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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동양철학반 수강생 유경종
오랜 방학이 끝나자마자 어마어마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린다. 그 이름도 부담스러운 칼 마르크스. 인류사에 커다란 횃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인듯도 하고, 젊은 날의 열정과 고민을 반추하게 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20세기 역사를 투쟁과 혁명의 피로 물들게 한 불온 사상의 원흉 같기도 하고, 특히 우리 나라의 분단과 대립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할 피의자 같기도 한,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야기하는 사상가가 바로 칼 마르크스다. 사십 중반에 마르크스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찌보면 좋은 기회이다. 해가 바뀌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는데 더 늦기 전에 마르크스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관념들을 한번쯤 깔끔하게 리부팅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한 요약은 생략하겠다. 시대와 생애는 김경윤 선생님의 본 수업에서 진행되는 강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강의 시간의 제한으로 인해 자세히 다루기 힘든 이론적 개념들을 조금 보충하는 자료가 되겠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겨우 이십여장의 글로 요약한다는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모르지 않지만 최대한 친절하게 쓰인 텍스트를 골라서 가능한 쉽게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세 권의 책이 도움을 주었다. <살림지식총서 칼 마르크스>는 일반 교양 문고본이고, <마르크스씨,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죠?>는 청소년 인문학 책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세상에서 가장 쉽게 쓰여진 마르크스 이론서를 자처하는 책이다.
우선 개념과 용어 정리부터. 마르크스 이론은 과학적이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개념이 분명히 정리된 바탕에서 논리가 전개되고 법칙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지름길은 없다. 개념 정리가 선결과제다. 다음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과제들과 함께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의미있는 비판과 현대적인 변용 사례들도 살펴본다. (※ 에필로그의 글은 꼭 한번 음미하며 읽어볼만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글은 일반인과 중딩, 심지어는 원숭이의 눈높이에 맞춘 책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초장부터 겁먹지 말고 슬렁슬렁 마르크스가 남긴 발자국들을 따라가는 여정에 올라보자. 파이팅~!!
◆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 개념들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나 방식, 다시 말해 세계관에 대한 공부이다. 그럼 세계관이란 또 무엇인가? 아주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그 시대의 세계관을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중세 사람들이 온통 신 중심의 세계에만 집중했다면, 현대인들은 온통 돈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대 사회의 세계관은 두말할 것 없이 돈을 숭배하는 것이다. 자, 이런 세상이 맘에 드시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뭔가 불편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면 다른 세계관에 대해 고민을 해 보자. 그 고민의 길잡이 중 하나가 바로 마르크스다.
1. 마르크스 철학을 왜 알아야 하는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중세 사람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마녀사냥, 이교도 핍박, 다른 민족과의 전쟁 등을 정당한 행동으로 여겼듯이, 오늘날에는 돈 중심 세계관에 따라 빈부 격차, 물신주의와 같은 엄청난 부작용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근본적으로 돈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세계관이 부조리를 낳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연히 뜯어고쳐서 올바른 세계관을 확립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르크스 철학은 마르크스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본 관점을 말한다. 그의 사상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도 상당히 중요한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그의 주장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주시라. 설득력 있다면 받아들이시면 되고, 아니라면 그냥 지식으로 알아두면 될 일이다.
2. 유물론 vs. 관념론 - 물질이냐 관념이냐
철학의 커다란 두 흐름이 있으니, 이름하여 유물론과 관념론이다. 전자는 물질을 근본으로 파악하는 철학이고, 후자는 관념을 근본으로 파악하는 철학이다. 다시 말해 우리 외부에 사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물론이다.
이에 반해 관념론자들은 다양한 대상에 존재하는 공통된 성질을 뽑아내서 추상적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추상 과정에서 실재와 동떨어진 관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론이 탄생한다. ‘영혼’이라는 용어를 예로 들면, 영혼이라는 용어로 두뇌 작용을 설명하는 순간, 영혼이 마치 두뇌와 동떨어져 실제로 다른 차원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세계관이 발전하면서 궁극적인 관념의 종착지인 ‘신’이라는 개념도 만들어진다. 삼라만상의 원인과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신이라는 최고 관념을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면서부터 제기된 철학의 근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물질이 먼저냐 의식이 먼저냐?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유물론과 관념론이 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대립되는 두 개념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갈등과 투쟁은 역사속에서 종교와 과학의 갈등과 투쟁으로 표면화되곤 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바로 관념론과 유믈론의 갈등의 배후에는 단순히 진리 인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치적 맥락이야말로 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중요한 측면이다. 고대 종교에서는 왕이 곧 제사장이었다. 신의 대리자로서 통치 행위를 뒷받침해줄 사상적 근거가 바로 종교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라는 최고의 관념론은 지배층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는 정신적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지동설과 진화론이 탄압을 받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지배층의 사상적 기반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사회가 과학을 받아들이는 태도 자체도 사실은 굉장히 정치적임에 분명하다.
이에 반해 과학은 종교와 달리 외부에 객관적 물질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성립하므로 유물론 그 자체이다. 이러한 과학적 성과를 통해 종교의 허구적 주장들이 밝혀지게 된다. 정리하자면 관념론(종교)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보수적 지배층인 반면 / 유물론(과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진보적인 포지션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관념론적 철학을 정립한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그는 이데아론을 통해 참된 실체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당시 그리스 귀족 정치를 옹호했던 보수적 귀족주의자로서 민주정치를 혐오했다. (※ 철학 콘서트 첫 시간에 배운 내용을 상기해보자) 플라톤의 대척점에 있었던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론을 통해 영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 정신도 물질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열렬한 민주정치의 지지자였고 당연히 귀족계급은 그의 유물론적 사상을 거부하고 증오했다.
중세로 넘어가보자. 서양 중세 내내 관념론은 봉건 영주와 성직자들의 세계관으로서 기독교라는 외피를 쓰고 봉건적 지배질서 유지에 기여했다. 이에 맞서서 과학으로 대변되는 유물론적 흐름은 관념론적 미신과의 싸움을 통해 진보적 세계관으로서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중세가 저물어갈 무렵 과학적 세계관이 차차 힘을 얻자 위기감을 느낀 극단적 관념론자가 출현한다. 바로 버클리 주교다. 그는 신의 존엄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져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모든 정보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외부 물질의 실재성을 인간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식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입장이 곧 주관적 관념론이다. 그러나 그는 신 자체를 의심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다시 신의 섭리를 호출해 도피처로 삼아버렸다. 황당하게도...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나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데아나 기독교 신처럼 초개인적이고 초감각적 정신적 실재를 가정하여 모든 것의 근원으로 삼는 견해를 객관적 관념론이라 부른다.
주관적 관념론과 객관적 관념론, 그리고 유물론을 비교하는 이유는 철학의 또 한가지 근본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 질문이란 바로 인간이 물질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유물론자들은 외부에 객관적 물질이 존재하고 감각기관을 통해 객관적 정보를 얻는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반영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면 되겠다.
