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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 나타난 자아 탐구와 사회 인식 양상
-<마법에 걸리다>를 읽고-
방민
1. 수필의 개인과 사회
수필은 개인 체험을 주요 제재로 삼는다. 수필의 개인이 체험 주체의 자아라면 그 상대 객체는 타자들 집합인 사회다. 여기에서 문학적으로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겠다. 하나는 자아가 체험하면서 타자와 맺는 관계보다는 개인 삶, 즉 내면적 성찰에 집중하는 것과, 타자에 주목하면서 내면 성찰보다 관계 설정을 지향하는 둘로 양분할 수 있다. 개인 내적 성찰에 집중하는 수필에선 단독자로서 삶의 양상을 보게 되고, 타자와 관계 인식에 초점을 두는 수필에선 사회 현상의 다채로운 양상을 만난다. 이처럼 수필에서 개인 삶의 문학적 양상은 둘로 갈려서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것은 내면적 정신세계와 외부 인식 양상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가 접하는 현상도 둘로 가를 수 있는 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아로 귀착하는 자아 지향과, 타인으로 향하는 외부 지향의 둘이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누구나 그러하듯 자아와 타자의 삶을 교차시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수필 역시 이와 같은 양상은 당연하다. 이점이 갖는 수필 문학적 의미를 『마법에 걸리다』(에세이작가회 제 21집, 에세이문학 출판부, 2017)에 실린 작품에서 찾아본다.
2. 내면 지향의 자아 탐구-존재론적 자아 탐구와 내적 성숙
개인의 자아 탐구는 문학의 오래된 주제의 하나다. 이것은 곧 인성 탐구에 연결되어 확장되고 변형되어 시공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버전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이 주제는 지구상에 살았거나 현존하는 사람 수대로 개별 자아가 있어 그렇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하는 사춘기부터 평생 따라다니는 모든 인간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본질적인 이 문제는 수필에서도 육성 그대로 가감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수필은 적나라한 인간의 핍진한 실상을 주요 공격 고지로 삼길 마다하지 않기에 말이다. 이 실화로 문학 제국에 존립하는 수필 영역을 확보해야하기에 더욱 직접적이고 도전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깊거나 얕거나 작가라는 한 인간의 자아와 마주치는 일이다. 그곳에서 작가가 그려 보여주는 한 개별 자아를 만나게 마련이다. 무엇을 하면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드러나면서, 즉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독자는 알게 된다. 말하자면 작가는 수필로 ‘나는 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공개하는 셈이다. 때문에 한 편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자발적으로 공개한 어떠한 사람의 자아를 읽는 셈이다. 단편적일지라도 당연히 그가 탐구한 그 자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일인 것이다.
인연정의 <글 핑계>는 창작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체험적 고백인데, 언젠가 읽어 본 작품을 예화로 들면서 작가도 유사한 경험을 풀어낸다. 글에서 본 것과 다른 양태이지만 이 작가 역시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을 밝힌다. 작가가 부닥친 고민과 작품 안에서 인용한 글에서의 작가는 상호 동질적이다. 이 동질적이란 말은 체감하는 각자 고통은 다를지라도 같은 성질의 통증을 느낀다는 말이다. 일종의 작가로서 숙명적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말이다. 아니 이미 글을 써본 사람은 누구라도 유사한 동질적 고통에 공감할 것이다. 수필 문학계의 동반자로서 동감하게 하는 이 고민은 작가의 내면적 고뇌이고 자아 탐구적 존재론이다. 곧 왜 나는 작가가 되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글을 써야한단 말인가. “나를 표출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길에 작가는 서 있다. 외부로 향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는 길을 보여준다.
