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한국문원편집부 편, 한국문원, 1999)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고 그곳을 죽은 이의 집(음택)으로 여겨, 후손들이 조상의 무덤을 찾아 살피도록 했다. 조상의 무덤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행사를 일컬어 ‘성묘(省墓)’라고 했으며, 주로 명절을 앞두고 후손들이 함께 무덤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행사를 치르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매장을 하지 않고, 대부분 죽은 이들을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화장제도가 자리를 잡은 만큼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성묘행사는 납골당을 찾는 일로 대체될 것이라고 하겠다.
‘왕릉 기행으로 엮은 조선왕조사’라는 부제의 이 책은 조선시대 왕들의 무덤을 답사하여, 그 위치와 특징을 살핌은 물론 생전의 업적 등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왕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왕과 왕족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 왕이나 왕비의 무덤에만 ‘릉(陵)’이라 칭했고, 다른 왕족들의 무덤에는 원(園)이나 묘(墓)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위를 상속했던 조선시대에 후손이 없어 왕족들 가운데 새로운 왕이 뽑히면, 왕이 아니었던 부친에게 왕으로서의 자격을 뒤늦게 인정하여 추존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왕과 별도로 묻힌 왕비와 추존으로 왕의 시호를 받은 이들까지 합해 모두 44개의 릉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북쪽의 영토에 있어 직접 답사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 책은 대부분 서울의 근교에 있는 왕릉들의 답사기라고 할 수 있다. 공개되어 일반인들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여전히 비공개로 운영되어 일반인에게 그 위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왕릉에는 생전의 활동에 따른 무덤의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예컨대 조선시대 1대 임금인 태조의 능에는 ‘건원릉’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서울에는 ‘릉’으로 끝나는 지명이 적지 않은데, 그곳에는 대부분 왕릉이 있어 그렇게 명명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 이러한 지명은 행정구역으로 서울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외곽에 해당하는 지역들이었다. 당시 한양은 사대문 안을 지칭하는 명칭이었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명당에 안치하여 왕족들이 쉽게 참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왕릉이 여러 개 모여있는 지역은 무덤의 개수에 따라 '동구릉'이나 '서오릉'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헌릉과 인릉이 모여 있어 이 둘을 합한 헌인릉 등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해당하는 '동구릉'에는 한양 동쪽에 9개의 왕릉이 조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서오릉' 혹은 '서삼릉' 등은 서울의 서쪽에 그 수만큼 왕릉이 함께 모셔지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머리말의 제목처럼 ‘왕릉답사의 진정한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이 책을 통해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 구도와 정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어 조선시대 역사를 개략적으로나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했기에, 왕릉을 소개하는 내용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더듬어볼 수 잇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의 무덤에 ‘릉’이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며, 그렇기에 국립묘지의 명칭도 ‘현충원’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을 모시는 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