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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소생하는 시간
안유환
들어가는 말
중요한 것이나 위험한 것은 흔히 빨강색으로 표시된다. 아름다운 것도 대체로 빨강색이다. 꽃이 빨갛고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는 ‘하트’가 빨갛다. 위험지역을 알리는 신호나 표지판도 모두 빨간색이다. 달력을 들여다보면 한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의 빨강색 글자가 왼쪽에 세로로 줄을 짓고, 이따금 들어있는 공휴일도 빨간색의 얼굴을 내밀고 있다. 구태여 빨간색을 끌어다 붙이지 않아도 쉼이란 일하는 것만큼 중요하고, 따라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해가 바뀌고 새 달력을 대하면 사람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올해는 공휴가 어떻게 분포되어있고, 몇 날이나 되는가를 챙겨보는 것이다. 어쩌다 찾아오는 연휴의 시간은 더더욱 삶에 활력을 더한다. 피곤한 몸이 새 힘을 얻어 일할 수 있는 것은 쉼 때문이다. 휴식은 일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휴식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휴식이란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양약이다. 매주 1회씩(또는 2회씩) 공휴가 주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철이면 사람들은 휴가를 기다린다.
무더운 여름철, 쉴 틈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공휴나 휴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요한 것을 소홀히 여기면 손해를 보고, 위험한 것을 대수롭잖게 생각하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땀 흘려 부지런히 일하고 쉬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행복이 소생하는 시간이다. 이달에는 12편의 수필 가운데서 쉼−휴식을 얘기하는 세 편의 수필을 들여다본다.
‘잠시 휴식을 취하십시오’ − 권갑숙
화자에게는 휴식이 없어 보인다. 어제 그는 산적한 회사 일을 정지모드로 돌려놓고, 급히 포항으로 갔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둘째 아이로부터 “그저께 밤에 설사와 구토로 잠 한숨 못잤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것이다. “누룽지로 죽을 끓이고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놓고 밤새 지켜봤더니 좋아져서” 이튿날 아침 다시 부산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그러나 아이를 간호하기 위해 급히 달려간 길이 뜻밖에 “봄의 향연”을 즐기는 잠깐의 여유로 이어지고 있다. “비에 젖은 4월의 산 빛은 숨이 멎도록 황홀하다. 봄비는 온 산들을 수채화물감으로 그려놓고 사이사이 초록색을 가지고 피라미드를 많이도 그렸네!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분홍물감을 묻혀 큰 붓으로 터치하듯 드문드문 찍어놓았다.”
작가는 운전대를 잡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노란색과 연두색, 베이지색은 갓 새싹이 돋아난 때죽나무, 서어나무, 참나무들의 새순일 것이고, 진한 연두색은 아마도 3월 하순부터 싹을 틔우고 숲에서 가장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귀릉나무와 화살나무일 것이다.······.” 고속도로변의 유채꽃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광고용 바람인형처럼 허리가 부러질 듯 휘청이며 자연의 에너지를 한껏 발산하고 있다. 전방을 주시하며 100km 규정 속도에 맞춰 조심스럽게 운전하려고 애쓰지만 펼쳐지는 봄 산의 정경은 마치 호객행위를 하는 것처럼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때로는 “취한 듯 비틀거리며” 운전을 하고 있다.
한 시간쯤 차를 운전했을 때였다. 예쁜 목소리로 “잠시 휴식을 취하십시오.” 라는 소리가 들리며 계기판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 잔 그림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이것은 언제나 한 시간을 넘게 달리면 “차도 사람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자동차 시스템”이다. 계속되는 그 소리에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진 않지만 “오늘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같아 마음이 바쁘고, 내일 모레 대기업에서 회사 실사를 나오기 때문에 사무실 안팎을 대청소도 해야 한다. 만물이 피어나는 이 좋은 계절에 마음은 쉬지를 못하고 있다.
화자는 계기판의 ‘휴식권유’를 계속 외면하면서 친언니처럼 가까운 부지런한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가정에서 현모양처의 소임을 다하느라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딸로서 완벽하게 집안일을 해내려고 무던히도 수고하는 것을 보아왔고, 평소에는 늘 건강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언니가 얼마 전 “휴식하라는 경고음을 무시했더니 몸이 갑자기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입원한지 한 달이 다되어가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병문안도 하지 못했다. 언니의 삶은 화자의 모습이었다.
