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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2. 24.(월요일)
호류지(法隆寺)
JR오사카역에서 호류지역까지의 요금은 640엔이다.
호류지역에 내려서 절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전차 안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옆 사람에게 이 차가 호류지까지 가느냐고 떠듬떠듬 물어보고 있었다.
옆의 일본 사람도 잘 모른다고 했다.
이 차가 호류지까지 가는 차 틀림없다고 대답해 주고 나서, 호류지를 가느냐고 한국말로 물어 보니 반색을 하며 그렇다고 했다.
부산대학교 학생인데 군대 갔다 와서 일본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다.
호류지 구경이 끝날 때까지 현정이와 좋은 얘기 상대가 되어 주었다.
호류지(성덕종 총본산)는 서기 607년에 스이코천황과 성덕태자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카루지(斑鳩寺)라는 이름으로 일본서기 스이코條에 기록이 전한다.
시텐노지나 아스카지보다 십여 년 늦게 지어졌으나,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들인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물론 창건당시의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재건된 것이 600년대 말이며 그 건물들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는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을 꼽고 있으나 1300년대 후반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호류지는 봉정사보다 두 배정도 오래된 것이니 참 대단하다.
게다가 보존상태를 보면 봉정사 극락전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건물 12개 동을 포함하여 국보만도 115점에 이르며, 1958점의 중요문화재가 보존되고 있어 이 절만으로도 메머드급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호류지 금당(국보)은 우리 나라 사람인 담징의 벽화가 있는 절로 유명하다.
이곳도 금당영역만 입장료를 받는데, 1인당 1,000엔이다.
(호류지 금당 전경 : 나라市)
아스카시대에 지어진 국보인 금당 안 정면 중앙에 석가모니,
그 왼쪽에 약사여래, 오른쪽에 아미타여래의 금동불상이 모셔져 있는 것은 우리 나라 사찰들의 대웅전의 본존 안치 방식과 같다.
해설사가 다가와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약사여래상은 창건 당시(서기 607년)에 성덕태자의 아버지 요메이(用明)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하였으며,
석가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은 후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석가여래상은 성덕태자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고 했다.
이 금당은 1949년에 대보수를 하다가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난 적이 있다면서 그 때 그을린 기둥의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 때 벽화 등의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고 하면서, 해설사의 포인터는 벽면의 낯익은 벽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그 벽화, 국민학교 책에도 나왔던 통통한 보살의 모습, 바로 그 담징의 호류지금당벽화다.
그러나 해설사의 입에서는 끝내 한국 사람이 그린 벽화라는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국보인 벽화였으며, 소화24년의 그 화재 때에 소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사진을 보고 새로 그린 것이란 얘기만 하였다.
기어이
"저 벽화 옛날에 한국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질문을 했다.
해설사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한국에서 담징이 그렸다고 하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곳에서는 그런 근거를 어떤 문헌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목소리에 꽤나 힘을 주며 말했다.
이 대목에서 설명 잘 들었다 하고 금당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오층탑 쪽으로 향하려는데, 금당과 오층탑 앞에 각각 배례석이 놓인 것이 보였다.
(호류지오층탑 배례석 : 나라市)
막돌로 된 배례석이었다.
우리 나라 절에서 본 배례석들은 사각돌로 다듬어서 연꽃을 새겨 넣은 연화배례석이 대부분인데,
이 곳에는 막돌로 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우리 나라 절에도 이런 것이 어디 있을까?
백제시대 절에는 있을라나? 생각하며 오층탑(일본에서는 五重塔이라 한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류지오층탑 : 나라市)
오층탑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층탑 역시 금당과 함께 아스카시대에 지어진 木塔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후대에 지어진 사천왕사의 탑과 달리 이것은 오래된, 일본 最古(세계 最古)의 목탑이라 사람이 출입하는 것을 막고 있는 모양이다.
어제 사천왕사 탑 함부로 올라갔다가 혼났는데, 아직도 다리 근육이 덜 풀린 듯 아프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불교의 시설물로서 인도에서 처음 생겼을 때에는 원분형(둥그런 무덤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으로 와서 하늘로 높이 올라가면서 塼塔(벽돌로 만든 탑 : 대구의 송림사와 안동의 신세동 전탑 등 우리 나라에서는 5기 정도의 전탑만이 남아 있다)이 많이 만들어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石塔이, 일본에서는 목탑(우리 나라에 목탑은 남아 있지 않고, 황룡사 9층탑이 목탑이었다고 하며, 경주에서 이 탑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는 절마다 탑은 거의 목탑이다.
어쩌다 석탑이 보이긴 해도 탑신석은 없이 옥개석만 쌓아올린 탑이 보였다.
