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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여름 문화 탐방기
함양에 부는 바람, 지리산의 한 여름 여행법
- 길은 마음을 걷게 하고 걸음 속에서 이탈된 나를 만난다
양 영 숙
(시인)
지리산은 바람을 떠오르게 한다. 지리산 하고 발음하면 산이 혀끝에서 가늘게 떨리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지리산 산길을 따라 함양으로 흘러 들어가겠지. 식물의 구근처럼 삶의 고통이 단단해질 때, 구근을 중심으로 가늘게 뻗어있는 뿌리들처럼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은 여행을 꿈꾸게 한다.
양재역 서초구민회관 앞에 사람들이 작은 가방 하나씩 들고 모여 있다. 혹시 시와소금 회원이신가요. 일행인 듯 보이는 모르는 분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이향숙 시인이 다가왔다.
“바지가 편해 보이네요.”
요즘 유행하는 일명 몸빼 바지를 입은 나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다. 뒤이어 임동윤 주간과 박해림 시인이 왔다.
오전 8시 20분쯤 전세버스는 양재역을 출발했다. 내 머릿속에 “소주병”으로 각인된 공광규 시인, 언제나 따뜻한 미소의 서범석 시인, 머리띠를 하는 전기철 시인, 대학 선배인 한성희 시인, 2013년 고운점필재연암청장관문학상을 받은 최정희 시인 등 그 외 여러 시인들이 참석하여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12시쯤 함양에 도착하였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부산과 대구, 전주 등 지방에서 오신 시인들과 합류하였다. 먼 길 떠나온 일행들이 많아지니 분위기는 더욱 활기차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13시 넘어 지리산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 거침없이 구부러진 오도재를 넘게 되었다. 지리산문학관은 시조시인 김윤숭관장이 설립하였다. 올해 4회째 맞는 지리산예술제에는 시낭송축제 및 인산문학상, 고운점필재연암문학상, 지리산함양문학상시상식이 있다.
함양은 지리산이라는 친근한 이름이 뒷받침하고 있어 벗을 만났을 때처럼 설레게 했다. 첫 설렘의 배후에는 배롱나무가 있었다. 막 피기 시작한 꽃은 먼저 피어난 꽃보다 색이 진한 배롱나무, 만날 때마다 새롭고 마음이 통하는 벗처럼 함양 어느 곳에서든 지천으로 피어 있어 함양과 지리산의 여름을 완성하는 듯하였다.
두 번째 설렘의 배후에는 오도재가 있었다. 오도재는 경남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에서 마천면 구양리를 잇는 고개로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길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며 본래 이름은 지만재라고 하는데 오도재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옛날엔 지리산과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으며 스님들과 지게꾼들이 지리산을 오고가며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 말이 있는데 현재의 오도재는 오솔길을 확장 포장하였다고 한다.
오도재를 넘어 도착한 지리산문학관에서 지리산예술제가 시작 되었다. 하순희 경남시조시인협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김윤숭 지리산문학관장의 환영사, 장순하 원로시조시인, 지리산문학관 상임고문의 축사가 이어졌다.
14시 30분쯤 인산문학상으로 “지리산 시” 의 문효치 시인이 수상하였다. 고운점필재연암청장관문학상으로는 “빨래 잘 마르는 동네” 외 1편으로 최정희 시인이 수상하였고, 연암청장관문학상(시조) 에는 “천마총 근처“ 외 1편으로 김임순 시조시인이 수상하였다. 지리산함양문학상은 박행달 시인이 수상하였고, 수상기념으로 ”순분이“를 낭송하였다.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시낭송가들의 시낭송대회가 시작 되었다.
날씨는 가시덤불속 그늘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더웠으나 참가자들은 긴장 때문인지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문학회 일행은 일정으로 인해 시낭송대회가 끝나기 전, 삼림공원으로 향했다. 함양 상림은 천연기념물 제 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치원이 이곳 천령군의 태수로 계실 때. 홍수의 피해를 자주 입자 백성을 동원해 강물의 줄기를 지금의 위치로 만들고 둑을 쌓아 나무를 가득 심고 상림을 조성했다고 한다.
