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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투명한 것들로부터
부엌은 이미 계란 비린내가 점령했다
물기가 말라가는 유리컵들이
무릎 꿇은 포로들처럼 창백해 보인다
수백 번 설거지한 컵의 낡은 가장자리
비린내는 늘 새것이다
컵이 계란 꿈을 꾸고 있다
계란이 컵의 꿈을 꾸고 있거나
꿈의 냄새는 비리다
꿈은 선택할 수 있다 컵이 깨어 있는 시간에도
컵의 표면에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부드러운 흔적인지
비린내가 남아 있는 자리에서 실제 감정이 자라난다
컵 자체가 되어버린 비린내, 격자무늬, 감옥 냄새
꿈에서 이미 가 있는 금을 따라 다시 부서지는 미로
생각의 행렬에 참여하는 비린내
설거지할 때 꿈은 파도처럼 밀려났다가
빛과 그림자로 컵이 재생된다
잠의 몽상은 부드럽게 파괴된다
깨지기 쉬운 몸 위로 비밀스러운 붓이 지나간다
미끄러짐, 충돌, 순간의 우아함, 부서진 파편
컵의 골절은 삶의 배열로부터
한때 흰색이었지만 잊혀진 밤이 컵에 담겨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마다
희미해지는 꿈을 흉내 내는 투명함
컵은 이제 깨끗해 보인다
그것과 다른 것
내가 가진 가방의 크기와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그 안은 늘 똑같다
가방이 경이로운 이유;
1.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
2. 미지의 영역이거나
3. 조용히 거주하는 공간이다
결론; 가방은 가방을 낳는다
이 시의 제목은
‘가방은 가능성의 교향곡’이 될 뻔했다
가방은 선박이 될 수도 있었다
가방이 끝없이 펼쳐지면
가장 작은 주머니부터 우주 망원경까지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돛은 복제되는 것이다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가방은 알지 못한다
각 가방에는 고유한 이야기와 은유가 들어 있다
가방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같은 것이
안주머니에 얌전히 박음질 되어 있다
가방이 늘어나면 운명이 복잡해진다
격자무늬처럼 차원이 얽히고
가방 속에는 가방의 평행 우주가 들어 있고
서술자, 방랑자, 과학자, 시인이 한데 얽혀
가방은 곤경에 처한다
제일 먼저 신분증이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는 것
분실한 열쇠나 작은 장신구는 모두
가방 안에 하나씩 복제되어 있다
병렬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이 작은 공간에
한 장, 펼쳐질 이야기, 반복되는 삶
들려줄 이야기는 너무 아름답지만
긴 가방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잃어버린 펜, 떨어진 동전은 매일 반복된다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동전이 가방 속에서 튕겨 나오면
딱 그만큼 현실의 시간 어딘가 구멍이 뚫리고
방황하는 손이 검은 우주의 부드러운 모래 속을 헤집는다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는 열쇠부터 음표까지
그것들을 정말로 잃어버린 것일까?
가방의 평행 우주에서는 여행 비용이 든다
분실물의 추억과 그리움이 만들어낸 각각의 가방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장씩 부드럽게 추적되는
가죽의 감촉, 영원히 얽매이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다
가방은 가방의 바깥을 볼 수 없어서
돛이 펴진다
<대표시>
정물처럼 앉아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발음해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
서로를 밀어내면서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손의 온기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눈은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불완전한 세 개의 이미지
―Animated Anti-animal/2022/Experimental/3'49"
0'00". 평일 낮. 천변을 떠다니는 오리들. 지나가는 사람 몇. 새끼오리가 자맥질하는 풍경.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가 나오지 않는다. 클로즈업. 1'13". 다시 전경. 흐르는 강물. 새끼오리가 후진하는 모습.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 천변 클로즈업. 54".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가 나오지 않는다. 1'13". 새끼오리가 들어간 물과 지금의 물은 이어지지 않는다. 물은 편집된 채로 흐른다. 새끼오리는 결락된다. 그때 엄마처럼 보이는 오리 등장. 1'30". 오리는 왔던 길을 거슬러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린 필름 조각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화면 속 최초의 목격자. 화면 밖의 나는 오리에게 알려줄 수 없다. 현장 속으로 참여할 수 없다. 오리에게 새끼오리의 실종을 알릴 수 있는 오리의 언어가 없다. 말은 번역되지 않는다. 2'17". 새끼오리가 없는 천변 전경. 물의 편집. 물이 삼켰다. 물이 오리를 오렸다. 물이 오리의 자유를 오리가 물의 자유를 먹었다. 자유는 자유를 먹는다. 죽음은 되감기 하지 않는다. 순간 팔뚝만 한 물고기가 펄쩍 튀어 올랐다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포즈. 2'35". 한낮 천변 풍경. 산책은 계속된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나란히. 입구와 출구를 따라 걷고 있다. 3'49".
