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太師公 할아버지
우리 전의이가의 시조는 이도자(李棹)이시다.
처음 함자(銜字)는 치자(齒)이며,
관직은 고려 개국익찬이등공신(開國翊贊二等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筐太師)로,
전산후(全山侯)에 봉하여 졌으며, 시호(諡號)는 성절공이다.
이를 연유로 우리자손들은 통상 시조를 태사공(太師公)할아버지로 부르고있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가 삼한을 통합할 때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고자 금강에 도달하였으나
때마침 장마철이라 금강물이 불어서 건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공께서는 정성을 다하여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하였고
태조 왕건은 심히 기뻐하여 함자를 도(棹)자로 사명(賜名;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이름)
하였다 한다.
또한 고려 태조가 출병하던 초기에 공이 陣中에서 軍略을 세워 왕의 계책을 크게 도왔으며
이로인해 응양군대장군으로 발탁되었고, 끝내는 왕을 보좌하여 삼한통합을 이룩하였다.
(조선 성종, 후손 휘 麟이 쓴 보첩서문)
※ 본관의 생성
태사공께서는 전산후에 봉해진 후, 근거지인 공주에서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定着) 세거(世居)하였으며,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전의(全義)로 정하고 세계(世系)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시조 태사공의 生卒年代는 알려지지 않았다.
부인은 태사공의 관직품계에 따라 부부인(府夫人)이라 칭하며,
합천홍씨(陜川洪氏)이고, 친정아버님은 재신(宰臣: 지금의 장관급)인 홍숙(洪淑)이다.
자녀는 생 1자로 2세인 정용위장군 강(康)이다.
태사공의 묘역(墓域)은 충남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 산3의1 원양한평(元量閑坪),
정좌(丁坐 동북향)에 모셔져 있다.
중종 임진년(1532년)에 15세손 구령(龜齡)님이 본도감사(本道監司)로 계실 때
최초로 갈석(碣石: 비석을 갈석이라함)을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 저절로 부러졌으므로
선조 무인년(1578년)에 본현 현감 15세손 인재(仁宰)님이 다시 음각으로 된 비석을 세웠고 ,
이것 역시 시일이 오래됨에따라 글자가 희미하게 되어 숙종 정해년(1707년)에
22세손 홍조(弘肇)님이 본도병사(本道兵使)로 계실 때 다시 비석을 세웠으므로
전후 두개의 비석이 있으며,
묘역 입구에는 서기1949년(丁亥)에 28세손 성로(聖魯)님과 태로(泰魯)님의 주관으로 남한 각지에서 여러 일가님들의
정재(淨財)를 모아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안동 김승지(金承旨) 호(號) 동강(東江) 영한(寧漢)님이 지으시고
글씨는 28세손 참판(參判)정렬(貞烈)님이 쓰셨다.
※ 宗廳 永思齋 (종청 영사재)
전의이씨의 종청인 영사재는 전의면 유천리 양한동 403번지에 건립하였고,
경내 景遠祠(경원사: 사당)에 1세 태사공의 위패를 비롯하여 8세까지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으로 春 3월2일, 秋 10월 2일에 시향(時享)을 올리고 있다.
< 사진. 약도 출처: 전의이씨성보(1990) >
이 내용은 전서공의 증손 서령공 휘 진간 7세손 휘 찬의 14세손으로
상자항렬을 가진 일가님(이름 모름)의 자료에서 사진 등 일부를 2005. 1. 발췌 참고하였다.
일가님의 높은 식견과 열정에 감사드리고,
많은 것을 배우고자 소통의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