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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모던포엠 원문보기 글쓴이: 전형철
아름다운 목숨 외 11편 장영희
목숨이 있다는 것과
목숨이 없다는 것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의 머리와 가슴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신비가 있으니
참 아름다운 목숨의 그 바탕
사라져 아주 없어지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다른 사물로 스며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숨 쉬고
끝없이 사물을 돌고 돌아
언제나 그대로인 것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시간만큼만 있다가
사라져야 아름다운 것
사라져서 아름답고
다시 돌아와 더 아름다운 그것은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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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일찍이 이보다 더
힘센 이를 본 적이 없다.
씨앗 한 알은 붓 한 자루와 같아
형태는 미약하나 바다 같은 힘이 있다.
민들레 물오리나무 바위도 되고
비둘기 사람도 되며
태풍보다 힘세고 치우천왕보다 힘센 너.
힘센 것들에게 늘 고개 숙이면서도
언제 씨앗 경배한 적 있는가.
죽음을 이기고 피어나는
씨앗은 힘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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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름이 되기까지
조각구름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지
연둣빛 꿈은
봄에는 가랑비로
여름엔 소나기로 내려
지절대는 실개울이 되었다.
한때는 절망했었네.
구름 녹으면 꽃이 지는 줄 알았네.
꿈이 올라앉은 개울
낙동강이 되고
꽁慢?가서
햇빛으로 날아올랐네.
어느새 조각구름
푸른 하늘에 다시 떠돌고
환희의 노랫소리 울리니
구름이 다시 구름이 되는 그 뜻
이제야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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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햇살 받아 반짝이는
솜털 새 쑥이 있어
동산은 참 좋다고 했다.
그러나
키 큰 오리나무와
산비둘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더 큰 산도 있지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사철 맑은 물 흐르는 계곡을 안고
날것 길것들 모두 품에 키우는
더 큰 산도 있지.
안개 피워 올리고
구름도 만들며
바람 일으키는 조화
그저 놀랄 만한 신기 가진
더 큰 산도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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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언제
바람 춤추고 물결 일어나니
배가 거친 바다 끝없이 경작할 꿈을 꾸고
물결 가라앉으니 배는 닿을 내린다.
배가 꿈을 꾸거나 잠시 쉬거나
시간이 언제 쉬는 것을 보았는가.
이슬 먹고 자라는
새봄 아장걸음 들꽃들이
아버지 새벽 바튼 기침에 잠 깰 때나
바위가 비바람 모아 제 몸 허무 갈아낼 때에도
시간이 언제 서 있는 것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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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가을에는
찢어질 듯 하늘 높이 솟는 소프라노 노래보다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어울린다.
가을에는
교회당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보다
전라도 보성골 이름 없는 옹기장이 구워낸
흙빛이 정답다.
가을에는
눈부신 비단옷보다
먹빛 짙은 나그네 저고리가
마음을 끈다.
가을에는
성공한 사람 활짝 핀 웃음보다
실패한 사람 작은 어깨 밑으로 흐르는
눈물이 더 진실하다.
가을에는
화사한 신부 상아 같은 손에 낀 다이아몬드반지보다
마디 굵은 우리 어머니 손
무늬 없는 은가락지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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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들꽃
-자전거를 만나고
은빛 두 발 눈부신 그대 천사처럼 어느 날 왔네.
계시는 없었지만 목숨 있는 모든 것들 사이
한 점으로 왔네, 아주 작은 의미로.
세상에 대해 칼날을 세우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막 배우던 그때
둥근 두 바퀴 단 한 번도
부딪히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함께 달리는 너를 만났지.
둥근 것과 둥근 것이 만나면
늘 화해와 아름다움만 있다네.
두 바퀴 굴리며
시간의 뜻과 산과 숲, 나무들이
왜 자꾸만 다가왔다가 멀어지는지
말 없는 가르침 배우고
때로는 안개 내린 날 산토끼처럼 행복해하며
꿈꾸는 들꽃.
그대 만나자마자
한 번 숨 쉴 사이도 없이
꿈꾸기 시작했네.
푸르고 조그마한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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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으면
살려내, 순결한 내 친구들 살려내.
살려줘, 죄 없는 날 살려줘.
얼룩새코미꾸리의 절규는 잦아들고
신음하는 강의 숨결을 듣는다.
막혀버린 모래톱 숨구멍
질식하여 사라지는 초록의 생명들
흰목물떼새, 재두루미
흰수마자, 누치, 꾸구리, 납자루, 미호종개
부들, 창포, 갈대, 어리연꽃
바위늪구비 그리운 단양쑥부쟁이
모두 어디로 가느냐.
너희 쓸쓸히 떠나는 그 뒤로
소신공양 연기로 사라지는 문수 스님.
가지 말라고 초혼가 불러 붙잡아보지만
벗들 고운 손 한 번만 더 잡아보고 싶어
엎어져 무릎 깨지면서 달려가지만
오금은 펴지질 않네.
제발 모두 한바탕 꿈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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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소녀
그래 참, 그때는 그랬다지.
열여섯 살 금귀걸이 가야 소녀는
순백 속곳 백일홍 꽃물로 적셔보지도 못하고
주인의 먼길에 동행했다지.
누구나 시간의 너울 타고 흐르다가 저절로 순순히
흙빛을 만나는 즐거움은 참 쏠쏠한 것인데
그 소녀는 깨알 같은 그 즐거움 알았을까나.