금당영역은 예의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데,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선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며, 주춧돌은 막돌주초로 되어 있다.
(호류지회랑의 배흘림기둥과 막돌주초 : 나라市)
아름다운 모습에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떠오르는데,
나이로 보면 두 배를 더 먹었는데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배흘림(엔타시스)기둥에 대한 설명이 가관인 것은 그리스의 신전건축에서 볼 수 있는 엔타시스기둥이 이곳에 있는데,
그리스와 일본과의 사이에 있는 나라에서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의 것이 일본에 전해졌다고는 할 수 없고,
따라서 이것은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이보다 앞서거나 최소한 동시대의 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도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아름답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리고,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배흘림기둥은 어디서 생겨서 어떻게 흘러 퍼졌나?
그 증거들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또 막돌주초에 대한 설명도 그렇다.
고대 중국인들의 천하관이라 할 수 있는 天圓地方(일본에서는 天圓地角이라고 말한다)의 사상이 반영되어
중국에서는 원주각초(둥근 기둥에 네모난 주춧돌)를 사용하였고, 자금성의 기둥과 주초를 예로 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원주각초를 썼는데, 군위 삼존석 굴의 기둥과 주춧돌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호류지의 막돌주초를 내세워 비교하면서 마치 일본 고유의 양식인 듯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와서 막돌주초가 많이 사용되긴 했다지만,
호류지보다 앞선 경주 황룡사지의 주춧돌이 막돌주초임을 몰라서일까?
그러고 보면 앞서본 배례석이 다시 맘에 걸리기도 한다.
우리 나라 것은 대부분 네모꼴의 연화배례석인데, 이곳에는 모두 막돌배례석이지 않았던가. 허허 참.
몽전은 성덕태자의 처소인데, 사찰의 한 쪽에 자신의 처소를 짓고 생활한 것을 보면 그의 불교에 대한 애착은 짐작할 수 있다.
(호류지의 몽전 : 나라市)
지진이 많아 그런지 일본의 건축물은 기단을 높이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몽전은 꽤 높은 기단 위에 단아하면서도 위엄있게 올려져 있다.
그가 이 '꿈의 궁전'에서 꿈꾼 것이 과연 불국정토였을까?
백제관음이라니?
백제관음당이라는 당우가 있고, 그 안에는 국보 백제관음이라 는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원래는 금당 안의 석가여래상 뒤에 있었는데, 이 곳에 따로 당우를 짓고 모셔놓았다니 백제관음에 대한 대접이 괜찮구나 싶었다.
이름이 백제관음이니 당연히 백제에서 건너간 것일 테지.
높이 약 2미터의 팔등신의 매우 늘씬한 이 보살상은 머리에 유리구슬 장식을 한 동판제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어 관세음보살상으로 보이며, 백제국에서 왔다고 전해지고 있어 백제관음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은, 作風으로 보아 백제의 불상이라 할 수 없고,
또 조선반도에서는 불상의 用材로는 쓰이지 않는 쿠스노끼(楠木 : 녹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점에서도 백제에서 만 들어진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버젓이 백제관음이라 붙여 놓고는 아니라고 하니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제불상의 조성양식과 용재 등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니 여기서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서 공부를 더 하는 수밖에 없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오니, 연도에 동백꽃이 담장을 이루고 있고, 연이어 고운 흙담이 멀리 아스라한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호류지의 토담 : 나라市)
(도동서원의 토담 :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의 토담(보물 제350호)과 비교해 보면 또 다른 맛이 있다.
깔끔하기가 깍쟁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절로 정겹게 느껴지는 데야 어쩔 수 없다.
호류지를 나서면, 이곳이 역시 나라인지라 나라쓰케(우리의 장아찌처럼 채소 과일 등을 절인 음식을 쓰케모노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奈良지방의 쓰케모노를 나라쓰케라 고 부른다.) 가게가 많이 보인다.
전차를 타려면 15분 정도 걸어야 할 판인데, 바로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도다이지(東大寺)로 가는 버스가 있어 올라탔다.
그 부산대 학생은 기차를 타러 간다고 하여 헤어졌다.
JR패스를 끊어 왔으니 이중으로 차비를 물 턱은 없을 것이다.
같은 나라 시내라고 금방 가려나 생각했는데, 기사에게 물어보니 40-50분이 걸린다고 한다.
요금도 760엔씩이나 나왔다.
일본의 시내버스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 나라처럼 고정요금이고 앞문으로 타면서 마에바라이(前拂)인 경우인데, 주로 시내의 단거리 노선의 경우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르며 내릴 때 돈을 낸다.
이런 버스는 뒷문으로 타면서 세이리켄(整理券)이라는 티겟을 뽑으면 거기에 번호가 찍혀 있고, 앞쪽의 전광판에 각 번호에 대한 요금이 나타난다.
