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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와 고조선(古朝鮮)
Ⅰ. 청동기 시대의 생활
1. 시기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遼寧, 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Amur River, 黑龍江, 헤이룽강)과 연해주(沿海州, Primorsky Kray)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세계 4대 문명인 Egypt(Nile강), Mesopotamia(Euphrates와 Tigris강), India(Ganges와 Indus강) 및 중국(黃河)문명도 청동기문화이다.
고교1학년 국사교과서 고대사 부분 변경 내용
주제 | 2006년 교과서 | 2007년 교과서 |
고조선 건국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 |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
청동기시대 |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주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기원전 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 | 신석기시대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문화가 앞선 빗살무늬토기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본격화된다. |
아직 학계에서는 이론이 있지만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한국 청동기시대의 상한은 종래 기원전 10세기에서 20~15세기까지 올라 갈 수 있다. |
2. 청동기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居住地)
구릉지대에 살았고 집터는 대체로 직사각형으로 움집(竪穴住居, 土幕, 庴幕)의 깊이가 낮아져 점차 지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이며 움집 중앙의 화덕은 한쪽으로 옮겨지고 저장구덩(貯藏穴)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했고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土城)이나 목책(木柵)과 환호(環濠)로 외부침입에 대비하였다.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작업장, 집회소, 공동의식장소 등도 있었다.
나. 유적지
강원 양양 지경리, 충남 부여 송국리. 여주 흔암리(欣岩里)
다. 유물
⑴ 청동제품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遼寧式銅劍), 거친 무늬거울(多鈕粗文鏡), 청동검(靑銅劍), 화살촉(靑銅鏃), 청동창(靑銅戈), 청동방울(靑銅鈴), 방패형동기(防牌形銅器)
밑바닥이 좁고 아가리를 뒤집어 겹으로 만든 (二重口緣, 이중구연) 적갈색을 띤 민무니토기(無文土器),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帶文土器), 미송리식토기, 붉은간토기(홍도(紅陶),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흑도(黑陶), 가지무늬토기(架子文土器)
⑶ 기타
반달형돌칼(半月形石刀),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홈자귀(有溝石斧) 등
바퀴날도끼(달도끼, 환상석부, 環狀石斧)
자름면을 보면 중심부 양면이 모두 볼록한 것, 한쪽 면만 볼록하고 반대면은 판판한 것, 가운데 구멍 둘레에만 볼록 튀어 나오게 만든 것 등이 있다.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은 나무자루 같은 것에 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크기는 지름 10~15cm의 것이 대부분으로, 도끼로 쓰였다기보다는 지휘봉 같은 권위의 상징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뭇가지에 끼워 불씨를 일으킬 때 회전력을 크게 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톱니날도끼[多頭石斧:별도끼]와 함께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의 유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BC 2000년대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뤼다[旅大] 쌍타자 유적을 비롯해 용천 신암리, 송림 석탄리, 강계 공귀리, 시중 심귀리 유적 등 북쪽 지방의 BC 1000년대 유적에서 주로 보이고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생활용: 무산 범의 구석 집자리 가장 아래 문화층(신석기시대 최말기)(굽접시, 구멍무늬토기들과 함께 출토),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유적
무덤의 껴묻거리용 : 고인돌 안에서 민무늬토기 및 간석기들과 함께 출토되며 주로 주머니 모양의 짧은 목단지가 대표적인 모습이나 최근에는 춘천 중도의 고인돌에서 보이듯 납작밑의 대접 모양도 출토
라. 무덤