상림에는 뱀, 개미, 지네 등의 미물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효성이 지극했던 최치원이 어느 날 저녁 어머니로부터 상림에서 뱀을 만나 매우 놀랐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곳으로 달려가 “모든 미물은 상림에 들지 마라”라고 외치니 뱀, 개미 등의 미물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최치원의 공덕을 기리고자 후손이 세운 최치원 신도비가 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살아 움직이는 노래, 물레방아 곁에서 사진을 찍고 앉아있자니 백백일홍이 가벼운 인사를 한다. 한껏 부풀은 백백일홍은 오랫동안 함양이 꾸는 꿈의 절정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의 하나인 연꽃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연꽃은 거의 지고 군데군데 철늦은 연꽃이 그나마 사람들의 아쉬운 마음을 위로 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금지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는 복효근 시인의 맛깔난 숲해설을 듣는 행운이 주어졌다. 나무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라는 내게 일행 중 어느 시인이 숲해설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상림은 신기한 이름을 가진 나무들이 많다. 노간주나무, 개암나무, 비목나무, 생강나무 등이 있으며 때죽나무는 열매를 가볍게 두드려 깨어 물에 넣으면 때죽나무액이 마취제의 역할을 해서 물고기가 기절하면 잡는다고 한다.
층층나무는 가지가 층층을 이루고 있어 층층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왠지 우아함이 있어 나무의 귀족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지를 활짝 펴 자라는 지라 층층나무 그늘 아래는 그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우슬초는 소 무릎을 닮아 붙여진 이름인데 관절에 좋다고 한다.
일행은 연리목 앞에 멈췄다. 복효근 시인은 어느 쪽이 남자로 보이느냐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시인의 “접목”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늘그막의 두 내외가’ / ‘손을 잡고 걷는다’ 처럼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접목, 삶과 시의 접목을 이루는 자가 아닐까 개울가에 돌다리가 놓여 있다. 또 하나의 길을 만났다. 돌다리를 건넜다. 돌다리는 시멘트 길을 걷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몸이 흔들리면 중심을 맞춰 가면서 신발이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옮기고 정성스레 걸음을 걷는다. 거리를 단축시키되 걸음을 늦추는 휴식이랄까
이곳에는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세조한테 사약을 받은 세종의 12남 한남군 묘역이 있다는데 그곳에는 들러보지 못하였다.
나오는 길, 울창한 숲과 대비되는 행색으로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오고가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7시쯤 지리산문학관에 남아 있던 시낭송대회 심사위원들과 합류 후 저녁 식사를 했다. 송영희 시인이 맛집 검색 후 미리 예약해 둔 식당은 에어컨도 없는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흑돼지 삼겹살 맛은 일품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기에 눈이 매워도 고픈 배를 다 채우고서야 식당을 나와 몇 몇 여류 시인들과 식당 뒤 계곡으로 향했다.
지리산 빛이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계곡, 발을 담갔다. 두 발이 물고기가 되어 흘러가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더위로 달구어진 바위 위에 여류 시인들이 누웠다, 고향 집 툇마루에 누운 듯 보였다.
숙소인 대봉산자연휴양림 가는 길, 가로등 없는 어두운 길은 초행길인 버스기사님의 애를 태웠다. 전세버스는 크고 길은 좁은데 안내 표지판조차 없어 몇 번을 다른 길로 들어섰다.
개인 출발해서 먼저 온 시인들과 휴양림 안내원과 몇 차례 전화통화 후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내려오는 길에 자세히 보니 휴양림은 아직도 조성 중이었다.
