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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소포타미아 약사
기원전 4000년대부터 함무라비까지
기원전 3000~2000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의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작업이다. 이 책은 메소포타미아의 소위 ‘짧은 연대기’를 따르기로 했다. ‘중간 연대기’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 짧은 연대기에 따르면 함무라비의 통치는 기원전 1728년에서 1686년 사이에 위치하지만 중간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 사이에 위치한다.
1.1 우루크 문화부터 루갈자게시(Lugalzagghesi)까지의 수메르인
(기원전 3100~2350년경)
1)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서술하려면 기원전 4000년대 후기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수메르인들이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주요 도시의 이름을 딴 ‘우루크 문화’가 꽃피었다. 그들은 문자를 처음 개발했을 뿐 아니라 상업망을 구축하고 메소포타미아 북쪽인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확장하여 이 지역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으며 수메르 언어와 문자를 전파했다.
2) 기원전 3000년대 초기에 메소포타미아 남쪽 수메르 지역 도시들은 도시국가를 형성했다.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은 유일한 참 군주이며 지역 신의 지상 대표자로 추앙된 엔시ensi가 다스렸다. 이런 사상으로 신전이 매우 중요시되었고 엔시는 정치적․종교적 권한을 가졌다. 여러 신 중 니푸르의 신 엔릴Enlil이 최고 신으로 여겨졌다.
3) 기원전 3000년대 중반에는 상황이 바뀌어 넓고 조직화된 중앙 집권적 국가를 지향하는 사상이 뿌리내린 듯하다. 어떤 도시들은 다른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했고 그 지배자는 ‘루갈’lugal(왕으로 번역할 수 있다)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권력 확장을 시도한 도시는 우르Ur, 라가슈Lagash, 우루크다. 기원전 2360~2350년에 움마Umma 출신의 루갈자게시는 우루크에서 권력을 잡아 우르와 라가슈를 복속시켰고, 뒤이어 니푸르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우루크가 최고 신인 엔릴의 도시였기 때문에 그는 이 신을 대표하여 모든 지역을 다스린다는 주장을 합리화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지배권이 ‘아랫바다’(페르시아 만)부터 ‘윗바다’(아마도 지중해)까지 확장되었으며 ‘세상의 왕, 네 지역의 왕’이라는 칭호를 누렸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적 묘사라기보다 이념적 주장이다(그는 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실제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루갈자게시로 인해 고대 동방의 역사에 전 세계적인 제국의 사상이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1.2 아카드왕조(기원전 2350~2150년경)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역에 자리를 잡은 반면, 북쪽 지역에는 셈족 계통이 살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들은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그 문자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언어에 맞추어 개조했다. 아카드Akkad(혹은 아가데Agade) 출신인 사르곤Sargon 1세는 키슈Kish 왕의 관리직부터 시작하여 왕좌에 오른다. 그 후 루갈자게시를 무찔러 그의 전 영토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한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는 아카드였고 여기서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민족들과 왕조를 지칭하는 ‘아카드’Akkadi, Accadi라는 용어가 나왔다. 사르곤 1세는 자기 제국의 경계를 동쪽으로는 이란까지, 북쪽과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Anatolia와 팔레스티나까지 확장했다. 그의 왕조는 약 1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사르곤뿐 아니라 네 번째 왕 나람 신Naram-Sin(기원전 2190~2155년경) 또한 기억해야 한다. 국가의 위대한 정비가였던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을 신으로 내세워 개별 도시들을 다스리는 모든 엔시보다 자신을 위에 두었다. 나람 신 이후에 아카드왕조는 남쪽 수메르인들의 도시들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자그로스Zagros(루리스탄Luristan) 산악 지역 출신 구티족의 압력에 굴복했다. 엘람Elam은 독립 도시가 되기 위해 아카드왕조의 멸망을 이용했고 남쪽 도시들은 어느 정도 자주권을 회복했던 것 같다.
1.3 우르 제3왕조
기원전 2050년경 우루크의 왕 우투 헤갈Utu-Khegal은 구티족을 공격했는데, 구티족은 같은 시대에 엘람의 왕한테도 패한 듯하다. 뒤를 이어 우르의 우르 남무Ur-Nammu가 우투 헤갈을 무찌르고 수메르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새로운 왕조를 창시했다. 그의 아들 슐기Shulghi가 엘람을 무찌르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규모 개혁 사업과 국가의 정비를 주도했다. 그는 나람 신을 따라 자신을 신(‘국가의 신’dingir kalam-ma)으로 선포했다. 이 왕조의 다른 왕들도 자신을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 언어와 문화에서 가장 화려한 마지막 부흥기를 상징한다.
1.4 함무라비와 바빌로니아의 패권
우루 제3왕조는 엘람과의 전쟁뿐 아니라 서쪽(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의 지역)의 셈족 계통인 아모리족의 침입으로 몰락했다. 아모리족은 기원전 2000년대 초부터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아모리 왕조 중에는 이비 신Ibbi-Sin의 봉신이었던 이시비 에라Ishibi-Erra를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이신Isin을 거점으로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면서 독립했다. 후계자 중에는 법전으로 유명한 리피트 이슈타르Lipit-Ishtar(기원전 1875~1865년)가 있다. 또 다른 아모리 왕조는 라르사Larsa에서 쿠두르 마부그Kudur-Mabug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의 아들 림 신Rim-Sin(기원전 1758~1698년)은 자신의 지배권을 이신에까지 확장했다. 아모리족이 다스린 주요 거점은 마리Mari, 아수르Assur, 에슈눈나Eahnunna, 바빌로니아Babilonia(아카드어로 바빌루Babilu, 수메르어로는 ‘신의 문’Ka-dingira)였다. 바빌로니아왕조의 여섯 번째 왕 함무라비Hammurabi는 라르사의 림 신을 무찌르고 수메르와 엘람 지역을 정복했다. 차례로 에슈눈나, 마리, 아시리아Assiria 지역을 정복하고 유프라테스 강 중류와 티그리스 강 상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함무라비의 통치와 함께 수메르 문화(수메르어는 종교 언어와 왕의 비문으로 남아 있었다)와 아카드 문화(아카드어는 재전 문서와 행정 문서에 사용되었다)를 이어받은 새로운 바빌로니아 문화가 시작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커다란 비석에 거의 온전히 보존되었고 그 내용은 성경, 특히 탈출기 20~23장의 법률들과 비교된다.
2. 고대 이집트
2.1 역사적 틀
이 지도는 이집트의 정치적·종교적 역사에서 중요했던 도시들을 보여 준다. 지역적 관점에서 북쪽 나일 강 삼각주를 포함하는 하이집트와 나일 강의 첫 번째 수문인 시에네Syene(아스완Assuan)까지 이집트 남부를 포함하는 상이집트로 구분된다. 이집트 역사를 소개할 때는 여러 왕조의 승계를 따라(이 세부 구분은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 대사제였던 마네토Manetho 덕분이다) 역사적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 넓게는 고대 시대, 고왕국 시대, 첫 번째 중간 시대, 중간 왕국 시대, 두 번째 중간 시대, 신왕국 시대, 후기 혹은 말기 시대로 나눈다. 통일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왕조가 동시대에 여러 곳에서 다스린 시기를 중간 시대라고 부른다. 이 장에서는 개괄적인 연대기만 제시하겠다. 기원전 2천 년대의 역사적 주요 사건들은 다음 장에서 제시할 것이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그리고 유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왕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장들로 미룬다.
1) 고대 시대(제1-2왕조. 기원전 3000~2778년경)
이집트 역사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비도스Abydos 근처의 티니스Thinis 출신 메네스Menes가 처음으로 지역을 통일하고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왕’이라고 불렸다. 이 칭호는 훨씬 후대까지 계속되었다.
