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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조선에 있어서 여러 모로 격변기에 해당하며, 정치적으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이 견고하게 유지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권을 장악한 이들의 세력이 견고하다는 사실은 역으로 당대 민중들은 가혹한 세금과 가렴주구로 고생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경제가 날로 어려워짐에도 권력자들의 주머니는 넘쳐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민중들의 어려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자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입하여 건물을 짓고 국고를 빼내 흥청망청하게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민중들의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이러한 흐름을 역사에서는 19세기를 ‘민중 봉기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급작스럽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마저도 후사가 없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실의 어른이었던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흥선군의 둘재 아들을 후계자로 정했다. 그 과정에서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군과의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고종의 즉위와 함께 흥선군은 왕의 부친에게 부여하는 대원군으로서 정치 활동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유일한 ‘살아있는 대원군’으로서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첨정을 하는 조대비의 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흥선대원군은 초기에 강력한 개혁정책을 시도하면서 적지 않은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 중건 사업에 착수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어 당대 민중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양반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각 지역에 산재한 서원의 철폐는 민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서양 세력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 취한 ‘척사쇄국’의 정책은 조선을 세계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물안개구리’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무엇보다도 고종의 치세에서 흥선대원군이 겪은 문제의 핵심은 며느리인 중전 민씨와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 불안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일각에서는 ‘명성왕후’라고 칭송하고 있지만,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돌이켜 본다면 중전 민씨와 그 일족들의 무능과 탐욕은 조선을 패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일족인 민씩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정치력을 확대하고 재산을 끌어모으기 위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중전 민씨의 일가들이 성난 군중들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일들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결국 고종의 친정과 함께 대원군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당대의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개항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이 각축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둘 사이를 오고가는 움직임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 군관에 의해 훈련을 받는 신식군대를 조직하면서, 조선의 군인들에게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않는 등의 차별이 있자 이에 반발하여 군사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후원을 받는 이른바 ‘개화파’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권력을 제대로 자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 주동자들이 살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고종의 즉위부터 갑신정변까지의 시기를 다룬 19권의 부제를 ‘쇄국의 길, 개화의 길’로 붙인 것은, 이 당시 역사의 흐름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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