쿠키
―비둘기가 많네요
포장마차에 서서 튀김을 먹었다. 이런 데 오면 오징어 튀김을 먹어야지.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바닷가였고 오징어가 싱싱할 테니까. 새우, 오징어, 게, 고추, 쑥갓, 깻잎 튀김이 가득했다. 다양하게 먹어야지. 튀김은 다양한 게 맛이라던데. 튀김은 여러 번 튀겼는지 누렇고 두툼했다. 골고루 주세요. 아주머니가 튀김을 다시 튀기는 사이, 서비스로 받은 작은 게 튀김을 먹었다. 통째로 튀긴 게. 게 맛은 딱히 나지 않는 튀김 맛. 관광지에서는 똑같은 맛이 난다. 튀김가루가 떨어졌고 비둘기들이 잽싸게 달려왔다. 누가 발을 건드려서 내려다보니 비둘기의 머리였다. 얘 좀 봐, 사람을 무서워하질 않네. “튀김 주지 마요. 데려다 키울 거 아니면” 아주머니가 낮게 경고했다. “비둘기가 많네요.” “아침에 와서 저녁에 가.” “네?” “저녁에 보면 다 퇴근하고 없어.” 아, 그렇구나. 마저 튀김을 먹었다. 자동차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봤다. 저러다 치겠다. 비둘기는 정물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많이 죽지.” “네?” “저것들 때문에 죽겠다니까.” 아, “차가 와도 가만히 있어, 여럿 깔려 죽었어.” 또 다른 비둘기가 손에 든 튀김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김석영 시인
2015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밤의 영향권』,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가 있음.
제4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소진된 인간, 이후의 시인
-김석영의 시에 대하여
박대현
김석영 시인의 시를 읽고 우선 들뢰즈가 말한 ‘소진된 인간’이 떠올랐다. 들뢰즈는 사무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에 관한 에세이에서 ‘소진된 인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그 글의 첫 문장은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뜻인가. 그에 따르면 ‘피로한 인간’은 어떤 ‘가능성’도 더 이상 실현할 의지가 없는 인간이고, ‘소진된 인간’은 실현해야 할 어떤 ‘가능성’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인간이다.
들뢰즈에게 가능성(가능적인 것)은 동일자적인 것이다. 가능성은 실현이 예정된 미지의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실재하고 있는 것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가능성은 재현의 유사성에 정주하고 있는 재현의 사유에 속한다.이는 동일자적 욕망에 의한 재현이자 반복이다. 피로한 인간은 동일자적으로 반복하는 삶에 지쳐서 가능성의 실현을 중지한 인간이다. 피로의 회복 여부에 따라 그것이 재개될 일말의 여지를 남겨 둔 인간이다. 반면에 소진된 인간은 그나마 남아있는 일말의 여지에 대하여 끝장을 본다. 가능성의 실현을 멈추는 데서 끝나지 않고, 아예 가능성의 실현을 모두 소진시켜버린다. 그는 이제 가능성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김석영의 시를 보는 순간 ‘소진된 인간’이 떠올랐던 이유는 무엇인가. 김석영의 시가 도달하게 될 이상적인 영토가 있다면, 그것은 소진된 인간 이후의 세대가 살게 될 영토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김석영의 시는 오랫동안 한국시를 지배했던 시적 주체와 세계의 외곽이 이미 허물어졌음을 말해주는 증좌다. 김석영의 시는 동일한 주체와 세계의 외곽 속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와 세계의 외곽 일부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김석영은 주체와 세계의 외곽에 관한 한 ‘소진된 인간’에 최대한 근접한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주체와 세계의 외곽을 쌓는 데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시적 주체와 그 주체가 바라보는 세계의 외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멍 뚫린 자리가 오히려 그의 시적 주체와 그의 세계를 지탱해준다.