3. 변증법 vs. 형이상학 -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사실 변증법과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된 용어들이다. 그 많은 변용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 철학과 관련하여 편협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우선 염두에 두고 진도를 나가자.
우선 형이상학부터.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특징은 세상을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정불변의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제도를 고정불변으로 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 있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착한 것과 나쁜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등 이분법적 사고방식도 일종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대립되는 두 요소가 뒤섞여 공존하게 마련이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세계관은 세상을 고정불변이 아닌,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생명도, 우주도, 사회도 다 충돌하고 변화한다. 변증법적 세계관을 철학으로 확고히 정리한 분은 바로 헤겔 선생이다. 그는 만물의 변화 발전의 원인은 바로 모순이라고 단순 명쾌하게 정리했다. 세상만사가 변화 발전한다면 그렇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뭐긴 뭐야 서로 모순이 부딪히니까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예를 들자면 중세 말 봉건사회의 토지 소유 귀족과 새로이 부를 쌓은 자본가 계급이 있다. 둘은 토지, 노동력을 놓고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모순적 관계다. 결국 두 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자본가 계급이 승리하여 봉건사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한 갈등 관계를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계에 일어나는 변화 발전도 변증법적 세계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인력과 척력, 양극과 음극 등 다양성을 관통하는 원인이 바로 모순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가 한 사물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두 가지 대립되는 성질이 동시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의 원인이 되는 것을 철학 용어로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에서 모순과 갈등의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어떤 방식으로 변화와 발전이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형이상학으로 돌아가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특징 중 다른 하나는 어떤 대상을 다른 것들과의 연관된 맥락에서 파악하지 않고 고립된 상태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17, 18세기 무렵의 자연과학 연구 방법론도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심화되면 세상 돌아가는 일이 서로 연관성 없이 우연적 사건들의 나열로 느껴지는 극단적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당연히 서로 연관되어 있고 순환한다. 형이상학과는 달리 세상을 이렇게 연관된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변증법적 세계관의 특징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세상을 고정불변하는 어떤 틀로 바라보기에 보수적 기득권 계층의 입맛에 딱 맞다. 반면 변증법적 세계관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변화를 바라는 진보적 사람들의 세계관으로서 맞춤이다.
4. 변증법의 기본 법칙
철학에도 법칙이 있을까? 법칙은 관찰과 실험의 산물이다. 법칙은 관찰을 통해 법칙성을 찾아낸 것인데, 이론으로 자리 잡으면 마치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세상이 그에 맞춰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어떤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자연 현상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자연현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법칙이 불완전한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현상이 먼저 있고, 그에게서 추론되는 법칙이 나중에 발견되는 것이다.
변증법의 대가 헤겔이 찾아낸 변증법의 기본 법칙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법칙이다. 앞에서 잠깐 살펴본 것처럼 모순 관계의 두 가지 성질이 한 대상이나 현상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갈등하고 투쟁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양질 전화의 법칙.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임계점에 도달하면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다가(양적 변화) 100도에 도달하면 팔팔 끓어 수증기가 되는 것(질적 변화)을 연상하면 된다. 양적 변화는 더디고 느려 보이고 연속선상에 자리하게 된다. 이에 반해 질적 변화는 급격하고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혁명이고 비약이다. 그러나 양적 변화가 꾸준히 반복되고 누적되어야 비로소 질적 변화의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법칙을 사회에 적용하여 사회적 모순이 축적되면 결국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설명했다. (※ 뉴턴의 역학은 양적 변화만을 인정하는 기계적 물리관으로서 진화, 사회의 변동 등을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부정의 부정법칙이다. 변증법적 부정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발전과정에서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다. 변증법적 부정은 이전의 낡은 것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발전적으로 취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버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된 것이 다시 부정되는, 부정이 반복되면서 그 과정이 주기적 성격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한 개의 대추가 부정(대추->대추나무)의 부정(대추나무->대추열매)을 거치니 수많은 대추로 늘어난다. 인간의 대를 잇는 것도 주기가 좀 긴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만물의 변화는 계속해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주기성을 지니게 된다. 부정의 부정법칙이란 다시 말해 변증법적 발전 과정의 경향(나선형 반복)과 방향(더 나은 것으로의 진보)을 가리키는 용어다.
정리해보자. 변증법적 기본 법칙 세가지 :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법칙 / 양질 전화의 법칙 / 부정의 부정 법칙 - 외워 두자.
5. 변증법적 관념론 vs. 형이상학적 유물론 - 물구나무 선 철학
이번에는 헤겔의 한계를 살펴보겠다. 헤겔은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과정으로서 역사를 이해하는 변증법이라는 탁월한 사상을 정립했지만 근본적으로 관념론자였다. 정신이 물질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변증법 체계에 갑자기 절대정신이라는 초월적 개념을 도입한다. 변증법적 발전 과정 자체가 절대정신의 섭리에 따른다고 본 것이다. 이건 뭐 거의 신과 동격이 탄생하셨다. 이러한 헤겔 철학을 마르크스는 ‘물구나무서 있다’고 비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관념의 결과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마르크스만의 차별화된 변증법적 관념론이 정립되는 것이다.
마르크스 이전에도 관념론을 통렬히 비판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체가 표현된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생각을 이어받아 마르크스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지, 종교가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결국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인간의 모습과 바램이 투영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종교나 신이 인간을 속박하는 굴레로 작용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흐의 명징한 유물론은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만든 신의 모습이 사실은 인간의 모습이기에, 변하지 않는 신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을 신의 지위로 올려놓은 것이다. 변치 않는 인간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인간상이 포이어바흐의 종착지였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는 헤겔의 관념론을 버리면서 변증법도 같이 버린 우를 범한 것이다. 형이상학적 유물론이라는 또 하나의 물구나무 선 철학이 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변증법을, 포이어바흐에게서 유물론을 받아들여 본인만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탁월하고 논리적인 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해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된다.
여기에서 진리를 알기 위한 태도의 차이들, 다시 말해 인식론의 몇몇 입장들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 물론 마르크스에 의해 다들 부정된 이론들이다.)
