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몇번째 아이스크림
우리는
아직 아버지는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에 적당할 나이
책상 위에 놓인 청첩장의 디자인을
살펴볼 나이 예쁘고 작은 종이에서 단서를 찾아
남의 삶 전반을 추리하는 나이 그럼 그렇지 그렇다면
대봉하는 나이
나는 오늘 저녁 좋은 아빠의
상징인 배스킨라빈스에 갔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설탕덩이를 뜨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목을 애처롭게 여기는 나이지만 카드를 내밀기 전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나이이며 포인트 적립과 사은품을 챙기며 드라이아이스가 되는 나이이다
초콜릿과 옥차가
섞이고 가운데는 단단한데
한갓진 데는 녹기 시작한 ㄴㄴ나이가 됐다 이렇게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20년 지나 30년
나는 은행과 약속을 했다 죽지
않기로 성실히 살기로 이 약속은 녹지
않는다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울 할머니가 몇 살이더라
남의 삶 전반이 가늠되지 않는
나이 우리는
단 것을 먹으면 배가 간지럽고
쓴 것을 먹으며 혀를 긁는다
건강을 위해 이렇게
내가 좋은 아빠다 죽지 않는 아빠다
노인의 빈소
모락거리는 연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제 할일을 다 하고
30년의 장례를 준비한다
사막,
열심히 녹으면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서울에서 만난다면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강남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사투리를 썼지
조금은 불편해지려고 했다 사투리로
자의식을 확인하는 자들이여 절대로 잊지 못하는
사투리여 왕따의 기억처럼 죽이고 죽여도
되살아나는 빌어먹을 사투리여
염병할 뉘앙스여 괘씸한 톤이여 공동체여
너나없이 쓸데없이 맥락 없이 욕을 뱉고 술잔은
이리저리 세상 바쁘고 이것이 몇 년 만일까
아마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러했겠지 예전에
착한 학생이었고 놀 때는 놀았고 의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강남대로에서 택시 하나 못 잡는다
이왕 모였으니 좋은 데를 갈까 하는 녀석은 여기에도 있고
미안하지만 부끄럽다 죄송하지만 기억이 안 나요 반말이
어색해요 하지만 사투리는 편하지 감각에 우정을 맡기고
기억을 추렴해보지만 사투리만 기억난다
너희 얼굴은 이름은 번호는 성적은
몇 년 만이나 이러한 폭력은
없었다 다들 성공해서 서울이나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배우자와 자식과 먹고 살고
있구나 명함을 나누자 인맥이 생기며 근거가 생기고
공동체도 생기고 자의식도 생기고 사투리가 없어진다
병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법원에 있는 친구여 연락을 하겠다
전화기를 붙잡고 사투리로 내가 그때
부끄러웠다
용서해달라
하는 친구는 없었고
숨가쁜 우정의 무대 위로 꺼냈던 반지갑들이
바짝 접히고 있었다
닭의 갈비
죽은 닭처럼 쓸슬한
송별회였다
우리는 퇴사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닭에게
불만이다 뒤적거리며 뒤척이며
계륵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거야
오늘도 가르침을 주시는 분
여기는 사실 갈빗살이 아닌 거야
오늘도 말씀이
모가지처럼 기신 분
죽은 닭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고
한참을 뒈진 채로 얼어 있었고
우리는 입만 살아 먹고 말하지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닭의 살갗 같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앉은자리를 떨며 푸드득 서두른다
죽을 줄도 모르고
죽으러 가고
죽은 줄도 모르고
죽어서 가고
말씀이 기신 분이 가르침을 멈추고 놀라 묻기를
여기 웬 닭대가리가 있어
우리는 놀라 벌떡 일어나 모가지를 비튼다
먹다 남은 닭의 순살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오르며 추는 삼바
안녕, 뼈가 없는 친구들아,
안녕, 살이 없는 친구들아,
안녕, 쓸쓸한 동료들아,
갈비를 떼어서 안녕
죽은 닭들의
송별회에서
로맨스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에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늠름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화장실 간다
오줌을 누는데 보이는 건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니.
땀 대신 쪼르륵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푸르고 깊은 몸 곳곳에 해변의 모래가 둘러붙어서
사무실 까지 왔다 질투는
로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내일은 동료와 친구와 선후배와 옆자리와 뒷자리와 동명이인과 같은 직군과 비슷한 또래와 노인과 젊은이와 이토록 연언에서 깊이 추잡스럽겠지만 극적이게도
바깥은 평온하다. 그것이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