0'00". 평일 낮. 천변을 떠다니는 오리들. 지나가는 사람 몇. 새끼오리가 자맥질하는 풍경.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가 나오지 않는다. 클로즈업. 1'13". 다시 전경. 흐르는 강물. 새끼오리가 후진하는 모습. 물 밖으로 나오는 장면. 천변 클로즈업. 54".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가 나오지 않는다. 1'13". 새끼오리가 들어간 물과 지금의 물은 이어지지 않는다. 물은 편집된 채로 흐른다. 새끼오리는 결락된다. 그때 엄마처럼 보이는 오리 등장. 1'30". 오리는 왔던 길을 거슬러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린 필름 조각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화면 속 최초의 목격자. 화면 밖의 나는 오리에게 알려줄 수 없다. 현장 속으로 참여할 수 없다. 오리에게 새끼오리의 실종을 알릴 수 있는 오리의 언어가 없다. 말은 번역되지 않는다. 2'17". 새끼오리가 없는 천변 전경. 물의 편집. 물이 삼켰다. 물이 오리를 오렸다. 물이 오리의 자유를 오리가 물의 자유를 먹었다. 자유는 자유를 먹는다. 죽음은 되감기 하지 않는다. 순간 팔뚝만 한 물고기가 펄쩍 튀어 올랐다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포즈. 2'35". 한낮 천변 풍경. 산책은 계속된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나란히. 입구와 출구를 따라 걷고 있다. 3'49".
-「불완전한 세 개의 이미지―Animated Anti-animal/2022/Experimental/3'49"」 전문
이 시는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시의 바로 앞에 배치된 시가 「Animated Anti-animal ̄2022/Experimental/3´49˝」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이다. “며칠 후// 물고기가 간혹 새끼 오리를 잡아먹는다는 기사를 보았고 나는 이 영상을 다시 돌려보게 된다.” 이 문장 속의 “이 영상”이 바로 그다음에 배치된 시 「불완전한 세 개의 이미지」를 지시한다. 「Animated Anti-animal」의 짧은 전문과 그 아래 각주로 제시된 “마리가 천변에서 오리를 찍은 영상”이라는 설명은 「세 개의 불완전한 이미지」의 내용이 마리가 오리를 찍은 영상, 즉 물고기가 새끼 오리를 잡아먹는 영상에 대한 것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시는 새끼오리가 자맥질하는 풍경, 엄마처럼 보이는 오리가 무언가를 찾는 장면, 팔뚝만한 물고기가 펄쩍 튀어올랐다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독특하게도 이 시는 영상의 내용을 시간순으로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을 되돌리고 중지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시는 화면 돌리기(), 화면 일시 중지‧클로즈업(), 되돌리기() 등의 방법으로 새끼오리가 사라지는 지점을 반복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화자는 영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새끼 오리가 사라진 영상 화면 속에서 편집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끼오리가 들어간 물과 지금의 물은 이어지지 않는다. 물은 편집된 채로 흐른다. 새끼오리는 결락된다.” “잘린 필름 조각”이 어디로 갔는지는 화자도 모른다. “그때 엄마처럼 보이는 오리”가 등장하고,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다. 영상 화면 밖의 화자는 오리에게 알려줄 방도가 없다. 오리는 영상 속에 감금되어 있고, 화자는 영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상을 경계로 하여 화자는 철저하게 외부 존재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뇌의 감산(減算)에 관한 일종의 알레고리다. 들뢰즈는 인간의 지각은 필연적으로 ‘감산’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세계의 방대한 정보를 수용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세계의 정보량을 감산한다. 마치 1초당 24프레임의 영화처럼 말이다. 1초 동안 담아낼 수 있는 세계의 정보량을 단 24프레임으로 감산하듯이 인간의 뇌 또한 세계의 정보량을 감산한다. 이것이 들뢰즈의 유명한 명제인 ‘뇌는 스크린이다’의 의미다.
