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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문서 해독력 한국인 최하위권, 국민일보 우리나라가 선진국 국민들의 실질 문맹률을 비교하는 22개 경제개발기구(OECD) 가입국 국민의 문서해독능력 비교에서 꼴찌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전 국민의 75% 이상이 새로운 직업에 필요한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일상문서 해독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요리 만들기’를 마리라는 개체 수준의 변화라는 시점에서 탈피하여 관계 속에서 달성한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 정의한다면 마리는 훌륭하게 요리 만들기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중략) 개인의 능력과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후쿠이 특수학교라는 ‘실천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요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진 웽거, <실천 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에서 그들을 ‘실천 공동체’에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는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리적인 공존과 그 밖의 방식을 통해서 ‘무엇을 하는 방식’과 ‘서로 접촉하는 장면’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특정한 실천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된 실천이란 그들의 모두가 종사하는 활동, 공유하는 활동에 관한 특별한 말하는 방식, 그결과로서 그들이 공유하게 되는 관점과 흥미, 이해利害 같은 것이다.(중략) 이 개념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공유된 실천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지, 설명을 위해 사용되는 ‘구조적 특징’을 전혀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
- 후쿠이 특수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천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일반 학교와 달리 모든 실천에서 ‘개인의 능력’이 드러나게끔 사회적으로 조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는 얼마나 개인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디자인된 사회인가. 또한 교사들 간에도 시험이 끝나면 반별 등수를 통해 드러나는 능력치에 대해서도 나름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실을 보면 학력이 곧 능력이고 자부심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볼 수 있다. 학급 평균을 떨어뜨리는 학생이 좋게 보일 리 없다. 만약 그 학생이 수업시간까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내심 전학이나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교실에서 학력 때문에 관심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은 그들 나름의 하위문화를 만들어 저항한다.)
- 비고츠키는 관점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심리학은 개인의 의식에만 모든 초점을 두는 ‘개체환원주의’, 개인의 머릿속만 문제 삼는 ‘주지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비고츠키의 개체환원주의와 주지주의에 대한 안티테제의 근간은 ‘행위론’에 있다.
- 비고츠키는 마르크스의 발상에 주목하여 개인 정신 과정의 ‘사회적 기원’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비고츠키는 인간의 독자적인 마음의 양태와 움직임 그리고 의식적 행위의 생성 매커니즘을 ‘문화적 발달의 일반적․발생적 법칙’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아동의 문화적 발달에서 모든 기능은 두 번, 두 가지 국면에 등장한다. 첫 번째는 사회적 국면이고, 그다음은 심리적 국면이다. 즉, 처음에는 정신 간 범주로 사람들 사이에서, 나중에는 정신 내 범주로 아동의 내부에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발적 사고와 논리적 기억 또는 개념 형성이나 의지의 발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 비고츠키, <사회 속의 마음>에서
- 위치는 개인 정신의 사회적 기원을 정식화한 비고츠키의 ‘문화적 발달의 일반적․발생적 법칙’과 ‘피부를 넘어서 확장하는 정신’이라는 관점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연결 지어 한꺼번에 아우르는 ‘행위론’을 포착하는 분석 단위로 기술적 도구(쟁기, 도끼, 컴퓨터 등), 또는 심리적 도구(언어, 숫자, 도표 등)에 ‘매개된 행위’를 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특정한 사회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매개-수단을-갖고-행하는-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행위자의 매개된 행위를 이끌어 내는 이른바 사회적․역사적 인공물, 즉 인간 활동의 ‘매개 수단’이란 언어, 계수와 계산의 다양한 형식, 기억 기술, 대수학의 기호, 예술 작품, 문자, 도식, 도표, 지도, 설계도 그리고 다종다양한 기호 등이다. 특히 비고츠키의 분석에서 용구와 기계 같은 기술적 도구와 구별되는 심리적 도구가 매개 수단으로 초점의 대상이 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매개 수단은 인공물뿐만 아니라 특정한 실천 공동체가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의미 시스템’과 ‘언어의 사용 방법’, ‘문제 해결의 방략’, ‘의사 결정의 절차’등을 포함한다. 특히 언어는 비고츠키가 매개 수단의 중심에 둔 대표적인 심리적 도구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비고츠키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협의로 정의된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 장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말’또는 ‘말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비고츠키의 주요 저서인 <사고와 언어>를 놓고 본다면 ‘생각하는 행위와 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비고츠키는 언어의 시스템(어휘와 문법)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어떻게 이용되는가, 즉 ‘언어’보다 ‘말하는 행위’에 관심을 가졌다.