2) 고왕국 시대(제3-6왕조. 기원전 2778~2263년경)
이 시기에 이집트의 수도는 멤피스Memphis였다. 위대한 건축물들을 통해 이 시기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다. 첫 번째 피라미드는 제3왕조의 창시자인 조세르Gioser(Djoser 혹은 Zoser라고도 쓴다)의 명령에 따라 사카라Saqqara에 건축되었다. 계단 형태로 건축된 이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뿐 아니라 죽은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 태양의 신(레Rê 혹은 라Râ)에게 도달하는 계단을 표현하기도 했다. 유명한 기자Gize, Giza의 피라미드들은 제4왕조 파라오들의 것인데, 계단이 아니라 완전한 피라미드 형태를 띤다. 태양과 연관된 상징은 유지된다. 즉, 피라미드의 모서리들은 햇살을 상징하는데, 죽은 이는 그 햇살을 따라 신에게 도달한다는 것이다.
3) 첫 번째 중간 시대(제7-10왕조. 기원전 2263~2050년경)
영주들 간에 분쟁이 있었다. 멤피스는 제7-8왕조.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는 제9-10왕조의 수도였다.
4) 중간 왕국 시대(제11-13왕조. 기원전 2050~1785년경)
테베Tebe가 수도다. 제12왕조 시대는 이집트 언어와 문학의 고전기였다. 아메넴헤트Amenhemhet 1세(기원전 2000~1970년), 세누스레트Sesostri 3세(기원전 1888~1850년), 아메넴헤트 3세(기원전 1850~1800년) 같은 파라오가 있다.
5) 두 번째 중간 시대(제14-17왕조. 기원전 1785~1580년경)
테베에서 다스리던 왕조들(제13, 제17왕조)은 약화되었다. 아시아(셈족) 기원의 힉소스Hyksos족이 그 틈을 타 아바리스Avaris를 수도로 왕국을 세우고 이집트 전역으로 지배권을 확장했다(제15왕조). 사료에 따르면 힉소스족은 온전한 의미에서 이 지역을 침략했다. 이 가설은 현대 학자들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민족이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테베의 파라오들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테베에서는 이를 ‘이민족’의 지배라고 생각했다. 제17왕조의 카모세스Kamose는 이집트의 통치를 수복하기 위해 힉소스족과 싸움을 벌였다.
6) 신왕국 시대(제18-20왕조. 기원전 1580~1085년경)
수도는 테베다. 아흐모세(아모시스)Ahmosi(기원전 1580~1558년)가 힉소스족을 물리쳤다. 아멘호테프(아메노피스)Amenofis 1세 치하 동안(기원전 1558~1530년) 이집트의 영향력은 시리아-팔레스티나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멘호테프(아메노피스) 4세(아케나톤Akhenaton 혹은 에크나톤Ekhnaton. 기원전 1370~1352년)는 종교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후계자 투탕카멘Tutankhamon(기원전 1352~1344년)에 의해 중단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온전하게 발견되었다. 제19왕조에서는 세티Seti 1세(기원전 1312~1298년), 람세스Ramses 2세(기원전 1298~1235년), 메르네프타Merneptah(기원전 1235~1224년) 같은 파라오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마지막 시기에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7) 후기 혹은 말기 시대(제21-30왕조. 기원전 1085~333년)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시대에 해당되며 권력이 약해 경쟁 왕조들이 생겨났다. 이집트 내 권력과 다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축소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이 타하르카Taharqa(혹은 티르하카Tirhaqa. 기원전 689~663년. 제25왕조의 파라오) 치세 동안 이집트를 침략해 이집트 북부를 점령했다. 프삼티크Psammetico 1세(기원전 664~610년)는 이집트를 아시리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제26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기원전 525년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Cambise에게 점령당했다. 사실 제27왕조는 페르시아군주들로 대표되며, 재건을 위한 힘없는 시도들은(제28-30왕조) 페르시아인들의 복권을 막지 못했다. 결국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serse 3세는 기원전 341년에 이집트 지배를 재확립했다(제31왕조). 페르시아제국에 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승리와 함께 이집트는 결정적으로 이민족의 지배로 넘어가는데,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인 라고스Lagidi(혹은 프톨레마이오스Tolomei) 왕조(기원전 321~30년), 그다음에는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3. 고대 오리엔트의 주요 사건들
기원전 17-13세기
3.1 히타이트족, 후르리족, 카시트족, 힉소스족의 축출
(기원전 1600~1575년경)
1) 기원전 18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현재의 터키 동쪽 지역에 위치한 할리스Halys 강 상류의 왕국들이 연합하여 아나톨리아에 히타이트족 국가를 형성했다. 왕국의 수도는 하투사Hattusha였고 왕들은 자신들 세력을 남동쪽, 즉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확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두 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주쳤다. 북쪽에는 코카서스 지역 출신의 후르리족이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언어는 셈족 계통도 인도-유럽 계통도 아니었다. 남쪽(바빌로니아 지역)에는 자그로스 혹은 코카서스 산악 지역 출신의 카시트족이 들어왔는데, 카시트족의 첫 번째 왕은 기원전 17세기 간다시Gandash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카시트족은 바빌로니아왕국 외곽 지역에서 살았던 것 같다.
2) 기원전 1580년경 이집트에서 테베의 제17왕조는 힉소스족과 전쟁을 시작했다. 세케넨레Sekenenre와 카모세스Kamose가 전투를 이끌었다. 뒤이어 제18왕조의 시조 아모시스는 아바리스(힉소스족의 수도)에서 힉소스족을 무찌르고 팔레스티나 남부의 사루헨Sharuhen에서 결정적으로 격퇴시켰다.
3.2 고대 히타이트왕국의 확산과 바빌로니아왕국의 붕괴
(기원전 1575~1530년경)
1) 무르실리스Murshil 1세 치하에서 히타이트족은 알레포와 카르크미스를 점령하며 자신들의 지배력을 시리아까지 확장했다. 이 히타이트 왕은 바빌론까지 원정을 감행했지만 확고히 복속시키지는 못했다(기원전 1530년). 그러는 동안 후르리족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미탄니Mitanni라는 나라를 세우고 와수카니ashshukani/Washshuganni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 도시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미탄니의 몇몇 귀족 이름은 분명히 인도-유럽 계통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는 그 안에 인도-아리안 계층이 존재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후르리족이 이민족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바빌로니아왕국은 북쪽으로 미탄니의 존재뿐 아니라 다른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동쪽으로는 카시트족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과거의 독립을 회복한 엘람 외에도 고대 수메르왕국에 해당하는 지역의 자치권을 회복하려는 ‘해양왕조’(해양은 페르시아 만을 지칭)도 견제했다.
2) 동시대에 이집트는 아모시스와 아메노피스 1세 때 누비아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강한 상업적 연대로 인해 이집트의 영향력이 팔레스티나와 비블로스에 이르기까지 넓어졌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파라오들이 이 지역에 정치적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3.3 바빌로니아의 카시트왕조. 고대 히타이트왕국의 쇠락.
이집트와 미탄니의 충돌(기원전 1530~1510년경)
히타이트의 왕 무르실리스 1세의 침략 이후 바빌로니아왕국 상황은 상당히 어지러웠다. 카시트 왕 아르굼Argum 2세는 기원전 1520년경 이 지역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은 두르 쿠리갈주Dur-Kurigalzu에 왕궁을 세운 쿠리갈주Kurigalzu 1세(기원전 1400년경)다. 그는 북쪽으로는 아시리아, 남쪽으로는 엘람과 ‘해양왕조’까지 성공적으로 원정을 벌였다. 이 시기에 히타이트왕국은 기울고 있었다. 사실 무르실리스 1세의 통치 이후에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반면 미탄니의 세력은 커졌다. 슈타르나Shutarna(기원전 1500년경) 왕과 함께 시작된 확장 정착은 카르크미스, 알레포 그리고 누주Nuzu(현재의 키르쿠크Kirkuk 근처)까지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미탄니의 확장은 이집트와의 충돌을 야기했는데, 이집트는 그동안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기 때문이다. 투트모세Tutmosi 1세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군사 원정을 벌였다(그뿐 아니라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3.4 미탄니와 이집트 사이의 전쟁. 거대 권력들의 균형.