빨간 산딸기 흐드러진 숲에 쪼그리고 앉아
진저리치며 오줌 누던 상쾌함 가슴에 묻고
질그릇 목긴 항아리 빚던 더벅머리 사내아이의
그윽하게 다가오던 착한 눈매 뒤로하고
그리도 그리던 꽃잠 한번 자 보지 못하고
숨결 물려준 어버이 뜨거운 눈물 뿌리치고
주군 따라 차가운 땅속으로 어이 스스로 들어갔을꼬.
가야 땅 온 누리에는 수천 수만 송이 오색 꽃들이 피고
맑은 영혼 올라간 하늘에서 황홀한 별들은 쏟아지는데
한갓 껴묻거리가 되어 너 떠난 이곳에 서니
철렁, 천 길 낭떠러지에 선 아찔함
사람이, 사람이 할 일은 아닌데
그리운 가야 가시나 너를 생각하니
빈속에 청양고추 먹은 듯
내 맘은 왜 이리도 아리고 아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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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곡선
온 누리에 곡선이 많았던 어린 시절
구불구불 논길을 걸으며
쇠비름, 질경이, 구절초를 보고
왕버들 춤추던 곡선의 실개천에서
피라미, 버들치, 메기를 보고
곡선의 초가지붕과 다랭이논에서
등 굽은 무지렁이 두꺼운 손마디 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 젖무덤에는 곡선의 아름다움 출렁이고
그 젖 먹고 자란 내 몸 어느 한 부분도
곡선 아닌 것이 없어
곡선의 세상에서 만난 자연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나를 키운다.
곡선의 길을 걸으면 저 너머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있지만
직선의 도로를 달리면 모든 게
하얗게 드러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직선의 삶만 있는 디지털 시대
쉽고도 간편한 관계를 위해서는
직선이 좋을지 모르지만
직선의 도로만 있고 곡선의 길이 없는 세상
사람의 참 삶도 사라져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보일 듯 말 듯한 곡선으로 이어지고
인정도 사랑도 세상 모든 것들도
곡선으로 만나야 하는 것을
기어이 창대 같은 직선으로 만나려는 심사를
어쩔 수 없어 쓸쓸하다.
곡선으로 만나고 곡선으로 말하는
그대가 그리워 나는 떠난다.
우리가 잃어버린 곡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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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다
정수리 찢는 바람이 지나가고
소리 없이 땅이 풀리는 날
연두색 새싹이 나오면서 그는 꿈꾸기 시작한다.
불볕더위의 하늘을 날아 민들레 씨는
안드로메다로 간다.
단단한 껍질 깨고 세상에 나와
어둠에서 빛을 만나고
첫눈 오는 날 숲에서 솔 씨 주워 먹는
비둘기에게도 살아야만 하는
소박한 은빛 꿈은 있다.
숲과 들의 풀과 나무들을 보아라.
서리 맞으면 시들고 말라 버리지만
새봄 바람맞으면 차가운 흙 뚫고
도사리처럼 살아나리라.
온 누리의 날고 기는 생명들을 보아라.
빛과 어둠이 번갈아 오가며 시간이 흐르면
피와 살 가벼워져 나왔던 그곳에 다 주고 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는 꿈을 꾼다.
우주가 우주이게 하는 힘은 꿈이다.
사람이 사람이게 하는 것도 꿈이다.
내가 나이게 하는 것,
그것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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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린다
태고부터 이 누리에
빛이 있으라 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수천 수만의 색깔이 목숨 얻어
알맞은 자리에 있게 되고
그렇게 자연과 인간 더불어 살아가는
황홀한 이 자리
수목들은 이른 봄부터 여름 내내
나부끼며 춤추던
시퍼런 오만의 기운 잠재우고
바야흐로 힘센 자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오색의 또 다른 새로운 자기가 자라나
거침없던 욕망이 물러가고 겸손이 왔다.
부질없던 교만은 가고
시나브로 사랑이 붉게 터졌다.
가야 할 것들을 이끌고 가는
오색의 만장 너울거리는데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우주의 시간 속에
잠시 여기서, 지금
마지막 붉은 심장을 주고
새봄 새싹으로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듣는다.
숨붙이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삼라만상이 오가는 진리를 생각하며
돌고 도는 세상 어느 언저리에서, 나도,
빛나는 단풍잎 하나 피울 수 있기를 소망하며
즐거이 나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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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張永熙) 시인. 문학박사
경북 예천 풍양 출생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성모여자고등학교 교사·부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詩와 詩論』(현재, 『문예운동』) 신인상을 통해 등단(1996)
《목마》동인
국제펜클럽․부산문인협회․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 이사․월간『우리시』편집위원
『문학도시』(부산문인협회) 편집위원
<경력>
국제펜클럽한국본부부산위원회 사무국장 역임
부산가톨릭문인협회 사무국장·이사·부회장 역임
『문학도시』(부산문인협회) 편집장 역임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부경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수상>‘시와시론(현재, 문예운동) 신인상’ 수상(1996년 5월)
‘암웨이청하문학상’ 수상(제16회, 2006년 10월)
<시집>『화단가에서』(신원문화사, 1997)
『그물에 걸린 고기』(우리글, 2004)
<지은 책> 『엘리트 문학』(공저, 학영사, 1994)
<동인지>『숲, 오래된 침묵』(목마31집, 세종, 2001) 외 다수
<논문>「한국 현대 생태시의 영성 연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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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시인의 시세계]
첫댓글 앗! 졸업 하기 전에 교수님 싸인도 하나 받아 놔야겠어요!! ^^
우와.... 교수님 싸인 받아놔야겠어요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