* 객관적 관념론
헤겔의 변증법적 관념론이 대표적. 세계를 알기 위해 절대정신을 탐구해야 함
절대정신에 대한 종합 보고서가 <정신현상학>
신, 절대정신 등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주장함
* 주관적 관념론
진리 자체를 의심. 버클리 등. 사물의 실재를 의심함. 불가지론으로 귀결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없고, 인생은 허무, 퇴폐와 염세로 물들기 쉬움
* 기계론적 유물론
형이상학적 유물론. 세상을 몇몇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고정불변의 어떤 틀로 이해하려 함
뉴턴의 역학 법칙 이후 이런 운동으로만 세상을 보는 기계론적 유물론이 유행함
형이상학적 고정관념에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끼워 맞추는 환원주의적 태도
6.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앞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인식론이란 지식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방법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말한다.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사물에 대한 정보들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분명 우리의 지식은 한계가 있고 오류 가능성도 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기본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과학적 성과의 객관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진리 인식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서 ‘실천’이 강조된다. 직접 해 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실천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주위의 자연과 사회를 바꾸어 갈 수 있다. 돌멩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던져 봐야 돌멩이를 알 수 있듯이. 과학자들의 실험도 정보와 지식을 실천을 통해 인식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자연계 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진리 검증에는 역시 실천이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체제라는 사실이 진리임을 검증하려면 실제로 그런 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유물론은 우리의 의식을 외부 사물이나 현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기에 당연히 실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장중한 선언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에서
인간의 두뇌를 통해 일어나는 인식 활동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 이 그것이다. 우선 감성적 인식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일차적인 정보를 활용해서 외부 물체를 판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건 동물들도 다 한다. 이에 반해 이성적 인식은 다양한 상황 관찰/ 공통 현상을 추출/ 일반화할 법칙 정리/ 정리된 법칙을 다른 현상에 적용/ 결과를 추측과 같은 단계적 분석과 추상능력을 말한다. 이성적 인식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참된 앎, 곧 진리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실천은 내 인식이 과연 맞는지 틀린지 판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감성적 인식을 토대로 이성적 인식 과정을 거쳐 이론이 도출되고, 이론이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무한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7. 역사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이론적 기초가 다져졌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 유물론에 대해 살펴보자. 간단하다. 역사 유물론이란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역사를 변화 발전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역시 사회 내부의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다양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규칙성이나 법칙성을 찾을 수 있을까? 역사란 그저 수많은 사람들의 우연한 행동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우연성과 다양성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에서 법칙성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식은 객관적 존재라는 환경과 동떨어져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비슷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은 의식도 비슷해진다는 말이다. 노예제 사회 속의 노예들은 ‘노예의 삶은 지긋지긋하다’ 는 공통된 의식을 공유하지 않겠는가. 노예적 존재가 노예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법칙을 파악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잘 관찰해보면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만큼이나 비슷한 점도 많다. 사회과학의 존립 가능성의 토대가 바로 거기에 있다.
공통된 존재 양식은 공통된 사회적 의식을 낳는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의 인간들은 누구나 일자리를 구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존재 양식 때문이다.이렇듯 동일한 존재 양식하에서 사회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의식을 사회적 의식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사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관념론적으로 역사를 보면 영웅과 위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고 로베스피에르, 당통, 나폴레옹을 연구할 것이다. 그들의 위대한 의식이 혁명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의 사상과 의식도 결국 시대와 주변 환경의 산물임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반면, 유물론적으로 역사를 보면 변화 발전의 원동력은 사회적 모순이니까 봉건 귀족 계급과 신흥 자본가 계급 간의 모순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서로 다른 의식을 갖게 된 외부 환경, 즉 의식 형성의 존재 양식을 파악하려 할 것이다. 의식의 배후에 작용하는 유물론적인 토대, 곧 존재 양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역사 유물론은 쉽고도 당연한 태도이다.
8. 생산력과 생산관계 - 역사의 토대
티베트의 조장, 마야의 옥수수 신 숭배 등의 의식 배경에는 그러한 의식을 배태한 존재 양식이 있다. 의식에 영향을 주는 존재 양식의 변수는 무수히 종류가 많다. 역사 유물론에서는 다양한 변수 가운데 역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요인을 찾아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요인이 무엇이냐,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먹고 자고 일하는 것과 같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이것과 관계되는 것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이다.
생산력은 한마디로 원료, 도구,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힘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형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식으로 표시하면 이렇다.
생산력 = 노동력 + 생산수단(노동대상/원료 +노동수단/기계)
생산관계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때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말한다. 노예제 사회의 생산관계는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 봉건제 사회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곧 생산관계다. 생산관계를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은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가? 이다. 그에 따라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구분이 발생한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 모두의 재산으로 할 것인가? 현재와 같은 소수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언제까지라도 그냥 둬야 할까? 갑자기 부담되는 질문을 던졌다고 너무 겁먹지 마시라. 사적 소유 전반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에는 다른 방식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좀 해 보자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틀어서 그 사회의 생산양식 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 기계적 대량생산 + 자본가와 노동자 되겠다. 역사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적인 모순은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다.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역사의 변동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자면 자본주의 공장생산 vs. 봉건주의 생산관계 -> 갈등과 모순 발생
프랑스 혁명이 인권 신장을 위한 혁명으로 기록되었지만, 본질을 살펴보면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산관계를 뒤집은 사건인 것이다. 물론 위대한 인물들이 역할을 했지만, 그러한 인물들이 나오게 된 근저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처럼 생산력이 발전하면 낡은 생산관계를 버려야 하는 것이 사회 발전의 원리이다.
정리해보자.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에 의해 모순적 요소는 갈등하고, 양질 전화의 법칙에 의해 생산력의 점진적 양적 변화가 어느 시점에서 질적 변환을 촉발한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바뀌는 시기를 우리는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의 법칙들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바로 역사 유물론이다.
9. 공황과 혁명 -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찾아보자. 생산력이 성장하면서 자본가-노동자 라는 생산관계가 불편해지는 상황이 도래한다. 자본주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는 시기는 공황 이 일어날 때다. 공황은 경제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90년대 말에 우리가 겪은 IMF 시기를 연상하면 된다. 자본주의 경제는 호황기와 침체기가 반복되면서 주기적인 경기변동이 찾아온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에도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경제 위기는 있었다. 그런데 공황은 이전 시대의 위기와 양상이 전혀 다르다. 이전 시대의 위기가 생산물 자체가 부족한 위기라면, 자본주의의 공황은 상품과 물자는 팔지 못해 남아도는데 서민들은 생활고로 자살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람?
간단히 공황에 이르는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의 생산수단 확대 >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 물자 잉여 > 재고 적체 > 경영 악화 > 신용 경색 > 고용 감소 > 지출 억제 > 기업 도산 > 은행 도산 > 경제 붕괴....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공황이다. 공황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장 폭력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태다.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쌓여 있는데도 자신들이 쓰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공황이 주기적으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구조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 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생산력과 관련된다. 사회적 차원의 분업과 협업으로 생산물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자본주의하에서의 생산은 개인적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서 전개된다.