나도 살면서 잠시라도 쉬었다 가야지, 내 건강을 챙기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쉽지 않았다. 여태까지 해오던 집안일과 회사 일에 내가 제동을 걸면 바퀴하나 빠진 자동차처럼 쓰러질 것이 뻔하다 싶어 그럭저럭 살아왔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복병을 만날지 모른 채 다들 그러려니 하고 살아간다. 여기저기 잔병쯤이야 나이 들면 다 그렇겠지 하며 막상 중병이 아니니 참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게 지금의 내 삶이고 우리네 삶이다.
언니는 며칠 전 “친한 사람끼리 담소하며 차 한 잔을 나누는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지 깨달았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우선 건강하니까. 그리고 별 어려움이 없었고 힘 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고 가끔 뒤돌아보며 여유를 가지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한다.” 집에 도착했을 때도 기계음은 ‘잠시 휴식을 취하십시오’라며 찻잔을 내밀고 있다.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 계기판 기계음은 쉬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귀에 지금도 계속 울리는 것 같다.
풍류음식 −남지은
우리조상들은 일하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일했다. 풍류를 즐길 뿐만 아니라 풍류 속에 살았다. ‘풍류’란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란 뜻이다. 조상들은 노는 데도, 쉬는 데도 멋을 생각했다. 하는 일없이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인생을 멋있게 살고 재미있게 놀아보려는 마음이 축제를 만들어내었다. 작가는 지금 ‘우시산국 축제’ 현장에 있다. 이 축제는 울산의 옛 지명인 ‘우시산국’에서 따온 이름으로 매년 3월 울주군 웅촌면 회야 강변에서 개최되는 풍류축제이다. 누구나 환영하는 축제장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춤추며 몸과 마음의 휴식을 만끽한다. 축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화전을 맛보는 것이다.
마을 부녀들은 번철에 화전을 부쳐서 축제장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맛보기를 나눠주었다. 번철은 고작 두 개 뿐인데, 화전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한참을 기다려 겨우 화전 세 개를 받아 일행과 나눠먹었다. 본래 음식이 적으면 더 감칠맛이 나고, 먹고 싶어진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과 찹쌀의 쫄깃함, 거기다가 모양까지 어여쁘니 어찌 맛이 없겠는가. 화전을 부치는 부녀들은 우리에게 한 조각 더 주고 싶어도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줄 수가 없다.
화자는 화전의 맛과 분위기와 화전을 부치는 부녀들의 마음까지 잘 형상화 하고 있다. 누구나 가보고 싶고 화전을 먹어보고 싶도록. “화전은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납작하게 펼쳐서 진달래꽃을 붙여서 기름에 지진 떡”이다. 축제장의 분위기는 지난날 고향마을의 화전놀이를 불러냈다. “문중의 부인들이 놀이를 하기로 뜻을 모아 시어른들의 승낙을 얻어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날짜가 정해지면 부인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시어머니들은 이날만큼은 며느리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게 참견하지 않았다.” 놀이장에 도착하여 먹거리가 마련되면 먹고 마시고 놀이판을 벌인다. 그 자리는 부녀들이 누리는 소중한 휴식시간이었다. “음주가무를 즐기며 남편 흉, 시댁 흉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한마디로 한풀이 무대였다.” 시부모님 앞에서, 남편 앞에서 내려놓지 못한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고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모두 쏟아놓는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모두 받아주는 화전놀이야말로 진정한 쉼터였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만들어먹던 떡에는 철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음력 새해 첫날에는 천지만물이 시작되는 날이니 청결하고 엄숙해야 하므로 하얀 떡국을 끓였다. 2월 초하루에는 1년 내내 쉬는 날 없는 노비에게 쉬게 하며 송편을 빚어 나이대로 먹이는 풍속이 있었다. 3월 삼짇날에는 화전을 부쳐 먹었고, 4월 초파일에는 느티떡을 만들었다. 느티나무 새잎을 따다가 멥쌀가루에 섞어 찐 것이 느티떡이다. 5월 단오에는 수리취떡을, 6월 유두에는 둥글게 빚은 흰떡을 꿀물에 넣어 수단을 빚었다. 7월 칠석에는 밀 부꾸미와 증편을 만들었고, 8월 한가위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어 솔잎을 깔고 쪄서 솔향기를 즐겼고, 9월 중양절에는 국화전을 부쳐 먹었다. 10월 상달에는 1년 중 가장 으뜸 달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시루떡으로 고사를 지냈다. 11월 동지에는 찹쌀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끓였고, 12월 가평절에는 골무떡을 했다.