고인돌(支石墓, dolmen), 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이 있었고 말기에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생겨났다. 선돌(立石, menhir)과 함께 거석문화를 형성하는 고인돌(支石墓, dolmen)은 무게가 수십톤, 큰 것은 수백톤에 달하고 이렇게 큰 돌을 옮기려면 많은 씨족원을 동원할 수 권력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고인돌은 전국 각자에 분포하고 있으며 그 방식은 네 개의 판석(板石)을 네모지게 짠 위에 널따란 덮개돌(蓋石)을 올려 놓은 탁자식(卓子式, 北方式), 매장의 주체부를 지하에 두고 그 위에 작은 돌이나 돌무지(積石)로 지탱된 덮개돌을 올려 놓는 기반식(基盤式, 南方式) 및 전혀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직접 매장부 위에 올려 놓은 개석식(蓋石式)외에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 원형고인돌묘(圓形支石墓, 경남 산청군 매산리, 경남 진주시 초전동)이 있으며 2000년 고창, 화순, 강화고인돌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의 부장품으로서 간돌칼(磨製石劍)이 주로 발견되고 청동기, 비파형동검(전남 순천시 우산리 고인돌)도 출토되기도 한다. 돌널무덤(石棺墓)은 지하에 널찍한 직사각형의 돌로 상자 모양의 널(棺)을 만들어 그 안에 시체를 매장하고 둥글게 흙을 덮은 것으로 고인돌에서 한단계 진화한 것으로 때로는 고인돌과 결합되어 있기도 한다. 돌무지무덤(積石塚)은 돌널(石棺)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웅진 시도, 통영 연대도・옥시도, 춘천시 진천리등에서 보인다.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시대에는 옹기 안에 사람의 뼈를 추려서 매장하는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木棺墓)도 유행했다. 독무덤(甕棺墓)은 2차장의 성격이 짙고 어린이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마. 경제생활
종래 사냥(狩獵, 수렵), 고기잡이(漁撈, 어로), 채취와 수집(採集, 채집) 생활 외에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 졌으며 BC 8세기경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부안, 김해 패총과 대동강 유역 등지에서 탄화미가 뱔견되었다.
바. 사회변화
생산경제의 발전과 사회진보로 인해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분화되고 사유재산 제도로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군장국가(성읍국가)가 생겨났다.
사. 예술
종교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하여 암각화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巖刻畵)와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巖刻畵) 등이 있다.
Ⅱ. 고조선(古朝鮮)의 등장
1. 고조선(古朝鮮) 사회의 성장
가. 단군신화 (檀君神話)
⑴ 위서(魏書)에 실린 단군신화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 아래에 내려가 다스리기를 원해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3개를 주며 하늘 아래에 내려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함)하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妙香山이 아닌 白頭山) 마루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곳에는 범과 곰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이 되기를 원해 三. 七기도(21일 동안)를 하니 환웅은 곰과 범에게 100일동안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 말고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라 했는데 성질이 급한 범은 뛰쳐나오고 무사히 견딘 곰은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환웅과 결혼한 웅녀(熊女)였다.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단군(檀君)은 즉위하여 평양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고 1500년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가 와서 왕이 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돌아가서 숨어 살다가 산신(山神)이 되어 1908세가 되었다.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하여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고(高, 중국의 요나라)때 일이였다>
⑵ 단군신화의 기록
①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 충렬왕 7년 1281년 일연(一然, 普覺國師).불교사관, 신라중심. 자율형식. 王曆, 紀異, 興法, 塔과 佛像, 義解, 神呪, 感通, 避隱, 孝道와 善行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 기자가 조선으로 오자 장당경으로 옮긴 뒤 1908세에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
② 제왕운기(帝王韻紀) : 고려 충렬왕 13년 1287년 이승휴(李承休). 단군강조. 발해 서술. 서사시 형태로 상권은 중국역사,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
③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 조선 단종 2년 1454년. 세종장헌대왕실록의 지리지. 도에 관한 총체적 개괄을 앞에 싣고 계수관(界首官) 별로 소속 군현의 지지를 기록했다. 각 군현의 지지는 관원(官員), 연혁(沿革), 진산(鎭山), 별호(別號), 속현(屬縣), 향(鄕)·소(所)·부곡(部曲), 명산(名山), 대천(大川), 사경(四境), 호구(戶口), 군정(軍丁), 성씨(姓氏), 인물(人物), 궐토비척(厥土肥瘠), 풍기(風氣), 간전(墾田),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藥材), 자기소(磁器所), 도기소(陶器所), 성곽(城郭), 역(驛), 대제(大堤), 소령군현(所領郡縣) 등의 항목으로 구성.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을 쌓고 태자 부루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에 참석시켰다.
