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장이 또 사고를 쳤다. 어제 오후 경로당에 있는 아버지를 모시러 온 육십대 남자를 붙들고 또 싸움을 벌린 것이다. 언성이 높아지고 탁자가 넘어지고 나중에는 서로 멱살까지 잡았다고 한다. 마침 경로당에 있던 K이사와 몇몇이 말리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고 한다. K이사는 경로당에 남아 씩씩거리는 조회장을 달래서 이 술집으로 왔다. 술은 좋아하는 두 사람은 전부터 약간의 친분관계는 있었던 모양이다. 밤 12시까지 마셨다고 한다. 흥분했던 마음을 술로 달랬던 탓인지 조회장은 평소 하지 않던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고 한다. “조회장이 그렇게 변한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어. 생각을 해보게. 평생을 그 고생을 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나이 먹었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보상을 받겠어......” K이사는 조회장의 젊은 시절 이야기 끝에 이렇게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K이사는 이 아파트 동네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 제일 먼저 사귀게 된 동네 술꾼 형님이다. 나보다 연배가 열서너 살 쯤 위이다. “근데 자네는 그 모든 걸 이제사 알았나?” K이사는 소주잔을 들려다말고 딱하다는 듯이 나를 건너다보았다. 젊은 친구가 그렇게 눈치가 없냐는 그의 핀잔이 느껴졌다. 조회장은 작년에도 경로당에 J일보를 구독신청해서 넣어달라고 동대표들을 붙들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전에 이 아파트 무슨 모임의 회장을 했던 적이 있어서 동네에서는 그를 조회장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의 언행을 통해서, 그가 과거 권력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던 모기관의 고위직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경로당 TV 앞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서 J일보를 펼쳐들고 큰 소리로 늘 욕을 해대곤 했던 것이다. “저 놈들은 모두 사회 불만분자 불순세력들이야. 저런 놈들은 모두 이북으로 보내버려야 돼!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 다 누구 덕인데 저 지랄이여!” 그리고는 누구든 자기 마음에 안 들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싸움을 걸고는 했다. 이 동네에 이사 와서 경로당에 인사차 들렀다가, 그런 그를 처음 본 나는 그가 과거 권력층의 일원이었거나 재벌가족의 한사람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조회장이 이제 알고 보니 모 권력기관의 고위인사도 아니었고, 그 기관에 물건을 납품하는 조그만 업체의...... 그것도 사장도 아니고 사원이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근히 어렵게 살아왔다고 한다. 이제 조금씩 취기가 오르는지 K이사는 부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회장은 아직도 자기가 일하고 고생했던 그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냥 떠나기에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허망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평소 조회장이 보였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고 있던 나는 어쩌면 K이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사실은 경로당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던 조회장의 모습에서 어딘가 떨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무도 그에게 ‘이보게. 이제 끝났다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제 그만 가세나.’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조회장을 지척에 두고도 그가 일으키는 소란이 귀찮기만 했을 뿐, 그의 얇은 한 겹 표정 뒤에 있었던 슬픔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얼마간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자 K이사는 그 술꾼얼굴에서는 처음 보는 놀라울 만큼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조회장을 앉혀놓고 정성껏 한 잔 따라주며 말해주었지. 이제 세상이 좋아졌다네. 그러니 지금은 안심하고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네를 다시 찾아도 된다네. 그리고 남은 평생 행복하게 살게나.라고 말이야.” 말을 마친 K이사는 자기 앞에 놓인 소주잔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힘든 일을 마친 사람처럼 긴 한숨과 함께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