송은자의 <선인장을 키우며>는 식물을 재배하며 아름다운 삶의 정체를 각성하고 희망의 에너지를 발견하여 내적 성숙의 계기로 삼는다. 그가 십 수 년을 키운 공작 선인장은 몇 해 전부터 봄에 꽃을 피운다. 하찮게 여긴 대상에서 꽃을 피우고부터 작가의 태도가 달라진다. 꽃이 보고 싶어서 여행 중에도 그리워할 정도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을 담금질하기에는 이 화초만 한 것도 없을 것”이라거나, “겉만 보고 상대의 전부를 아는 양 칼질”하는 세상에서 “깨달으라 일침을 놓”기도 하고, “나는 과연 살아오면서 누구를 위해 즐거움을 줬던가 돌아보게”도 한다. 결국 이 선인장은 작가가 “현실에서 진정 아름답게 사는 삶을 깨우치게”한다. 식물에 기대어 작가는 내면을 응시하여 자아를 찾아가면서 한 단계 상향된 내면 성숙의 자리에 오른다.
이미정의 <옷장 속에 갇힌 내 욕망>은 옷을 대체 사물(외현화한 외부 매개 자아)로 내세워 내적 자아의 욕망을 투사한다. 변화를 갈망하는 잠재 욕구와 자아 정체성을 탐구하는 이 글은 은폐와 노출 사이의 줄다리기가 긴장을 동반하면서 적나라한 내면 풍경을 고백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솔성에서 진정 수필답게 읽힌다. 옷이란 매개물로 대변한 작가의 내면 욕망은 고백문학인 수필 본류에 연결되고,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어 자아 정체를 찾으려는 것은 욕망 숨기기(내숭떨기)와 드러내기(솔직성)의 이중 심리 갈등을 보여주는데, 이 점에서 정직한 자기 응시가 함께 돋보인다.
박헬레나의 <답은 사방에 널려 있다>는 부부간 갈등 양상을 주요 제재로 삼아서 대화할 때 사용하는 언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 자신을 돌이켜 가며 내면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전환시킨다. 부부 사이 소통 문제에서 대화를 다루는 바, 이는 소통의 핵심 매재인 언어 자체에 집중하는 점에서 자못 본질적 과제를 잡는다. 이런 경우는 언어에 관한 일반 이론이나 학자들의 견해를 들여와 타설 관념으로 마무리하거나 보완하는 경우를 더러 보는데, 이 작가는 자설적 관념화를 시도하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한 점에서 매우 값져 보인다. 이미 언어의 제반 기능과 본질에 관해서 대표적으로 야콥슨, 촘스키, 토도로프 둥이 핵심적 언급을 한 바 있어 그것을 작가가 빌려와서 얽기 쉬운데, 체험으로 깨우친 바의 언어관을 내비친다. 체험적 관점에 자신이 넘치는 경우는 대체로 교시적 포즈를 보이기 쉽다. 역시 박 작가도 이렇게 확장하는 곳으로 가는데 약간 아쉬움을 남긴다.
김광남의 <자업자득>은 자동차 파손 사건을 겪고 그 가해자를 탐색해가는 과정에서 한 인물을 조명한다. 여러 유사한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하는 문제적 인물을 확인한 후에는 통상적인 해결 방식에서 빗겨난다. 그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우리 사회의 타락상을 비판하지 않고, 즉 외부로 방향을 돌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내면화 방향을 선택하여 지난 날 유사한 작가의 행위를 반성한다. 이처럼 그 인물을 도덕적 사회적 문제 인간으로 몰아가기 쉬운 함정을 넘어서는 자리에 올라서는 성숙한 작가 의식을 보인다. 수필의 본질인 자기 성찰과 내적 성숙의 기회로 삼아 수필가로서의 참다운 면목을 드러낸다.
최봉숙의 <냉수 한 컵>은 성실하게 살았던 한 천주교 신부의 삶을 소개한다. 그것은 작가에게 나름 삶의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걸 밝히면서 그를 도울 수 있는데 그러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훌륭한 신부의 봉사 활동과 그것을 기리는 글에서 작가는 바람직한 한 인물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와 대비하여 너무나 부족했던 과거 자신을 안타까워한다. 이렇듯 이 글은 행동화 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일종의 자기 고발이자 타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점에서 자성적이다. 즉 타인을 향했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여 돌아보는 순간 그는 자아 탐구의 문에 들어선 것이다.
