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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역사 시리즈 중의 세 번째로 출간된 이 책은 ‘중세의 악마’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기독교는 이미 유럽에서 주류 종교로서의 지위를 차지했고, 권력까지 움켜쥔 교황의 위세로 인해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칭하고 있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천사 ‘루시퍼’는 최고의 위치에서 타락한 존재로서 악의 대명사로 치부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때로는 사탄과 혼동되어 불리기도 하지만, 루시퍼는 기독교의 원죄를 촉발시킨 존재로써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악을 인격화한 존재로서 루시퍼의 이름이 소환되기에 이르렀다.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계는 선이 지배해야만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간혹 악이 선을 능가하는 위력을 부리는 현실에서, 종교가 대응하는 논리는 설득력이 미약하기만 하다. 아마도 저자가 오랜 동안 ‘악의 역사’에 천착하여 그 논리와 현실적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이유라 할 것이다. 3권에서는 세상을 뒤흔들었던 범죄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우리 현실에서 실재하는 악의 면모를 ‘루시퍼의 삶’이라는 항목으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악은 실재하며,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악마’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분명한 시각과 용기를 가지고 지금 당장 악과 맞붙어 싸우는 것만이 다가오는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임을 강조한다.
두 번째 항목인 ‘비잔티움의 악마’에서는 초기 기독교의 ‘교부철학’으로부터 비롯된 ‘악마’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 다양한 전설들까지를 포함시켜 ‘악마와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자만 때문에 타락했고, 악마와 그 정령들은 우리를 유혹하여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통과 타락을 기뻐한다고 믿었다’고 설명한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천사 가운데 최고의 지위에 있던 루시퍼가 신의 자리를 탐내 타락했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악의 인격화된 존재인 악마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논리는 '악과 괴로움의 문제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함으로써 중요치 않은 세부 사항에 빠진 나머지, 중요한 논점들을 회피하는 인간 성향의 증거’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악마라는 존재는 비단 기독교만의 논리가 아니라, 같은 뿌리를 가진 이슬람교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이슬람교의 악마’라는 두 번째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기독교보다 선악의 구분을 더 명확하게 정립했기에, 그들이 신성시하는 <코란>이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해석했다고 여겨진다. ‘처벌과 시험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코란>은 고난을 신의 자비와 일치’시켰으며, 이슬람교에서는 ‘악마는 스스로 독립한 존재가 아니’고 신이 악마를 창조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할 수 없’기에, ‘오직 기도와 코란, 그리고 신의 자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의 논리가 시작되었다고 이해된다.
저자는 기독교에서 악마의 개념은 서양 각 민족의 ‘민담’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다각도로 서술하고 있으며, ‘중세 초기의 악마론’은 이러한 토대에서 기독교 교리를 연구한 교부철학자들의 논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적그리스도의 논리가 형성되었고, 타락한 천사로서 ‘루시퍼’가 그것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루시퍼의 반역은 실패로 돌아갔고’, 하늘에서 내던져진 그는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왜곡하고 변형시켰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면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식이 왜 필요한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이 여전히 논리적 맹점으로 꼽히고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이제 ‘초기 중세의 예술과 문학에 등장하는 루시퍼’의 다양한 형상들을 소개하고, 악마의 존재와 그 역할을 탐구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악마와 학자들’이라는 항목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단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이해되며, 중세 후기에 이단을 처벌하기 위해 수행되는 이른바 ‘마녀재판’의 주요한 근거로 작용했다고 이해된다. ‘전성기 중세 예술과 문학에 등장하는 루시퍼’라는 항목에서는 ‘악마의 신학을 이끌었다기보다는 뒤따라갔’던 예술과 문학의 다양한 사례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의 예술 작품에 비로소 ‘루시퍼는 지옥이나 죽음과 같은 무서운 표상과 때때로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여기에서 주로 밀턴의 <실락원>과 단테의 <신곡>을 통해서 지옥과 악마의 형상을 서술하고, 이러한 것이 후대 기독교의 논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던 시대에 미술과 연극을 종교의 교리를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연극에 나타난 루시퍼’에서는 이 시기 종교에서 연극의 역할과 그 의미를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라 할 수 있는 14~15세기의 다양한 움직임을 ‘유명론자, 신비주의, 그리고 마법사’라는 항목에서 정리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마녀 사냥은 악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아무런 죄도 없는 이들이 마녀라고 지목되는 순간 희생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녀 사냥은 악마의 존재를 믿는 것이 불러올 수 있는 끔찍한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역사로부터 ‘계몽주의라는 철학적 이념과 마녀 사냥군들의 명백히 지나친 행위로 인해 책임 있고 반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수그러들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악마’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가져왔고, 이후 ‘악마에 대한 믿음도 상당히 불신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악마의 존재’라는 항목을 통해서 ‘악마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메타포’라고 규정하면서, 악마가 아닌 ‘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여전히 종교적으로 ‘악’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이 세계에 엄연히 실재하는 ‘악’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신의 이름’을 내결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행위를 ‘악’이외에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배제하며 탄압하는 이들은 과연 종교적 교리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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