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조의 독자이다
신형건 시인
1.
나는 독자이다. 시조의 독자이다. 시조 읽기를 좋아하고 때때로 좋은 시조를 읽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시조가 눈에 띄면 그냥 지 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열혈 독자는 결코 아니다. 시조를 애써 찾아 읽지는 않는다. 어쩌다 좋은 시조 한 편을 만나면 꼭 그 시인을 기억 하려 하고 언젠가 시조집을 구해 읽으리라 기약하지만 실행에 옮긴 경우는 많지 않다.
요즘 내가 시조를 접하는 통로는 주로 시인들이 보내 준 개인 시조집이나 구독하는 일간지이다. 한때 시조가 비중있게 실리는 문예 지를 구독한 적 있으나 아쉽게도 종간되고 말았다. 일간지엔 매주 한 편씩 발췌된 시조와 해설을, 매월 서너 편씩 신작 시조를 읽을 수 있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수십 편이 모아진 개인 시조집은 왠지 끝까지 읽어 내기가 좀 버겁다.
나는 당대의 시인들이 창작한 시조를 읽을 때마다 자주 경탄한다. 미학적인 탁월함과 다양한 변주와 과감한 파격이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호하는 작품은 옛시조가 많고, 현대시조 중에선 좀 더 소박한 작품들이다. 대개는 율격을 잘 갖춘 단시조 인데, 호흡하듯 편안히 읽고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나면 오롯한 그림 한 장이나 말씀 한 구절처럼 남는 시조들이다.
일간지에서 매월 개최하는 백일장을 살펴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 다. 첫자리에 뽑히는 시조는 역시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연시조이다. 천의무봉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그 아래쪽으로 자꾸 눈길이 쏠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세 번째 자리에 오른 단시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좀 어눌해 보이지만 막 연못에 떠오른 물방개처럼 단박에 내 마음에 들어앉는다.
2.
나는 편집자이다. 시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하는 편집자이다.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지만 아직도 기획 편집 실무를 일부 겸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출판사에선 시조집을 대여섯 권 펴냈다. 옛시조 선집 1 권, 동시조집 3권, 동시조가 다수 수록된 동시집 2권을 펴냈으니 아 주 미미한 종수이다. 문학적 관심을 반영하자면 좀 더 많은 작품집을 내야 하지만, 책 판매를 통한 독자 확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얼마 전, 번역 출간할 외서 자료를 살피다가 흥미로운 책을 발견 했다. 재미교포 2세 작가인 린다 수 박(Linda Sue Park)의 최신작 『The One Thing You'd Save』(Clarion Books, 2021)였는데,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이 이채로웠다. “만일 집에 불이 났다면, 최우선으로 무엇을 구할까?”라는 질문에 중학교 한 반 아이들이 토론을 벌이는 이야기인데, 아이들 목소리를 연시조 형식에 실어 표현하고 있었다. 와, 시조로 쓴 소설이라니!
일찍이 『사금파리 한 조각』(서울문화사, 2002)으로 미국 최고의 아동 청소년문학상인 ‘뉴베리 상’을 수상한 린다 수 박은 영어 동시조집 『Tap Dancing on the Roof : Sijo(Poems)』(Clarion Books, 2007)를 출 간한 바 있는데, 『지붕 위의 탭댄스』(정인출판사, 2016)로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작가는 이번에 책을 내면서 “시조는 정말 재미있는 형식이고, 더 잘 알려져야 마땅해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시조의 세계화라는 측면에서 그녀의 시도에 정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3.
나는 시인이다. 동시를 주로 쓰지만 때때로 시조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수년 전, 현대시만을 주로 써 온 시인이 등단 50주년 기 념으로 펴낸 두 번째 시조집을 읽은 적이 있다. 개인적인 소감을 밝히자면, 그 시인이 평생 써 온 현대시들보다 더 좋았다. 나도 시인으 로서 버킷 리스트 중 하나로 오래 간직해 온 것이 평생 소박한 시조집 한 권을 내는 것인데, 이 원로 시인과 재미 교포 2세 작가가 나를 한껏 자극해 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조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독자이다. 때때로 좋은 시조를 만나기를 기대하는 독자이다.
1984년 새벗문학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대한민국문학상, 서덕출문학상, 윤석중 문학상 등을 수상. 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 『바퀴 달린 모자』, 『콜라 마시는 북극 곰』, 『여행』, 『아! 깜짝 놀라는 소리』, 시선집 『모두모두 꽃이야』, 『별에서 별까지』
첫댓글 나는 시조를 쓰는 사람이고,
또한 시조를 읽기 좋아하는 독자이기도 하다.
어쩌다가 좋은 시조를 만나면 그 작가를 만나고 싶고
작품에 매료되어 한 가슴 가득 설렘으로 차오른다.
그 어디서 한 번 만난적도 없지만 차 한 잔 마신 일도 없지만.
함께한 듯 공유한 마음으로 만나는 활자 속의그 만남이 참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