이춘희의 <라면 냄비 받침>은 사회에서 전문가를 푸대접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에 대한 작가의 공감 태도와 자성의 양면을 포착한다. 상호 소통적 대비로 실체적 진정성을 획득하여 모든 작가에게 해당하는 공감대의 터전을 닦는다.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우리가 갖는 회의는 과연 누가 읽고서 공감할 것이고 그 수고에 대한 대접을 해줄까 하는 의문이다. 그것의 여부나 강도가 창작의 욕구를 상쇄시키지는 못한다할지라도, 어쩌면 숙명의 길에 나선 창작에도 타인의 관심을 바라고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병존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 글에서처럼 녹록하지 않고, 더구나 그 자체를 평가절하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럴 때 그런 사태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우리의 가치를 외치고 나서기보다 무언가 문제의 해결책이 우리 자신에게 없는지,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지 돌아보는 자세는 전향적이다. 문제의 출발과 해결에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맺게 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것을 놓치고 타자로부터 해결책을 찾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내가 맞닥뜨린 문제를 누가 나서서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직 그것은 나한테 달려 있고, 전부를 해결하지 못해도 그 실마리나 단초는 나에게 있음을 재빨리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에 한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된다. 그런 면에서 자성을 기본 맥락으로 삼는 수필에서 문제를 자신에게 귀착시키는 태도는 본질적이어서 수필답다.
3. 자아의 외부 지향성-내면 지향적 자성과 외향적 행위
타인과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 체험의 진액이 다시 세상 이해의 관점을 확장시키거나 사회로 환원하여 타인과의 바람직한 관계로 전이되는 경우의 수필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자성을 전제로 타자로 향한 행위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그 실행의 종착점이 나에게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맺는다는 말이다. 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타인에게서 발휘되는 자성적 행위의 결과인 문학적 현장을 보기로 하자.
조유안의 <마법에 걸리다>는 관람한 영화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한 후에 행동의 변화로 나아간다. 이처럼 개인이 각성한 후에 타인에게 그 변화된 행동을 전달하여 삶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각성한다. 영화가 성찰의 계기가 되면서 삶의 진정성을 각성하게 된다. 자신을 바라보고 비치는 거울은 우리 삶의 도처에 편재함을 깨우치게 한다. 타인과 관계하면서 자신의 언행을 살피고 반성하는 것은 관계 사고의 출발점이다. 일상에서 철이 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적 사고의 온전한 실천을 행할 때 부를 수 있는 명명이다. 이러한 관계적 사고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경도하거나 유아독존식의 반사회적 벽을 쌓는다. 산다는 것은 이 다양한 관계에 의한 관계망 안에서 존재하는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러 인간과 관계망을 형성한다. 가까운 혈연의 가족부터 나아가 친구와 지연과 학연의 지인들, 직장의 동료, 이웃과 마을 사람, 국가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통 관계망에 얽혀 있다. 이 관계망에서 개체의 자리를 바르게 알고 그에 맞추어 잡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여러 불상사를 겪고 어려움에 처한다. 수필 쓰기는 바로 이러한 관계망에서 개별 관계의 정확한 좌표를 찾아가는 일에 적극 나서는 문학적 행위라 달리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무엇보다 중요한 수필의 과제인 셈이다.
