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오데사와 체르노빌 월요일 아침. 벤은 주상절리로 돌아가려고 헤이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면 요하나와 결혼문제를 말해야 하는데 아직 정하지 못해 걱정이 가득했다. 걱정을 하는 사이에 갑자기 어제 헤어진 제인의 환한 얼굴이 떠올라 입 꼬리가 웃자‘내가 왜 제인을 생각했지?’ 하고 깜짝 놀랐다. 아침 일찍 키예프 삼촌이 회사에서 가져온 공구를 만질 때도 좋은 공구보다 제인 생각이 났다. 자꾸만 제인 얼굴이 떠올라‘안 돼’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리던 헤이든의‘영웅트럭’이 왔다. 뒤따라 딱정벌레를 닮은 차가 도착하고 환한 미소의 헤이든의 아내‘니엘’이 두 아이와 함께 내렸다. 헤이든이 소개하는 인사를 마치고 벤은 처음 본 딱정벌레차를 쓰다듬으며 ‘니엘’에게 물었다.
“숲정이에서 많이 본 딱정벌레를 닮았어요. 차 이름이 뭐에요?” “아~ 이 차는‘폭스바겐’이라고 하는데 ‘국민차’라는 뜻이에요. 히틀러가 중산층의 저축 참여를 위해 저렴하고 품질 좋은‘국민차’를 만들라고 해서1937년에 생산을 시작했는데 1939년에 2차 대전이 일어나자 군용차를 만들라는 지시에 멈추었지요.”
니엘은 기자 헤이든처럼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해 주었다.부부가 닮은꼴이었다. 벤은 공구상자를 트럭에 실었다. 둘러보니 이주하는 짐이라고 보기엔 너무 단촐 해 보였다. 주상절리에서 한 달간 필요한 식량과 상비약 그리고 간단한 의료 장비가 전부였다. 모두 차에 올라 환송을 받으며 니엘이 근무할 폴란드와 주상절리로 향했다.
6~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항구의 남자오데사는 소비에트 ‘브랸스크’로 가는 곡물 수송을 마치고 돌아와 특진이 되었다. 군 생활이 너무 바빠 일주일이 넘어서야 체르노빌을 찾아갔다. 빌은 오데사와 총격전에서 입은 총상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빌은 부상 때문에 걷지 못할까 암담했다. 요하나에게 부담을 줄까봐 떠나보냈지만 이후로 심한 갈등에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오데사에게 특등 사수로 다져진 정신도 흐트러진 환자가 되었다. 간호를 하려고 남았던 어머니도 쫓아내듯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자포자기로 치료도 소홀히 하고 의욕상실로 말문까지 닫았다. 오데사장교의 물음에도 겨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오데사는 빌을 위한 처방전이 필요했다. 요하나 가족과 주상절리까지 가는 동안에 벌어진 여러 일들을 무용담처럼 들려주었다. 모든 이야기는 기승전결 요하나로 끝을 맺었다. 그제야 밝아진 빌이 첫 마디를 했다.
“모두 잘 도착했겠지요?” “그럼~혹시 몰라서 버스도 두고 강가에 씨앗도 뿌려 주고 왔는데 잘 자라서 요하나 가족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을 안 하고 온 것이 후회가 된다.” “장교님의 배려는 늘 감동입니다. 잘 자랐을 겁니다.” “그래? 그럼 잘 치료받고 주상절리에 가서 잘 자랐는지 확인하고 알려주게 하하하.”
오데사가 들려 준 요하나 이야기는 빌에게 특효약이었다. 오데사는 빌을 큰 병원으로 옮겨주고 모든 경비를 감당하며 치료를 받게 했다. 오데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고 열 달이 흘렀다. 빌은 너무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인사를 했다.
“장교님께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무슨 소리. 내가 부상을 입혔으니 당연한 일이지. 이제 완쾌라 하니 요하나를 찾아 주상절리로 가야지?” “예? 그동안 일은 다 잊고 고향에 가서 하던 일을 다시 하겠습니다.” “정비사? 내 생각하곤 다르지만 잘 생각했다.”
빌은 고향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빌을 데리고 버려두었던 황무지 땅으로 갔다. 호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와 콩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자 빌이 놀라서 물었다.
“아버지. 여긴 황무지였는데 무슨 곡물이?” “하하하 그건 말이야 오데사 장교님께서 곡물을 싣고 가다가 우리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가셨는데 우리 몰래 씨앗을 뿌려놓고 가셨더라. 근데 주상절리 아가씨 땅에도 뿌려 주었을까? 하하하.”
빌은 대답을 해주기 싫었다. 요하나를 생각하면 지우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나는 가끔 그 아가씨가 생각나더라. 만약에 말인데 네가 그 아가씨를 원한다면 이곳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적극 환영할 것 같다.” “아버지. 이미 오래전에 떠난 사람입니다. 나와 엮으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자동차 정비소를 다시 시작 할 겁니다.” “그래? 그건 좋은 생각이다.”