소유의 사적 성격은 생산관계와 관련이 있다. 생산수단, 생산이익 등의 완전한 사적 소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의 이윤 추구 행위가 전적으로 자유를 보장 받는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자본가 개인의 욕망이 사회 전체의 공동선과 일치하면 천만 다행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생산 활동이 사회성을 띤다면 상식적 전 사회적 차원의 경제 계획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본가들은 국가 차원의 계획경제는 자유시장경제를 망친다는 명분으로 철저히 반대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이윤 추구 활동이 사회 전체 차원의 계획 때문에 방해받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통제되지 못한 생산의 욕망으로 인해 공황은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금융 기법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오히려 거품이 더 커지고 위험은 은폐되기 쉽다. 그래서 공황의 충격은 더 파괴적이고 범위는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과잉 생산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생산의 무정부성 이라 부른다. 이에 더해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욕구로 인해 비정규직 등의 값싼 일자리가 양산되면 노동자의 소득이 감소하게 되고, 그에 따른 과소 소비 역시 공황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은 새로운 생산관계를 요구한다. 사적으로 소유한 생산 수단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소유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나온 아이디어들이 바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대안이다. 경제 권력을 다수가 함께 소유하자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눈살을 찌뿌리며 이렇게 되묻는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좋지만, 현실 역사에서는 부작용이 많지 않았는가? 하지만 역사상 그의 이론이 제대로 실천되어 본 적은 없다. 마르크스주의를 빙자한 독재 국가들이 실패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지기는 커녕 더욱 심화되고 고착화되었다. 새로운 변화 발전의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10. 토대와 상부구조 - 물구나무 선 사회
자,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조금만 더 집중해서 개념들을 체크해나가자. 이번에는 토대와 상부구조다. 토대란 그 사회의 생산관계 총체를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봉건적 생산관계 등의 큰 틀과 나라마다 다른 구체적인 현실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본 것이 바로 토대라 할 수 있다. 상부구조는 정치적, 도덕적,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 및 그에 상응하는 기관, 조직 등을 말한다.
이 두 개념이 중요한 것은 경제적 토대가 그에 걸맞는 문화적 상부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듯이) 토대가 바뀌면 그에 따라서 상부구조가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토대가 형성되면 사적 소유를 보장하는 법 질서(상부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법, 문화, 도덕, 예술 뿐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 가치관, 인간성조차 경제적 토대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통념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 이라는 통념은 자본주의적 토대에서 형성된 관념일 뿐이다. 물론 모든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존 본능은 모든 경제적 논리 전개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 철저하게 이기적이 되도록 하는 게임의 법칙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다. 원시 공동체와 유사한 사회를 살펴보라. 그들은 생존 자체를 위해 함께 도우며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어서 이기심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생산 목적은 자본가 개인의 이윤 추구, 곧 돈벌이 뿐이다. 당연히 노동자들을 더욱 쥐어짤수록 이윤이 증대한다.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 자본가로부터 돈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게 법칙이 되었다. 이렇듯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오로지 이기심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명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은 자연스럽게 교육 현장으로 스며들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기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해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경쟁과 이기심에 내몰리는 기계가 되었고 압박을 견디지 못해 학교 폭력 등의 일탈도 심각해졌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부모들의 과잉 교육열만을 탓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본질은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판단의 오류인 것이다.
경쟁, 환경파괴, 이기심, 인간성 파괴, 전쟁... 이 저주받은 게임의 법칙의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돈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돈은 사실 추상화된 가치일 뿐이다. 모든 상품은 예외 없이 누군가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모든 가치는 노동이 창출하는 것이다.
이렇듯 가장 소중한 가치인 타인의 노동을 단순한 화폐 수치로 바꾸어 놓은 것을 물신주의라 부른다. 눈에 보이는 상품 뿐 아니라 예술도 학문도 사랑도 모두 화폐 가치로 가격이 매겨진다. 물구나무 선 가치의 전도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환경을 변혁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봉건사회보다 발전된 점은 분명히 많다. 풍요로운 물질 생산으로 인간을 기아와 가난에서 해방시킬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모순이 자명하다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하는 사람이 사회의 주인으로 서는 새로운 사회 제도,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11. 계급투쟁과 국가 - 권력을 쥔 자 누구인가
이제 계급에 대해 알아보자. 계급을 나누는 기준은 단순하다.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여부에 의해 계급이 나뉘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사회 경제 제도하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레닌)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 계급 간에는 착취와 피착취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착취가 존재하면 반드시 빈부 격차가 발생한다. 착취는 계급 사회의 속성 그 자체이기에 빈부 격차는 구조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열심히 분석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착취의 구조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노예제나 봉건제의 착취 구조는 비교적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누가 착취자이고 누가 피착취자인지가 신분에서 명확히 갈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노동자는 외견상 자유로운 신분이다. 그래서 착취를 보기가 명확하지 않다. <자본론>이 좀 어려운 이유가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의 긴 역사를 고찰하면서 계급 투쟁을 서로 다른 계급들의 이해관계가 대립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이의 불행이라면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계급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착취 계급에 대한 피착취 계급의 투쟁이 사회를 변혁하는 근본 동력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말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는 국가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기구로 보았다. 국가는 공평무사하게 구성원의 갈등과 불평등을 조절하는 기관 같지만, 사실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억누르고 지속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해 조직된 힘이라는 것이다. 생산수단 독점으로 경제적 지배를 이뤄낸 지배계급들이 국가기구를 통해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면서 정치적 지배까지 차지했다고 보았다. 계급의 존재가 국가 기구 존재의 전제 조건이 된다. 노예제 국가, 봉건제 국가, 자본주의 국가 등 경제적 토대에 맞는 국가가 존재해 온 양상을 살펴보면 국가의 폭력을 지배계급이 독점하는 것은 계급사회 유지의 필수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인지하다 보면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라 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애국심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자고 대답하고 싶다. 또한 국가라는 기구와 국가 테두리 안에 사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슴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의 작고 강한 정부의 본질은
* 작은 정부 : 정부의 모든 기능을 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떼어주는 것
* 강한 정부 : 피지배 계급의 반발에 대해 강력하게 응징하겠다는 것
결국 자본에게는 한없이 작고 / 노동자 민중에게는 한없이 강한 정부 가 이명박, 그리고 그를 승계한 박근혜가 지향하는 정부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인지한다면 우리의 애국심과 사랑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가 고민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12. 사회혁명과 주체 - 세상을 바꿔라
혁명은 한 나라의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시스템과 주체가 모두 바뀌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은 체제가 바뀌고 지배계급이 바뀌었으니 혁명이 맞다. 이에 반해 우리가 흔히들 혁명이라고 부르는 4.19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은 정권만 바뀐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혁명은 낡은 지배계급이 무너지고 새로운 계급의 정권이 수립되어 사회 구조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공부했던 개념들을 다시 상기해보자.