(화용론:은 의사 소통시의 발화에 대한 언어론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언어 사용이 어떻게 바뀌는지, 화자의 의도와 발화의 의미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연구도 다룬다.)
시도
-Bernard Werber(2009)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이해한 것,
내 생각과 그대의 이해 사이에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 사회․문화와 개인의 정신을 연결하는 ‘말하는 행위’라는 매개 수단의 사용, 사회․문화적 실천의 형식에서 개인의 고차정신기능 발생과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라는 분석 단위에서 탈피하여 연구의 일차적인 분석 단위를 재설정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인’이나 ‘개인의 능력’을 만드는 ‘경계’에서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그 ‘실재’가 어디 있는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성’과 ‘주체’와 ‘개인의 능력’이 상호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되는지, 어떻게 사회적으로 표시되고 관찰 가능하게 되는지 하는 것이다.
(‘문제’-‘학생’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문제라고 불리우는 행위 또한 역사와 환경의 소산이며 그 학생이 한 행동 또한 역사 환경적 구성물이다.)
- ‘개인’이라는 닫힌 분석 단위를 바깥으로 열어젖혀서 ‘특정한 실천공동체에서 특정한 매개 수단을 가지고 행하는 개인’이라는 분석 단위를 취하며, ‘학습’을 개인의 머릿속 변화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문화적 실천’으로 재고하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 레이브와 웽거는 비고츠키의 관점을 현대에 계승한 상황학습론의 창시자로 이들에 따르면 주류 심리학에서는 학습을 그것이 학습자 스스로 발견한 것이든 타인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이든 또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얻은 것이든 학습자가 ‘지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다루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황학습론에서는 학습을 ‘전인격적’ 문제와 과련한 것, 특정한 ‘실천 공동체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았다.
학습을 내면화로 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학습을 실천 공동체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다름 아닌 세계 안에서 행위하고 있는 ‘전인격whole person'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학습을 참가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이 계속해서 바뀌어 가는 ’관계의 집합set of relations'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은 물론 사회적 실천 이론의 전형적인 관점이다. 상황학습이론은 사람, 행위 그리고 세계를 관계론적으로 보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 진 레이브, 유진 웽거, <상황학습론>에서 |
-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다는 것은 기능과 지식을 개인이 내면화하는 문제를 넘어서 보다 큰 관계 스시템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완전한 참가자full-participant’가 되는 것, 특정한 실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a kind of person’이 돠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활동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로운 직업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학습’이라는 활동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활동, 작업, 기능 그리고 이해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중략) 인간은 이러한 관계에 의해서 정의됨과 동시에 이러한 관계를 정의한다. 따라서 관계가 변하면 학습의 모습 또한 변하게 된다. 학습의 이런 측면을 무시하면 학습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 진 레이브, 유진 웽거, <상황학습론>에서 |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학습을 너무나 지엽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학습은 개인의 (문화 역사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시각은 우리가 학교에서 애들을 대하는 방식에서부터 새로운 관점을 요구한다.)
[근대 자본주의가 구축한 교환 가능성의 이데올로기]
- 학습이나 생산 활동을 ‘일련의 요소 동작으로 분해해서 그 하나하나를 착실히 실행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 공업 사회의 벨트컨베이어 방식 생산 공정에서 유래했다. 이 관점은 노동자에게 요소 동작인 ‘순서’의 확실한 실행만이 중요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혼자 실행하도록 요구한다. 이처럼 ‘정확한 순서’의 실행으로 실현되는 사회는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한’ 사회이기도 하다. 할당된 요소 동작만 실행할 수 있으면 노동자는 ‘누구라도’ 상관없고, 생산한 제품은 모두 ‘똑같은 것’이므로 교환 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자에게는 ‘교환 가능한 인간(부품)’이 되기 위해 ‘교환 가능한 요소 동작’을 확실히 실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도록 훈련하고, 평가하고, 선별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교환 가능한 부품이 되지 못하는 장애인은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된다.