④ 응제시주(應製詩駐) : 세조 8년 1462년 권람((權擥)이 조부 . 권근(權近)의 응제시 24수와 명(明) 영종 영통제(英宗 正統帝)가 권근에게 내린 응제시 3수에 주석을 붙인 책
'요 원년 단군이 단목 아래 내려와 조선의 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천년 이상 왕위를 이어갔다'
▴응제(應製) 1. 임금의 명에 따라 임시로 치르던 과거. 2. 임금의 명에 따라 시문을 짓던 일
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성종 7년 1476년에 신숙주, 노사신등이 ·삼국사기에 빠진 고조선사(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로 ·성리학적 사관으로 불교사는 배제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다.
⑥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성종 12년 1481년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엮은 지리서. 누정(樓亭)・학교(學校)・불우(佛宇)・사묘(祠廟)・고분(古墳)・명환(名宦)・인물(人物)・제영(題詠) 등 사항을 늘리고 시문들을 첨가 → 신동국여지승람 중종 26년 1531년 중종의 명에 의해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이 펴낸 관찬 지리서
⑦ 동국통감(東國通鑑) : 성종 16년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 편년체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통사(본기 아닌 외기에 기록).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 조선을 개국했으며 기자 도래 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됐다
⑧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광해군 7년 1615년에 한백겸(韓百謙)이 지은 역사지리서. ·북쪽에 고조선, 남쪽에 삼한(한국)이 위치했음을 밝혀냄·고구려의 발상지가 만주지방임을 고증.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
⑨ 동사(東事)¹
현종 8년 1667 허목(許穆. 남인)의 저서.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하고 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 편찬. 북벌운동과 붕당정치를 비판. ·단군, 기자, 신라를 중국의 삼대(三代)에 비유
⑩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현종 13년 1672년 홍여하((洪汝河, 남인)의 저서, 왕권강화, 붕당정치의 폐지를 주장. ·휘찬여사와 함께 영남 남인들이 가장 추앙한 사서. 민족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는 데 의문을 제기
⑪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조 2년 1778년 안정복(安鼎福)이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를 처절한 고증에 의한 통사로 서술
⑫ 동사(東史)²
순조 3년 1803년 이종휘((李種徽 소론)의 저서. 고조선을 원시시대가 아닌 진일보한 문명을 지닌 국가체로 강조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만주 수복을 주장. ·부여와 발해를 우리 영토와 역사로 인식
⑬ 아시조선(兒時朝鮮) : 1927년 최남선(崔南善)이 조선정신의 표현으로서 단군신화를 연구하여 동북아시아문화권의 중심으로서의 한국사의 줄기 수립
⑭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 신채호가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출판한 것으로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담고 있다.
⑶ 단군신화의 의미
단군신화는 천강신화(天降神話)로서 선민사상(選民思想)과 우월성(優越性)을 과시하고 있으며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 구름→번개, 벼락) 3사로 보아 농업사회와 국가(刑罰)의 성립되었으며 토착부족(곰)과 이주부족(환웅)의 결합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제정일치(祭政一致, theocracy)의 사회에서 단군(檀君)은 제사장(祭司長)을 왕검(王儉)은 정치적 수장(政治的 首長)을 의미하였다. 한편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환인(桓因, 태양신(太陽神, sun god)), 환웅(桓雄, 천왕(天王)) 및 환검((桓儉), 천군제사장(天君祭司長))을 모시고 있다. 단군신화에는 주체성(천손과 요임금 즉위 50년이므로 중국과 대등) , 도덕성(홍익인간) 및 낙천성(장수, 산신, 영혼불멸사상)이 담겨져 있다.
나. 고조선의 발전
⑴ 고조선의 성립
고조선은 아사달(阿斯達, 王儉城, 왕검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청동기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단군은 백성들에게 개수(盖首, 상투)와 변발(編髮)을 가르쳐 주었으며 단군 아들 부루(夫婁)는 중국 도산(塗山)에 가서 하나라 우(禹) 임금과 여러 제후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⑵ 고조선의 성장
고조선은 BC 3세기경 부왕(否王, 기부(箕否))과 준왕(準王, 기준(箕準)) 등이 왕위 세습이 나오고 왕 밑에 상(相), 경(卿), 대부(大夫), 대신(大臣), 장군(將軍), 박사(博士)와 같은 관직의 분화를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전국 7웅 연(燕)과 대치하였으며 고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서 난하(灤河) 또는 대능하9大凌河)를 경계로 연나라와 접했다. BC 284년경 연나라 진개(秦開)가 침입하여 요동군(遼東郡) 설치하기도 하였고 철기(명도전, 반량전, 오수전)가 유입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 유이민 유입되어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장하였다.