히타이트 신왕국의 강화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68~1436년경)는 므기또에서 카데스Qadesh의 왕이 이끄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왕들의 연합군과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했다. 뒤이어(기원전 1456년경) 카르크미스에서 미탄니왕국을 격파했다. 이집트와 미탄니의 충돌은 아메노피스 2세(기원전 1436~1413년) 때에도 계속되었으나, 결국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어 투트모세 4세(기원전 1413~1405년) 때 두 국가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화해는 파라오와 미탄니왕 아르타타마Artatama 1세의 딸 무테무이아Mutemuia의 결혼으로 성사되었다. 그 뒤에 아메노피스 4세(기원전 1367~1350년)는 미탄니의 왕 투슈라타Tushratta의 딸 타두 케파Tadu-Khepa와 결혼했다. 아메노피스 4세는 새로운 수도 아켓 아톤을 건설했는데, 그 유적이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파라오의 외교 문서고가 발견된 것인데, 거기에는 시리아-팔레스티나와 다른 고대 오리엔트 속국의 왕들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 있다. 텔 엘 아마르나의 편지들에 따르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이집트의 권위가 의심스러워졌는데, 그런 이집트의 쇠약은 미탄니왕국 때문이 아니라 히타이트 세력이 다시 커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히타이트 왕 슈필루리우마Shuppiluliuma는 미탄니왕국을 속국으로 삼은 반면 아시리아는 아슈르 우발리트Ashur-uballit 1세 때 단기간 동안 바빌로니아까지 지배력을 확장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3.5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충돌. 아시리아의 약진
이집트 제19왕조는 시리아를 향한 확장 정책을 취했다. 당시 그곳에는 히타이트족이 알레포, 카르크미스(그리고 아마도 우가릿까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무와탈리스Muwatalli가 이끄는 히타이트족을 카데스 근처 오론테스Oronte 강가에서 공격했다. 이 전투는 어떤 의미로든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이집트 문서에서는 람세스 2세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람세스 2세(통치 20년 되던 기원전 1269년경)와 하투실리스Kattushili 3세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히타이트족은 아시리아의 확장에도 맞서야 했다. 아다드니라리Adadnirari 1세(기원전 1328~1305년경)와 살만에세르Salmanassar 1세(기원전 1273~1244년경)는 (히타이트족과 연합한) 미탄니와 북부 시리아(히타이트족의 지배를 받던)의 영토를 정복하려고 여러 차례 군사 정벌을 시도했다. 이 목표는 투쿨티 니누르타Tukulti-Ninurta 1세(기원전 1243~1207년경)가 달성했는데, 그는 카르크미스에서 히타이트족을 격퇴했으며, 바빌로니아 정벌을 승리로 이끌고 약탈을 자행했다. 투쿨티 니누르타 1세가 죽자 아시리아제국은 쇠퇴기를 맞았다. 대략 같은 시기에 히타이트왕국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이집트는 ‘해양 민족들’의 침략에 맞서야 했다.
4. 민족들의 목록
창세 10장
4.1 민족들의 목록
홍수(창세 6-9장) 이후 창세기 10장에서는 땅을 다시 채운 노아의 자손들이 소개된다. 이는 나중에 아브라함 사건들의 배경이 될 민족들의 목록을 형성한다.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계보학적 구조에 따라 묘사되지만 그런 친족 관계는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고려이기에 민족적 현실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야펫과 연관된 북쪽 민족들, 함과 연관된 남쪽 민족들, 셈과 연관된 중앙 민족들이 있다. 분명히 성경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민족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이런 목록이 기원전 8~6세기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짐작케 한다. 창세기 10장에 언급된 이름들은 대부분 아시리아 왕들의 연대기들과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의 저술을 통해 알려진 이름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
1) 야펫의 아들들 : 고메스Gomer는 아시리아 문헌에 기미라이Gimirrai, 그리스 문헌에는 심메리Cimméri족으로 나온다. 마다이Madai는 메디아인들, 야완Iavan은 이오니아인들을 지칭하며 통상 그리스인들이다. 투발Tubal은 아시리아 문헌에는 티바르Tibar나 타발Tabal로 나오며 킬리키아Cilicia(터키의 남동쪽)의 주민들과 함께 기억된다.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티바르인들이라 부르며 흑해 연안의 폰토스Ponto에 위치시킨다. 메섹Mesech은 아시리아어로 무슈쿠Mushku, 헤로도토스는 모스키Moschi라고 부르는데, 그는 이들을 티바르인들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전제한다. 티라스Tiras는 다른 곳에 인용되지 않지만 그 이름은 이집트 문헌들이 투르샤Tursha라고 부르며 대체로 티레니아인들Tirreni, 즉 에트루리라인들Esruschi과 동일시되는 ‘해양민족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에제키엘서 38장 1절과 39장 6절 곡Gog의 국가로 나오는 마곡Magog은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메르의 아들들 : 아스크나즈Askenaz는 스키타이인들(아시리아어 아슈구자Ashguza, 그리스어 스키토이Skythoi)이다. 토가르마Togarma는 아시리아 문헌(티울가림무Tiulgarimmu)과 히타이트 문헌(테가르마Tegarma)에 나오며 여기서 그들이 킬리키아, 카파도키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연역할 수 있다. 리팟Rifat은 밝혀진 바 없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1세기의 히브리 역사가)는 폰토스와 카파도키아 사이의 파플라고니아Paflagonia라고 한다.
야완의 아들들 : 키팀Kittim은 키프로스인데 다른 이름들은 논란이 되고 있다. 도다님Dodanim에 대해서는 로도스인들이라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타르시스Tarsis를 어떤 이들은 스페인 남부, 또 어떤 이들은 사르디니아Sardegna에 위치시킨다. 엘리사아Elisa는 지중해의 한 섬 혹은 반도일 것이다(이탈리아? 키프로스? 에게 해의 어떤 섬?).
2) 함의 아들들 : 에티오피아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쿠슈Kush로 번역되는데 이는 이집트 남쪽 지역을 지칭하며 따라서 누비아를 포함한다. 이집트와 가나안은 잘 알려져 있다. 풋Put의 위치는 아마도 리비아(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소말리아라고 생각하지만)일 것이다.
에티오피아(쿠슈)의 자손들은 아라비아 남쪽의 민족들로, 그중 예멘에 위치하는 스바Saba와 드단Dedan[이사21,13-14; 예레 49,7-8; 에제 25,13에서 테만(테마)Teima과 연관됨], 하윌라Havila(혹은 아윌라Avila. 오늘날 예멘의 산악 지역 카울란Khaulan)는 스바와 함께 셈의 자손들로도 언급되는데(창세 10,28-29), 이는 성경 저자가 서로 다른 전승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왕국의 시조로 알려진 전설적 영웅 니므롯Nimrod에 대한 여담이 에티오피아의 아들들과 연관된다(창세 10,8-12).
이집트(미츠라임Mizraim)의 아들들 : 창세기 10장 13절부터 14절까지 열거된 이름 중 파트로스Patros인을 알아낼 수 있는데 상이집트와 르합Laab인, 즉 리비아다. 납투Naftuch인은 나일 강 삼각주를 지칭할 수 있으며 캅토르Caftor인은 크레타 섬이 분명하다.
가나안의 아들들은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리아-페니키아의 도시들(시돈, 아르왓, 하맛)과 성경에서 팔레스티나 주민들로 늘 거론되는 민족들이다.