- 근대의 산물인 ‘능력’은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능력’은 근대 사회가 다양한 상품을 특정한 생산 방식(벨트컨베이어)으로 교환 가능하게 제조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구성한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여기는 신념과 달리 이것들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2001년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을 바꾼 것, 혁신교육을 이야기 하면서 제기되었던 ‘핵심역량’ 이러한 표현들도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능력’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탈자본주의적 사회상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는 교육관을 디자인 할 수 있을까?)
-비고츠키는 세계는 단순히 객관적․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산물, 곧 문화적 환경이라고 했다. 즉 인간이 디자인한 인간 활동을 위한 환경이다.
Chapter6 누가 혜정이를 능력이 없다고 하는가
Chapter7 협력적 과정으로서 인지 VS 협력의 교육학
- ‘협력적 과정으로서의 인지’는 사회적 구성주의 인간철학, 비고츠키 ‘인식론’과 ‘인간관’의 문제이고, ‘협력적 교육학’은 비고츠키 아이디어를 단순히 방법론적으로 이용한 것, 즉 방법론 지상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 협력의 교육학에서 말하는 협력 또는 타협이란 인간을 대자적 존재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즉자적 존재)가 먼저 있으되 나 혼자 잘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이기려는 동기도 버릴 것을 강제하는 형국에서 나온 생각이다. 그들은 원래 인간은 즉자적 존재(영원한 아이)지만 앞으로 학교에서는 대자적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이다. (중략) 인간은 애당초 대자적 존재이거늘 지금까지는 즉자적 존재로 살아왔으나 앞으로는 대자적 존재로 살아가라는 말이다.
- 인간은 주위의 사물과 타인의 협력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기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 비고츠키 주장의 핵심이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작가’는 죽은 것, 곧 작가가 혼자서 작품을 쓴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 신영복의 다음 글도 비고츠키가 말하는 ‘협력’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는 데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천재란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순간의 독창이 아니라 오랜 중지(衆智)의 집성이며 협동의 결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의 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천 갈래 만 갈래 분업과 거대한 조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물신성(物神性)은 사람들의 만남을 멀리 떼어놓기 때문에 '함께' 살아간다는 뜻을 깨닫기 어렵게 합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
- 우치다 타츠루의 벗인 히라카와 카즈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보통 자신이 독창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고유한 고민과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실은 언젠가 어디선가 과거의 어느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체험된 것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장래이 누군가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반복될 것입니다. 인간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태는 그다지 독차적이진 것도 아니고 다양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이미 있었던 사건이나 사태의 반복이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반복은 개인 혹은 개체를 유(類)로 돌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라카와 카즈미,<경재성장이라는 이름의 병>에서 |
비고츠키를 공부한다는 것은 ‘개체를 유(類)로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협력적 과정으로서의 인지’ 그리고 ‘결핍태로서의 인간관’, 또는 ‘대자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이라는 시점을 가지면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 기원이다”, “자신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게임은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자기규정, 나는 ‘기동자’가 아니라 ‘패스하는 사람’이라고 자기규정을 하면 어쩐지 풋워크(foot-work)가 매우 좋아집니다. |
- 우치다 타츠루는 ‘중지의 집성’, ‘협력의 산물’로서 ‘인간관’과 ‘인식론’에 기초해 ‘패스’와 ‘증여’의 문제 재능의 문제와 연결시켜 절묘하게 풀어낸다.