체제 내부의 모순 > 양적 축적 >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 고조 > 혁명의 객관적 조건
> 양질 전화의 법칙에 의해 혁명 발발
여기서 핵심은 객관적 조건과 함께 혁명 주체의 등장이다. 누가 혁명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가장 핍박받는 이들은 농노였지만, 혁명 주체는 상공업 발전 통해 새로이 등장한 자본가 계급인 부르주아지였다. 이유는 자명하다. 자본가 계급이 새로운 생산력 발전을 담보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농노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담보하는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고 / 소유의 사적 성격을 담보하는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다. 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 인해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맞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필요하게 된다. 생산 수단을 개인이 아닌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주도할 계급은 노동자 계급인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휴머니즘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다. 법칙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과학이다. 휴머니즘도 중요하지만 생산수단의 담보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 성공해서 참다운 사회주의를 건설하면 그 사회는 지배, 피지배 계급이 사라진 평등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전망했다. 무계급 원시사회에서 계급 사회인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시대를 거쳐 다시 무계급인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 법칙에 의해 훨씬 진보한 형태로 원형으로 돌아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나선형 발전 모델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체제라고 보았다. 진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민중이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을 틀어쥐어야 한다. 가난을 끝장내는 유일한 방법은 빈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에서 승리할 때만이 비로소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국가라는 상부구조를 차지하는 것, 국가 권력의 획득이 모든 혁명의 기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과 갈등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도 항상 함께 존재한다. 그 가능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 계급의 사상과 조직을 통해 구현된다. 사상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밝히는 방향타 역할을 한다면 / 조직은 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엔진이다. 노동자는 홀로는 약하지만 함께 뭉치면 누구보다도 강해질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의 개념들을 정리하는 긴 글을 마무리하며 그의 간결하고도 선명한 외침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마르크스에게 다가가기
1. 세계사의 장벽을 넘어서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첫 번째 장벽은 바로 유럽 근대 역사에 관한 지식이다. 모든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공간적으로는 유럽이라는, 시간적으로는 근대라는 배경에서 태동한 것이다. 당연히 유럽 근대의 역동하는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 반복되는 억압과 착취의 역사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려면 계급 투쟁의 역사를 이해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우선 계급이라는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흔히 계급은 신분과 유사한 용어로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히 말해 신분과 계급은 다르다. 신분은 법이나 관습에 따라 정해지는 세습적 지위를 말한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양반이냐 상놈이냐와 같은 명칭이 신분이다.
이에 반해 계급은 공통된 경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세습적 지위가 아닌 돈이나 지식, 힘과 같은 성취 자원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갈리는 것이다. 쉬운 예로 노동자와 자본가는 계급적으로 명확히 대비되는 두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각자 자신의 것만 잘 지키면 끝이었다. 그러나 생산이 증대되고 부가 일부에게 집중되면서 지배계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예전과 다른 수단이 필요해졌다. 무기가 발달하고 군대가 조직되었으며 전쟁의 규모가 점점 커졌다. 또한 사회구성원을 모두 경제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교육이 실시되었고 화폐와 언어가 표준화된다. 결국 경제 자원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갈등과 전쟁을 반복하며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루어 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계급 투쟁의 역사를 평화적으로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고민했다. 그리고는 경제적 자원과 이익을 건드리지 않고는 평화의 역사를 새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 프랑스 혁명의 포성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시절은 유럽 대륙이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봉건 제도에 도전한 대규모 사회혁명이 곳곳에서 요동치던 시기였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여 의회가 해산되고 인권 선언 작성되면서 봉건제 붕괴의 서막이 열린다. 뒤이어 1819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 1820 이탈리아 혁명/ ·1821 그리스 혁명/ 1825 러시아/ 1830 프랑스, 네덜란드... 등등 유럽 각지로 혁명의 열기가 퍼지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모토로 하는 자유의 물결이 몰아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은 신흥 자본가 계급의 소유의 자유를 위해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와 농노를 해방시킨 부르주아지 혁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집단 혁명의 파워를 입증했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혁명으로 가는 중요한 변곡점임에는 분명했다.
마르크스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만 계급적 모순이 타파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이 평화적 개혁을 통한 정치 혁신을 주장한 당대 사회주의자들과 대비되는 확실한 차이점이다.
하지만 정치 혁명, 자유의 물결보다 더 중요한 시대적 요소가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
▶ 산업 혁명 후 인간의 삶
첨단 사회라고 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선 혹독한 노동 현실이 존재한다. 특히 비참한 어린이 노동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의 초기부터 대두된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본 산업혁명도 희망의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여성의 착취가 심화되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작품은 당대 도시 노동자들의 처참한 노동 현실을 잘 보여준다. 과중한 육체 노동, 심적 스트레스, 열악한 음식, 비위생적 환경, 전염병, 휴식의 실종 등이 동시에 반복되면서 도시 빈민들의 평균수명은 급격히 줄어든다. 당시 도시 노동자 계급의 평균수명이 15~19세였단다. 농촌 지주가 50~52세였다니 엄청난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어린아이, 여성, 노약자도 모두 노동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도시 인구 밀도는 상승하고, 상하수도 등 도시 기반시설은 태부족하고, 스모그, 공해, 전염병에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농촌의 사정은 어땠을까? 농촌 역시 소규모 경작지나마 빼앗기고, 방목권이 박탈되면서 자연 공동체가 붕괴되었다.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제강업과 면직업 등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층으로 흡수되었다.
엥겔스는 당시 도시 빈민들의 비참한 삶을 살피고 <영국 노동 계급의 실태>라는 논문을 1844년에 발표하였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작성한 <공산당 선언>에서는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 문제를 처음으로 적시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은 자립성을 모두 상실했고, 노동자는 이제 단순한 기계 부품이 되었다.
21세기의 석학 에릭 홉스봄은 말한다.
노동자가 아무리 좋은 빌딩의 사무실에서 많은 월급 받고 일한다 해도 그는 결국 자본가의 말 한마디에 해고되어 노숙자가 될 수 있는 노예 아닌가?
마르크스의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노동자는 부품이고 부품은 언제든 새 걸로 교체될 수 있다. 명퇴의 압박, 실직의 불안, 그리고 그걸 잊기 위한 힐링의 악순환을 보라. 산업사회나 정보사회나 분화된 계급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은 동일하다.