곽숙자의 <얄궂은 인연>은 옥수수로 회상하는 안타까웠던 사연을 밝히면서 가족사적 체험과 오버랩 시킨다. 타인을 배려하는 진정성이 드러나면서 선한 의지의 발현을 본다. 타인에게 향하는 외부 지향적 윤리의 실상이다. 옥수수에 얽힌 사연과 가족사적 아픔을 연결하며 과거 회상 속에 인간애의 온정이 드러나고 과거 행위의 불찰을 고백하면서 인간 양심의 면모를 보인다. 옥수수 찰기처럼 참된 마음의 고백, 어린 시절 어머니가 견뎠던 고된 삶의 기억이 겹치면서 어느 옥수수 장수의 지난한 삶에 동감한다. 그것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안타까움은 인간의 선량함과 타인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심성을 목도하게 한다. 작가의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맹자가 말한 바의 성선설을 뒷받침하면서 인간다움의 정체를 확인한다. 타인에게 베풀었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자책은 문학 치유로 이어질 것이다. 작가는 이 글로써 그나마 해소하게 되었으므로 이후에는 아마도 상당량의 평안을 찾게 될 것이고, 앞으론 옥수수를 먹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은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고유한 치유의 기능을 갖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라는 효용성의 정체이다.
이상규의 <대답 없는 휴대폰>은 근무처 부하 여직원과의 직장 체험이 주요 줄거리다. 글은 근무할 때 그녀와 어떤 사연이 있었는가를 얘기한다. 백혈병에 걸려 입원한 그녀를 병문안 하고 작가는 얼마 뒤에 퇴직한다. 퇴직 사무를 처리하면서 그녀에게 준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고 혹 그게 병과 연결된 것은 아닌지 후회한다. 뒤이어 재직 당시에 마음을 써주고 적극 배려하지 못했다는 때늦은 인식에 이른다. 그 후 안부 전화를 걸었으나 응답이 없다. 휴대폰 연락이 안 되자 그 반성적 후회가 한결 더 크게 밀려온다. 작가가 이젠 더 이상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길이 막히자,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지만 모두 막힌다. 이처럼 지난 행위를 돌이켜 반성한 이후에 작가가 향하는 곳은 타인이다. 즉 성찰적 행위가 내적 성숙의 기회에서 멈추지 않고 외부로 향한다(“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는 점이다. 즉 말이라도 해주면서 타자와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정해경의 <그녀가 주고 간 선물>은 전에 살던 집 주인의 부정적 이미지가 반전의 계기(욕실 의 나비 스티커)를 가지며 긍정 이미지로 변화한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숨겨진 진실과 그 이면의 양면적 진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인식 전환을 체험하고 자신의 희망적 기대와 타인과 자아의 바람직한 상상적 소통에 다가선다. 역전의 상황에서 느끼는 건 발견의 기쁨이다. 표면과 이면 사이의 차이에 진실이 숨겨 있다. 함부로 쉽게 겉만 보고서 판단하려드는 태도에 대한 모두의 반성으로 읽힌다. 타인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그 겉만 피상적으로 보아서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병존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전달한다.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타인과 나누고자 시도하는 소통 행위다. 소통의 결과는 여러 결과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소통의 욕구가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동인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4. 사회 인식의 자아 귀착-관용적 체념의 반성과 비판적 자성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다. 그것을 관용적으로 수용하거나 작가의 각성과 자성으로 귀결하는 글을 보기로 한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수양을 위한 교과서라는 관점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군자가 세상을 주유하고 유람하면서 도를 깨우치는 방식과 통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자에서 수양을 위해서 주유천하를 택하지 않고, 깊은 산골이나 동굴을 택하여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는 방법과 대척에 서는 방식이다. 어느 것이 정신 수양할 때의 우열인지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고, 유전적 소인으로 한 개인이 자기 내면 지향인가, 외부 행동 지향인지에 달린 성격적 문제라 보는 게 보다 온당한 시각이 아닐까? 형태가 다른 방식의 선택이나 그 얻고자 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할 수 있기에 말이다.
