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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서사시집’이라는 부제를 내결고 있지만, 이 시집을 읽었을 때 그러한 명명에 걸맞은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의 <일리아드>아 <오디세이아> 혹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처럼 보통은 영웅적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것을 흔히 ‘서사시’라고 지칭하며, 그 명명 여부가 문제되고 있지만 동학혁명 전후의 역사를 당대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서술한 신동엽의 <금강>과 같은 작품을 ‘서사시’ 혹은 서사시적‘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일컫기 때문이다. 물론 <해월, 길노래>라는 제목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시집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행적을 따라 서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사적 맥락‘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룩된 작품들이 단편적인 시인의 감상과 평가로 형상화되어 있어, 본격적인 ’서사시‘의 틀을 갖추 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그동안 취재하고 연구했던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밑바탕에 깔아두고서, 그에 따라 작품으로 형상화 했다는 점에서 ‘서사시집’이라는 부제를 붙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이유라면 시인 자신에게는 이 시집이 ‘서사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문제는 최시형의 삶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그저 단편적인 시인의 감상과 이를 보충하는 주석들에 의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성격은 ‘서사시집’이 아닌, 해월 최시형의 ‘서사’를 따라 시인의 서정을 펼쳐낸 ‘서정시집’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인은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오래, 흠모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해월 최시형의 삶을 오랫동안 추적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가 오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며, “이 서사는 그 그리움의 정이 맺힌 말”임을 드러내고 있다. 시집에 수록뙨 작품들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 역시 시인의 그러한 감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혹여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을 잘 모르는 독자라면,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윤석산의 발문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서시’로부터 시작되어 ‘소년기’와 ‘터일 마을’ 등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의 순서는 그대로 해월 최시형의 삶의 궤적을 따라 형상화되어 있다. 아마도 그의 삶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시인이 구성해 놓은 최시형의 ’서사‘를 머릿속에 상상하며 작품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인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과의 ’만남‘을 일컬어, “그(최시형)를 통해 내 속 꿈틀대는 질문과 대답으로 흐르는 길”로 표현한 내용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길노래‘로 표현된 최시형의 삶을 표현해내는 시인의 감성이 독자인 나에게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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