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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은 특정 인물이 등장하고, 그의 일대기 혹은 그를 둘러싼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소설의 요소를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으로 꼽고 있는데, 그만큼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국 문단에서 이러한 전형적인 방식에서 탈피한 소설들이 등장하고, 전통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낯선 형식의 작품들이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소설 작품들의 경향은 이런 특징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 최근 지인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1980년대 이전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들과는 다른 면모가 한강의 작품을 비롯한 최근 소설가들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생각 역시 기존의 방식에 익숙한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최근의 경향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성립할 수 있다. 나 역시 한강의 소설들을 읽기 전까지는 전통적인 소설의 관점에 입각한 작품들에서 더 친밀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최근의 작품들을 즐겨 읽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어 읽을 때마다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죽음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특히 죽은 자와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한강 소설의 주요한 특징으로 이해된다. 작품 속의 대화는 결국 산 자가 이끌어가고, 그 인물의 주관적 생각이 짙게 반영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도에 때로는 역사가 포함되고, 페미니즘과 같은 특정의 이념 혹은 등장인물이 겪은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관 관계가 등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초반에는 모호했던 주제가 작품이 진행되면서 뚜렷한 초점으로 모아지는 방식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산 자를 중심으로 죽은 자의 말이 과거의 경험이나 인물의 상상력이 덧붙여져 서사의 흐름을 단단하게 만들어간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어린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의 갈등으로 인해 한때 소원하게 지냈고,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이정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우연히 마주친 미술잡지에서 친구였던 서인주에 관한 글을 확인하고, 해당 글을 쓴 인물인 강석원을 찾아 친구의 생전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탐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정희와 서인주의 과거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상황들이 기억이나 상상력의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종이와 먹을 이용한 그림, 서인주의 죽음과 미시령, 서인주에 대한 강석원의 집착, 그리고 이정희가 몰랐던 서인주의 삶 등이 차례로 채워지며 작품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채 완결되지 않은 듯 열린 구조로 종결되는 마무리가 한강 소설의 특징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강석원의 집착만큼이나 서인주가 죽은 이유를 찾아나서는 이정희의 집요한 모습이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죽은 자를 불멸의 예술가로 만들려는 집착을 보여주고, 서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찾으려는 이정희의 집요함이 맞부딪쳐 끝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결말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라고 하겠다. 더욱이 이정희는 서인주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알게된 사실들이 오히려 더 낯설게 다가온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책의 띠지에 적힌 ‘소설의 방식을 부수면서, 동시에 소설의 육체를 가지고 삶을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는 구절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관점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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