서민웅의 <꽃이 목마른 가봐>는 작가가 거주하는 골목의 환경 미화에 솔선하는 내용이다. 보통의 경우는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십상인데, 그러하지 않고(이웃의 비협조에 불평과 비난 없이) 작가 자신의 낙으로 돌리는 문학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웃을 배려하고 문제를 수용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과 교양적 태도를 읽게 한다. 골목길 화분을 기르는 애환이지만 환경 미화의 선행에서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고 이웃을 배려하면서도 자기 희열로 전환시켜 내면화하는 태도가 아름답다. 수필은 작가가 나름의 인격을 완성한 후에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걸 유감없이 보여준다. 왜 수필이 젊은이들이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문학인지 실감나게 증명한다.
최승영의 <날개 달린 아이>는 세상의 비뚤어진 인간관을 고발한다. 때늦은 반성적 후회이지만 사회 문제를 자기 문제화시키거나 또는 내면화의 대상으로 낚아 올리는 태도에서 개인과 사회의 발전적 소통이 가능하고, 이 지점에 문학의 진실한 사회적 기능이 자리할 것이다. 한 인물이 살아가는 길은 세상과의 타협과 갈등, 화해와 불화의 사이에 있다. 잠시 과외지도 하면서 알게 된 아이의 삶을 관찰하면서 세상의 그릇된 인간관과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성과 자각에 이른다. 이 작가의 특징이기도 한 타설 관념을 즐겨 수필에 차용하면서 때로는 과도하게 때로는 빗겨가면서 체험과 연결시키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 태도는 어쩌면 작가가 내세우는 주제에 대한 객관적 논리성을 확실하게 드러내고자 하려는 욕구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수필은 논문과도 다르고 비평과도 다르다. 어떤 관념을 논리적 근거로 입증하기보다 체험적 사실에서 실체적 진실을 추출하는 것으로 형상화가 생명인 문학 본질에 더 가깝다.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가 강한 경우에 간혹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수필 문학에선 삶의 구체적 자설적 진정성이 더욱 값지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과 종교적 진리의 말씀보다 한 인간의 사건에서 우러나오는 진솔성이 더욱 귀하다 하겠다. 세상에 이미 알려지고 존재하는 지식의 전달로 교시성을 내세우게 되면 독자에겐 감동을 감량減量케하기 십상이다. 수필가가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독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려하거나 알게 하려고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독자 앞에서 작가는 늘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직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적 진실을 겸손하게 차려내는 일에서 그쳐야 한다. 무엇을 알고자 어떤 것을 배우려고 수필을 읽으려는 독자는 거의 없다. 독자는 수필에서 작가의 꾸밈없고 적나라한 삶의 실상을 공유하면서 동감하고 감동하고자 한다. 배우고 알려면 그러한 지식 중심의 책은 훨씬 더 많고 구하기도 쉽다. 다만 그곳엔 실존 인간과 생활의 구체상이 없다. 그곳에 없는 한 실제 인간을 만나고 싶기에 허구적 인간과 그의 삶을 다룬 소설이 아닌 수필을 찾는 것이다. 이점을 수필가는 늘 명심해야 마땅한 일이다.
서장원의 <그루터기를 지나며>는 오늘날 세태의 이중성을 체험하는 게 주 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에 설교적 목소리를 들이대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자제하여 관용적 태도를 보여준다. 산책길의 사연인데 건전한 사회상과 불량 사회상의 이중성을 고발하면서도 명암을 분별하여 수용하고 관조적 평정심을 보이는 것은 수필답다. 우리 이중적 자화상을 제시하면서 작가는 세상의 그러함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여 관조적 자세를 가능하게 한다. 세상의 명암에 가까이 가면 관조하기 어렵고, 그것은 칭찬과 분노의 직접적 일차원으로 대응하게 할 것이다. 이 적정한 거리두기는 평정심을 부른다. 관용의 미덕을 살리게 하면서 설교적 목소리나 교설적이지 않고 독자가 안심하고 수용할 터전을 갖춘다. 이렇게 양면성의 세계로 향한 시선은 자성을 도모하면서 자아화에 이르는데, 바로 수필이 가야할 길이다.