▶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에서 찾은 마르크스의 답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들은 잠시의 자유의 기쁨을 맛보지만, 곧 이어진 산업혁명으로 다시 노예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진정한 승자는 부르주아지뿐이라는 결론이 명확해진 것이다. 자본가가 굴리는 돈은 더 큰 돈을 벌게 해 주고 돈은 곧 권력이 되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회항로 등 신항로의 발견은 성장하던 부르주아지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전 세계로 식민지가 확대되었고 교역량이 폭증했다. 이러한 산업 환경 속에서 길드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장인들은 공장제 수공업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고 노동 작업은 효율적으로 분화된다. 게다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비롯된 공업 생산 혁명은 현대적 공장 시스템을 탄생시켜 현대적 자본가의 토대를 마련해 주게 된다. 기계화로 인해 산업은 완전히 자본가의 것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자신의 육체에 기대어 살아가는 노동자는 자립성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지 계급은 자본의 무한 확장을 통해 경제력, 정치력, 무력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국가는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지켜 주기 위해 업무를 공동 처리하는 하나의 모임에 불과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도 그가 벌어들이는 돈으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돈 중심의 세상이 세팅된 것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애초에 자본을 확보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를 축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6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립하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단행하게 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라는 인상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역사상 가장 많이 읽혔지만,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문서라 할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선언한 공산당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았고, 이 선언문은 혁명에 대한 염원을 담은 하나의 신앙 고백문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산당 선언>의 내용은 1.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2.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문헌 4.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혁명의 최전선에 나서리라 기대했던 영국 노동자들의 반응은 미미했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민중 봉기도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 후 이 선언문은 수십년동안 잠들어있다가 20세기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68혁명의 사상적 바탕에는 언제나 <공산당 선언>이 자리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조건 배척한 이상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부패한 자본주의를 막고 노동자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고민했던 사상가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낭만적이고 비과학적인 몽상적 사회주의자들을 혐오하였기에 구체적 지침을 세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생산자 소외, 분노 축적, 집단적 움직임, 국가의 탄압, 더 큰 저항의 결집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단계를 고찰해냈던 것이다.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엥겔스의 조서 중)
▶ 자본주의는 나쁜 것인가?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은 혁명, 해방 등의 단어만을 시비하며 그의 사상을 과격하다고 매도하고,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르는 추종자들도 수박 겉핥기로 마르크스를 읽고는 자신의 임의대로 차용해먹는 경우가 많다.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마르크스의 사상 그대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무조건 자본주의를 배척했을까? 물론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패한 자본주의를 없애자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핵심은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는 생산량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인류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기회를 특정 계급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독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사상가가 바로 마르크스였던 것이다.
2. 철학사의 장벽을 넘어서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유럽 근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근대의 철학사상 속에서 마르크스 철학의 위치와 특징들을 알아보자. 근대철학을 알려면 우선 헤겔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 마르크스주의의 바탕이 된 헤겔 철학
근대독일철학은 헤겔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철학의 한계를 지적했다.
헤겔은 처음으로 자연과 역사, 정신적 세계를 끊임없는 운동, 변화,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았으며, 또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우연처럼 보이는 과정의 내적 합법칙성을 증명하는 과제 자체를 제기한 것에 헤겔의 의의이다. 헤겔은 역사관을 형이상학에서 해방해 변증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이며, 내적 모순이 있다.
헤겔은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적자이다. 그는 머릿속의 이상에만 주목한 18세기 계몽주의의 한계를 넘어 역사 과정 속에서 필연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역사는 절대자(즉, 신)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절대자는 이성이고 그 본질은 자유이며, 역사는 자유가 전개되는 과정이었다. 또한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 반/ 합 3단계의 변증법이 일관하는 법칙 속에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모순의 긴장과 대립에 의해 자연이 변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관념 중심인 헤겔 철학을 물질 중심으로 다시 사고하였다. 사회주의의 임무는 완전한 제도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계급과 그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게 하는 역사적, 경제적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날 충돌을 해결할 수단을 찾는 데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전까지의 사회주의는 유물사관과 양립할 수 없었다. 새로운 역사 법칙을 전개하려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적 성격을 폭로해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 과제는 잉여가치를 발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을 점유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노동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주목한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의 가치를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짜내었고, 잉여가치는 결국 부르주아지 자본 축적의 원천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는 헤겔과 달리 물질노동을 인간의 자기 정당화의 본질로 보았다. 또한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에서 자유가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마르크스는 자유는 나중에나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그는 철학사적으로 관념 중심으로 이상을 추구하는 철학에서, 물질 중심으로 현실을 추동하는 철학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 이상 국가란?
마르크스 이전에도 플라톤, 토머스 모어 등 이상 사회의 건설을 염원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플라톤이 제안한 이상국가는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도덕 공동체로서 정의론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렇지만 구성원의 욕구나 이익 충족과는 거리가 있었고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다. 반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사유재산이 없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통해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극히 이상적인, 공산주의 국가와 닮은 국가다. 그런가 하면 헤겔의 이상향은 정반합의 역동적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 자유와 존엄이 인정받는 사회를 말한다. 헤겔에 와서 비로소 대립, 긴장, 모순, 역동적 발전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헤겔의 방식은 마르크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
마르크스는 헤겔의 제자였지만 뜻을 달리 하여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을 냉철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행복과 진보로 여겨지던 기술과 문명의 발달도 민중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 자본주의는 신의 선물일까?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부의 축적과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메시지에 늘 세뇌당하고 있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을 죄악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동 신성 풍조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청교도 윤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막스 베버는 보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기원과 개념이 자본주의의 태동과 맞물린다는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물질적 즐거움의 추구가 아니라, 세속적 즐거움에 대한 금욕을 추구하는 청교도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욕망의 무한 추구를 제어하기 위해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순수한 종교성을 근대 자본주의 기업이 나아갈 바른 길로 제시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주로 칼뱅주의)이 강조하는 소명개념과 예정설이 자본주의 발전과 통계학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때 베버의 이런 분석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부의 축적에 대한 죄의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였다. 전통적으로 부끄럽게 여겨지던 치부 행위에 대한 정당화 논리가 종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사회주의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으니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부류. 하지만 현재의 악을 피해 과거의 악으로 돌아갈 순 없다.
다음으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의 악을 해결하면 된다는 부류. 하지만 적당한 재조직이 가능할까? 기존 사회 유지의 변명에 불과하다.
세 번째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를 아울러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경제 자원 재분배 정책을 중요시한다. 민주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과도 협력한다. 진보적 유럽 국가들이 추구하는 모델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정적 차이점은 뭘까? 바로 혁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차이다. 공산주의는 자본가들에게 더 큰 파이를 받아내는 타협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는 세상을 추구한다. 또한 자신의 노력을 통해 번 것이 아닌 자본가의 재산은 몰수해서 나눠주는 것이 맞다고 본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경영을 완전하게 이룩한 적은 없었다. 그러한 이상이 좋은지 나쁜지는 우리가 실현해 보았을 때 비로소 실효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면 한 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는게 아닐까?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 스스로가 참지 못하고 다른 체제로 바꾸고자 함으로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행복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사는 게 벅차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이 절실하면 당연히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를 벗어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혁명은 정말 두려운 것일까?
아무래도 혁명이라고 하면 피가 연상되어 무섭다. 그러나 오늘날의 혁명은 글이나 예술, 토론 등의 방식으로 작은 혁명을 시도할 수 있다. 이름하여 성숙한 혁명이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피 냄새 나는 무력 혁명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 역시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성숙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폭력을 선동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라는 종기는 지금 곪을 대로 곪았음이 날이 갈수록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왜 혁명이 안 터질까? 혁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작은 혁명들이 모여야 가능하다. 현실을 눈을 뜨고 보자. 프롤레타리아트 소외의 다양한 현상들이 보일 것이다.
3. 정치경제학의 장벽을 넘어서
근대의 역사와 철학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정치경제학을 공부해보자. 비로소 마르크스가 좀 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 애덤 스미스를 오해하는 21세기 사람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자유방임시장 등등의 이론으로 자본주의 초석을 다진 이름이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중농학파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1776년 <국부론>을 출간하여 자유방임의 효과를 설파하며 자본주의 경제 이론의 핵심을 제시하게 된다.