아버지는 일손 부족으로 수확을 제대로 못해서 농사 규모를 대폭 줄였다. 하지만 그것도 힘들어 농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때마다 요하나 아버지 사촌형제 사이가 무척 좋아 보여 의형제를 맺어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상절리로 가자는 말이 턱에까지 올라왔지만 엮지 말라는 말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빌은 마음이 흔들릴까봐 생각을 지우려고 저수지로 향했다. 갑자기 코끝으로 수선화 향기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요하나에게 수선화 향기가 난다고 고백했던 생각이 떠올라 괜히 왔다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요하나 생각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벤에게 요하나를 부탁 한다고 했으니 잘 지내겠지? 둘이 결혼을 했을까? 아이는 낳았을까? ‘아니야 난 특등사수였어 정신을 가다듬어야해. 지우자 지워. 친족이라도 4촌이 넘으니까 합스부르크 유전병에는 걸리지 않았겠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자 고개를 마 구 마구 흔들어 지웠다. 요하나를 지우는 결단이 필요해서 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지나 소비에트로 이어지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중이라 망설였다. 그때마다 수선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문득 요하나와 헤어지던 날 병상 곁에서 벤의 부모님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급히 피난을 하느라고 벤과 요하나 출생 때 받았던 목걸이 편지를 잊고 왔어요.” “20세 생일이 되면 같이 열어보라고 했는데 돌아갈 수도 없고.”
빌이 고향에 온지 3년이 지난 1942년. 빌은 전쟁이 끝나면 요하나 생각을 지우는 여행보다 편지를 찾아 벤의 부모님께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찾으러 폴란드로 가자. 오데사 장교님처럼 숲정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하지만 벤과 요하나가 결혼해서 사는데 갔다가 어색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생각만 무수히 많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자 요하나가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던 백선자국도 싫었다. 검은 땅이라고 불리는 ‘체르노빌’에서 검은 잎사귀라라고 불리는‘빌’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도 싫었다. 정비소를 하며 겨우겨우 참았던 빌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숲정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 벤 어머니께서 폴란드에 중요한 편지함을 두고 왔다며 무척 궁금해 하셨어요.” “오~ 아주 중요한 편지였나 보다. 너도 오데사 장교님처럼 감동 만들기 한번 해보아라.” “예?” “내가 차를 사줄 테니 맘껏 여행 겸 폴란드에 가서 편지를 찾아 주상절리에 전해 주고 오면 좋겠다. 어때?” “그건 아닙니다.”
빌은 아니라고 했지만 말이라도 하니 답답함이 조금 풀렸다. 시간이 흐르며 그동안 유명 정비사라는 말이 입소문을 타 많은 차들이 몰려들었다.
독일군이 ‘슈빔바겐’차를 타고‘퀴벨바겐’을 견인해 와서 수리를 부탁했다. 차를 살펴 본 빌은 엔진을 독일에 가서 구입해 오기 전에는 쓸 수 없는 폐물이라고 했다. 난감한 운전병은 할 수 없다는 듯 차를 버리고 갔다. 보름이지나 아버지의 농사를 짓는 집사가 바쁘게 왔다.
“빌. 오다가 숲속에 처박힌 차를 보았는데 자네가 고쳐서 쓸지 몰라서왔네.”
빌은 반가움에 집사의 트럭을 타고 20여분을 달려갔다. 차는 창문과 옆 문등 윗부분이 망가진 ‘퀴벨바겐’이었다. 차를 견인해서 엔진을 교체하고 시동을 걸어보자 예상대로 배기통에서 가솔린 연기를 뿜었다.
“와우~” ‘퀴벨바겐’에 천막을 달고 마지막으로 수선화 아가씨 요하나의 보라색으로 전체도색을 했다. 여기저기 정비를 거쳐 세상에 하나뿐인 차가 완성 되었다. 1945년 9월2일 독일의 패배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열 달이 흘렀다. 1946년 7월. 평온의 여름이 왔다. 아버지가 등 뒤에서 재촉을 했다.
“빌. 더 이상 완벽한 여행용 차를 만들지 마라. 그러다 그 아가씨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 “아버지 저는 오데사 장교님처럼 살고 싶을 뿐입니다 자꾸만 엮지 마세요.” “그래?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 어쨌든 목걸이편지를 찾으러 떠나거라. 어서 하하하.”
빌은 한 달 여정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보라색 퀴벨바겐을 타고 검은 땅 체르노빌을 떠나 오데사장교를 찾아갔다.
“와우! 정비사라고 이렇게 멋진 차를 만들다니 놀라워. 세상에 하나뿐인 차이고 온통 수선화 색깔로 보아 요하나에게 주려는 선물 같은데 드디어 만나러 가는 군 축하해.”
“예? 그건 아닙니다. 요하나 가족이 숲정이에 두고 왔다는 귀중품을 찾아 전해 주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 주상절리 길 정보 좀 부탁 합니다.” “하하하 사랑을 찾아가는 빌의 정성도 대단하네 하하하.” “사랑이 아닙니다. 목걸이를 전해주려고 가는 거니까 자꾸만 엮지 마세요.” “그래? 하하하.”
오데사는 그곳에 맹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빌이 장군의 경호원을 마치고 반납한 권총과 실탄을 특별 선물이라며 내주었다. 빌은 이 총을 다시는 쏠 일이 없기를 기도해 달라고 했다. 오데사는 여전히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해바라기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또 써야지? 하하하.” “예? 그거야 그렇겠지요. 하하하.”
빌은 유쾌한 기분으로 폴란드로 향했다. 부서진 건물들이 즐비하고 곳곳에 새로 건축하는 건물들이 하나둘 보였다. 며칠 만에 도착한 폴란드 숲정이 마을입구. 빌은 전쟁으로 불탄 나무와 포탄 자국에서도 요하나의 향기가 풍겨 오는 듯 했다. 부서진 집들을 보며 전에 요하나가 들려주었던 마을 풍경을 떠올렸다.
“마을 중앙에 이마를 마주대고 서 있는 두 집. 뒤편엔 교회가 있다고 했지. 집은 20여 채. 뒤로 갈대숲이 있고 벤이랑 마을 동생과 숨바꼭질을 했다고 했지?”
빌은 술래가 되어 편지를 찾아 나섰다.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은 숨은 요하나 찾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