3) 셈의 아들들 : 엘람인들이 잘 알려져 있고, 남부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있다. 아수르Assur는 아시리아, 아람Aram은 시리아 사막과 메소포타미아 북쪽 민족들이다. 루드Lud가 가장 불명확하지만 소아시아의 리디아인 듯하다. 아르팍삿Arpacsad은 알려진 바 없다. 이미 밝혔듯이 셈의 아들들 가운데 에티오피아의 아들들로 앞서 지칭된 아라비아 민족들, 즉 스바와 하윌라가 재언급되면서 다른 이름도 첨가된다. 그중 금 때문에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인용되는 신비로운 오피르Ofir 지역과 현재의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 해당되는 하차르마웻Azarmawet을 들 수 있다.
종교적 의미
창세기 10장 민족들의 목록은 성경 저자가 알고 있는 민족들의 한계 내에서 모든 인류가 지닌 자체의 본성과 창조주의 신적 계획에 의해 새겨진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5. 아브라함의 첫 번째 이주
창세 11,26-13,18
5.1 칼데아의 우르에서 하란까지(창세 11,26-31).
하란에서 팔레스티나까지(창세 12,1-7)
창세기에 서술된 아브라함의 역사는 수메르의 고대 도시 우르에서 시작된다. 창세기 11장 28절은 그 도시를 칼데아 우르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대상의 착오다. 이 이름은 기원전 7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이는 이 단락의 저자(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경에 저술했을 것이다)가 이 도시의 이름을 자신이 저술하던 시점에 맞추어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기를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의 역사를 기원전 19세기로 보는 가설이 다소나마 학자들 간에 동의를 얻었으나, 근래의 연구들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다. 역사학적 관심보다는 종교적 관심이 더 큰 성경 기사들은 시대구분을 위한 정확한 기준점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그 이주의 역사를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옮겨 다니던 유목민과 반유목민들의 역사, 관습과 비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집단의 존재와 관습은 역사적으로 매우 오랫동안 존속되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Terach의 씨족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갔을 것이다. 성경 여러 단락에서 하란 지역은 ‘아람인들의 지역’으로 지칭된다(창세기 25장 20절과 28장 2절에서는 파딴 아람Paddan Aram, 창세기 24장 10절에는 아람 나하라임Aram Naharaim으로 명명. ‘두 강의 땅’, 즉 유프라테스 강과 카부르 강 사이에 위치한다). 여기서도 명명법은 기사들이 기록된 시기(고대 근동 문헌들에서 ‘아람’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세기부터 나타난다)를 암시한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 조카 롯과 함께 전 재산을 가지고 하란과 아버지 씨족을 떠나 새로운 땅을 향해 떠난다. 창세기 12장 6절은 다른 지역을 언급하지 않은 채 아브라함이 스켐Sichem(오늘날 나블루스Nablus 근처의 텔 발라타Tell Balâta)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지도에 표시된 여정은 참고만 될 뿐이다. 고고학적 유적은 스켐에 기원전 4000년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보여 준다.
5.2 팔레스티나와 이집트(창세 12,8-13.18)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도착했음에도 아브라함은 계속 반유목민으로 살아간다. 베텔(창세기 35장 6절에는 베텔의 고대 이름 루즈Luz가 나온다. 오늘날 이 지역은 베이틴Beitîn이라 불린다)과 아이(오늘날의 에트 텔et-Tell)사이의 산악 지역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헤브론 남쪽 지역 네겝 방향으로 내려간다(창세 12,9). 몇몇 이집트 문헌에 따르면 유목민들은 이집트로 피신하곤 했는데, 아브라함도 가뭄이 닥치자 비옥한 땅 이집트로 갔다. 성경은 파라오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전한다. 파라오가 사라이를 첩으로 맞이하지만 하느님의 재앙이 내려 남편에게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다(창세 12,11-20).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발길을 돌려 네겝으로 돌아온 다음 북쪽으로 향했고 그 전에 자신이 천막을 쳤던 베텔 근처에 이르렀다(창세 13,4). 여기서 아브라함과 롯은 재산 문제로 더 이상 한 지역에 같이 살 수 없게 되어 헤어지기로 결정한다. 이 일화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다. 롯은 사해 지역에 자리를 잡기로 결정했는데, 성경 본문은 당시 이 지역이 매우 비옥했다고 한다(전설인 듯하다). 롯은 아마도 고모라처럼 사해 남쪽에 위치했을 소돔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 초아르Zoar(벨라Bela라고도 부름)는 더 남쪽이고 성경 본문에서 롯의 영토가 확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은 헤브론 근처의(헤브론에 속했을 수도 있다) 마므레Mamre로 옮겨 갔다.
종교적 의미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역사는 사도 바오로도 기억하는 바와 같이(로마 4장; 갈라 3장) 모든 신자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성경 기사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세상의 역사는 구원 역사로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 구원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활동하시고 인간은 신앙과 무조건적인 순종을 통해 협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6. 네 왕의 습격과 소돔의 멸망
창세 14-19장
6.1 네 왕의 원정(창세 14장), 하가르의 피신(창세 16장)
창세기 14장의 기사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1절에 나오는 네 왕국 중 둘은 식별할 수 있다. 엘람(티그리스 강 동편)과 바빌로니아 지역인 신아르다. 엘라사르는 알려지지 않았고, 고임은 히브리어 일반 명사로서 ‘이방인들’을 뜻한다. 이 네 지역의 왕들 이름은 고대 근동의 다른 문헌들이 증언하는 고유명사들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낼 수는 없다. 성경 저자는 역사적인 지역과 인물들의 이름을 인용하지만 자신의 정보에 대한 연대기적·지리학적 정확성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저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고대 근동의 위대한 왕들이나 민족들보다 더 뛰어난 아브라함의 위대함과 가치였다. 이 기사의 이런 성격은 엘람 왕 크도를라오메르와 연합군이 대적한 소돔, 고모라, 아드마, 츠보임의 왕들 이름이 경멸스런 용어를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사실(베라Bera는 ‘악 안에서’, 비르사Birsa는 ‘악행 안에서’, 신압Sinab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자’, 세므에베르Semeber는 ‘그 이름이 사라지다’를 의미할 수 있다)에서도 증명된다. 묘사된 침략군의 여정은 요르단 강 건너편을 거쳐 중요한 무역로였던 ‘임금의 큰길’을 따라 이어진다. 아스타롯 카르나임은 창세기 14장 5절에서 한 장소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카르나임은 하나의 설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카르나임에서 가까운 아스타롯’을 의미한다. 아스타롯은 시리아의 테실Tesil에서 남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텔 아슈타라Tell 'Ashtera, 그리고 카르나임은 셰이크 사아드Sheikh Sa'ad에 해당된다. 함Ham(암Am)은 현대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지니고 있는 장소인데 이르비드Irbid에서 남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오늘날의 키르베트 엘 쿠레이아트Kirbet el-Qureiât에 해당하는 키르야타임은 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네 명의 왕에게 패배한 민족들(주즈족, 엠족, 르파족, 호르족)의 이름은 신명기 2장(여기서 주즈족Zuzim의 이름이 잠줌밈Zamzummim으로 나온다)에 다시 나오는데, 그들을 그 지역 원주민으로 열거한다. 주즈족과 엠족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는 반면 창세기 36장은 호르족을 묘사하는데, 그들은 세이르 산악 지역에 살았다. 르파족Refaim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죽은 이들 나라의 거주민들(참조: 시편 88,11; 이사 26,14. CEI 이사야서는 히브리어 르파임refaim을 ‘그늘’로 번역한다)이나 전사와 거인들로 이루어진 고대 민족(창세기 14장이나 신명기 2장과 같이)을 지칭한다. 고대 우가릿 문헌들은 이 용어가 죽은 왕들과 영웅들을 지칭함을 보여 줌으로써 성경의 이중 용법을 설명한다. 창세기 14장에 묘사된 네 왕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면 엘 파란에 도착하는데, 이는 현재 아카바 만에 있는 엘랏Elat이다. 그리고 엔 미스팟(‘심판의 샘’)은 성경 본문에서 카데스 바르네아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현재의 아인 카데스'Ain-Kades다. 하차촌 타마르(혹은 하사손 타마르Hasason-Tamar. 에제 47,18-19; 48,28에는 타마르로만 되어 있다)는 현재의 아인 후스브'Ain Husb에 해당한다. 이 지점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가나안 다섯 도시의 왕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성경 기사에 따르면 이 왕들의 반란이 네 왕의 원정을 야기했다. 그들은 롯까지 잡아갔다. 그래서 이를 알게 된 아브라함이 자기 씨족 사람들과 동맹군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북부 단(이 역시 시대를 착각한 듯하다. 판관 19,29에 따르면 여호수아 시대 이후 단 지파가 점령하기 전까지 이 도시는 라이스Lais라고 불렸다)에서 행렬을 따라잡아 롯을 구해 내고 적들을 호바Coba/Hoba까지 추적하여 그의 재산을 되찾았다. 호바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경 본문은 이를 다마스쿠스 북쪽이라 한다. 이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아브라함은 사웨Save 계곡, 다른 말로 ‘왕의 계곡’에서 멜키체덱을 만나는데, 사웨 계곡은 예루살렘(여기서는 살렘이라고 불림) 근처에 위치한다. 이 기사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은 돌아온 뒤 헤브론 근처에 자리 잡은 반면 롯은 소돔 근처로 되돌아갔음을 암시한다.