그가 공격하고자 한 주요 대상은 잘못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려던 중상주의자들이었다. 왕실과 귀족이 소유한 금과 은에만 집착하는 중상주의자에 대항해 국민과 연관된 모든 생필품으로 관심을 확대한 진보적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부의 원천은 ‘국민의 연간 노동’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인간 중심의 이론가였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은 지극히 낙관적인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전체의 이익 증대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개인이 모여 형성하는 시장과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무한한 낙관론을 갖고 있었다. 걱정 말고 자유방임하라, 시장은 모든 것을 잘 해결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전공은 윤리학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에 대한 선한 본성을 미리 전제한 바탕에서 시장의 효용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여러 사람이 함께 부유하게 사는 세상을 고민했다. 이러한 애덤 스미스를 보수주의자로만 보면 본인이 섭섭할 것이다.
▶ 노동 착취와 소외
하지만,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기대했던 착한 자본주의는 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산업혁명을 통해 구조가 급속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돈과 물건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고 타인의 행복을 수단화하여 짖밟는 비도덕적 사회가 되어버렸다.
노동은 부자를 위해 멋진 걸 만들어내는 댓가로, 가난한 사람에게 불행만 만들어낸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자기가 생산한 상품으로부터의 소외를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인해 노동의 소외는 심화된다.
마르크스는 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에 소요된 노동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를 최소한으로 적게 상정해서 남은 잉여가치를 가져가버린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바라는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상품의 가치는 실제 사용 가치와 서로 다른 상품이 교환될 때 매겨지는 교환가치로 나뉜다. 마르크스는 교환 가치가 상품 생산에 들어간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어떻게 잉여 가치에 바탕을 두고 이윤을 얻는 것일까?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과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 가치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바로 이 차이를 자본가는 잉여 가치로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필요 노동을 초과하는 잉여 노동을 늘려서 이윤을 만드는 것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소외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노동의 종류, 노동의 과정, 노동의 이익에서 철저히 단절되기에 노동 소외는 더욱 심화된다. 노동을 통해 자유를 추구할 수 있도록, 소외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문제임에 분명하다.
▶ 한국의 노동 착취와 소외의 사례, 전태일
1970년, 평화시장의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노동 착취에 항거하여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인다. 전태일은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다만 소외를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로서 사회적 메시지 던지고자 한 것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는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도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전태일 평전> 중 1970. 8. 9 일기에서
당시의 대한민국은 유신 독재 시절이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고 기업가들은 부품화된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이윤 추구에만 몰두했다. 전태일은 부품으로 소비되다가 버려지는 벗들을 보며 분노하고 절망했다. 결국 그는 무고한 생명들이 시들지 않도록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 두려운 결단을 내린 것이다.
▶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이윤 추구 극대화 > 노동 착취 심화 >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 > 혁명 발발
이러한 과정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행로이다. 혁명을 꼭 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구조 때문에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모순은 누가 해결해야 할까? 자본가들은 스스로 모순을 해결해야 할 이유가 당연히 없다. 노동을 기계로 대치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자라는 가치관을 유포하고, 소수의 성공사례를 광고하면서 사회적 모순이 없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소규모 자본가 역시 거대 자본가와 연계되어 모순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혁명만이 참다운 모순의 극복 방법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자는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일체의 현존 사회 조직 일체가 전복되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선언한다.
부르주아지여, 공산 혁명 앞에 전율할지어다.
프롤레타리아트여, 그대들이 잃을 것이라곤 억압의 쇠사슬 뿐,
성공하면 그대들은 세상을 얻을 수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중
▶ 마르크스도 생각 못한 환경 문제
근대 서양 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자연을 지배할수록 인간의 자유가 커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데카르트도 그랬고 베이컨도 그랬다. 마르크스 역시 노동이 사물을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시키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 중심주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궁극적 목적이라면, 자연은 열등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은 인간의 관심과 노동이 닿을 때 비로소 의미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는 무분별한 개발지상주의와 성장 제일주의로 표출되었고 그 폐해는 막중했다. 오늘날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마르크스 이론도 마찬가지로 부와 노동의 터전인 지구가 무한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환경문제와 자원고갈은 인류 생존 자체의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허기진 것처럼 자유롭게 경쟁적으로 새로운 상품을 욕망하고만 있다. 이제는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넘어 인간 뿐 아니라 생명 자체를 존중하는 이데올로기로 노동과 자연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4. 마르크스라는 벽을 넘어서
마르크스는 분명 조금은 이질적이고 부담스런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으로 세상을 보면 소외와 분노를 느껴 각각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적어도 그 의미에 대해 다른 무게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 의심의 대가, 의심을 받다
마르크스는 니체, 프로이트와 더불어 3대 의심의 대가로 불리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나 종교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나 공상적 사회주의를 통해 인류가 과연 행복해 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리고 과거 분석에 머물지 않고 미래 건설에 대한 그림을 그렸기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1917년 러시아는 볼세비키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로의 혁명을 감행했다. 1949년에는 중국도 마오쩌뚱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 동유럽도 줄줄이 사회주의를 채택했으며 쿠바, 베트남 등 제 3세계도 사회주의화 되었다.
하지만 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면서 제 3세계도 자본주의로 편입되었고 중국 역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제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 사상가로 의심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는 스탈린, 김일성 등의 독재가 실패한 것이지 마르크스 이론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마르크스 자신도 거짓된 사회주의 국가의 멸망을 반겼을 것이다.
마르크스 이론 강점은 삶의 조건을 꼼꼼히 따져 각자에 맞는 조건을 모색하도록 열려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사상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게오르그 루카치, 발터 벤야민,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이 알튀세르 등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 이단아들이다. 하지만 기존 고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일관성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정한 마르크스의 이론가들인 셈이다. 이렇듯 변증법적으로 모순을 끌어안으려 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정통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는 역동성을 지닌다.
의심하라, 그리고 해석하는 것에만 멈추지 말고 행동하라
▶ 공상적인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는 스스로를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구분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렀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본연의 속성인 이윤율 저하의 법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본의 집중화와 독점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 결과 어느 선까지는 경쟁을 통한 발전이 나타나지만, 고도화되면 무수히 많은 기업이 망하고 결국은 가장 힘세고 큰 기업이 살아남아 독점 또는 과점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아주 잘 사는 극소수 자본가와 처참한 대다수로 이분화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본가 중심 사회를 전복시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발생하고 결국은 각자가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만큼 분배받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정이 속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리라 보았기에 과학적 사회주의인 것이다.
그런데 카를 포퍼는 마르크스주를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대표 주자다. 그는 마르크스 이론이 반증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인류의 역사는 권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적 범죄와 대량 학살의 역사.
