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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 경상도(慶尙道) 초계군(草溪郡)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 경상도(慶尙道) 초계군(草溪郡)
동쪽으로 창녕현(昌寧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쪽으로 합천군 경계까지 13리이며, 남쪽으로 의령현(宜寧縣) 경계까지 28리이고, 북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3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이 팔계(八溪)라 고쳐서 강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이 그대로 합주에 예속시켰다. 명종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이 현 사람 정수기(鄭守琪)ㆍ변우성(卞遇成)이 왕실(王室)에 공이 있었으므로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좇았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초팔혜(草八兮)ㆍ팔계(八溪)ㆍ청계(淸溪).
【성씨】 본군 정(鄭)ㆍ변(卞)ㆍ주(周). 대여곡 표(表).
【형승】 사방 산이요 여덟 줄기 물이다. 군의 사면이 모두 산이면서 평평한 들판이 넓다. 대암(臺巖)ㆍ무월(舞月)의 여러 골 물 여덟 가닥이 구불구불하여 역력히 헤아릴 수 있다. ○ 서거정의 관가대(觀稼臺) 시에, “사방의 산은 군을 에워서 가고, 여덟 줄기 물은 마을을 안고 흐른다.” 하였다.
【산천】 청계산(淸溪山) 군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학산(巢鶴山) 군 북쪽 30리에 있다. 무월현(舞月峴) 군 서남쪽 10리에 있다. 대암산(臺巖山) 군 서쪽 10리에 있다. 고법현(高法峴) 군 동남쪽 14리에 있다. 구미현(仇彌峴) 군 북쪽 34리에 있다. 미타산(彌陁山) 군 남쪽 16리에 있다. 의령현 편에도 나온다. 황둔진(黃芚津) 군 북쪽 10리에 있다. 합천군 남강 하류로서 동쪽으로 흘러 감물창진(甘勿倉津)으로 들어간다. 감물창진 군 동쪽 24리에 있다. 곧 고령현 개산강(開山江) 하류이며, 남쪽으로 흘러서 의령현 경계로 들어간다.
【토산】 석청[石淸蜜]ㆍ닥종이[楮]ㆍ칠ㆍ감ㆍ대[竹]ㆍ산무애뱀[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호두[胡桃]ㆍ잣[海松子]ㆍ석류ㆍ붕어[鯽魚].
【봉수】 미타산 봉수 남쪽으로 의령현 가막산(可莫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합천군 미숭산(美崇山)에 응한다.
【누정】 감정루(鑑政樓) 객관 동쪽에 있다. ○ 고려 김태정(金台正)이 누 앞에 섰는 굽은 소나무를 읊은 시에, “벼슬 굴레 벗어나지 못한 백발 첨지는, 허리를 굽힘을 시세의 풍습 따라 하는데, 세상 일과 상관 없는 푸른 수염 첨지는, 어떤 사람 눈에 들려고 매양 몸을 굽히나.” 하였다. ○ 이인복(李仁復)이 화답하기를, “빈 객관에 병든 첨지 접대하는 사람 없는데, 노송은 오히려 맑은 바람 보내니 기쁘다. 이 몸은 굽었을망정 마음은 굽히기 어려우니, 우리 당에 어찌 더 직궁(直躬)을 물으리.” 하였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이 누 앞 굽은 소나무를 읊은 김태정의 시에 화답하기를, “일찍이 동서로 유랑하는 첨지로 표방했는데, 문서 더미 속에서 가을 바람을 두어 번 맞이했다. 바다 파도 소리가 미타산 새벽에 용솟음치니, 문 밖에 정신 나는 굽은 소나무 소리더라.” 하였다. 낙민정(樂民亭) 군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구름 낀 봉우리가 동쪽으로 뻗었고, 여러 산골 물이 합쳐져서 큰 냇물로 되어 합천ㆍ초계를 지나 강에 들어간다. 두 고을 경계에 들판이 넓고 산이 열려서 기상이 맑고 멀며 사랑스럽다. 그러나 빈객이 왕래할 때에 이 경계에서 영접할 곳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 지가 오래였다. 홍무(洪武) 계유년에 계림(鷄林) 이인실(李仁實) 후가 초계의 지군(知郡)으로 와서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처리되었으며, 다음해에 풍년이 들었다. 이에 여러 사람에게 의논하여 놀고 있는 자들을 부려서 기한을 정하고 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서 기숙하기에 편리하고, 헌함을 만들어서 관람하는 데에 상쾌하게 하였다. 북쪽으로 가야산이 바라보이고 남쪽으로 무월(舞月)이 보인다. 갑산(甲山)이 왼쪽에 있고 황산은 오른편에 있어서 푸르른 것이 뾰족뾰족 책상과 자리 위에 들어오고, 냇물은 서쪽으로 절벽을 돌아 동쪽으로 끊어진 언덕을 안고 돌아서 소용돌이치는 물방울이 술상 사이에 튄다. 못에 연기 끼고 모래에 달 비치며, 물가에 풀 푸르고 언덕에 꽃이 붉다. 농사하는 자는 노래하고 고기잡는 자는 피리 불며, 길가는 자는 노래하여 기쁘고 즐거운 광경이 처마 밑에 떠나지 아니한다. 정자 서쪽 두어 마장 되는 지점에는 길이 절벽에 났는데 쳐다봐도 굽어봐도 천 길이다. 길이 아주 좁아서 길가는 사람이 서로 피하여 가기를 수백 보 지난 다음이라야 험한 곳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자가 반드시 이 정자에 휴식하게 되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즐거움을 즐기는 자는 백성이 또한 그의 즐거움을 즐긴다.’ 하였다. 이후가 이 정자에서 즐거워하면서 백성과 함께 하였으니, 백성도 또한 이후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 이름을 낙민이라 하였다.” 하였다.