- 재능은 타인을 위해 사용하면 내재화되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외재화되고, 물상화되고, 결국 박리(剝離)되고, 바람에 날려서 사라진다. - 현재 자신이 입고 있는 사회적 혜택의 꽤 많은 부분이 ‘자기 노력’에 의한 획득물이 아니라 천부의 선물이라는 것을 자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서 ‘반대 급무의 의무’를 느끼는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지, 그것이 재능 사활의 분기점이다. ‘반대 급무의 의무’란 이 선물에 대해서 답례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 재능이 가져온 이익은 ‘사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것은 ‘증여자에게 직접 등가에 해당하는 것을 답례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는 ‘하늘’이기 때문에 돌려줄 방법이 없기도 하지만, 모든 증여에서 ‘처음에 증여한 사람은 어떠한 답례에 의해서도 상쇄할 수 없는 절대적 채권자’라는 룰이 있기 때문이다. - 피 증여자에게 증여자가 느끼는 부채감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증여자’가 되는 것을 통해서만 상쇄할 수 있다. 자신이 새로운 증여 사이클의 창시자가 될 때 비로서 부채감은 그 절박함을 완화한다. 이렇게 해서 증여의 도모노가 넘어가듯이 처음에 한 사람이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무한 연쇄되어 가는 프로세스다. 재능은 일종의 선물이다. 이것에 대한 ‘반대 급무 의무’는 그 선물이 가져온 이익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어떠한 대가도 구하지 않는 순수 증여로 내밀 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 - 증여가 가져오는 이익을 자신만을 위해 저장한 사람에게 ‘다음 선물’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증여를 해도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새로운 증여 사이클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하늘’은 증여를 그만두어 버리기 때문이다. 천부의 재능이라는 것은 이른바 ‘마중물’이다. 그 재능의 ‘씀씀이’를 보고 다음 선물의 스케일과 질이 결정된다. (중략) 자신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절실히 받아들이는 자만이 재능의 고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자신의 재능의 성립과 기능에 대해서 철저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취한 것 가운데 ‘이것만큼 내가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오리지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치다 타츠루, <평가와 증여의 경제학>에서 |
-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비고츠키가 주장하는 ‘협력’이라는 우물물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것은 대자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에 기초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왜 세상과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철저하게 묻는 실천적 행위이다.
비고츠키의 이름을 내결고 만세를 부르려는 학인이라면 교실에서 협력 수업을 도입하자고 외치기 이전에, 협력의 교육학을 부르짓기 이전에, 적어도 비고츠키 인간관과 인식론을 탐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비고츠키의 입장에 서서 ‘협력’에 대해 고민할 거라면, ‘어떻게 하면 협력 학습을 교실에 도입할 것인가’하는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닥터 진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도움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반면교사 포함하여) 깨닫는 일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이를 깨닫는다면 앞으로 자신이 입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패스하는 것이 ‘협력적인 과정으로 인지’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인식론적으로 ‘카피 레프트’의 지점과 일치한다. 그런데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인식의 공동체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식의 결과를 규범적으로 타인과 나눠야 한다는 윤리적 주장은 ‘천부’를 끌어들여 해결하고 있다. 칸트가 윤리적 규범의 필요성을 결국 ‘신’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한계와 일치한다. 규범윤리의 궁극적 물음은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Chapter8 문화 심리학으로 바라본 세계 : 디자인된 현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세계, 즉 ‘디자인해 놓은 세계’에서 태어나 그 세계에서 많은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디자인’의 라틴어 어원은 ‘de signare’로 ‘to mark’, 즉 ‘표시하기’를 뜻하다.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대지에 돌을 나열해서 토지를 구분하는 것’, ‘시간의 흐름을 태양의 높이로 구분하는 것’, ‘어떤 현실에 인간이 손을 대서 가공하는 것’ 마지막 정의를 눈여겨보면 디자인이란 ‘지금 있는 질서를 변화시키고 바꾸는 것’으로, 사람들이 어떤 디자인을 새롭게 공유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것과는 다른 현실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자인은 대상의 물리적 변화, 이에 따른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변화 그리고 지각 가능한 현실의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교사의 눈앞에 있는 아이가 예컨대 ‘공부를 잘하는 아이인가, 못하는 아이인가’하는 것은 아이가 내부에 갖고 있는, 즉 원래부터 갖고 있는 개체의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수업 디자인과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업 디자인이란 수업 교재와 과제, 목표 설정에 그치지 않고 ‘아이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다룰 것인가’하는 정체성의 디자인이다.
