위패를 모셨는데, 서석찬 시인은 조선 초 명재상 양경공 서유의 주손(冑孫)이라고 한다.
햇볕으로 꺼냈다/ 할아버지 쓰신 글
장독 속에 묵혀 둔 김치 같은 원고를
잘 삭아 시큼한 향이 단숨에 넘는 시간의 벽
혓볕으로 꺼냈다/ 할아버지 하신 말
문집으로 내지 마라 유언 하신 이유를
수십 면이 지나서 알아차린 숙부께서
햇볕으로 꺼냈다/ 할아버지 쓰신 한시
국화 향 가득한 마당 대대손손 이어지길
낮아도 높은 봉우리 더불어서 살라는 말씀
-「徐羅伐 228 –하봉잡초를 보고」전문
하봉잡초(下峰雜抄)를 펴낸 사연을 말하면서 할아버지가 남기신 한시(漢詩)들은 국화 향기 가득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물질보다는 정신세계를 중요시한 할아버지의 정신에 시인은 공감하고 동화하게 된다. 이렇게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서는 “낮아도 높은 봉우리 더불어서 살라는 말씀”처럼 호가 하봉(下峰)이지만 높은 봉우리와 어울릴 때 조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대유학자가 스스로 하봉(下峰)이라 낮추었으니 모두가 겸손하라는 채찍질일 것이다. 오늘날 겸손이 없이 권력을 휘두르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느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겸손을 강조하는 하봉(下峰) 선생의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래 못 보아 희미해진 아버지
거울을 마주 하니 선명한 윤곽들이
어느 새 마주한 얼굴 나는 그의 데깔코마니
육 십을 건너면서 길을 잃은 욕심들
그리운 마음 담아 떠올리는 자식들이
세월은 다시 제자리 나는 손에 무얼 쥘까
-「徐羅伐 236 -思父曲」부분
할머니의 유언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디어 거두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육 십을 건너면서 길을 잃은 욕심들”이라는 말을 볼 때, 인생을 달관한 나이가 되었기도 하며, 불자로서의 정진과 함께 할머니의 유언ᅌᅵ 계기가 되어 원망을 걷게 되었다고 본다. 아울러 듬직한 아들과 딸이 일광문의 양 기둥이 되어줄 것이라 볼 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또 새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새 마주한 얼굴 나는 그의 데깔꼬마니”라며 아버지와 자신이 닮았음을 조용하게 토로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무엇을 자식들에게 쥐어줄 것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 새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을 통하여 예부터 흘러오는 큰 강물의 줄기와 합류하게 된다. 그것은 물질추구의 욕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길이며 선비의 길이기도 하며 구도자의 길이기도 하다.
허리가 구부러진 노송에게 물었다
긴 세월 전설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말없이 대답 대신에 몸을 더욱 낮추었네
-「徐羅伐 211 –고위산을 오르다」부분
이 작품 역시 전설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말없이 대답 대신에 몸을 더욱 낮추었네”라며 겸손하라는 하봉 선생의 정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7. 나오며
이상으로 서석찬 시인의『서라벌(徐羅伐)』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연작시조 250편은 다양한 소재로 박물관을 연상케 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불교에 귀의하려는 뜻을 한 때 품었는데 스님의 가르침과 화두를 평생 등대로 삼아서 승속불이의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시인으로서 남다른 시선과 표현으로 순서서정시에서 현대시조의 절창들을 노래하였다. 시적 성취가 가장 크게 나타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구도의 길은 서라벌은 하나의 불국토이며 그것은 현실에서도 나타나며 결국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불법이 아님이 없는 경지를 노래하였다. 넷째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조부이신 하봉(下峰)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와 닮은 자신에게서 그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그리하여 두 자녀는 일광문의 든든한 두 기둥이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30여년 간 노래한 것은 한마디로 구도의 길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었다. 그것은 시조(時調)를 통하여 모든 것이 융합되고 있다. 그리하여 일광문(一光門)의 맑고 높은 정신과 숨결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래서 눈에 잘 뜨이지 않은 작은 꽃에도 깊은 눈길을 보내며 큰 의미를 담담하게 노래하게 된다.
알칼진 바람에도 볕이 드는 자갈 밭
무릎 꿇는 나에게 건네지는 향기는
은은한 변산바람꽃 긴 겨울의 메시지
기다려라 언제나 조급해 하지 말고
때가 되면 다시 와 꽃 피우고 새 울겠지
우리는 그저 왔다가 돌아가면 되는 것을
-「徐羅伐 226 –시부거리에서」전문
“우리는 그저 왔다가 돌아가면 되는 것을”이라면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가슴에서 울리는 에밀레종 소리일 것이며 독자들도 시집을 펼쳐들면 자신을 돌아보면서 은은히 끊임없이 들리는 에밀레종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연작시조집『徐羅伐』의 높은 시적 성취에 크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도 꽃과 사랑을 주제로 한 시집 곧 발간을 한다니 기대를 한다. 또한 ‘서라벌’의 노래뿐만 아니라 더욱 다양하게 시선을 돌려서 자유롭게 노래하며 하늘을 훨훨 나는 새가 되기 바란다.
첫댓글 서석찬님의 삶이 더 궁금해집니다. 승속을 하나로 여겨 도를 닦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신 모습을 말입니다. 표리가 다른 세상사람들이 헌신짝버리듯 하는 서라벌의 보물들을 갈고 닦아 빛나는 언어의 샘에 넘치게 담아놓으셨네요. 두고 두고 읽어봐야할 글들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