관가헌(觀稼軒) 객관 북쪽에 있다. 창랑루(滄浪樓) 황둔진 언덕에 있다.
【학교】 향교 군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팔진역(八鎭驛) 군 동쪽 5리에 있다. 송림원(松林院) 군 동쪽 15리에 있다. 동원(東院) 군 동쪽 5리에 있다. 낙민원(樂民院) 낙민정 아래에 있다. 고법원(高法院) 군 남쪽 10리에 있다. 사법천원(沙法川院) 군 남쪽 28리에 있다. 횡보원(橫步院) 황둔진 남쪽 언덕에 있다. 구미원(仇彌院) 구미현(仇彌峴)에 있다. 감물창원(甘勿倉院) 감물창진 서쪽 언덕에 있다.
【불우】 봉서사(鳳棲寺) 대암산(臺岩山)에 있다. 미타사(彌陁寺) 미타산에 있다. 갑산사(甲山寺) 청계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쪽 7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대여곡소(代如谷所) 군 북쪽 28리에 있다.
【명환】 본조 권형(權衡)
【인물】 고려 정배걸(鄭倍傑) 일곱 살 때에 시서를 통하였고, 현종(顯宗) 정사년 전시(殿試)에 제1인이었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시호는 홍문(弘文)이다. 정문(鄭文) 배걸의 아들이다. 나이 겨우 15ㆍ6세 때에 노성한 사람같이 의젓하였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부 상서 겸 태자빈객에 이르렀다. 살림을 일삼지 않아서 살고 있는 집이 겨우 바람 비를 가릴 만하였다. 송(宋)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을 때, 황제가 하사한 금과 비단을 시종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서적을 매입하여 돌아왔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정윤의(鄭允宜) 배걸의 7세 손이다.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충경왕(忠敬王) 무진년 과거에 둘째에 합격하였다. 정선(鄭僐) 배걸의 7세 손이다.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세 고을 수령을 지냈는데, 그때마다 정사 잘했다는 명성이 있었다. 벼슬이 첨의 평리에 이르렀다. 정인(鄭絪) 선의 손자이다. 음률에 정통하고 또 예를 아는 것으로 알려져서, 후진이 모두 와서 배웠다. 벼슬은 판개성(判開城)에 이르렀고 팔천군(八川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시호는 양헌(良獻)이다. 정습인(鄭習仁) 자는 현숙(顯叔)이며, 지기가 있어 술에 취하면 곧은 말을 감히 하였다. 공민왕 때 과거에 올라 성균학관에 보임되고, 지방에 나가 영주(榮州) 원이 되었다. 무신탑(無信塔)을 철거하였다가,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받고 폐출 당하여 서인이 되었다가 신우(辛禑) 때에 전교령으로 제수되었다. 일본에서 사신이 왔을 때 습인이 답례사로 임명되었으나, 일본 사신은 불교도였으므로 습인의 이름을 듣고, “불도를 배척하는 자는 우리들이 함께 하지 않는 바이니, 사람을 바꾸기를 청합니다.” 하여 가지는 않았다. 부모 상을 만나서는 모두 시묘하여서 3년을 마쳤다.
