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향기
최원현
“할무니, 왜 이쁜 감자꽃을 다 따분당께라우?”
“꽃을 따내줘야 밑이 쑥쑥 든다고 안 그러냐?”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할머니를 따라 밭엘 나갔다. 할머니는 밭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더니 감자밭으로 가 감자꽃을 따기 시작했다. 꽃은 꽃이고 밑은 밑일 텐데 어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니 어미가 감자꽃을 참 이뻐했느니라.” 하시더니 눈물을 훔쳐내셨다. 엄마가? 순간 흐린 기억으로 어머니가 감자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당가 화단에 부러 감자를 심었단다.” 감자를 수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감자꽃을 보기 위해 심었다는 말로 들렸다.
어머니는 내 나이 세 살,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결핵이었다. 형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어머니는 나를 당신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했단다. 하나 있는 핏줄인데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으련만 그걸 막아야 하는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이미 한 자식을 당신이 앓고 있는 병으로 잃어버린 입장이니 눈앞의 자식을 바라보면서도 살을 깎는 아픔으로 그걸 참아냈을 것이다.
하얀 감자꽃을 좋아하셨다는 어머니는 하얀 옷을 즐겨 입으셨단다. 어머니는 당신이 감자꽃이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감자꽃에서 어머니 모습만이 아니라 어머니 냄새까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예쁘진 않지만 함초롬히 무리 지어 큰 송이처럼 피어나면서도 개체로 외로워 보이는 꽃,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의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한 아름다움에 왠지 슬픔의 냄새가 풍겨나는 감자꽃은 오히려 빈약해 보이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감자꽃은 자신을 아름다움으로 피워 올리기보단 저 아래 땅속 열매가 튼실해지기만을 바라며 그곳으로 모든 것을 보낸다.
나는 어머니 모습만큼 냄새도 기억 못 한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품에서 자란 내게 어머니의 냄새는 할머니의 냄새고 이모의 냄새였다. 한데 문득 어머니의 냄새는 감자꽃 향기가 아닌가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감자꽃 향기, 내 어머니의 냄새.
감자는 뿌리식물이라기보다 줄기식물이라고 한다. 땅속의 줄기가 뿌리 열매인 감자가 된단다. 자신의 몸을 땅속 깊이 묻어 땅속 열매로 키우는 사랑, 그렇기에 꽃에서 받아 써야 할 양분도 가급적 억제하고 땅속으로 보내다 보니 피어난 꽃조차 여리고 힘이 없어 보인 것 같다. 영양이 될 만한 건 모두 다 땅속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노랗게 말라가는 하얀 감자꽃, 내 어머니의 삶도 그런 감자꽃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나도 감자꽃을 땄다. 똑똑 목을 부러뜨려 따다가 손에 든 감자꽃을 코끝에 대보았다. 풋내 같기도 한 연한 라일락 향기가 났다. 할머니의 앞치마에 손에 든 걸 버리고 다시 할머니를 따라 꽃을 땄다. 그런데 다시 꽃을 따려는데 감자꽃의 목이 부르르 떠는 것 같다. 순간 내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목숨을 빼앗기는 참담이 어린 나를 통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할무니, 이 꽃 안 따면 안 돼?” 했더니 “따줘야 밑이 잘 든다잖냐?” 하신다. 난 꽃따기를 그만두었다. 꽃이 불쌍했다. 아니 내가 무서워졌다. 손에 쥔 꽃들의 목에서 퍼런 피가 흘러나와 끈적대고 있었다. 퍼런 감자꽃의 풋내 같은 피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 왔다. 엄마의 냄새 같다는 감자꽃 향기, 난 엄마에게 크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손에 묻은 감자꽃 진도 어서 씻어내고 싶었다.
난 그날 이후 감자꽃을 따지 않았다. 할머니도 그 후로 감자꽃을 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당에 병든 딸이 좋아한다고 꽃을 보기 위해 심었던 감자꽃인데 그 딸이 가버리고 없다고 수확을 올리겠다며 퍼런 피 흘리게 그 꽃의 목을 꺾는 이율배반적 행위가 바로 인간의 삶이었다.
얼마 후면 감자꽃이 필 것이다. 시골에 있는 작은 땅뙈기에 무얼 심을까 걱정했더니 후배가 씨감자를 보내왔다. 그걸 아내와 둘이서 심었다. 어떤 감자가 열릴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는 흰 꽃이 피려면 두백감자여야 한다. 감자꽃의 꽃말은 ‘자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
5월이면 유난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감자꽃이 피는 때다. 감자꽃은 씨가 맺혀도 그 씨를 심지 않는다. 결국 꽃이 필요 없는 식물이다. 그래선지 어떤 것은 아예 꽃이 없는 것도 있다. 씨는 씨이되 씨의 역할을 못 하는 감자꽃의 씨, 대신 씨감자의 싹들이 생명의 씨가 된다. 그러나 감자꽃의 꽃말처럼 자애로 넘치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꽃, 땅속 결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감자꽃의 사랑이야말로 어머니의 희생이다.
우리 엄마는 감자꽃이다/ 맛있는 건 모두 다/ 땅속에 있는 동글동글한 자식들에게 나눠 주고/ 여름 땡볕에 노랗게 시들어 가는 / 하얀 감자꽃이다 – 이철환의 <보물찾기>
그러고 보면 나도 어머니처럼 흰 감자꽃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보고파지면 어머니 대신 볼 수 있는 꽃, 연한 라일락 내 나는 하얀 감자꽃 향기가 진짜 어머니 냄새일 것 같기도 하다.
―최원현, 「감자꽃 향기」(북랜드, 최원현 수필선집 『고자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