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6일 일요일
여수에서 목포로 오는 길에 점심먹으러 잠깐 들른 벌교를 지나며..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속에서 묘사된 벌교
벌교농협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가장 번화가인 듯..
소설속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당시 지주들과 친일파들을 이용해 돈장사를 통해 치부를 하고
결국 좌익들에게 죽음을 당했던 금융조합이 바로 저 농협의 전신일 것...
저 길 끝에 일제시대에 '소화다리'라 불린 부용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였던 그 때가 소화6년이기도 해서 소화다리로 불리는 '부용교'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죄익 우익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소설에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는 못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라는 표현과
포구의 갈대밭에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 그 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최근에 새로 만들었다는 다리
이 다리 뒤로 제2부용교와 철교가 있고
양쪽 제방은 중도방죽으로 이어진다.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나까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잉ㅆ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하고 가난헌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돼지 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엣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쌓는 일에 비허겄소...」
벌교의 그 유명한 꼬막정식 밥상,
먹기 전에 찍어야 하는데 먹다가 생각나 젓가락 놓고 급하게 한 컷~ ^ ^
꼬막부침개, 꼬막 된장찌개, 꼬막 장조림, 삶은 꼬막, 구운 꼬막, 꼬막 양념장, 꼬막 회무침 등
꼬막으로 할 수 있는 요리는 다 나온다.
소설 속 주요 장소들이 한 눈에 보이는 태백산맥 문학지도
그 외..
선암사의 승선교를 지은 두 선사가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홍교와
조정래님이 어린 시절 부잣집 친구 아들과 잘 놀았다는 천석꾼의 집은 김범우의 집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당시의 건물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있다는 보성여관과 금융조합건물 등을 못 보고 와서 안타깝기 그지 없으니
언젠가는 벌교 읍내 구석구석을 천천히 걸으며 눈에 가슴에 담아보는
여유있는 문학답사를 꿈꾸어보노라...
그리고 두 번이나 읽은 태백산맥을
눈으로 문학지도를 따라가보며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심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