임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종 하가르와 한자리에 들도록 설득한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여종의 아들은 여주인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하가르는 임신했지만 두 여인 간에 대립이 일어나 하가르는 광야로 도망쳐야 했다. ‘브에르 라하이 로이’(살아 계시고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우물) 근처에서 환시를 본 하가르는 여주인 사라에게 돌아가기로 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다. 성경 본문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가 카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고 전한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베렛이 움므 엘 바레드Umm el-Bâred라면, ‘브에르 라하이 로이’는 카데스 남동쪽에 있음이 틀림없다.
6.2 천사들의 방문과 소돔의 멸망(창세 18-19장)
마므레에서 세 인물의 방문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그해 안에 사라가 아들(이는 하가르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을 낳으라고 선포하신다. 그 후 세 인물은 소돔으로 가고 아브라함이 죄 많은 도시를 위해 중재하는 일화가 나오는데, 소돔에는 의인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소돔에 도착한 두 천사는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그가 초아르Zoar(벨라Bela)로 피신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죽고 롯과 그의 딸들은 산악지역으로 옮겨 갔다. 성경에 따르면 그들이 모압인과 암몬인의 조상이다. 소돔 멸망 기사는 사해 남쪽 지역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들에 대한 어떤 기억을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도시의 유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소돔에 관한 정보들은 전형적인 전설적 색채를 띤다(한때 비옥하던 땅이 황무지로 변하는 이야기는 여러 민속 기사에서 발견된다). 성경 저자는 그런 전승들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특별히 가깝고 친교적인 관계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종교적 의미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명령 이후에 하느님의 약속은 창세기 15장과 17장, 18장에서 반복된다. 기사들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당신께서 하신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을 점점 분명히 드러내는데, 그 약속은 이사악의 탄생에서 처음으로 실현된다.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은 시나이에서 성조들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질 계약의 전주곡이다. 이 계약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뿐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7. 이사악의 탄생부터 야곱의 하란 정착까지
창세 20-29장
7.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이사악의 탄생(창세 20-22장)
1) 창세기 20장 초반에 마므레(헤브론)를 떠난 아브라함이 카데스와 수르Sur 광야 사이의 네겝에 자리 잡는 내용이 나온다. 그다음에 그라르로 옮기는데, 성경은 시대를 착오하여 필리스티아Filistei족의 지역으로 설명한다. 필리스티아족은 기원전 13세기나 12세기에 비로소 팔레스티나에 도착한다. 그라르는 가자와 브에르 세바 사이여야 한다. 다른 이론도 있지만 가장 개연성 있는 장소는 베트 구브린Bet-Guvrin에서 남쪽으로 42킬로미터 떨어진 텔 에슈 셰리아Tell-esh-Sherî'â다. 창세기 12장의 파라오와 관련된 일화와 비슷한 일화가 여기에도 나온다. 그라르 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첩으로 맞아들이지만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해 그녀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낸다.
2) 이사악이 탄생한다. 아브라함이 브에르 세바에 있는 동안 태어난 듯하다. 이사악의 탄생은 사라와 하가르의 갈등에 다시 불을 지피고 사라는 이사악의 상속권을 지키기 위해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한다. 쫓겨난 하가르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녀와 아들의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성경은 이스마엘이 파란 광야에서 자랐다고 전한다.
3) 우물 사용으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고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는다. 이 기사로 브에르 세바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 (어린 양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브에르 세바는 이스라엘의 현대 도시 브에르셰바Beersheva에서 동쪽으로 약5킬로미터 떨어진 텔 에스 세바Tell es-Seba'에 해당한다.
4) 창세기 22장의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쳐지는 사건은 ‘모리야 땅’에서 일어났다. 역대기 하권 3장 1절은 이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건설된 장소와 동일시하고 있다.
7.2 사라와 아브라함의 죽음, 이사악의 결혼(창세 23-25장)
사라는 마므레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틀림없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안장하기 위해 구입한 막펠라Macpela의 동굴이 헤브론 근처에 있다. 그다음 아브라함은 가장 나이 많은 종을 하란으로 보내 그곳에 남아 있는 자신의 씨족 중에서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 오게 한다. 종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호르의 아들 브투엘의 딸 레베카와 함께 돌아왔다. 예비부부의 만남은 창세기 16장에서 이미 언급된 브에르 라하이 로이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역사는 창세기 25장에서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막펠라 동굴 안 사라 옆에 안장되었다. 이 기사가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함께 아버지를 안장했다고 전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7.3 그라르와 브에르 세바에서의 이사악(창세 26장)
창세기 26장 이사악의 생애에 관한 일화들은 창세기 20-21장 아브라함에 관한 일화들과 유사하다. 제 아비처럼 이사악도 그라르에 가고, 레베카의 미모에 혹한 사내들이 자신을 죽일까 봐 그녀를 누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성경이 필리스티아족이라고 부르는(필리스티아족은 기원전 13~12세기부터 팔레스티나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라르 지역 거주민들과 우물 사용을 두고 분쟁이 발생한다. 이사악이 판르호봇(‘넓은 터’ 창세 26,22)이라는 우물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브에르 세바의 남서쪽 와디 루헤이베Wadi Ruheybeh 있다. 브에르 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이사악이 맺은 조약으로 분쟁이 종결된다. 이는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상기시킨다.
7.4 하란을 향한 야곱의 여행(창세 28,1-30,24)
야곱은 이사악의 두 아들 중 동생이다. 성경은 하란을 향한 그의 여행에 두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야곱은 에사우의 분노를 피해야 했다.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와 공모하여 에사우가 받을 아버지의 축복과 장자권, 그에 따른 권리들을 가로챘던 것이다(창세 27장). 또한 아버지 이사악이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의 옛 씨족의 여인 가운데서 아내를 찾아야 했다. 지도에 개연성 있는 여정을 재구성해 보았다. 여행에 대해 성경 본문은 베텔에 머무른 것만 서술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주님이 나타나시어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야곱에게 똑같이 주신다.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라헬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라반의 책략에 빠져 그녀의 언니 레아와도 결혼해야 했고 장인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일해야 했다. 하란에서 야곱의 아들 대부분이 태어났으며, 이들이 이스라엘 부족들의 조상들로 추정된다.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서 아들들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 대물림하던 부족 간의 특별한 관계가 이 성경 기사에 녹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레아 부족(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 라헬 부족(요셉과 후에 가나안에서 태어난 벤야민. 창세 35,16-20). 라헬의 몸종 빌하(빌라) 부족(단과 납탈리), 레아의 몸종 질파 부족(가드와 아세르)이라고 이야기한다.
