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60여 년 전 일제치하에서 일본으로 끌려가 급여 중 일부를 떼어 일본우편국에 저금을 꼬박꼬박하였는데 해방 후 먹고살기 바쁘고, 사회가 어수선하여 잊고 살다 이제야 증서를 찾아 왔으니 찾는 방도를 알려달란 말씀이었다.
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의 우편국도 아닌 일본 우편국에서 저금한 돈을 60년이 지나 찾아달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결론은 우리나라 우체국에서 취급한 것이 아니라 지급할 수 없다는 답변만 하였다. 나라 잃은 죄로 타국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며 강제적으로 저축한 할아버지 돈을 일본에서 지급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지금도 우리 생활 속에 일제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연세 드신 분들이나 어른이 돌아가시고 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조선간이생명 보험” 증서를 가지고 오셔서 보험금이 지급되느냐고 문의 하곤 한다. 조선총독부 우정국에서 전쟁비용 충당과 민족자본 형성을 막기 위하여 1929년부터 종신 보험, 양로보험, 학자금보험을 거의 강제로 판매하였다.
당시 월액보험료는 50전, 80전, 1원, 1원 50전 등 4종류이며, 보험금은 사망 또는 만기 시 최고 700원이었다. 1930년대 80kg 쌀 한가마니 값이 22원 정도였다니 700원은 쌀 32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며, 지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600여 만 원 정도 될 것이다.
지금도 600만원이 적은 돈이 아닌데 불행하게도 대부분 계약은 이미 지급 소멸시효가 완성된 상태이고, 그동안 1953.2.17. 1차 화폐개혁으로 100원이 1환으로 100:1로, 1962.6.9. 2차 개혁으로 10환이 1원으로 10:1로 각각 평가 절하되었다.
지금은 쌀 32가마가 70전으로 추락하여 10원 미만이 되며, 국고금단수법에 의하여 지급이 불가하게 되었다.
1911년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의하면 50만 원 이상의 거부가 32명이라고 보도했다. 지금 재산 가치로 따지면 700억 원은 족히 넘을 거부들이다. 왕실의 친인척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와 거상(巨商)들이 대부분이었다니 슬프다.
민초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어 번 돈을 시대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구렁이 알 같은 돈도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일부 권세가들은 그런 혼란기에 부를 축척하여 한 나라의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니 시(時)의 고금(古今)을 떠나 돈에 대한 집착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그저 우울할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