짐을 숙소에 풀고 전기철 숭의여대 교수이자 시인의 “우리 시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주제로 특강이 있었다. 현재 우리시는 기존 우리시가 보인 단순성을 극복했으나 시가 어려워지고 차가운 지적 산물이 되어 점점 독자를 상실했고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앞으로 기존의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 하면서 음악성과 현실감을 동시에 포용하는 시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시인은 당분간은 포스트모던한 지적인 시들과 ‘신서정’과의 갈등이 나타나지 않겠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각지에서 참석한 시인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송영희 시인, 강수니 시인과 나는 계곡으로 향했다. 알맞게 어두운 밤 계곡은 우리들의 비밀을 만들기에는 그야말로 적당한 푸른 어둠이었다. 우리는 한 입 가득 달사과를 베어 물고 시간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산속의 밤이 깊어갔다. 시원한 밤바람은 여름이 감추어둔 꽃 속의 열매 같았다. 다음 날 7시쯤 일어나니 부지런한 시인들은 벌써 아침 산책을 끝내고 있었다.
오전 9시 넘어 부산에서 온 일행들과 헤어져 산머루와인농장이 있는 두레마을로 이동하였다. 함양의 아름다운 또 하나의 배후는 산길이었다. 산 속에 산 밖에 가느다랗게 뻗은 산길은 함양 사람들의 내력이었다.
산 아래 밭에서 일을 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손은 땅을 만지는 것 같기도 하고 파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논에서는 바람이 시를 쓰고 있었다. 길게 자란 벼는 바람을 모으고, 바람은 물결을 만들며 푸른 붓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더는 오를 수 없는 곳에서 버스는 멈추고,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의 길은 넓고 포장된 길, 하나의 길은 좁은 숲 길, 나와 몇몇의 시인은 어느 시처럼 좁은 길을 택하여 걸었다. 혹시 길이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오르는 숲길은 그늘과 함께 ‘차는 갈 수 없음’ 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길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산머루와인제조공장에 도착하였다. 산머루와인의 제조 설명과 함께 와인동굴로 들어섰다. 동굴에 길게 늘어서있는 고급와인들, 서범석 시인이 일행 모두에게 와인 한 잔씩 산다고 하자 일행 모두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산머루 두레마을에서 나오는 길, 꽃무릇을 만났다. 이 꽃은 많은 사람이 상사화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꽃무릇이라고 한다. 이 꽃에는 어느 여인이 꽃이 된, 가슴 아픈 전설이 있다고 강수니 시인이 알려 주었다. 한 여인이 스님을 짝사랑하다 죽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핀 꽃이 꽃무릇이라고 한다. 꽃과 잎이 따로 피고, 따로 지기 때문에 평생 만날 수가 없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한다고 하니 애잔한 사랑 이야기 하나가 숲길에 떠내려간다.
계곡 옆에 지은 식당에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은 후, 우종태 시인이 답사를 다녀온 거연정으로 향했다. 거연정은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말 전오륜의 7대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 선생이 시복거(始卜居)를 추모하기 위하여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 손인 진사 전재학, 전민진 등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거연정은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 자연암반 위에 지어져 있어 바위섬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내부에 벽체를 판재로 구성한 판방 1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자에 가기 위해서는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 아름드리 물푸레나무는 거연정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가지를 뻗고 있다.
정자에 올라섰다. 누대에 이은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왔다. 우리를 향하여 쉬어가라는 듯 시원한 바람과 계곡물 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다. 이 바람은 이제 각자 자리로 돌아갈 에너지가 될 것이다.
거연정이 이토록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는 이유는 주위에 큰 바위가 있어 물길을 갈라놓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곡을 흐르는 물과 거대한 바위들의 조화, 계곡의 여성성과 바위와 정자의 남성성의 혼합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뽑아내는 것이 아닐까
거연정 탐방을 끝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일행들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 미련을 두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잠시 이탈된 나와 여기에 벗어둔 내가 만나는 순간이다.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이 여행이라면 돌아오는 길은 현실을 인정하며 나를 증명하는 것이다.
수고한 임원진들과 편안한 여행을 하게끔 인솔한 한성희 시인, 함께 한 시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폭양은 소금을 만들어 낸다. 시와소금 문학회 회원들은 함양 지리산 여행 속에서 인생의 큰 결정체를 만들어 내었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갈래의 길을 보았으며 아름다운 배후를 만났다. 나는 오래도록 함양 지리산 바람을 기억할 것이며 이 기억은, 삶의 소중한 맛으로 탄생할 것이다.
-2013년『시와소금』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