종교적 의미
이사악의 탄생으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 실현에 이사악의 ‘희생’ 기사가 논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충실성과 아브라함의 순종과 신앙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이사악과 야곱의 역사는 형제간의 속임수나 질투 같은 매우 인간적인 사건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에서 그 자손들에게로 확산됨을 보여 준다.
8. 야곱과 그의 아들들
창세 31-50장
8.1 야곱의 번영과 하란에서의 도망(창세 30,25-32,1)
라반은 야곱에게 제 딸들을 아내로 주는 대가 혹은 선물로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했지만, 야곱은 자신의 능력과(창세 30,37-43) 하느님의 축복 덕분에(창세 31,10-13) 부유해질 수 있었다. 야곱은 장인 가족들과 분쟁을 피하려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도둑을 맞았다고 생각한 라반이 야곱을 추격했고, 야곱은 그를 피해 미츠파Mizpa(‘감시하는 장소’라는 뜻의 이 이름은 여러 장소에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합의에 도달하여 계약을 맺고 각자의 영역에 경계를 표시했다.
8.2 에사우를 만나다(창세 32,2-35,29)
1) 야곱은 미츠파에서 마하나임[히브리어 Mahanayim.‘ 두 개의 진영’을 뜻함(창세 32,8-11 참조). 이에 대한 다른 설명은 창세 32,2-3에 나오는데 ‘하느님의 진영’을 뜻함]으로 옮겨 간다. 마하나임은 야뽁 강 북쪽 동편 연안의 텔 에드 다합 엘 가르비Tell ed-Dahab el-Gharbi(텔 다합 서편)이거나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키르베트 엘 마네Khirbet el-Mahne(지도에 표시한 대로)일 수 있다. 여전히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웠던 야곱은 여기서 에사우에게 심부름꾼들을 통해 선물을 보낸다. 가족과 가축을 먼저 야뽁 강 너머로 건넨 다음 야곱은 혼자 남아 밤에 어떤 신비스러운 인물(천사, 하느님의 사자)과 씨름을 한다. 이 일화는 야곱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하느님께 승리한 자’)과 그 지역의 이름 프니엘Penuel(‘하느님의 얼굴’)을 설명한다. 프니엘은 야뽁 강 서쪽 연안의 텔 에드 다합 에슈 샤르키Tell ed-Dahab esh-Sharqi(텔 다합 동편)임이 틀림없다.
2) 에사우와의 만남은 야곱이 겁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어쨌든 야곱이 에사우와 합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둘은 헤어진다. 에사우는 세이르 지역으로 돌아오는데, 이곳은 에돔인들의 거주지가 될 것이고 에사우-에돔은 민족의 시조가 된다(에돔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36장에 나온다). 반면 야곱은 수콧Sukkot(‘초막’을 뜻함)으로 가는데, 이 장소는 야뽁 강이 요르단 강과 합류하는 에드 다미야ed-Damiya에서 북동쪽으로 11킬로미터 떨어진 텔 데이르 알라Tell Deir 'Alla에 해당된다. 그는 나중에 여기서 스켐으로 옮겨 간다(창세 33,19). 스켐에 정착하기 위한 토지를 평화적으로 구매했지만 그 후 야곱의 아들 시메온과 레위가 저지른 약탈과 학살(창세 34,25-29)은 야곱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야곱은 베텔로 이사하는데, 그곳은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곳이다. 이 여행은 도중에 모든 이교 신이 제거되고 정결 예식이 거행되기 때문에 일종의 순례처럼 묘사된다. 베텔에서 하느님은 그전에 야곱에게 하신 약속들을 재확인해 주신다.
3) 베텔에서 야곱은 남쪽으로 이주한다. 성경 본문이 베들레헴과 동일시하는 에프라타에서 라헬은 벤야민을 낳고 죽는다. 이를 근거로 베들레헴 근처에 라헬의 무덤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참배되고 있다. 이 장소를 예루살렘 북쪽인 라마라고 하는 전승도 있다(예레 31,15; 1사무 10,2).
4) 야곱은 마지막으로 마므레-헤브론에 도착한다. 성경은 여기에 이사악이 아직 살아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이사악도 죽어서 에사우와 야곱, 두 아들에 의해 헤브론 근처에 묻혔다고 전한다.
8.3 요셉의 역사(창세 37-45장)
야곱은 요셉을 스켐으로 보내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간 다른 아들들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스켐에 도착한 요셉은 형제들이 더 북쪽의 도탄Dotan(오늘날의 텔 도탄Tell Dothan. 스켐에서 북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짐)으로 옮겨 갔음을 알게 되었다. 요셉에게 질투와 시기심을 품은 형제들은 요셉을 상인들의 대상(이스마엘인들 혹은 미디안인들)에 팔아넘기고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일을 겪은 요셉은 결국 재상 자리에 오른다. 성경 기사를 통해 그의 거주지를 힉소스인들(이 책 2장, 3장 참조)의 수도 아바리스로 추정할 수 있다. 오랜 가뭄으로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구하려고 요셉의 집에 왔지만 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셉은 형제들로 하여금 그들이 저지른 악의 엄중함을 깨닫게 한 후 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며 마지막에 화해한다.
8.4 야곱의 이집트 이주 그리고 죽음
1) 요셉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야곱과 그의 모든 씨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나일 강 삼각주 동쪽 끝 편에 있는 고센 땅에 자리를 잡았다.
2) 야곱은 이집트에서 죽지만 요셉과 형제들은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막펠라에 있는 아브라함의 묘지로 운반한다. 그렇지만 성경 기사에 따르면 장례식은 아벨 미츠라임(‘이집트인들의 초원’을 의미하지만 본문은 'abel‘초원’과 'ebel‘애도’ 사이에 유사음의 유희를 보이면서 이 이름을 ‘이집트인들의 애도’라고 설명한다)이라고 불리는 고렌 아탓에서 치러졌다. 이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며, 요르단 강 ‘건너편’(성경에서 이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는 강의 동쪽)이라는 설명은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만든다. 이를 전제하면 이집트에서 마므레까지 상당히 이상한 여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의미
야곱의 역사에서 종교적 중심지는 베텔이다. 그가 혼자 도망갈 때 여기서 약속들을 받았고(창세 28장), 재산을 가지고 가족과 돌아올 때 여기서 약속들이 그에게 반복되었다(창세 35장). 따라서 야곱이 베텔로 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모든 우상을 버리라고 명령한 것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오직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로부터 이스라엘이 분리되었음을 설명한다. 요셉의 역사는 하느님의 섭리(의로운 요셉이 겪은 불행과 형제들의 미움으로부터 결국 가뭄으로 구제될 수 있었다)와 인간들의 회개(요셉의 형제들이 했던)에 대한 필요성을 보여 준다.
