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계간 서평_ 정겸
산고의 고통은 혹독했지만 열매는 달콤했다
정겸 시인
하늬바람이 살갑게 불어오는 가을 입구에 서 있다. 우뚝 걸음 멈추고 걸어온 길 되돌아보니 지난여름은 너무도 많은 아픔과 상처였다. 길고 긴 장마와 홍수, 어쩌면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우리는 자연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 경제는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골목상권의 붕괴라는 초유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어김없이 배송되는 문예지를 보면서 왠지 마음의 위안과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 그것은 책갈피 속에서 피어나는 시어들이 독자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도 잘 버티고 있는 출판사와 문예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시 전문지에 수록되는 시편들은 시인들의 혹독한 산고 속에서 태어난 달콤한 열매다. 독자들은 작가들의 땀이 밴 언어의 리듬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또 하나의 시적 미학을 발굴해 내는 것이다. 계간 『시와편견』 여름호에 발표된 ‘시편이 초청한 시인의 신작시와 대표시’를 촘촘하게 읽어 보았다. 손현숙 시인의 「우연히 당신을 만났다」 외, 수록된 시편들 모두가 정중동(靜中動)으로 살아가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하늘나라 가는 기도를 하였다
그의 기도는 천국으로 매일 다가가게 하였다
그는 하늘나라 향한 마음뿐이었다
회개하지도 않았다
남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첨탑의 종소리보다 빠르게
그는 승천을 하였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었다
천국으로 간 사람들은 없었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이었다
천년을 그곳에서 그는 살아가고 있다
-이종만 「천년」 전문
이종만 시인은 자연과 함께하는 시인이다.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이 건네주는 선물로 살아가는 양봉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속에는 자연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그가 엮어 낸 시집에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만 하는 법과 원칙이 담겨 있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시의 행간 속에 숨겨 놓았다.
「천년」이라는 시를 보자, 천년이라는 긴 세월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어져 내려오는 시간이다.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하늘나라 가기’ 위해 기도를 하다니, 이것은 결국 자연을 거슬리는 일이다. 시인은 결국 천년 동안 기도를 해도 자연의 순리에 역행을 하면 천국으로 갈 수도 없고 오히려 풀 한포기 없는 지옥 같은 곳에서 천년을 살아야한다고 엄중 경고 하고 있다.
오얏꽃, 문장이 걸린 찻집 앞에서 오얏꽃을 검색하는데 느닷없이 자두가 튀어나온다 자두를 패버리고 오얏을 심어도 하얗게 한 입 베어 물린 이빨자국 선명하게 목젖을 타고 내린다
누구를 지독하게 기다려본 적 없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름날 이상한 중력 속으로 오얏꽃, 오얏꽃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걸음이 골목을 돌아나온다
붉고 실한 자두를 한 바가지 들고 와서 주먹처럼 내밀었던 한 장면, 목소리는 지워지고 입술은 자꾸 풍경 너머 눈빛에게 물어나 볼까, 나는 참 멀리도 왔나보다
입술 다물어서 불안한 얼굴이 태연하게 나를 지나 골목, 골목을 기웃거린다 저는 모르고 나만 아는 뒷모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 모르는 척 당신은 나를 지나갔다
-손현숙 「우연히 당신을 만났다」 전문
손현숙 시인의 시적 감각과 색깔은 또렷하다. 아니다, 어떤 때는 너무 직설적이어서 속내가 다 드러나기도 한다. ‘오얏꽃을 검색하는데 느닷없이 자두가 튀어’나오다니,그도 그럴 것이 오얏은 자두의 순 우리말로써 자두나무의 꽃을 뜻 한다. 그런데 왜 오얏꽃을 고집하는 것일까. 첫 미팅을 나가 짝짓기 전, 선한 눈빛의 여인 마주쳤다. 내심 그 여인과 한편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리더의 룰에 따라 걸린 여인은 의외의 다른 여인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화자는 오야꽃에 집착을 한다. 붉고 실한 자두 같이 정열적으로 다가와도 화자는 오직 오얏꽃이다. 비유와 상징이 돋보이는 이 시속에서 화자는 오매불망 오얏꽃이다.
한밤중 인적 없는 빗속을 달리다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에어백이 터졌고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문을 열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중략)
누군가 내 목을 비틀기 전에 내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마침내 죽음은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심장을 속이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
새의 깃털을 덮고 잠이 들었다
이번 생은 누가 꾸고 있는 악몽일까
-휘민 「라이브 플러킹」 부문
비가 내리는 한밤중 인적 없는 곳에서 로드킬의 현장을 경험한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길을 별도로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개발의 명목으로 동물들의 길을 침범하거나 혹은 가로질러 새로운 도로를 개설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동물들은 자신들의 길로 착각해 인간들에 의해 변고를 당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리얼하게 표현했다. 사고로 인한 죽음과 제3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여러 관점에서 현실적 감각으로 끌어들였다. 살아 있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마취 없이 마구잡이로 뜯어낸다면 그 고통은 어떠할까.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라는 공간속에서 두려움의 척도는 얼마나 될까. 화자는 결국 ‘누군가 내 목을 비틀기 전에 내가 나를 죽일 수 있을까’라는 반문으로 죽음에 대한 고통을 악몽으로 치부하고 있다.
