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에 엉겨붙은 벌레들이 급류에 떠밀리다가 ‘따악’ 바위에 부딪치면서 양쪽으로 쪼개졌다. 강변으로 쏠린 가장이의 벌레들은 오그르르 수풀로 기어올라 생명을 이어갔고 강물로 쏠린 나머지 한쪽은 꾸불텅 자맥질로 모두 세상을 마감했다.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생명체 하나, 비탈길에 뿌리 내리며 빗장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날아온 돌’로, 충청도 공주에 자리매김 중인 송창희 선생(49세) 이야기이일 뿐이다.
먼저 태생적 가난이다.
70년대 소도시 골목길 언덕바지 끝물 하꼬방에 ‘엄마 없는 가족’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비가 샜고 푸석푸석한 바닥은 냉골이었고 당연히 학비도 없었다. 주 메뉴는 된장죽이었다. 된장에 쌀을 한 주먹 넣고 푹푹 끓여서 먹었고 쌀 항아리가 바닥나면 밀밥으로 때우거나 녹말가루를 잼처럼 휘휘 풀어서 빈속을 채웠다.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으므로 점심시간이 되면 햇볕을 쬐거나 공복을 견디기 위해 책에 파묻히곤 했다. 고개 들면 눈알이 시큰거리며 먼지 알갱이들이 누렇게 부유하는 것 같았다.
중량교 뚝방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 이혼 후 구리시로 이사를 갔는데 아버지는 전학수속을 하지 않았다. 왕복차비로 하루치 버스표 딱 네 장(40원)만 주었다. 구리시 태평동에서 서울시 이문국민학교까지는 등굣길만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씩만 다녔고 그마저 중량교에서 4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날마다 지각을 했고 2교시 종이 울리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육성회비나 미술 준비물 때문에 ‘업드려 뻗쳐’에도 이력이 붙었지만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던가, 25원으로 학교를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학교까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돈을 빌릴 친구도 없었고 행여 꾼다고 치더라도 갚을 방도도 없었다. 하굣길은 구리시에서 태평동까지 걸었고 다섯 시간 후 부르튼 발바닥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 저무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첫 마디는.
“왜 늦엇! 집안 일이 산더미 같은데. 시꺗!”
생존이 바빠서 슬퍼할 여가는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설거지를 끝내고 곧바로 용돈을 만들기 위해 종이줍기에 나섰을 뿐이다. 종이를 펴서 노끈으로 묶어 고물상에 넘기면 ‘달고나’ 한 조각을 깨물 수 있었다. 길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이 모두 돈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날마다 길만 쳐다보았다. 그랬다. 언제부터였나, 길바닥에는 돈이 되는 쓰레기와 돈이 안 되는 쓰레기로 나뉘어 있었다. 그때.
“일루 와봐라. 얼라야.”
얼핏 보니 원조 넝마 양아치다. 소년보다 목 하나쯤 크고 울퉁불퉁한 손에는 갈고리 집게가 달려있다. 저 갈고리에 찍히면 머리통이 고깃덩이처럼 뚝뚝 떼어질 것 같다. 먹잇감이 된 소년은 바짝 얼어붙었다.
“앞으론 오지 마세요. 내 구역이니까. 한번만 걸리면 눈깔을 후빈당.”
하더니 집게로 꿀밤을 톡톡 먹인 것 같은데 실로 무지하게 아팠던 것이다. 그 후로는 원조넝마를 피해 고철을 주우러 다녔다. 고철은 비를 맞아도 썩지 않으므로 한참 쌓아놓았다가 한꺼번에 팔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움직였다. 열세 살에는 가방 장식용 쇠를 찍어내는 프레스공장에서 일했다. 우주표 가방 공장 쇠고리에 반짝반짝 멕끼를 칠하는 일이다. 열여섯 즈음일까. 가죽장갑 공장에서 일하면서 새새틈틈이 책을 보았다. 더 이상 밀리면 끝이므로 수시로 ‘자존’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려 보는 것이다.
당연히 구두닦이 코스도 거쳤다. 주택은행 청계지점 계단 옆에서 구두코에 침 뱉으며 광을 내는데, 차장급 넥타이 사내가 반질반질한 구두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니는 이 계통으로 성공할 것 같다.”