학습 환경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아이를 어떤 존재로 다루고 싶은가’와 ‘어떤 존재로 만들고 싶은가’라는 지극히 사회․문화적인 의사 결정의 과정을 내장하고 있다. 예컨대 단순히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만을 ‘학력’으로 정의한다면 학력을 촉진하기 위해 지식을 주입하고, 그것이 아이 내부에 제대로 정착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수업 디자인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 아이가 ‘내부’에 갖고 있다고 보는 학력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장부’, 곧 ‘성적표’라는 사회․역사적 인공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성적표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또 다른 인공물인 ‘평균’, ‘분산’, ‘표준편차’ 같은 도구도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누가 우수하고 뒤처지느냐라는 ‘마음’이 만연한 현대 한국의 교실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여러 사회․역사적 인공물에 힘입어 근대 이후에 생겨난 ‘디자인된 현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디자인된 현실로 인해 학교가 없었던 시대의 ‘개인’과는 다른 종류의 ‘개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 ‘비만’, ‘지능’, ‘학력’ 등 어떤 사상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처럼 우리는 추상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기술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으로 ‘실체화’한다. 그리고 실체화한 사상은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에 크고 많은 영향을 미친다.
‘비만’을 예를 들어 보면 지금 비만은 매우 가시적이지만 누구의 눈에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는 뚱뚱한 것은 부의 상징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비만’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 우리는 ‘비만’을 실체로 다루고 행위 대상으로 여긴다. 일상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활동의 기준이 되다 보니 퇴치를 위한 전문 기관까지 생겼으며, 과체중이나 각종 성인병 관련 데이터가 쏟아져 나온다. 마른 체형과 날씬한 몸매에 가치를 두는 사회이기에 비로서 ‘비만’이 사람들 눈에 ‘실체’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 비네 등이 제창하고 웩슬러 등에 의해 정교해진 ‘지능지수’와 우리가 흔히 부르는 능력 개념은 또 어떤가. 현대 한국 사회에는 이 둘의 향상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넘치고, 이를 위한 시장이 활성화되어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들도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행위의 대상이 되려면 학교, 학원, 표준 테스트, 커리큘럼, 통계, 데이터베이스 등 다양한 ‘사회적 인공물’을 디자인할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주류 심리학과 학교육육이 연동해서 만들어 낸 ‘개인이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지능’과 ‘학력’은 그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차별화하고 서열화하는 사회와의 관계로서 재고해야 한다.
(비네의 지능(IQ)에 대해서 교육학적인 비판은 많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상에서 많은 학부모들은 지능지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학력’에 대한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내는 디자인된 현실이다.)
-결국 디자인은 ‘다른 질서와 의미를 대상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확장해서 정의할 수 있다. 디자인에는 물리적인 변화, 행위의 변화, 마음의 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현실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진다.
-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가능성과 아울러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디자인된 환경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자각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디자인된 환경에 대한 ‘특권화’다.
- 우리가 사는 현실은 가치중립적인 ‘지구환경’과는 다르다. 우리는 지리학적으로 이미 만들어진(ready-made,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사회․역사적 인공물에 매개된 가치와 의미로 가득한 세계를 살고 있다.
- 인간은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환경을 디자인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물의 환경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환경✻’을 살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즉, 주류 심리학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포인트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무자각에 있다. 예컨대 심리학 실험실에서 ‘기억✻’을 그냥 ‘날기억’이라고 정해 버린 무자각, 또는 심리학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행위를 ‘행위✻’로 보지 않는 무자각과 ‘탈정치화’ 등.
현실을 디자인하는 특질이 인간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심리학✻’의 필요성을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성은 사회․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비고츠키와 워치의 주장대로 우리는 ‘매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심리raw psychology’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지금까지 심리학이 대상으로 삼은 우리의 ‘마음’활동은 사회․문화․역사적 조건과 불가분한 일체로서 ‘심리학✻’으로 다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심리학✻’은 ‘문화심리학’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렇게 시점을 전환할 때 ‘✻’은 더 이상 기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시좌를 생활에 응용하면 ‘운명적인 것이 디자인으로 계속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깁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능력을 내 속에서 밝히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능력은 내가 환경에 적용하는 활동 시스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심리학은 사람을 사회․역사적 인공물, 타자를 포함한 환경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함께 짜내는 시스템 속에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