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종 대왕의 애민 사상(愛民思想)을 논하라.
1. 문제의 소재
세종은 태종의 3남으로서 왕위에 올라 32(1418~1450)년간 재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백성들에 대한 연만의 정이 많아서 백성을 위한 여러 가지 들을 했다. 세종의 이러한 백성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인 애민사상(愛民思想)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民本主義)와도 관련이 있다,
2. 세종의 애민 사상
가. 신권의 존중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시행한 6조직계제를 왕 18년 1436년에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제도로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합의제인 의정부에서 심의한 다음 결론을 내려 왕에게 품의하는 형식이다. 이는 전제구주제하에서 신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제도로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제도였고 오늘날 서양에서 시행하고 있는 현대의 내각책임제의 남상(濫觴)이라고 할 수 있다.
나. 한글 창제
세종은 말과 글이 일치 하지 않아 불편하고 백성들이 글을 몰라 국민교화(偃草, 언초)에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은 일상생활에 부합되는 민족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 의식과 누구나 쉽게 문자를 배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민중의식에서 한글을 창제하였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고 언어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로 평가받고 있고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이며 한글은 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이다. 이러한 한글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최만리, 김문, 정창손, 박팽년 등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왕 세종 25년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여 왕 28년 1446년에 한글을 반포(頒布)하였다.
다. 과학기구의 발명
세종은 신하들에게 다양한 과학기구를 만들게 했는데 이는 과학적인 과학적인 측면도 있지만 농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세종때에 발명돤 과학기구로서는 세종 14년 1432년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기구인 간의(簡儀)(대・소간의), 세종 15년 1433년. 이천(李蕆), 정초(鄭招), 정인지(鄭麟趾), 김빈(金鑌) 등. 천문현상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혼천의(渾天儀), 세종 15년 1433년 청동(靑銅)으로 만든 천문현상을 지상에 재현시켜 보여주는 천문시계인 혼상(渾象), 세종 19년 1437년 구리로 만든 높이 12m의 기둥형으로 정오에 태양(해)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는 장치인 규표(圭表), 세종 19년 1437년. 청동으로 만든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는 관측기(주야측후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로 이다. 혼상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둘레 3백39㎝. 세종 20년 1438년 금과 옥, 구리를 원료로 하여 제작한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는 정교한 자동시계장치)인 옥루기륜(玉漏機輪), 세종 16년 1434년 6월에 만든 표준 자동시보 장치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세종 20년 1438년.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솥(釜)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日影), 세종 23년 1441년. 가뭄과 홍수가 겹쳐 많은 피해를 당하자 조선시대에 한강의 수위를 측정하던 기구인 수표(水標), 세종 23년 1441년.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測雨器) 및 풍향관측기인 풍기대(風箕竹)등을 발명하거나 제작하였다.
라. 농업, 의학, 인쇄솔, 군사
세종은 당시 중요한 산업인 농업을 진흥하게 하기 위하여 농서도 발간했는데 세종 12년 1430년 정초(鄭招)가 한국에 맞는 농서로 편찬 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그 외에도 양성지(梁誠之) 등이 편찬하거나 번역한 농잠서, 축목서, 잠서주해, 잠서(번역판)등이 있으며 문신화가였던 강희안(姜希顔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난 화훼원예교본을 썼다.
세종은 백성들의 건강에도 관심이 많아 약재에 관한 책으로서 세종 10년 1428년 유효통(兪孝通), 노중례(盧重禮), 박윤덕(朴允德)이 향약의 채취시기를 고증하여 월별로 구분한 약재에 관한 이론서인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과 세종 15년 1433년 유호통, 노중례, 박윤덕 등이 고려 이래의 전통을 집대성한 것으로 내과, 의과, 안과 등 여러 부문으로 나누어 병론과 처방을 적고 있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및 세종 27년 1445년 김순의 등이 당송원명의 모든 의서를 수집하여 편찬한 의약백과사전인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있다. 그리고 활자로서 경자자(庚子字, 세종 2년 1420년), 갑인자(甲寅字, 세종 16년 1434년)가 있고 1419년 남부지방 백성을 괴롭히는 일본 해적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이종무(李從茂)를 시켜서 정벌하게 했고 국경지방에 국경지방 진, 보(전략촌)를 설치하고 두만강 유역은 1434년 김종서(金宗瑞)의 6진(六鎭, 온성[穩城], 종성[鐘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회령[會寧], 부령[富寧))을 확보하고 압록강 유역은 최윤덕(崔潤德), 이천(李蕆)의 4군(四郡, 여연[閭延], 무예[虞芮], 자성[慈城], 무창[茂昌])과 개척으로 북방 영토를 넓혔고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조선인이 여진인보다 우세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영토의 골격이 되었다.
마. 영향
세종대왕은 굉장히 비만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천성이 운동을 싫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백성을 위해 일하다 보니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위와 같은 업적 덕분은 백성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3. 결어
세종은 국왕은 신하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함께 고민하고 신하의 신권을 존중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렸다는 점에서 세종은 애민사상이 남달랐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