【효자】 고려 정국경(鄭國鏡) 청성군(淸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일찍이 부모를 위해서 6년을 시묘하였다. 윤안인(尹安仁)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이르렀다. 부모가 역질로 죽었으나, 안인은 몸소 시체를 업고 가서 장사하고 6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복을 마칠 무렵에 조모상을 당하여 또 3년을 여묘하였는데, 9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왕래하지 않았다. 정포(鄭包) 향공(鄕貢)으로서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여러 차례 옮겨져서 봉상시 소윤에 이르렀다. 부모상을 만나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6년 동안을 여막에 거처하였다. 남영신(南永伸)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에 이르렀다. 나이 70을 넘어서 부모상을 만났는데, 6년간 여막에 거처하였다. 아들 광(光)도 또한 부모를 위해서 6년 동안 시묘하였다.
『신증』 본조 하영징(河永澄) 아버지가 죽자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었고, 3년 동안 여막에 거처하였다. 복을 마치고도 그대로 묘 곁에서 살았고, 흰 옷을 벗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제물을 올렸다. 성종(成宗) 21년에 정려되었다.
『신증』 【열녀】 본조 손(孫)씨 고을 사람 안근(安近)의 아내이다. 16세에 지아비가 죽었는데, 3년 동안을 울며 조석으로 몸소 전을 올렸다. 복을 마치자 그의 조부모가 젊은 나이에 과부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개가시키고자 하니, 손씨는 죽기로 거절하였다. 그래도 강제로 개가시키려 하니, 손씨는 대숲에 몰래 들어가서 목을 매었다. 그 형이 보고서 풀었는데, 곧 시가(媤家)에 가서 살다가 32세에 죽었다.
【제영】 일구산수절섬진(一區山水絶纖塵) 이원(李原)의 시에, “한 구역 산수 가는 티끌도 없는데, 벼ㆍ기장 우거진 비 갠 뒤 경치가 새롭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고성 청계산(淸溪山) 위에 옛날에 쌓은 터가 있다.
【방면】 택정(宅定)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양동(良洞) 서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적동(赤洞)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백암(白巖)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초책(初冊)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이책(二冊)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삼책(三冊)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갑산(甲山)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30리이다. 중방(中方)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청원(淸元)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덕진(德眞)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덕공(德公)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 대여곡(代如谷)의 소재지는 북쪽으로 28리이다.
【진도】 황둔진(黃芚津) 북쪽으로 10리인데 고령(高靈)으로 통하는 대로이다. 감물창진(甘勿倉津) 일명 현창진(玄倉津)이라고도 하며, 고령 개산강(開山江) 하류 동쪽으로 25리인데, 창녕(昌寧)으로 통하는 대로이다. 삼학진(三鶴津)ㆍ현창진(玄倉津) 상류인데 군과의 거리는 30리이다. 앙진(仰津) 현창진 하류인데 군과의 거리는 35리이다. 이상 두 곳은 중로이다.