다시 시로 돌아가자면, 이 영상에서도 세계의 정보에 대한 감산이 일어난다. 특히, 물속으로 들어간 새끼오리의 장면(1′13″)에서 중대한 감산이 일어나고 있다. 이 감산은 필시 누군가에 의한 편집에 의해 발생한다. 영상 속의 오리는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을 뿐 영상의 편집을 전혀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인 우리도 간혹 무언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챌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한다. 일시적인 지각의 단절이나 의식의 부재 현상인 피크노렙시(pyknolepsy)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세계의 무한한 정보량은 의식의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상 속의 오리처럼 인간 역시 이 세계의 결락을 눈치채지 못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지각의 불완전성은 이 세계에 대한 이해 역시 불완전한 것임을 말해준다. 주체 역시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주체는 인간의 신체 내부에서 외부의 자극으로 생성되었다가 결국 해체되는 ‘과정’(화이트헤드)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서 무수한 구멍들이 존재한다. 구멍 뚫린 주체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이 세계의 실상이란 것도 그러한 주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 시인의 시에서 적어도 두 가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세계의 외곽을 벗어나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멍 뚫린 주체의 실상을 사물의 차원에서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양상을 보도록 하자.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가방은 알지 못한다
각 가방에는 고유한 이야기와 은유가 들어 있다
가방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같은 것이
안주머니에 얌전히 박음질 되어 있다
가방이 늘어나면 운명이 복잡해진다
격자무늬처럼 차원이 얽히고
가방 속에는 가방의 평행 우주가 들어 있고
서술자, 방랑자, 과학자, 시인이 한데 얽혀
가방은 곤경에 처한다
제일 먼저 신분증이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는 것
분실한 열쇠나 작은 장신구는 모두
가방 안에 하나씩 복제되어 있다
병렬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이 작은 공간에
한 장, 펼쳐질 이야기, 반복되는 삶
-「그것과 다른 것」 부분
이 시는 지금 여기의 삶과 다르게 펼쳐지는 삶에 대한 진술이다. 시인은 가방을 통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주를 상상한다. 그 속에는 ‘평행우주’가 들어 있다. 평행우주에 대한 사유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부터 기원하여 프랑스 혁명가 블랑키를 거쳐, 오늘날의 현대물리학에 적극적으로 사유되는 우주론이다.(특히 휴 에버렛의 다세계 이론은 평행우주론이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수학적 우주의 실재로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운명 또한 인간의 상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격자무늬처럼 차원이 얽”혀 있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이 실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가방이 이 세계를 의미하듯이, 가방 속의 다른 가방은 이 세계로부터 얽혀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의미한다. 그 무한한 평행우주 속에 “서술자, 방랑자, 과학자, 시인”의 삶이 “한데 얽혀 있”다. 이 시의 주체는 그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한 시인의 주체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시인이 모르는 거대한 세계를 시인은 직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직관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재에 찰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방 안에 가방이 있다는 사실은 가방의 “곤경”이다. 이 세계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이 세계가 처한 “곤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세계와 주체의 확실성에 기대어왔던 세계관의 붕괴를 알리는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동일자적 세계관의 나르시시즘은 파괴되고 만다. 시인의 눈은 지금 여기의 삶에서 결락되어버린 무수한 세계를 향한다. 그것은 가방 안의 가방, 즉 “가능성의 교황곡”으로서, “한 장, 펼쳐질 이야기, 반복되는 삶”의 세계다.
이는 단순히 이 세계의 외곽을 벗어난 세계의 확장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주체의 확장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서술자, 방랑자, 과학자, 시인” 등의 주체를 포괄하는 시선을 지닌 이 시의 주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자. 비유하자면, 「세계의 불완전한 이미지」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오리를 바라보는 영상 바깥 시점의 주체일 것이다. 시인의 시적 주체는 단일한 시공간의 시점을 벗어나 기존의 주체와 세계를 응시하면서 다른 차원의 위상을 점유한다. 이때의 주체가 갖는 특성은 아직 규명된 바 없으므로 무어라 언급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야말로 투명한 상태다.
하여, 두 번째 양상의 시다. 아래 시를 보자. 아래 시에서는 사물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물과 사물의 부딪힘, 즉 자극(작용)과 반응(반작용)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물론 이것은 ‘과정’으로 존재하는 주체의 양상을 내포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부엌은 이미 계란 비린내가 점령했다
물기가 말라가는 유리컵들이
무릎 꿇은 포로들처럼 창백해 보인다
수백 번 설거지한 컵의 낡은 가장자리
비린내는 늘 새것이다
컵이 계란 꿈을 꾸고 있다
계란이 컵의 꿈을 꾸고 있거나
꿈의 냄새는 비리다
꿈은 선택할 수 있다 컵이 깨어 있는 시간에도
컵의 표면에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부드러운 흔적인지
비린내가 남아 있는 자리에서 실제 감정이 자라난다
컵 자체가 되어버린 비린내, 격자무늬, 감옥 냄새
꿈에서 이미 가 있는 금을 따라 다시 부서지는 미로
생각의 행렬에 참여하는 비린내
설거지할 때 꿈은 파도처럼 밀려났다가
빛과 그림자로 컵이 재생된다
잠의 몽상은 부드럽게 파괴된다
깨지기 쉬운 몸 위로 비밀스러운 붓이 지나간다
미끄러짐, 충돌, 순간의 우아함, 부서진 파편
컵의 골절은 삶의 배열로부터
한때 흰색이었지만 잊혀진 밤이 컵에 담겨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마다
희미해지는 꿈을 흉내 내는 투명함
컵은 이제 깨끗해 보인다
-김석영, 「투명한 것들로부터」 전문
이 시에서 시의 화자(주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부엌이다. 하지만 화자는 단 한 번도 노출되지 않는다. 「불완전한 세 개의 이미지」에서처럼 마치 영상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듯이. 시인은 영상을 되돌리며 바라보듯이, 부엌의 풍경 또한 그 비슷하게 바라본다. 이 시는 언뜻 보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부엌에 계란 비린내와 설거지한 유리컵들이 있다. 그게 다다. 시인은 그게 다일 뿐인, 계란 비린내와 유리컵들의 경계면에 대해 사유한다. 컵이 계란 꿈을 꾸고 있다거나 계란이 컵의 꿈을 꾸고 있다는 건 호접지몽(胡蝶之夢)의 물질적 변형이다. 꿈과 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분별 불가능성이 사물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 시는 계란 비린내와 유리컵의 접촉 면에 시적 확대경을 들이댄다. 베르그손의 순수지속을 파지하려는 물질적 상상력의 고투다.