그 위로의 말이 표창처럼 얼굴을 찍었다. 소년은 받았던 구두를 팽개치며.
“이게 수단이지 목적이 아닌데요.”
울멍울멍 표창을 되돌려주었다. 금테 안경의 사내가 입술을 이죽대다가 등을 돌렸지만, 그 상처 받은 소문이 은행 안으로 퍼져 너도나도 신발을 챙겨주는 부메랑의 덕도 보긴 했었고.
첫 사랑 소녀와의 조각난 사연도 순전히 구두통 때문이었다.
은행원들의 구두를 한아름 안고 포만감으로 내려오다가 하필 소녀의 안경잡이 친구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숨긴 것도 아니고, 실토하지 않았을 뿐인데 하늘이 와르르 무너졌다. 머리가 하얘진 채.
“내가 얘기할 테니 먼저 얘기하지 마요.”
당부했다. 안경잡이 소녀도 입을 다물듯 분명히 눈망울울 끔먹였었다. 그러나 사랑의 반전의 드라마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연의 빈 가슴을 채우지 못한 채 6년 내내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돈벌이에 눈을 뜨기도 했다.
그래도 책이 좋았다. 복싱을 배운 후 깝죽대던 고교생들을 두들겨 패던 외로운 사춘기가 지나고, 열아홉 이후 최초로 월간지 ‘신동아’를 접했다. 다음으로 ‘철학에세이’ ‘노동자의 철학’을 거쳐 ‘노동의 새벽’을 만나면서 막연하던 초점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 ‘말誌’ 정기구독을 하면서 비로소 ‘세상 속의 나’를 인식한다. 가난은 나의 게으름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 문제라는 것.
청계천 ‘나까마라’ (시계의 특수전지 밧데리)를 만지면서 돈을 모을 즈음 6월항쟁을 만났다. 최루탄 인파에 흡입되었고 마침내 세상의 일원이 되면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 달 생활비가 10만원인데 몽땅 털어 한겨레 주식을 샀다가 나중에는 아예 한겨레신문 지국장으로 몸을 옮겼다. 개척교회 목사님을 비롯한 먹물 지인들한테 모자란 부분을 채우며 최연소 지국장으로 등록된 것이다.
그리고 지역 언론 이슈화를 위해 왜곡보도 백서 같은 전단지나 쪽지 문화를 만들어갔다. 6월항쟁 직후, 불안보다 깨어있는 기쁨이 크던 시국이다. 이문동, 휘경동, 회계동에서 알바생들과 움직이던 중 정보과 형사의 방문을 받는다.
“지국장님 어디 계쇼?”
“제가 지국장입니다.”
“아니, 지국장 말이요. 지국장.”
“…….”
담당 형사는 그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한사코 바깥에서 유령 지국장을 찾으려 애를 쓴다. 허름한 외모부터 도대체 ‘장급’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직도 자신이 그런 투명인간 팔자인 줄만 아는 중이다. 그의 서리 머리칼도 은어 떼 빛깔로 모아지지 않아서 그저 지푸라기처럼 끌어안고 산다. 후광으로 지켜주는 ‘키다리 아저씨’는 애초부터 없었으므로 늘상 독고다이 생활이 체득화된 탓이다.
이제 지천명이다. 그는 지역에서 노인의료기구 사업을 하며 평화비행단에 동참하기 위해 강정마을을 다녀왔고 희망꿈 학부모회의 일원으로 교육청 앞 집회에 나가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객지의 좌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벗들을 불러 술안주를 내놀 때 그의 헌신성은 빛이 난다. 우리들은 그니가 칼질한 김치찌개나 쭈끄미도 먹었고 호프집에서 나오는 과일 사라다와 병어무침도 먹었다. 나는 그의 술잔을 받으며 가끔 멍든 가슴 삭히곤 한다. 언제부터였나, 중년 이후 소도시 엄지들의 행보를 받춰주던 그가 ‘엄지의 싹’으로 바뀌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저 골목길 어디쯤에 가난한 중년들을 위한 술집 쉼터를 운영하고 싶다고 멀뚱하게 밝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