2. 위만조선(衛滿朝鮮)
가. 위만의 집권
한은 노관(盧綰)을 옛 연의 땅에 연왕(燕王)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한에 반하여 북쪽 흉노(흉노)로 망명해 버렸다(후에 살해됨). 정국이 바뀌는 동안 중국으로부터 동쪽으로 망명하여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위만(衛滿)이 1000여명을 이끌고 망명하여 국경수비 임무를 맡다가 준왕(準王)을 내좆고 왕이 되었다(BC 194~180). 준왕(準王)은 남쪽 진국(辰國)으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고 하고 위만조선은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였다.
나. 한나라와의 충돌
한은 흉노가 위만조선과 연결하는 경우에 받을 위협에 두려워 하였고 BC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呂)가 28만 주민을 이끌고 한에 내속하자 예(濊, 압록강 중류와 동가강(佟佳江) 유역 일대)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위만조선에 입력을 가하려 하였지만 예인의 반항으로 수년만에 중단되었다. 위만조선이 남방의 진국과 한나라의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하고 위만조선과의 한과의 창해군 복립에 대한 정치적 교섭이 실패하자 조선 장수(裨王 長)를 살해하고 달아난 요동군 동부도위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 살해하자 한무제(漢武帝, BC 141~87)가 침공하여 1년만에 왕검성 함락(BC 108)되어 우거왕(右渠王)은 살해되고 끝까지 저항하는 성기(成己)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한나라 칩입 |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5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 왕검성 공격 |
공손수 전권부여 |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 누선장군 체포, 군대병합하여 좌장군과 조선 공격 |
우거(右渠王) 항복 거부 | 조선상 노인(路人), 상 한음(相 韓陰)(韓陶), 이계상 참(尼谿相 參), 장군 왕겹(王唊) 항복 권유, 우거 거부, 노인(路人. 도중 사망), 한도(韓陶), 왕겹 도주 항복 |
우거왕 살해 | 이계 상 참(參)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니 왕검성에서 대신 성기(成己) 항거 |
성기 살해와 멸망 | 좌장군 순체가 우거 아들 장(長)과 노인 아들 최(最)을 시켜 성기 모살 교사. 조선 항복. 한사군 설치 |
3. 한의 군현
가. 한사군 :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BC 108년) 현도군(玄菟郡, BC 107년)
나. 진번군, 임둔군을 폐하고 낙랑군(진번 15현중 7현), 현도군(+임둔군) 관할에 둠(BC 82년)
다. 현도군 만주 흥경(興京) 방면으로 이동(BC 75년)
라. 요동 땅에서 독립된 세력을 펼치고 있던 공손씨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옛 진번땅에 대방군(帶方郡) 설치(AD 204년경)
마. AD 313년 고구려 15대왕 미천왕(美川王) 낙랑 축출, 백제 13대왕 근초고왕(近肖古王) 대방군 314년 축출
바. 신과 후한 교체기에 낙랑 토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반기를 들어 6년간 자치를 쟁취했으나 새로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에 의하여 평정되었다(BC 36년). 최리(崔理)는 스스로 낙랑국왕이라 칭하면서 백성을 다스렸다.
진번군의 군치였던 잡현(霅縣)과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등 남부도위 소속 7현
4. 고조선사회
가. 8조금법에 나타난 고조선 사회
한서 지리지 연조(漢書 地理志 燕條)에 3조가 나와 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 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讐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僻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은도쇠 기자거지조선 교기민이의례 전잠직작 낙랑조선민 범금팔조 상살이당시상살 상상이곡상 상도자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 욕자속자 인오십만 수면위민 속유수지 가취무소수
시이기민종불상도 무문호지폐 부인정신불음벽 기전민음식이변두 도읍파방효리급내군고인 왕왕이배기식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쳐서 길쌈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50만 전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하며 결혼을 하고자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사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나. 환단고기에 나타난 8조금범
①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②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③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④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⑤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⑥ 게으른 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⑦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⑧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讐)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다. 의미
① 사람의 생명과 사유재산보호
② 노비제 옹호 및 노비의 순장제도(旬葬制度M 8C 강상무덤에서 100여명 매장)
③ 범죄를 수치로 여김
④ 가부장적 사회(霍里子高의 箜篌引, 公無渡河歌)
⑤ 여성의 정절 중요시
⑥ 화폐사용
바. 고조선사회의 변화
한사군 설치이후 법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여 풍속이 각박(刻薄)해졌다.