어느 듯 축제장은 행사가 무르익어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먹고 싶어도 실컷 먹어볼 수 없는 화전은 축제의 맛을 내는 양념이었다. 대신에 일행은 미나리를 넣고 무친 도토리묵과 파전을 시키고 막걸리 한잔으로 흥에 빠져들었다. 화전놀이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놀이로 전해지고 있다. 주로 부인들의 놀이였으나 후대에 오면서 유생들도 봄맞이 놀이로 즐기던 멋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시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누구나 과거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화전놀이 같은 축제를 재현해봄으로 우리는 쉼이 있는 풍류의 멋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의 경사− 김혜강
사람들이 일터를 벗어나 쉬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넓은 곳이다. 아무리 규모가 커도 도시는 비좁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가야한다. 큰 회사라도 사무실은 좁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잠시 쉬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야하고, 오래도록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쉼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속이나 넓은 들판, 확 트인 초원에서 지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거기가면 피곤한 이들이 쉼을 얻을 수 있고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마당이 넓은 집’이라면 평안이 깃들고 직장에서 쌓인 피로를 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화자가 그 마당 넓은 집 H선생으로부터 받은 전화는 “손가락에 장을 지져야할 일이 생겼다.”는 우울한 소식이었다. 그분은 한 달쯤 전에 남편이 달걀로 병아리를 부화시키겠다는 말을 듣고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아 “성공하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아리가 부화되었다는 것이다. 병아리 부화소식은 전원풍경 같은 지난날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너무도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병아리 이야기를 듣다보니 양지바른 시골집 마당 한 귀퉁이에서 알을 품고 있는 어미닭을 본지도 참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 가축들은 식구처럼 사람들과 한 울타리 안에 살았다. 해와 달과 별이 돌아가며 하늘을 차지하듯, 마당을 함께 나누어 쓰고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골목길이나 개울로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으나 가축과 사람이 말없이 교감하며 지내던 시대였다. 세월 따라 닭들이 전자레인지만한 닭장으로 이주해 간 뒤, 우렁차게 뽑아 올리던 수탉 울음소리는 더 이상 새벽하늘을 가르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이 예언하듯 제시하는 미래는 “자연성과 인간성 말살에 대한” 어두운 시대이다. “생명체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과학의 발달이 인간복제를”시도하고 “탄생이 아닌 맞춤형으로 생산되는 그들은 성대가 제거된 애완견처럼 인간의 특징인 사랑이나 행복,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과 정서는 알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해가지고 달이 뜨는 사연과 꽃이 피고 별이 반짝이는 우주의 법칙 같은 것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며, 본능으로 교감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허물어질 수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앞날이 어둡고 우울함이 가슴을 덮누른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온 H선생님 집의 병아리 부화 소식은 “연둣빛을 머금고 눈을 뜨는 새싹처럼 상큼” 했다. 그것은 봄과 함께 찾아온 모처럼의 경사였다.
“팔자에 없는 병아리 어미노릇까지 하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한숨 섞인 푸념은 처음부터 자랑이었다. 낙동강을 낀 사방이 트인 마을, 새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선생님 집 마당에는 이제 병아리들이 매일같이 종종거리며 동요 속 가사처럼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할 것이다. 머지않아 우렁찬 수탉 울음소리도 울려 퍼질 것이다. 휴일이 되면 손자들이 병아리를 보러 올 것이라는 목소리는 벌써부터 달떠 있다. 혹 내년 봄에는 보름달이 쉬었다 가는 마당 넓은 집으로부터 어미닭이 알을 품는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마당이 넓은 집에 살고 싶다는 것은 나이든 현대인들에게는 하나의 로망이 아닐까? 작가는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마당 넓은 집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을 맛보게 하고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마당 한구석에 텃밭을 만들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남새를 가꾸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키우는 애완견(?)이 이웃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뛰 놀 수 있을 것이다. 넓은 마당이 주는 자유이다. 철따라 피우는 꽃들로 부터는 계절이 변화하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이 파란 가을이 오면 한 두 그루 쯤 서있을 감나무에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그것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이제는 쉬라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맺는말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정신노동도 쉰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유대인은 그들에게 주어진 계명을 생명처럼 지켜왔다. 그렇게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들은 온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번영과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에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온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몸과 마음의 휴식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수필쓰기는 그때그때 작가의 마음과 눈에 비치는 가장 아름답고 의미 깊은 그림을 백지위에 그려내는 것이다. 권갑숙의 「잠시 쉬어가십시오」는 쉼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도 쉬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남지은의 「풍류음식」은 축제의 풍류 속에 녹아있는 멋과 놀이에서 휴식을 찾아내고, 김혜강의 「마당 넓은 집의 경사」는 넓은 환경이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몸과 마음의 휴식을 노래한다. 일하는 사람에게 쉼이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공휴일이 빨강색으로 표시되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