구체적 역사가 있다면 사람들 모두에 관한 역사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류 역사란 없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마르크스는 역사 공부를 통해 계급 투쟁 역사관을 갖게 되었는데, 인류 역사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출발점이니 마르크스 이론은 원천적인 문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증 가능성이 과학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 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같은 역사주의 철학자가 전체주의의 뿌리를 만든다고 비판하였다. 포퍼도 마르크스가 현실을 분석하여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측면을 드러낸 점은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현실 비판을 넘어서 미래를 예측한 점에 대해서는 잘못된 시도라고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 혁명이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가 활성화된 나라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공산주의 혁명이 후진국 러시아에서 일어났고, 실제 권력을 잡은 세력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었다. 이를 보며 포퍼는 마르크스 이론의 비과학성을 비판하게 되었다.
또한 포퍼는 마르크스가 사람들이 미래를 다양하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지적하였다. 역사의 필연적 과정과 같은, 결론이 정해진 닫힌 역사관은 ‘열린 사회’에 적합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큰 명제는 변혁이었다. 해석이 아닌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포퍼가 주장한 열린 사회를 이상으로 추구한다는 자유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서는 유독 닫힌 태도를 보이고 있다. 포퍼가 비판한 것은 열린 사회를 만드는 것에 반대가 되는 ‘고정된 생각’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의 이론과 사상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경제와 정치를 넘어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을 열어 나가며 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지배, 착취의 개념을 성 차별에 적용하였다. 차별이 경제,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운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은 1970년대에 기존의 환경주의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공급받았다. 자본주의가 무한 경쟁을 부추기며 무절제한 자원 사용으로 환경 문제를 가속화킨 책임을 물으면서 마르크스 이론에 바탕을 둔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 문제를 점진적으로 교정하면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방안을 찾는 ‘복지국가’ 모델도 소외된 사람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마르크스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적용되면서 열린 토론의 장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에필로그 : 말로 그치지 않는 철학
오늘날 자본주의는 심화되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조직적 행동의 반대로 가고 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평소에 신세 한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이야기에 공감하나? 마르크스 이론은 틀린 것일까? 이에 대해 대답하려면 우선 우리의 일상은 경제적 토대 외에도 다른 요인에 의해 조직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게 뭘까?
마르크스는 경제적 토대와 물질을 사회의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문화’ 라는 변수다. 마르크스는 경제와 물질에 문화까지를 합쳐 보지 못한 한계를 가진 19세기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소비하고 생산하고 기대하고 좌절하고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문화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보가 말하는 변혁과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연 그것에 의지해 더 큰 이익과 행복을 얻을 지 불안해한다. 하지만 보수는 이미 경험한 것만 지켜도 안전하다고 강조하는 전략을 쓴다. 도덕, 화합, 전통 등 긍정적인 명분을 내세워 경험적으로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비판, 절망, 분노 등 진보의 표어에 대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문화 조작이다. 철저하게 현실을 인식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 조작에 좌우되기 쉽다.
오늘날의 문화 조작은 은근히 하지 않고 아예 전면적으로 노골적으로 전개된다. 양식 있는 사람이 보기에 황당한 일을 밀어붙이면, 그게 대세임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 언론을 장악한 보수층이 자기네 프레임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입견을 유포시키면 사람들은 세뇌된, 조작된 조건에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각 정부 출범시 나오는 정책 기조, 슬로건 등이 대표적인 문화 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 토대에 집중한 나머지 이러한 문화적 영향력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가 19세기 산업혁명의 영향력에 마음 빼앗겼듯, 우리는 21세기 정보혁명과 문화 전쟁을 결합시켜 사회 현상을 보아야 한다. 이제 권력은 무력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다. 미디어와 문화적 트렌드를 주도하여 사람들을 조정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연예인과 소비 유행에 젖어 문화 권력에 동조하고, 어른들은 특정 집단이 선호하는 가치를 자기가 스스로 형성한 가치인 양 수용하며 살아간다.
문화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역할을 한다면, 역으로 새로운 기회도 열리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꿈꾼 혁명이 꼭 정치적 유혈 사건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한 문화적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마르크스가 분석한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그를 넘어서야 한다.
마르크스는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는 측면에서 코페르니쿠스, 다윈,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니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돋보이는 까닭은 단순히 지적 개입으로 만족하지 않고 실천적 과제 속으로 우리의 삶을 던져놓도록 각성시키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모순을 느낀다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실천에 마르크스의 지혜와 용기가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
<독일 이데올로기 1>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경제학. 철학 초고>와 <신성가족>의 연장선에 있는 책.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써 유물론적 방법론을 사회 구조 및 역사 발전의 일관된 체계로 서술함. 이 책에 나타난 완성된 형태의 역사 유물론을 두고 엥겔스는 후에 사회주의를 공상에서 과학으로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이론이라고 자평함.
<자본론> 카를 마르크스
상품 분석부터 공황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을 설파함.
이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경전이 됨. 전체 3부를 다섯권으로 구성함.
* 1권 : 자본의 생산 과정 -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의 기초이자 전제인 상품과 화폐에 관하여 설명함. 자본주의적 생산에 있어서 잉여 가치론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임금, 자본의 축적, 자본주의 관계 창출로서의 본원적 축적, 자본주의적 발전의 역사적 경향 등을 밝힘.
* 2권 : 자본의 유통 과정 - 자본의 운동은 생산 뿐 아니라 유통 과정에서도 창출되는 것으로, 자본의 순환, 회전운동을 일으키는 영향, 여러 자본이 뒤섞인 사회적 총 자본의 재생산 운동에 관하여 설명함.
* 3권 :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 -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잉여 가치가 이유, 이자, 땅값 같은 현실적인 요소로 바뀌어 각각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을 밝힘. 자본 경쟁을 통해 평균 이윤이 만들어지고,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른 이윤율이 줄어드는 경향에 대해 설명함. 이어서 자본과 상업 이윤, 이자와 신용,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토지 소유와 땅값의 관계를 해명함.
<공산당 선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의 반열에 올린 기념비적 책, 마르크스 철학의 결정체.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 회의에서 공표할 당 강령의 용도로 쓰여짐.
현실을 개혁하는 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기 위해 이념과 현실의 화해를 시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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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로 삼은 책들
<칼 마르크스> 박영균 / 살림지식총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임승수 / 시대의 창
<마르크스씨,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죠?> 이남석 / 탐
첫댓글 음 원전에 비하면 요약이지만 짧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이런 요약정리가 너무 잘 되어 천사뚱 선생님의 강의가 무색해지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 대단한 철학자이군요.
"진보가 말하는 변혁과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연 그것에 의지해 더 큰 이익과 행복을 얻을 지 불안해한다. 하지만 보수는 이미 경험한 것만 지켜도 안전하다고 강조하는 전략을 쓴다. 도덕, 화합, 전통 등 긍정적인 명분을 내세워 경험적으로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비판, 절망, 분노 등 진보의 표어에 대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문화 조작이다. 철저하게 현실을 인식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 조작에 좌우되기 쉽다."---보수의 전략이 왜 먹히는지를 잘 분석규명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