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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에서 죽은 후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최초의 임금은 바로 연산군(燕山君)이다.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했으나, 실정(失政)을 이유로 폭군이라고 평가되어 끝내 폐위되면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바른 것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반정(反正)’이라 칭하고 있으나,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성공한 쿠데타’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시 권력 탈취가 실패로 끝났다면, 이는 반정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수많은 역모(逆謀) 사건 가운데 하나로 지칭되었을 것이다. 특히 재위 말기의 악정(惡政)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폐위되었던 것을 당연시하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치세를 ‘절대 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라는 부제로 규정하고 있다. 신권(臣權)을 억누른 상황에서 펼쳐졌던 연산군 시기의 왕권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강력하고 견고했으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신하들이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은 이미 성종 시절부터 배태되어 있었다고 논해지는데, 세자의 모친인 왕비 윤씨를 서인으로 만들어 쥭음으로 이끌었던 과거의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부왕인 성종 역시 이를 우려해 이 사건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이를 알게 되리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입장에서 연산군이 이 사건을 통해 신권을 억누르려는 기회로 이용했다고 하겠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했던 성종과는 달리, 연산군은 즉위하면서부터 신권을 제압하려는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첫 번째가 바로 왕에게 간하는 대간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건력의 대립은 결국 유가 이념을 내세웠던 사림들을 일거에 몰락시킨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를 초래햇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글(조의제문)을 그의 제자들이 실록에 수록하려했다는 점을 문제 삼아 대규모의 숙청을 벌였던 것이라 하겠다. 항우에 의해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의 글이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유자광의 참언을 받아들여 진행되었던 사건이다. 즉 억울하게 왕위에서 쫓겨난 초나라 의제가 단종에 비유되고, 제문에서 비판적으로 언급한 항우는 계유정난으로 장권을 차지한 세조를 지칭한 것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이 세조와 그 자손인 예종과 성종 그리고 연산군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논법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기화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이에 동조하는 일부 신하들과의 결칵 속에서,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건을 끌어들여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들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처럼 ‘흥청망청’으로 대표되는 유흥에 빠져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에서는 연산군 즉위 초에는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나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갑자사화 이후 절대 왕권이 성립하면서 폐위 당할 때까지 약 2년 동안의 폭정으로 인해 ‘푹군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무도한 정치는 결국 ‘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내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29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등극한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세운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논해지기도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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