겨울 들녘에서
묵시록을 읽고 있는 바람소리 들린다
책갈피마다 서성이는 빈 그루터기
소유를 벗어 버린 계절이
맑은 햇살에 몸을 씻고 다시 드러눕는다
(중략)
천년을 발돋움해 온 들녘의 가슴팍
설익은 삶을 가둬놓은 시멘트 집들만 널린 채
겨울 묵시록 시퍼런 목청이 전깃불을 켠다
-박종현 「쥐불놀이」 부문
전반적으로 시의 흐름이 서정적으로 다가와 독자들이 읽기 편안한 시다.
특히 도입 부분인 첫 연 ‘겨울 들녘에서/묵시록을 읽고 있는 바람소리 들린다’에서 머리가 맑아지는 청량감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시편 속에 숨어 있는 무소유와 맑은 햇살에 몸을 씻는 은유의 기법이 독자로 하여금 신선한 이미지를 느끼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어린 시절 즐겨 놀았던 ‘쥐불놀이’에서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파도 같은 삶에 시적 상징성을 풀어 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어지러운 세상 한복판에 서 있으며 언젠가는 타고 남은 재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라 했다. 화자는 왜 묵시록 같은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는지 궁금하다.
수업 종이 울린다.
누구도 암흑의 시월이 올 줄 몰랐지.
미슬 시간은
그 시절 제일 난처한 시간이었지
스케치북 없어 교실 뒤편에 통금시간처럼
앉아 있던 미슬 시간
선생님은 수업 시작과 동시에 준비물
검사를 했지. 눈 지그시 감고 생각하면
예닐곱 명은 대 뿌리에 손바닥을 갖다 댔지.
(중략)
미슬 시간에 암흑과 원이라는 걸
배웠지. 지금 내 손바닥을
붉게 때리네. 갈까마귀 울음 같은
검은 종소리가
-박우담 「시간」 부문
시라는 장르에서 시간이라는 소재 혹은 주제는 어떤 의식의 흐름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화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의 미슬시간을 소환하여 이미지화 했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 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가 이 시편에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지독한 가난을 겪어야 했던 어린이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육성회비를 걱정해야했던 세대들, 비교적 준비물이 많이 요구되어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미슬 시간의 풍경을 상징화 했다. 이는 어쩌면 한 세대의 서사적 이야기를 시학으로 풀어 낸 화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행간 속에서 지금도 갈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레미안 언니 자리맡아 놨어 이리 와
204동 아우님 머리 까맣게 했네! 여기 앉아
새로 온 수영강사 잘 가르치더라 배는 나왔던데 잘 떠
25년 경력이래, 빌라 언니는 안 왔네?
알타리 10단을 담갔다잖아
(중략)
꿀단지 같아
허우적대다 가라앉은 거지만
억울할 것도 원통할 것도 없어, 그냥 걷다 보니 구름이 발아래야
실어오고 실어 가는 바람
젖은 머리카락 위로 꽃비 쏟아진다
-황주은 「셔틀」 부문
도심 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풍경들이 시속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과거의 여인들은 동네에서 만난 지인을 호칭 할 때 친정집 고향의 명칭을 따서 남양댁, 예산댁, 목포댁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 명칭과 동호수의 이름으로 호칭한다. 셔틀이라는 상징성에서 느끼듯, 늘 같은 거리를 왕복하거나 빙빙 돌며 진부하게 사는 것이 현실이지만 화자는 래미안 언니와 204동 아우님 등의 이름을 빌려 시적 이미지를 호기심으로 반전시켰다. 행간 속에서 펼쳐지는 스포츠센터 가는 길이 자칫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시의 흐름을 독자들은 오히려 더욱 새로운 감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한 것이 세상의 이치라며 ‘억울할 것도 원통할 것’도 없으니 스포츠센터에 나가 지인들과 어울리며 내 건강 내가 지키며 편하게 살자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가을이라는 찬란한 계절 앞에는 고통의 중병을 참고 견디며 이겨낸 여름이라는 계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와편견』 2023년 여름호에서 마주한 시편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채증한 체험적 현실을 은유와 환유로 이미지화 했다는 점이다.
특히 최인호 「사춘기2」中 ‘눈을 깜빡이는 동안에도 세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김승 「물의 가시에 찔리다」中 ‘물에 쏘인 손끝이 얼얼하다/물도 제 영역을 침범하면/날카롭게 반응하는데’, 이신율리 「비 오는 날의 스페인」中 ‘ 불꽃이 튀어도 지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이진우 「홈커밍데이」中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운동장엔/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박선민 「버터」中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격렬한 속도입니다’ 등 빛나는 시편들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지난봄과 여름은 우리 문단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로 꽁꽁 묶여 폐쇄되었던 문화의 창이 열리며 각 종 문학관련 강좌와 세미나가 재개 되어 많은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린이가 한 뼘의 키를 자라게 하려면 많은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 이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으니 제2의 문예부흥 시대를 기대해 본다.
정 겸 시인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궁평항』 외 다수.
경기시인상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