9.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순례
탈출 1장-민수 19장
지리적·연대기적 해설
이집트 탈출의 출발점은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분명하다. 이는 탈출기 1장 11절을 근거로 얻어 낼 수 있는데, 탈출기를 보면 히브리인들은 도시 피톰과 라메세스 건설을 위해 강제 노동을 하게 된다. 피톰은 텔 엘 아르타비Tell el-Artabî, 라메세스는 아마도 타니스Tanis(오늘날의 산 엘 하가르San el-Hagar. 하지만 힉소스인들의 고대 수도 아바리스, 라메세스, 타니스가 같은 장소를 지칭할 수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칸티르Qantîr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메세스라는 도시명은 람세스 2세(이 책이 채택한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1298~1235년)의 통치를 반영한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은 람세스 2세 시기에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탈출기가 제공하는 다른 정보들에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성경 본문들은 종교적 관심이 우선이기 때문에 역사학자가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는 자료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할 뿐 아니라(가령 당시 파라오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매우 복잡한 문학적 역사도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인들의 여정 중 숙영지로 언급된 장소들을 식별하기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닌데, 시나이 산(호렙 산으로도 불림) 같이 가장 중요한 것부터 그러하다. 전승에 따르면 이 산은 같은 이름의 반도 남쪽에 위치하지만 이 전승은 매우 후대의 것(4세기)이고, 여기 말고 다른 장소라고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하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문제가 복잡한 만큼 그것을 설명하는 가설도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두 개의 이집트 탈출 사건이 반영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집단이 각기 다른 여정을 통해 팔레스티나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이렇게 지형학적 불분명성을 설명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책의 지도에서는 시나이 산의 전통적 위치를 보존하면서 성경 본문이 묘사하는 여러 단계의 개연성 있는 위치를 표시해 보려 했다(많은 경우에 이 장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술의 논리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아무런 확실성도 내세울 수 없다). 독자들은 이 지도들을 성조들의 역사에 관해 그러했던 것처럼, 이집트 탈출 역사를 재구성한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현재의 연구 수준으로 이를 재구성하기란 매우 어렵다) 성경 기사가 묘사하는 여정을 가시화하여 제안하는 보조 자료 정도로 여겨야 할 것이다.
9.1 이집트와 미디안 사이에서의 모세(탈출 1-4장)
이 지도는 이스라엘인들이 강제 노동을 당했던 도시 피톰과 라메세스의 위치를 보여 준다. 성경 기사에 따르면 히브리인이었던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에 입양되었고, 훗날 자신의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인을 살해한다. 그는 파라오의 처벌을 피해 미디안족이 거주하던 광야로 도망간다. 이 지역은 아카바 만 북쪽이었을 것이다. 이 지도는 모세가 무역 대상들이 다니는 여정을 따랐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미디안에서 모세는 결혼을 하고, 호렙 산 지역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길 때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다. 하느님은 그에게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도록 부르셨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되돌아오는데, 탈출기 4장 27절에 따르면 아론은 ‘하느님의 산’(호렙 산)으로 모세를 만나러 나왔다.
9.2 이집트에서 시나이 산까지의 숙영지(탈출 13-19장; 민수 33,5-15)와 시나이 산에서 카데스까지(민수 11-13장; 33,16-36)
1) 이집트 탈출(탈출기 13-14장)
수콧은 이집트 체쿠Tjeku에 해당하는 것이 거의 분명하며, 피톰에서 조금 떨어진 현재의 텔 엘 마스쿠타Tell el-Maskhuta 동쪽에 있는 와디 투밀라트Wadi Tumilat 안에 위치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티나로 가는 가장 빠른 길, 성경이 ‘필리스티아인들의 길’(탈출 13,17)이라고 부르는 해안을 따라 가는 길 대신 에탐 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데, 그곳은 팀사Timsah 호수와 ‘쓴 호수’Bitter Lakes 사이의 구릉 지역에 위치할 것이다. 피 하히롯은 ‘갈대 바다’(그리스어 칠십인역본과 그 후의 번역본들에서는 홍해와 동일시된다) 근처에 있다. 만약 갈대 바다가 쓴 호수에 해당된다면 피 하히롯은 그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 믹돌(‘요새’)과 바알 츠폰은 확실히 식별되지 않지만, 여러 학자는 바알 츠폰을 북쪽 시르보니스Sirbonis 호수 근처에 위치한다고 보는 데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런 위치 추정은 성경에 묘사된 여정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이것이 몇몇 학자가 생각하는 두 개의 전승 이론, 즉 하나는 시나이 북쪽, 다른 하나는 시나이 남쪽이라는 서로 다른 여정을 담은 두 개의 전승이 나중에 한 기사에 합쳐졌다고 보는 이유 중 하나다). ‘갈대 바다’에서 이집트 군대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개입하신다. 히브리인들은 무사히 바다를 건너지만 파라오의 마차와 군인들은 물에 휩쓸려갔다.
2) 갈대 바다에서 시나이까지(탈출 16-19장)
마라(탈출 15,22-26)는 모세가 쓴 물을 단 물로 바꾼 기적이 일어난 장소다. 이는 현재의 아윤 무사'Ayun-Mûsa(‘모세의 샘들’) 오아시스나 아인 하와라Ain Hawâra에 해당한다. 엘림은 오늘날 와디 가란델Wadi Gharandel이라 부르는 큰 오아시스였을 것이다. 민수기 33장 10절에 지목된 홍해 근처의 진영은 라스아부 젤리메/제니메Ras Abu-Zelîme/Zenîme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Sin 광야에서 ‘만나’가 시작된다. 이곳은 데베트 에르 라블레Debet er-Ramle(‘모래 언덕들’)라 불리는 넓은 초지에 해당할 수 있다. 돕카(민수 33,12)는 사라비트 엘 카딤Sarbît el-Khadim 고원이라 추정되곤 하며, 여기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터키석 광산 유적이 있다. 알루스는 와디 엘 에슈슈Wadi el-'Eshsh 계곡 연안이다. 탈출기 17장에 따라 아말렉족과의 싸움이 있었던 르피딤은 와디 레파이드Wadi Refayid에 있었을 것이다. 시나이 광야는 예벨 무사Gebel-Mûsa(‘모세의 산’)라는 산악 지형의 북쪽에 있는 에르 라하er-Raha 고원에 해당된다. 모든 전승은 예벨 무사라는 이름과 이를 성경의 시나이 산(호렙 산)과 동일시한다. 민수기 1장 1절과 10장 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시나이에서 약 1년간 숙영했다. 성경 전승은 시나이에서 십계명과 이스라엘의 사회생활과 종교 생활에 관한 법률들이 선포되었다고 전한다. 법률들은 야훼 하느님과 백성 간의 계약 체결 문맥 안에 배치되어 있다.
3) 시나이 산에서 카데스까지(신명 1,19; 민수 33,16-36)
타브에라(민수 11,1-3)나 키브롯 타아와(민수 11,34-35)는 위치를 알기 어렵다. 현재의 루웨이스 엘 에베리그Ruweia el-Eberig로 볼 뿐이다. 이 기사에서 지명은 지리학적 지칭이라기보다는 서술 기능에 가깝다. 하체롯(민수 11,35)은 현재의 아인 후드라Ain Hudhra일 것이다. 파란 광야(민수 12,16)라는 이름은 성경 전승에서 팔레스티나 남쪽과 시나이 북쪽의 사막 지형을 지칭하며 카데스와 연관되곤 한다. 카데스는 팔레스티나 남쪽의 친Zin 광야와도 연관되는데, 두 지역의 경계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성경 본문은 시나이 서편에 위치한 ‘신 광야’(탈출 16장 참조)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팔레스티나 남쪽의 ‘친 광야;’와 혼동하면 안 된다]. 민수기 33장 18절부터 30절까지는 이스라엘인들 여정에서 여러 지명이 언급되지만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리트마, 림몬 페레츠, 리브나, 리싸(루세이트 엘 네긴Russeit el Negin), 크헬라타(쿤틸레트 엘 쿠라이야Kuntilet el-Quraiya), 세페르 산(예벨 아라이프 엔 나카Gebel 'Araif en-Naqa), 하라다(확인되지 않음), 막헬롯, 밋카, 하스모나(아인 엘 쿠세이메'ain el-Quseime 로 추정).