장현심의 <백수(白首)>는 늙은 오골계의 지난 일생과 인간 말년의 삶을 대조시키고 노익장을 의식한 노년의 삶에 대한 의식을 표출한다. 이 사회를 향해 노년을 정당하게 인식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편으론 적절하게 변화된 응답을 바라는 도전적인 글이다. 집에서 기르던 닭의 달라진 처지가 가련해서만 이 글을 쓴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 변화를 작가는 지켜봐오면서 인간에게 빗대어 말할 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세월 따라 변하고 그 신세가 예전과 달라진다는 말이다. 지위는 물론이고 세상의 대우도 역시 그에 따라 바뀐다. 그 처지의 가련함에서 비애의 정조나 동정의 연민을 드러내는 것도 당자에게는 달갑지가 않다는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자기 존엄성의 동경과 유지하고픈 욕망을 드러낸다. 과연 이 글은 노계인 백수에 대한 관찰자적 시선으로만 읽어내는 것이 좋은가. 표가 나지 않지만 노계에서 작가의 빙의된 자아를 읽을 수 있다. 노계 삶의 어느 부분 작가의 처지를 의탁하여 간접적으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노년을 맞이하여 예전과 여러모로 다른 삶의 노정에 놓여 있다. 노계의 처지가 된 작가는 노계를 내세워 세상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앞으로 남은 생의 바람을 대변하고 있다. 가족과 어울려 사는 삶의 그날이 빨리 현실화하기를 기다리면서 작가는 오늘도 그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작가의 어떤 사고와 감정을 표현한다. 수필은 그것을 더욱 직접으로 구체화하여 노골적으로 제시한다. 자신과 처지가 유사한 매개물을 등장시켜 완만한 욕구를 기교적으로 형상화 하여 드러낸다. 이것은 문학의 기능적 효용성이 작가에게 작용하는 경우이고, 수필은 역시 주제의 문학이면서도 작가 중심의 문학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최양자의 <자발적 왕따>는 천변의 오리 일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인간과 대비하여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해하는 시선을 보인다. 오리의 왕따를 자발성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독특함이 이채롭다. 달리 보면 스스로 소외시키는 건 한 생명체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이다. 자기를 먼저 비하한 뒤에 남이 경시하는 것이다. 자존감을 갖지 못한 자를 누가 나서서 존중할 것인가. 오리의 동료로부터 분리를 자발성으로 이해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생명체 자존의 법칙을 알아낸 셈이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생명의 자존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을 뺀 모든 생명체는 자존이 태생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은 바로 자존으로 탄생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존재를 허무는 자해나 자살은 할 수 없다.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기에 그런 일은 없다. 다만 예외가 있다. 인간은 자해하고 자살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고 소멸시킨다. 그것은 단 하나 자존감을 상실했을 때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존감은 인간 실존의 근본 핵이다. 이점을 오리를 매개로 하여 들어내어 관조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삶의 비의를 깨우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인 가구나 혼자서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 시대의 인간들이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이처럼 자발적 왕따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해서 인정하는 작가의 관점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할 것이다.
5. 사회 인식의 두 목소리-직설과 은유의 방식
사회에서 비롯한 문제를 작가 자신에게 돌리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회로 반사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혁명가의 세계관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의 수고로 세상은 바뀌고 변하기도 하지만 그에 따르는 셀 수 없는 희생과 부작용 또한 발생하기도 하는 것은 역사에서 다양한 사례가 있다. 혁명적 실행은 아니지만 그에 동조하는 작은 행동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그 결과의 목적 달성과 무관하게 이런 시도 자체를 나무라거나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행동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실제 세상은 관성에 따라서 변하지 않으려 굳세게 저항하고 자신의 현재를 고수하려하기 때문이다. 과연 문학은 이럴 때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 각성인가, 행동인가. 인간에게 영육의 양면이 있는 것처럼 이 양자는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기대치에 근접하려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행동 방향에 다가선 글을 살피고자 한다.