승차한 거리가 멀어질수록 요금이 올라가고, 내릴 때 그 번호에 해당되는 금액을 세이리켄과 함께 요금함에 넣고 내린다.
요금함 옆에는 환전기가 있는데, 천 엔 짜리와 오 백 엔, 백 엔 짜리만 환전이 가능하다.
지갑에 오 천 엔 짜리 밖에 없어 이걸 내밀었더니, 기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개인 호주머니와 지갑을 다 뒤져서 겨우 거스름돈을 맞춰 주면서, 앞으로는 큰돈은 환전해서 버스를 타라고 당부했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얘기해 주는 것이 다행이다.
다른 승객들도 별 불평 않고 기다려 주었다.
몇 년 전 미국 보스턴에서 아침 일찍 혼자서 택시를 타고 잔돈이 없어 혼이 났던 생각이 떠올랐다.
요금은 14달러인가가 나왔는데, 백 달러 짜리를 냈더니, 히스페닉계로 보이는 그 운전수가 방크(bank), 방크! 를 외치며 눈을 부라리는데, 아따 얼매나 무섭던지.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
같이 눈을 부릅뜨고, 아침부터 어디에 방크, 방크! 가 열려 있느냐고 하면서 주머니를 다시 뒤져보니 13달러 정도가 나왔다.
이거라도 받겠느냐 하니까 녀석은 빼앗듯이 돈을 나꿔채 갔다.
미국에서 팁도 안 주고, 그것도 요금마저 깎고서 택시를 탄 것은 이것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택시의 진행방향과 반대쪽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뒤통수로 택시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러고도 못미더워 얼른 골목길로 접어들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도다이지(東大寺)
도다이지와 나라공원(일명 사슴공원이라 불린다) 그리고 春日大神社를 가려면, '大佛前春日大社前'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식당에서 우동을 먹었는데 750엔씩 이었다.
우동 한 그릇에 750엔은 일본에서도 비싼 것이다.
관광지의 물가가 비싼 것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 일대는 담장이 없어서 나라공원의 사슴들이 절과 공원, 신사의 경내는 물론이고, 입구의 도로나 상점 앞에까지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관광객이 사 주는 센뻬이를 받아먹는다.
상점에서 500엔을 지불하고 센뻬이 한 묶음을 집어드는 순간, 아까부터 우리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놈이 재빨리 다가 왔다.
(나라공원의 사슴들 : 나라市)
순식간에 센뻬이를 묶은 종이띠까지 빼앗겨 버린 현정이 황당무계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도다이지(관람료 : 대인500엔, 소인300엔)는 정류장 이름도 그렇듯이 엄청난 크기의 불상으로 유명하며, 나라시대인 서기 728년에 창건된 화엄종의 종찰이다.
이 절의 금당인 대불전(국보)은 나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두 번 이나 소실되었고, 1709년에 재건된 것이 현존하고 있다.
재건 당시 벌목에서부터 완공까지 20년이 걸렸으며, 건축용재는 26,000여 본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57mW*50.5mD*48.7mH 규모의 현존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호류지가 세계 最古의 목조건물이니, 목조건축물에 관한 한 일본 사람들의 자부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도다이지 대불전 전경 : 나라市)
이 대불전으로 들어가는 길(參道라고 부른다)에는 네 종류 의 돌을 깔아놓았는데,
중앙에 푸른빛을 띠며 한 줄로 깔려 있는 돌이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산이며,
그 양쪽의 한 줄씩이 중국산,
그 바깥쪽이 한국산,
맨 바깥쪽이 일본산 돌로 깔려 있다.
이것은 불교의 전파루트를 표시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 그렇다.
일본 사람들 중에도 역사인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전혀 없진 않다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제대로 역사인식을 하게 되면, 호류지의 배흘림기둥도, 막돌주초와 배례석,
그리고 목탑의 전파 루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이 되고 말 터인데, 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대불전 안에 모셔진 엄청난 크기의 대불(국보)은 비로자나불이며,
중생에게 지혜와 광명을 주는 부처이며 화엄경의 본존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대불은 서기 743년에 聖武天皇의 발원으로 주조되었으며 752년에 開眼法要式을 거행했다 한다.
공사에 연인원 260만명이 투입되었고, 사용된 구리가 499톤, 도금에 사용된 금이 440킬로그램이나 되었다고 한다.
불상의 높이는 14.98미터, 얼굴 길이 5.33미터, 눈의 길이 1.02미터, 대좌 높이는 3.05미터이다.
