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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꼽히는 윤이상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고스란히 체험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러야만 했으며, 그 이후로 정권에서 귀국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독일로 귀화를 결정해야만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에서는 비교적 왕래가 자유롭던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대규모 간첩 사건을 조작했던 것이 바로 ‘동백림 사건’이다. 그와 함께 화가 이응노 역시 이 사건으로 고국을 찾지 못했으며, 지난 2006년 과거사 위원회에서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살았기 때문에, 통영에서는 2010년 윤이상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특히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광주여 영원히’라는 제목의 관현악 작품을 창작해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윤이상의 음악은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을 아우르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전통 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조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1년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에 공연하기 위해 창작한 <심청>으로 인해 윤이상은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그가 북한을 방문한 것도 고구려 고분의 사신도를 보고 음악적 영감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의 형실을 절감했던 그로서는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누구보다 아파했으며, 통일된 조국을 꿈꾸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북한 방문은 자주 교류해야만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으며, 다만 남과 북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그것을 정치적으로 오용했던 독재정권에 의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하겠다. 이 책은 그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으로서, 윤이상의 처지를 ‘상처 입은 세기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늘 한국인으로 불리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윤이상을 규정하면서, 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서 산청과 통영에서의 생활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해방 이후 음악교사와 대학 강사로 지내면서 작곡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음악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독일에서의 활동과 북한 방문, 그리고 그로 인해서 ‘동백림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으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던 그의 '상처 업은' 삶의 모습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내 남편 윤이상>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던 부인 이수자 여사의 꼼꼼한 기록을 통해, 윤이상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활동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볼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아이들이 읽기 편하도록 쉬운 문체로 소개하는 책의 내용도 인상적으로 여겨졌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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