제3절 철기문화와 여러 나라의 성장
Ⅰ. 철기의 사용
1. 철기시대(鐵器時代)
철기는 BC 5세기경 중국에서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를 거쳐 대동강으로 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 청동기는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철기는 전국에서 사용되었다.
2. 유물
가. 중국과의 교류 흔적
명도전(燕, 齊나라 화폐), 반량전(秦나라 화폐), 오수전(漢나라 화폐)과 및 붓 출토로 중국과의 교류를 알 수 있다. 특히 경남 창원 다호리(茶戶里) 널구멍(土壙木槨墓)에서 철제농구, 청동검, 칠기고배(漆器高杯), 붓 등이 발견되었는데 붓은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증명한다.
나. 청동기 문화
종래 중국식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거친무늬거울(多鈕粗文鏡)은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잔무늬거울(多鈕細文鏡)로 바뀌었고 거푸집(鎔范, 鎔笵)이 만들어 졌다.
다. 농기, 무기
철제 무기와 농기가 제작되었으며 철제농기구의 이용으로 생산량이 급증했다.
3. 주거지와 무덤장식
주거는 배산임수의 전통적인 취락형태를 보이고 무덤은 청동기 말에 나타난 널무덤(木棺墓), 독무덤(甕棺墓)이 만들어 졌다.
초기철기시대
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용어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기원전 4세기대에서 한군현(漢郡縣) 설치이후 한(漢)의 발달된 철기문화(철제무기류, 단조철부 등)가 본격적으로 남한지역에 파급되는 시기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韓時代) 이전인 기원전 2세기까지 약 300년간의 기간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한국식동검(세형동검), 세문경(잔무늬거울), 청동제 의기 및 무기, 철제 농공구 등이 출토된다.
* 세형동검(細形銅劍)
세형동검은 초기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 좁고 긴 형태를 이루며,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지역에서 발견되어 한국식동검이라고도 부른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출토되는 칼날(劍身)이 비파 모양인 비파형동검(요령식동검)과 대비된다. 세형동검은 대부분 석곽묘와 토광묘에서 주로 출토된다.
* 검파두식(劍把頭飾)
세형동검 손잡이(劍把) 끝에 장착하여 칼날(劍身)과 칼손잡이(劍把)의 무게 균형을 잡아 검으로 찌를 때의 효과를 더하기 위한 손잡이 끝 장식이다.
* 검초하부 연결금구(劍鞘下部 連結金具)
세형동검 칼집은 세부분(상부-결입부-하부)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하부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금속제 부속구이다.
* 철사(鐵鉇)
오늘날의 조각도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로 만든 공구류의 일종이다. 끝이 뾰족하고 칼과는 달리 횡단면이 납작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동과(銅戈)
동과는 중국 殷∙周代부터 사용되던 무기다. 과는 전차전에서 기병들이 사용하던 무기로 긴 병부에 날이 아래로 가게 착장해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한반도에 유입되면서는 근거리에서 보병들이 내리찍는 무기로 사용됐다.
* 주조철부(鑄造鐵斧)
주조철부는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떠 낸 도끼로 임시로 두드려서 제작하는 단조철부와 구분된다. 주조철부는 농공구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무기로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발라 마연(磨硏)하여 흑색의 광택을 띠는 목이 좁고 긴 항아리다. 형태는 목이 긴 형태가 주류를 이루며, 단면 원형의 점토대토기와 함께 초기철기시대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토기다.
Ⅱ. 여러나라의 성장
1. 부여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農安)에 위치하여 농경에 유리했다.
⑵ 농경목축 : 관리들의 명칭을 가축에서 따온 것도 목축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⑶ 경제 : 말, 주옥, 모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다.
나. 전개
⑴ 이미 1세기 초에 왕호 사용, 중국과 외교 관계
⑵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결국 고구려 문자왕때 편입(494)
다. 정치
⑴ 왕 아래 馬加, 牛加, 狗加, 豬加의 사출도가 있었고 그 외 使者 등의 관리 존재
⑵ 가(加)들은 四出道를 다스림
⑶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족 연맹 형성
⑷ 오곡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
라. 사회
⑴ 법률이 매우 엄하였다.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②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를 배상하게 했다(一責十二法).