크기는 하지만 조각기법이나 전체적인 균형미 등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의 전매특허인 지권인(한쪽 손의 인지를 다른 손으로 감싸쥐는 수인의 한 가지이며, 골프 그립과 비슷한 모양이다)을 하지 않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손을 가슴까지 올려서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게 하는 모양이며, 두려움을 없애 주는 수인이다)을 하며,
왼손은 여원인(손바닥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는 모양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수인이다)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내 짧은 상식으로는 자꾸만 아미타불상인 것 같아 보이는데, 공식적으로 비로자나불상이라고 하니 근거가 있겠지.
이 불상은 전각의 중앙에 봉안되어 있어서, 사방을 돌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래 전에는 불상을 다 이런 식으로 조성했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불상을 불전의 뒷벽에 붙여서 조성하게 된 것은 관리편의상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불상의 뒤쪽으로 돌아가면 뭔가 크기로 사람을 놀라게 하려 는 것인 듯한 곳이 있다.
(도다이지 대불전 기둥의 구멍 : 나라市)
건물 내 高柱의 밑둥에 커다란 사각형의 구멍을 내 놓고 그 사이로 사람이 기어서 빠져나가게 해 놓았다.
어린이가 거길 통과하면 야뇨증에 효험이 있고, 액을 물리친다나.
현대적 의미로는 비만측정기구일 것이다.
여길 통과하지 못한 아이는 장래 '생활습관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겁을 준다.
어쨌던 하나의 기둥에 난 구멍으로 사람의 몸이 통과할 수 있으니 그 기둥의 굵기는 엄청 커야 할 것이다.
현정이 그리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기어이 그 구멍을 통과하고 나더니 또 한 번 황당하게 웃었다.
입구에서 현정이 오마모리(お守り;기복이나 호신의 뜻을 표시하여 몸에 지니고 다니는 패찰 같은 것) 하나를 400엔 주고 샀다.
대불전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가서 언덕 위에 종루(국보)가 있다.
종(국보)의 무게는 26톤으로 성덕대왕 신종(22톤)보다 더 나가며, 전체 모양과 표면의 문양 등으로 보아 전형적인 일본종이다.
도다이지 창건 당시인 나라시대에 주조된 것으로서, 일본의 3명종으로 꼽히며 '奈良太郞(나라타로)'라는 애칭으로 불린다고 한다.
(도다이지의 범종 : 나라市)
동양의 종은 중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각기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해 갔는데,
중국종, 한국종, 일본종의 비교는 내일 혼슈의 서해안(우리의 동해에 면한)에 있는 쓰루가로 가서 죠구진자(常宮神社)란 곳에 있다는 신라종의 소리를 들어보고 해야겠다.
조금 더 돌아가면 대불전의 뒤쪽에 쇼소인(正倉院)이 있다.
正倉院은 우리 나라와도 관련된 역사 유물이 엄청나게 감춰져 있는 황실의 비밀창고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져갔다는 황실의 '三種의 神器'(동경, 동검, 동과)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보물이 있는지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일년에 한 번씩 몇 점씩 공개하는 기간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곳을 모두 공개하면 황실의 정체성이 다 탄로나 버리기 때문에 공개를 못한다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믿고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닌 듯 싶다.
과거에는 쇼소인을 도다이지에서 관리했으나, 근래에는 궁내청으로 관리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더욱 보안을 철저히 하자는 취지일 것이다.
저 쇼소인의 문이 활짝 열리는 날이 일본이 비로소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날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JR나라역에서 보통열차를 집어타고 교토로 향했는데, 단선철도에다 완행은 역시 완행인지라 시간이 무척 걸렸다(요금 690엔).
(나라-교토간의 보통열차 : 나라市)
시간이 걸리다 보니 예정에 없던 일도 일어났다.
현정이 소변이 마렵다 하여 중간의 작은 역에서 내렸다.
개찰구를 나가서 오줌누고 차표를 다시 끊어서 타야 되나 싶어서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마침 플랫폼 한 쪽에 화장실이 있다고 했다.
기왕 내린 김에 모두 함께 이 곳 시골 땅에 施肥를 했다.
다음 열차시각을 물어 보니 10분 정도 뒤에 반대편 플랫폼에서 타라는 것이었다.
반대편에서 타면 거꾸로 가는 거 아닌가 의아해 하면서 기다리니 교토행 열차가 왔다.
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매번 홈의 방향을 반대로 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상하행의 열차가 거의 정확하게 교대로 들어오고 있었고, 직전에 열차가 나간 쪽의 홈으로 반대편 방향의 열차가 들어오게 하면 선로의 키리카에(切換)를 매 한 번 씩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웃지 않을라나 모르겠다.
완행열차가 2시간 가까이 시간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교토역에 내리자 바로 역 앞의 교토신한큐호텔에 체크인하고(트리플룸 조식포함 22,900엔) 밥 먹으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