이 시의 핵심은 유리컵과 비린내가 만나서 벌어지는 작용(자극)과 반작용(반응)이다. 비린내가 유리컵에 닿으면 유리컵에 묻게 되고, 그곳에서 “실제 감정이 자라나”고 비린내는 “컵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주객을 단정할 수 없는 호접지몽과도 같은 것이다. 비린내는 “격자무늬”의 유리컵 속에서 “감옥 냄새”가 되지만, 유리컵 내부로 “이미 가 있는 금을 따라 부서지는 미로” 속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행렬에 참여”한다. 이때 계란 비린내는 이미 유리컵이다. 화자는 비린내가 유리컵이 되고 유리컵이 비린내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화된 호접지몽의 생생한 장면이다. 설거지를 통해 “잠의 몽상은 파괴되”고 “빛과 그림자”의 컵으로 다시 “재생되”고 말지만, 화자는 이미 “미끄러짐, 충돌, 순간의 우아함, 부서진 파편” 등을 보았다. 유리컵의 경계는 확고한 것이지만, 시인은 이미 물질들이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실제 감정”을 자라게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실제 감정”은 스피노자의 용어로는 감응(affection)으로 표현될 것이다. 태양은 밀랍을 녹이고 진흙은 굳히듯이, 물질과 물질 사이에는 감응이 일어난다. 이렇듯 모든 물질들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투명한 것이다. 외부의 자극(작용)들에 대한 투명한 반응(반작용)들.
시인은 매우 예민하게도, 유리컵과 계란 비린내의 상호적인 감응을 통해 인간의 주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읽어내는 듯하다. 물질들 사이의 경계가 투명하듯이, 인간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 또한 투명해진다. 베르그손이 일찍이 인간의 뇌를 일컬어 지각의 연장이라고 말한 바 있듯이, 인간 정신성의 기원은 외부에 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자극이 인간의 뇌 속에 머물러 정신성을 만들어낸다. 외부의 자극이 흘러들어와 인간의 정신을 생성해내는 과정에 주목하면 인간마저 투명해지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신 세계와 물리 세계의 경계가 투명해지고 만다. 시인의 주체는 “투명한 것들로부터” 존재한다. 그것은 사물에서 사물로 나아가는 이행(移行), 지속, 흐름, 다시 말해 ‘과정’이다. 시인은 깨지기 쉬운 유리컵과 계란 비린내의 투명한 상호적인 감응을 바라보듯이, 외부 물질과의 투명한 감응을 통해 형성되는 자신의 주체를 바라본다. “투명한 것들로부터” “투명한 것들”에게로 이행하는 지속적인 흐름이 시인 자신의 주체다.
시인의 시적 세계관 속에서 주체와 세계는 단수로 존재하지 않고 복수로 존재한다. 주체와 세계는 굳건한 외곽을 지니고 있지 아니하며 단지 연속된 흐름으로 존재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지각되는 ‘과정’은 무수한 결락을 지니고 있음을 물론이다. 이러한 시적 세계관을 내면에 기입한 시인이 기존의 주체관을 지닌 채 세계의 외곽을 쌓는 일은 몹시 피로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석영 시인이 완전히 소진된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로한 인간을 넘어 소진된 인간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소진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발해내는 시적 역량에 육박하고자 하는 절제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겠다. “나는 언제부터 나를 갖게 되었습니까”(「진짜 돌」,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라고 묻는 ‘진짜 돌’처럼, 부드럽고도 강건하게 말이다.
박대현 문학평론가.
2005년 부산일보 평론 당선.
<헤르메스의 악몽>, <우울한 것의 추락>, <황홀한 아파니시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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