최지안의 <개 같은 경우>는 도전적으로 세태를 고발한다. 애견인 양태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맘껏 야유를 보낸다. 작가의 세태를 향한 관점만 보일 뿐 작가로서 개별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회를 향한 목소리만 두드러진다. 그런 시점에서 작가의 성향이나 의식을 추적할 수 있다. 인간이 경시되거나 도외시 된 이런 세태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고발한다. 비뚤어진 애견 양육의 풍습에 대해서 상반적으로 인간의 소중함이 경시되거나 무시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은 작가의 명명에도 나와 있듯, “개 같은 경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개가 상전인 사회, 정말로 인간이 없는 개의 세상, 개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삶, 어찌 보면 개만도 못한 삶에 대한 조롱이자 자기 비하의 심정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를 향한 강렬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질타, 나아가서 경각심을 제고하는 강한 의도를 읽는다. 그만큼 목청은 건강하다. 사회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것의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믿는 진취적 건강함이다. 지금과 다른 사회, 달라야할 사회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에 다가서려는 의지와 욕구는 건강한 사고인 만큼 무척 직설적이다.
김건수의 <어떤 명의>는 현 의료 세태를 자아 관점에서 풍자하고 비판한다. 직설 화법으로 드러내어 따져 묻지 않고 회고적 감성으로 주관화하여 간접 화법으로 우회하는 노련함을 드러낸다. 의료 현실을 비판하는 풍자와 유머 기법이 개성적이고 사태를 해석하는 관점이 독특하여 흥미롭다. 직설적이지 않은 에둘러가기의 간접화에서 여유와 반전의 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은 최지안 작가와 다르다. 직설적이지 않고 간접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최지안과 비교하자면 노회한 셈이다. 강력하지 않으나 은근하여 오히려 독자에게 부담주지 않는다. 최지안의 경우는 옳은 말이지만 수용하기에 약간 거북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지만, 김건수 작가는 그러하지 않다. 최지안의 경우는 딱딱한 견과류 음식이라면 김건수는 스프처럼 유동식이어서 섭취와 소화에 부드럽게 스민다. 양자의 차이뿐 이점을 우열의 평가로 삼을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두 음식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내세울 순 없다. 독자의 취향에 의해 수용의 선호가 갈릴 뿐이다. 둘 다 사회 문제를 의식하고 그 해결책 혹은 희망적 개선의 바람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자에는 작가가 관찰자로만 존재하지만, 후자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자는 사태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더욱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지만, 후자는 직접 개입하여 주관적이다. 그만큼 자의성이 크다. 자의적 판단이 앞서서 설득력 획득에 일부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태도는 이 주제에 대한 화자의 사유와 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증좌로 기능한다. 이처럼 사회의 세태를 풍자하거나 비판할 때 화자의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작가의 기조가 직설적인지 은유적 세상 인식인지 양자로 갈려 나타난다.