9.3 정찰대 파견(민수 13-19장)
파란 광야 혹은 카데스에서 모세는 정찰대 열두 명을 가나안 땅으로 파견한다(민수 13,2.26 참조). 지도는 그들이 택했을 만한 여정을 보여 주는데, 성경 기사는 그중 두 지역만 언급한다. 북쪽으로는 헤르몬 근처 르홉으로, 여기서 시리아의 도시 하맛Hamat, 즉 시리아의 하마Hama로 통하는 길이 시작된다. 따라서 르홉은 약속받은 땅의 이상적인 북쪽 경계를 나타낸다. 민수기 기사가 언급하는 두 번째 장소는 남쪽 헤브론 산악 지역이다. 정찰대의 보고는 모세와 하느님께 대항하는 이스라엘의 반란을 야기했는데, 가나안 민족들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반란에 대해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세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38년 동안 그들을 카데스에 머무르게 하는 징벌을 내리셨다. 지은 죄를 보상하려던 이스라엘 백성의 시도는 호르마 근처에서 결정적 패배를 자초했다(만수 14,39-45).
종교적 의미
이집트 탈출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고, 또 그렇게 자유로워진 덕분에 구세주인 야훼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종살이에서의 해방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런 사랑의 모범으로 남게 된다. 계약 사상은 신명기 시대부터 시작하여 갈수록 점점 더 이스라엘과 그들 하느님의 관계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고, 신약에서 ‘새로운 계약’으로 다시 표명되기에 이른다. 원래 목축(해방절)이나 농사(무교절, 주간절, 초막절)에 기원을 두었던 히브리인들의 큰 축제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되었다. 해방절과 무교절은 탈출기 본문에 이미 나온 것과 같이 종살이에서의 해방 순간, 초막절(수콧)은 광야에서 머무는 것, 주간절(오순절)은 시나이 계약 체결과 연관된다. 성경 전승에서 광야에서 머무르는 기간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야훼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시기(예레 2,2; 호세 2,14-15)와 ‘시험/유혹’[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시험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신다(신명 8,2-3 참조)]의 시기라는 것이다. 후대에 기록된 법령집도 시나이 사건들과 모세가 받은 계시와 연관된다. 그 만남이 이스라엘을 하느님 백성으로 만든 순간이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10. 카데스에서 모압 벌판까지.
요르단 강 건너편 정복
민수 20장-신명 34장
10.1 카데스에서 요르단 강 건너편
(민수 20,14-22,1; 33,31-42; 신명 2,26-3,7)
이 지도에 표시된 여정은 여러 성경 본문의 정보를 통합한 것이다(민수 20-22장; 33장; 신명 2-3장). 하지만 성경 본문들이 모든 세부 사항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많은 지역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도의 여정은 여러 세부 사항이 불확실하지만 성경 기사의 큰 줄기에 부합하게 작성했다. 카데스에서 이스라엘인들은 호르 산 방향으로 향하는데, 호르 산 근처에는 모세롯(민수 33,30b; 신명 10,6에는 모세라)이 있었다. 호르 산은 지금의 예벨 마데이라Gebel Madheira로 볼 수 있다. 호르마(정확히 할 수는 없지만 유다의 남쪽 네겝 사막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에서 이스라엘은 아랏 왕에게 승리를 거둔다.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바로 가는 대신, 에돔의 영토를 우회하여 남쪽으로 향한다. 민수기 33장 31절부터 35절에 언급된 숙영지들 중 오직 에츠욘 게베르만 확인되었는데 현재 아카바 만의 엘랏Elat 근처였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보아야 한다. 푸논(민수 33,42)은 현재의 페난Fenan에 해당될 것이고, 오봇(민수 21,10; 33,43)은 아인 엘 웨이바'Ain el-Weiba에 해당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은 제렛 천(오늘날의 와디 엘 하사Wadi el-Hasa. 민수 21,12)에 도착하는데, 제렛 천이 모압 영토의 남쪽 경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모압의 동쪽 경계로 이예 아바림(민수 21,11)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모압 영토를 우회하는 여정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압의 북쪽 경계인 아르논 강(오늘날의 와디 무집Wadi Mujib)에 이르게 된다. 브에르와 마타나(자주 키르베트 엘 메데이이네Khirbet el-Medeiyineh라고 언급되는)는 와디 에트 테메드Wadi eth-Themed 근처였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이스라엘인들은 와디 엘 하비스Wadi el-Habis 연안의 나할리엘(민수 21,19) 방향으로 옮겨 갔다가, 느보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피스가 산(라스 에스 시야가Ras es-Syagha. 민수 21,20) 근처 바못(21,19b)에 도착한다. 여기서 벳 여시못에서 아벨 시팀까지 이르는 모압 벌판에 진을 치게 된다. 성경 기사에 따르면 바못에서 모세는 모압 북쪽의 영토를 다스리던 아모리인들의 임금 시혼에게 사신을 보낸다(민수 21,21. 그러나 신명기 2장 26절에 따르면 이 일은 아르논 강 근처 크데못 광야에서 일어나는데, 이 기사가 더 논리적인 듯하다). 그러나 시혼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부함으로써 야하츠(야하자, 야사. 아마도 현재의 립Libb)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시혼의 왕국 북쪽 경계인 야뽁 강까지 영토를 점령했다. 점령된 도시 중 디본과 메드바가 기록되어 있다(민수 21,30).
뒤를 이어 이스라엘은 야뽁 강 북쪽 지역에 자리한 바산의 왕인 옥과 싸움을 벌인다. 에드레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으로써 그 지역까지 복속시킨다. 신명기 3장 1절부터 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바산 영토의 모든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이것으로 성경 기사에서 약속받은 영토 점령에 대한 첫 번째 단계, 즉 요르단 강 동쪽 지역 점령에 관한 약속이 이루어진다. 모세는 이 영토를 가드, 르우벤, 그리고 므나쎄 지파 일부에게 나누어 주었다.
10.2 발라암의 신탁
바알 프오르(혹은 프오르)의 불충실, 미디안 원정 등은 모압 벌판에서 일어난 일들이다(민수 22-25장; 31장).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은 유명한 점쟁이 발라암을 불러온다. 발라암의 거처는 프토르(민수 22,5)였는데 이곳은 아시리아 문헌들에 언급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연안의 피트루Pitur와 동일한 장소일 것이다(그곳은 ‘아마우Amau인들의 땅’에 위치하지만, 해석이 불확실하다. ‘그의 백성 자녀들의 땅’으로 번역해야할 것이다). 발라암은 암몬과의 경계인 이르 모압에서 발락을 만나는데, 여기서 두 사람은 희생 제사를 바치기 위해 키르얏 후촛으로 옮겨 간다. 그다음에 모압 왕 발락은 발라암이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면서 저주를 내릴 수 있도록 그를 여러 장소(바못 바알, 피스가 산 꼭대기 ‘파수병 밭’, 프오르)로 데려가지만, 발라암은 줄곧 저주 대신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에 축복을 내린다. 발라암의 이름은 요르단 계곡 동쪽의 텔 데이르 알라Tell Deir ‘Alla(일반적으로 성경의 수콧으로 추정된다)에서 발견된 8세기의 단편적 비문에도 등장한다.
모압 평야는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연설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모세의 죽음이 서술된다. 그에게는 약속된 땅을 밟지 못하고 느보 산의 피스가 정상에서 그 땅을 바라보는 것만 허락되었다.
종교적 의미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 가나안 앞까지 도착했다는 이야기로 모세오경을 마무리한다. 성경의 이 첫 번째 부분은 히브리인들의 토라, 율법에 해당된다. 토라는 하느님의 원의(願意)의 가장 전형적인 계시로 여겨졌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라는 요르단 강변을 배경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모세오경을 읽을 때, 모세오경이 약속된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할 임무를 여호수아에게 맡기면서 요르단 강변에서 끝맺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을 지님!) 생애의 기사를 요르단 강변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약속들이 충만히 실현됨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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