③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한다(가부장적 가족제도 성립)
⑵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다.
지배층 | 가(加) |
호민(豪民) | |
피지배층 | 하호(下戶) |
노비(奴婢) |
⑶ 제천행사 :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인 영고(迎鼓, 12월)(농경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
⑷ 점복유행 :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牛蹄占法)
⑸ 장례풍습 : 순장(旬葬)
마. 의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고구려, 백제의 원형이 됨
2. 고구려(高句麗)
가. 지형과 경제
⑴ 위치
동가강 유역의 졸본(卒本, 桓因, 환인)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⑵ 지형
산악지대이므로 토지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서 식량이 모자랐다. 활발한 정복과 약탈(掠奪)을 전개했다(전투가 생산활동).
⑶ 경제
토지가 척박하여 초기부터 평야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掠奪經濟) 부경(桴京)이 있었다.
나. 건국
BC 37년 주몽(朱蒙)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다. 정치
⑴ 5부족 연맹 : 계루부(桂婁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 연노부),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
⑵ 활발한 정복전쟁 : 요동 진출, 옥저 정복
⑶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어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독립된 세력 유지하였다.
⑷ 제가회의(諸加會議) :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라. 사회
⑴ 부여와 비슷한 사회계급 구성
⑵ 제천행사 : 국동행사로서 동맹(東盟, 10월)이 있었다.
⑶ 조상신숭배 : 주몽(朱蒙), 류화부인(柳花婦人)
⑷ 데릴사위제(婿屋制, 서옥제)
⑸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levirate)
⑹ 혼수품에 수의(壽衣, 繸衣) 포함
⑺ 점복의 풍습
3. 옥저(沃沮)
가. 지형
함경도 지역의 동해안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⑵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했다.
⑶ 고구려에 포목, 어물, 염을 공납하였다.
다. 정치
⑴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⑵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
라. 사회
⑴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⑵ 민며느리제(豫婦制)
⑶ 사후세계를 인정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무덤인 목곽에 안치했다(骨葬制, 家族共同墓制).
4. 동예(東濊)
가. 지형
강원도 북부, 동해안 지방(원산지역)에 위치했다.
나. 경제
⑴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⑵ 단궁(檀弓),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를 생산했으며 명주, 삼베 등의 방직기술이 발달했다.
한 대(漢代) | 옹어(鰅魚) |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 | 반어(班魚) |
수당이후(隋唐以後) | 해표(海豹) |
다. 정치
읍군(邑君)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다스렸다고 고구려 태조왕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라. 사회
⑴ 제천행사 : 무천(舞天)
⑵ 족외혼(族外婚, exogamy)
⑶ 책화(責禍) : 다른 부족의 경계를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 등으로 배상해야 했다.
5. 삼한
가. 지형 및 경제
⑴ 한강 이남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달했다.
⑵ 수리시설이나 벼농사를 위한 저수지를 축조했다.
김제 벽고(碧骨堤), 밀양 수산제)(水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상주 공거恭儉池), 의성 대제지(大堤池)
⑶ 마한지역은 꼬리긴닭(長尾鷄)이 유명했고 변한지역에는 철 생산이 활발했고 철을 낙랑과 왜에 수출했고 철을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했다.
나. 정치
⑴ 융합문화
고조선 유이민의 남하로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하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 형성했다(BC 194년 준왕(準王) 진국에 와서 진왕(한왕)이 되었으며 위만조선말기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이 20000명을 거느리고 진국이주).
⑵ 진왕(辰王)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辰王)으로 추대되어 삼한을 통치했다.
다. 제정분리사회(祭政分離社會).
⑴ 정치적 지배자로 거수(渠帥, 渠率),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불예(不例), 견지(遣支), 읍차(邑借) 등의 군장이 있었다.
⑵ 제사장(祭司長)으로서 천군이 신성지역인 소도(蘇塗)를 다스렸다.
라. 사회
⑴ 5월 수릿날의 기풍제(祈豊祭), 10월 계절제(十月祭)를 통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⑵ 무덤양식으로 주구묘(周溝墓), 움무덤(土壙墓),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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