6.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운 세상 풍경
개인은 혼자 사회와 격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홀로 산 속에 은거하여도 사회가 미정형인 채로 잠재한다. 그는 결코 사회와 동떨어진 우주 어느 곳에 고독자로 사는 것이 아닌 셈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일상의 삶을 꾸려가지만 개별자로서 삶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시간 공간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 개체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말은 단독자 개인이면서도 사회 집단의 일개 구성원이란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영위하는지가 바로 인생을 슬기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요체가 될 것이다. 수필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일정 부분 사회와 연관 고리를 유지하는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로부터 출발하여 세상을 돌아서 다시 나로 귀착하는 순환형 삶의 모습, 어느 한 방향으로만 직선적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원형의 모습을 이루는 것, 너가 곧 나이면서 개인이 곧 사회인 경우를 본다. 수필은 세계를 자아화 하는 면에서 시와 닮은 주관성의 장르이면서도, 역으로 자아를 세계화 하는 면에선 교설의 세계를 담는 객관성 장르이기도 하다. 나아가 개인으로서 자아와 세계로서의 사회가 조화하면서 이른 바 주객이 일치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김용자의 <짧은 글 네 편>은 전원생활에서 건져낸 다양한 삶의 일상적 양태에 스민 문제를 객관적 시각으로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비판하고 자성한다. 작가가 등장하지만 직접 나서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세상살이에 대해서 과도한 비판이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잔잔한 풍경을 그려내듯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전원의 이모저모를 담담하게 보고하듯 그려낸다. 그 중에는 세상의 불공평한 경우도 있고, 이치와 현실이 상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입증한다. 세상살이는 마냥 만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헝클어지지도 않고, 그야말로 자연이 그러하듯 다양한 모습 속에서 인간의 삶이 그럭저럭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양한 인생살이, 인생의 정답은 없다는 것을 작은 마을의 여러 사람의 인생사를 들여다보며 전한다. 강력한 메시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서 메시지 이상의 전언을 읽는다. 이것은 작가의 관조적 시선 속에 감춰진 인생 만사의 수용과 인정의 너그러움이다. 그만큼 인생의 성숙한 인식을 발견한다. 인생의 성숙이란 이해 안 되는 인생이 없고, 그 모든 사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수필 기능의 하나는 바로 인생 성숙에 이처럼 부드럽고 은근하게 기여한다는 점에 있다 할 것이다. 주관적 시선과 객관화된 전원의 삶이 글에서 어울려 조화로운 시공을 담아낸다. 개인과 사회의 평화로운 공존의 세계가 열려있다. 너의 삶이 있듯, 나의 삶도 있고 함께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전언을 읽게 한다.
이복희의 <조금만 더>는 일상의 격려와 자제의 이중성을 다룬다. 이 글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실상의 괴리와 불일치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을 다룬다. 이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자아와 타자의 체험을 표집하여 대비하면서 주제 통합에 이른다. 그가 넘침과 모자람의 양면을 체험한 것은 어린 시절 달리기가 처음이다. ‘조금만 더’의 노력이 웃음거리로 귀결된 쓰라린 기억, 전철 안에서 타인으로부터 간접 체험한 ‘조금만 더’의 실상을 유사하게 접한다. 이의 대조적 상황인 ‘조금만 덜’로 작가 생각의 변화가 오고 이것을 체험의 주체화로 확인한다. 후배 아들 교통사고의 안타까움은 그의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작가의 삶의 실상에서 그 양자의 거리가 그렇게 쉽게 화해할 수 없는 상당한 거리에 놓인다는 것을 국수를 삶으며 다시금 깨닫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현실과 당위 사이의 거리, 언제나 양자는 길항하면서 존재한다는 깨우침을, 그 원초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의 타인으로 향하다 다시 작가 자신에게로 환원하는 원형적 사유의 구성은 시적 회귀형 반복성과 수미쌍관적 구성을 갖춘다. 즉 수필의 바람직한 전개 원리에 그의 수필이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아와 타자, 시작과 끝, 뫼비우스 띠처럼 이중적인 세상의 이치를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한다. 개별로부터 출발한 주체적 체험이 사회의 객관 세계에서 조응하여 다시 자아로 귀결한다. 전자와 달리 주객의 호응을 이루어 일체화 된다. 세상을 받아들여 일치된 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세상과 나는 별개가 아닌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 있다는 말이겠다.(2017.10.11.)
첫댓글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특히 4번 항의 20행부터 한 단락은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이네요.
아 대단한 필력이십니다.
작가회동인지 <마법에 걸리다>를 언급해주시니
감사할 뿐이지요. ㅎㅎㅎ
공부 잘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왜 발을 꼭 묶었습니까
만백성이 다 읽으면 안 되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