【창고】 읍창ㆍ적창(笛倉) 서쪽에 있다. 외창(外倉) 북쪽에 있다.
草溪郡
東至昌寧縣界二十五里,西至陜川郡界十三里,南至宜寧縣界二十八里,北至高靈縣界三十五里。距京都七百四十五里。
建置沿革
本新羅草八兮縣。景德王改八
溪,爲江陽郡領縣。高麗改今名,顯宗仍屬陜州,明宗置監務。忠肅王以縣人鄭守琪、卞遇成有功王室,陞爲郡。本朝因之。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草八兮,八溪,淸溪。
姓氏
本郡 鄭,卞,周。
代如谷 表。
形勝
四山八水。郡四面皆山,而平郊廣衍。臺巖、舞月諸壑之水,八派縈紆,歷歷可數。○徐居正《觀稼臺》詩:“四山圍郡去,八水抱村流。”
山川
淸溪山。在郡北一里。鎭山。
巢鶴山。在郡北三十里。
舞月峴。在郡西南十里。
臺巖山。在郡西十里。
高法峴。在郡東南十四里。
仇彌峴。在郡北三十四里。
彌陀山。在郡南十六里。亦見宜寧縣。
黃芚津。在郡北十里。陜川郡南江之下流,東流入于甘勿倉津。
甘勿倉津。在郡東二十四里。卽高靈縣開山江之下流,南流入宜寧縣界。
土産
石淸蜜,楮,漆,柹,竹,白花,蛇,安息香,胡桃,海松子,石榴,鯽魚。
烽燧
彌陀山烽燧。南應宜寧縣可莫山,北應陜川郡美崇山。
樓亭
鑑政樓。在客館東。○高麗金台正《樓前曲松》詩:“未脫名繮白髮翁,折腰非處爲時風。不關世事蒼髥叟,悅眼何人每鞠躬?” ○李仁復和云:“空館無人待病翁,古松猶喜送淸風。此身雖屈心難屈,吾黨何須問直躬?” 〔新增〕 兪好仁《和金台正樓前曲松》詩:“早署東西漫浪翁,簿書叢裏數秋風。海濤聲沸陀山曉,隔戶精神偃蹇躬。”
樂民亭。在郡西十五里。○李詹記:“雲峯迤東山谷,衆水合爲大川,經陜、草入江。二邑之境,野豁山開,淸遠可愛。賓客之往來,恨境迎之無所者蓋久。洪武癸酉,鷄林李侯仁實爲知郡於草,政平訟理。明年歲大稔,乃謀於衆,役游手者,指期經營。房之以便寄宿,軒之以快觀覽。北望伽倻,南瞻舞月,甲山在其左,黃山在其右,攢靑聳翠於几席之上矣。水西轉絶壁,東抱斷岸,盤渦
跳沫於尊俎之間矣。潭煙沙月,汀草岸花,農者謳,漁者笛,行者歌,可喜可樂者,不離乎簷楹之下矣。亭西數里,道出絶壁,俯仰千丈,道極狹,行人辟易數百步,然後脫險。東西行者,必於斯亭焉休息,其爲樂何如哉?孟子曰:‘樂民之樂者,民亦樂其樂。’ 李侯樂於斯亭,而與民共之,民亦樂李侯之樂也。故名之樂民。”
觀稼軒。在客館北。
滄浪樓。在黃芚津南岸。
學校
鄕校。在郡西二里。
驛院
八鎭驛。在郡東五里。
松林院。在郡東十五里。
東院。在郡東五里。
樂民院。在樂民亭下。
高法院。在郡南十里。
沙法川院。在郡南二十八里。
橫步院。在黃芚津南岸。
仇彌院。在仇彌峴。
甘
勿倉院。在甘勿倉津西岸。
佛宇
鳳棲寺。在臺巖山。
彌陀寺。在彌陀山。
甲山寺。在淸溪山。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郡西七里。
厲壇。在郡北。
古跡
代如谷所。在郡北二十八里。
名宦
本朝 權衡。
人物
高麗 鄭倍傑。七歲能通詩書。顯宗丁巳,殿試第一人,位至門下侍中。諡弘文。
鄭文。倍傑之子。年甫十五六,嶷然若老成。登第,官至刑部尙書兼太子賓客。不事生産,居
室僅庇風雨。奉使入宋,所賜金帛,分與從者,餘悉買書籍以歸。諡貞簡。
鄭允宜。倍傑七世孫。官至奉翊大夫。忠敬王戊辰榜眼。
鄭僐。倍傑七世孫。擢魁科,歷宰三州,皆有聲績。官至僉議評理。
鄭絪。僐之孫。爲人精曉音律,且以知禮聞,後進皆就學焉。官至判開城,封八川君。諡良獻。
鄭習仁。字顯叔。有志氣,使酒敢言。恭愍朝登第,補成均學官。出知榮州,以撤無信塔爲辛旽所嫉,廢爲庶人。辛禑時,授典校令。日本來聘,命習仁報聘。日本使,佛者也,聞習仁名,乃曰:“斥佛者,吾輩所不與,請易之。” 不果行。居父母憂,皆廬墓終三年。
孝子
高麗 鄭國鏡。封淸城君。嘗爲父母廬墓六朞。
尹安仁。官至軍器少尹。父母死於疫,安仁親負屍而葬,居廬六年。將服闋,遭祖母喪,又廬墓三年。凡九載,一不往還于家。
鄭包。以鄕貢登第,累遷至奉常少尹。
遭父母喪,負土成墳,居廬六年。
南永伸。官至中顯大夫。年過七十,遭父母喪,居廬六年。子光,亦爲父母廬墓六年。
〔新增〕 本朝 河永澄。父歿,負土營墳,居廬三載。服闋,仍居廬側,不脫素衣,朔望必設奠。成宗二十一年旌閭。
〔新增〕 烈女
本朝 孫氏。郡人安近妻也。年十六夫死,泣涕三年,躬奠朝夕。服闋,祖父母憐其少寡,欲奪志,孫氏以死固拒,猶强之,孫氏潛入竹林自縊,其兄見而解之,卽歸舅姑家居焉。年三十二而終。
題詠
一區山水絶纖塵。李原詩:“云云,禾黍離離霽景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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