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간 경주
제2편-남산 탑곡 마애불상군(塔谷 磨崖佛像群)
남산 탐곡 마매불상군(塔谷 磨崖佛像群)에 가려면, 옥룡암(玉龍庵)을 거쳐 지나야 합니다. 이 옥룡암(玉龍庵)은 안동 출생의 본명 이원록(李源錄)과 인연이 닿아 있는 암자인데. 이원록(李源錄)은 독립운동가로 3형제가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 형사들에게 쫓기다가 체포되어 첫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 때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號)를 육사(陸史)로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잊어서는 안될 독립운동가요 시인(詩人)인 이육사(李陸史) 선생님이십니다. 일제의 눈초리를 피하기 쉬운 곳이 사찰인데다, 불가(佛家)의 고승들과의 친분관계로 절집을 찾았던 것 같다. 일제 이전부터 사설암자로 존재했던 옥룡암(玉龍庵)의 하만석(河萬石) 스님으로 말하자면 백담사의 만해스님이나 청담, 성철, 경봉 스님, 벽안(碧眼) 스님 등과 함께 일찍이 금강산 마하연 강원에서 수행하셨던 도반이었으며 당시 불교계에 학덕을 떨치던 승려였다고 합니다. 이 옥룡암(玉龍庵)에는 추사 김정희도 다녀갔다고 합니다. 김생의 금석문을 찾기 위해 경주 무장사로 내려왔던 추사가, 일시 묵은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추사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일로향각(一爐香閣)"이란 현판이 지금도 걸려 있습니다. 또 새로 지은 옥룡암(玉龍庵) 종무소에는 추성각(秋聲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글의 내용이 "가을의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각설하고.....................
경주 남산은 북쪽 금오산(金鰲山)과 남쪽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오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남산이라 부릅니다. 남산은 우리나라에서 불적지(佛蹟地)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동남아 불교국가와 동북아 나라의 불교 유적(遺跡)의 차이가 많은데, 그것은 불교를 받아 드릴 때부터 생긴 문화의 차이로 여겨집니다. 동남아 불교국가는 높이나 규모의 크기가 엄청난 스투파(Stupa)가 많습니다. 반면 동북아는 그런 불교 유적(遺跡)은 없습니다. 동남아 소승불교와 동북아 대승불교의 차이로 그러리라고 객관적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경주 남산은 불국정토(佛國淨土)와 다름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저 암벽에 정으로 쪼아 새긴 작은 마애불(磨崖佛)이지만, 결코 작은 신라의 땅에서 일어난 불심(佛心)만은, 당시 어느 나라보다 엄청나게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결코 유적(遺跡)의 수량으로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스투파(Stupa)의 크기에 우리는 감탄을 합니다. 휘감은 황금에도 의심의 눈초리로 또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文化遺産)에 대해서, 자부심(自負心)이 없으며 가꾸고 보존(保存)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 팽개친 승탑(僧塔)과 석탑(石塔)이 부지기수이고, 도굴되어 찾아 회수할 길이 없습니다. 유적(遺跡)의 재료를 훼손하여 가정집 주춧돌 혹은 담장 사용 했으며, 자르고 다듬어서 필요에 따라 사용해 왔고 방치를 했습니다. 심지어 돈벌이가 되면 야밤에 차량에 실어, 골동품 수집가에게 넘겨주고, 돈 몇 푼을 받아 유흥비로 탕진하기도 했습니다. 경주 남산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들이, 돌부처님 머리만 잘라 일본으로 가져가고, 머리 없는 부처님이 지금도 남산 골짜기에는 부지기로 많습니다. 그나마 큰 바위에 마애로 새긴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어, 현재 아름다운 우리의 유물(遺物)로 남아있어, 우리의 문화유산(文化遺産) 찾는 이들에게는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탑곡 마애불상군(塔谷 磨崖佛像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군입니다. 높이 약 9m, 둘레 약 26m의 큰 바위 4면에는, 수십 구의 불보살상과 기타 조각이 새겨져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적(文化遺跡)입니다.
마애(磨崖) / 신용성
한 천년은 살았을까
눈썹도 닳아 없는
말없이 바라만 보던
긴 묵언의 시선
오늘은 마주 앉아
늙은 세월을 읽어 본다
침묵이 깊어 질수록
말없이 침몰하던 사유
내 언어의 절벽 앞에
푸른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