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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하는 예술가(신영복)
[시경]이 북방 문학임에 비하여 [초사楚辭]는 남방 문학입니다. 남방은 양자강 유역입니다. 기온이 따뜻하고 의식주 걱정이 없습니다. 이처럼 느긋한 삶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초사]입니다. [시경]의 시는 4언체입니다. 노래로 치면 4분의 4박자 행진곡입니다. 또박또박 걸어가는 보행입니다. [초사]는 6언체입니다. 6언체는 춤추는 리듬이라고 합니다. 보행은 목표 지점이 존재하고 확실하게 땅을 밟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경]의 사실성입니다. 이에 비해서 춤은 가야 할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6언체는 대단히 자유롭습니다. 북방에서는 기후와 지형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영위되는 삶 또한 매우 절박합니다. [시경]에서는 삶의 아픔이 절절하게 공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시경]은 집단 창작인 데 비해서, [초사]에는시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주희는 [시경]에 대해서는 주를 달지 않고, [초사]에 대해서만 주를 달았습니다. [초사]는 지식인 고유의 이상을 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초사]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시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입니다. '슬픔에 젖어'라고 번역되는 이 시는 임금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슬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현인을 만나지 못하는 근심을 노래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북방과 남방이 싸우면 늘 남방이 북방에게 집니다. 그래서 '敗北'이라고 쓰고 '패배'라고 읽습니다. 북에 지는 것이 패배의 일반적 의미로 통용됩니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방 호남성 장사長沙 출신인 모택동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북방인 연안延安을 근거지로 하고, 동북3성을 기반으로 해서 통일 장정에 나섰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淸兮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 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 가이탁오족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명구로 회자되는 이 구절은 <어부>의 결론입니다. 초나라의 공족公族으로 세 번이나 유배되었던 굴원이 마지막 유배 때 쓴 시로, 지나가던 어부와 나누는 대화 형식의 시입니다. 당시는 합종연횡 등 각국이 연대 방식을 놓고 이합집산하던 난세였습니다. 서쪽 강국인 진秦을 고립시키고 제齊와 합종해야 한다, 아니다 진과 연횡하는 게 옳다. 친진파와 반진파가 팽팽하게 맞서서 싸웠는데, 굴원은 반진파로 유배되고 초 회왕은 결국 인질로 잡혀가서 죽습니다. 나중에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영웅호걸들이 대거 초나라에서 나옵니다. 진승陳勝, 오광吳廣, 유방劉邦, 항우項羽가 초나라 출신입니다.
굴원의 고고함은 중심부에 대한 변방의 저항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부와의 논쟁에서 그의 자세 역시 고고합니다. "내가 듣기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는 법이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 법이다. 어찌 깨끗한 몸으로 오물을 뒤집어쓴단 말이냐. 차라리 상강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는 게 낫다." 어부가 그러한 고고함에 빙그레 웃으면서(莞爾而笑완이이소), 노(枻)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鼓枻而去고설이거) 부르는 노래가 바로 '창랑지수'입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되지"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창랑의 '물'과 '갓끈'과 '발'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가 바로 인문학적 과제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매우 경직되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현실과 이상이 조화와 지양의 의미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대하고 있습니다. 산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내려올 때에도 '저 나무가 10년 후에는 이만큼 자라겠지' 하는 상상을 안고 하산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나 상황이 다 그렇습니다. 개체는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분分하고 석析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해 버립니다. 대상화, 타자화는 관념적으로만 가능하고 실험실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의 삶 속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좌와 우는 칼 같은 적대적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농담처럼 하는 말로 '右'파는 우右 자가 입口과 손手의 조합인 것처럼 먹기만(口)하고, '左'파는 일工만 한다는 것이지요. 실천을 우경적으로 하라고 하는 까닭은 아마 일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천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 많은 분들의 정서와 이해관계를 충분히 담아내야 합니다. 한편 이론을 좌경적으로 하라는 의미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갑니다. 실천의 경험을 정리하면 이론이 됩니다. 이 이론은 다음 실천의 지침이 되고 동시에 그 진리성이 검증되면서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좌와 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20세기의 가장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하는 체 게바라Che Guevara의 평전을 보면,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실을 존중하되 이룰 수 없는 꿈, 그걸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자주 만나는 우파적 주장으로, '인간의 본성은 보수적이다'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개인주의와 시장논리의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란 개념은 그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 자체가 '환원론'還元論입니다. 그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가장 본질적 부분으로서의 DNA는 압도적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DNA는 지구 역사에서 30~40억 년 전 사이의 어느 시점에 기적적으로 합성된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바로 이 DNA가 핵심이고, 이 DNA의 운동 원리가 바로 자기 존속survival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생명의 유일한 운동 원리가 바로 자기 존속입니다. 살아남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DNA가 생명의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 마투라나H.Maturana의 주장입니다. 생명은 DNA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생명체 자체가 자기 생성을 계속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DNA라는 확정된 논리 체계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주변 조건과 만나서 물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투라나는 생명이란 '방랑하는 예술가'라고 합니다.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자기 생성, 즉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위自慰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위는 생명이 서바이벌하기 위한 자기 위로입니다.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입니다. 좌절과 파괴에 직면한 생명은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위로는 전체의 구도를 보수적으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기존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자위보다는, 신랄한 자기비판이 더 필요합니다. 냉정한 자기비판은 일견 비정한 듯하지만,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훨씬 높여 줍니다. 물론 자위와 자기비판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남방이 패배의 땅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낭만과 창조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낭만은 불어 '로망'roman의 번역어입니다. '이야기'란 뜻입니다. 논리 체계를 갖추지 않은 서술 일방을 '로망'이라고 합니다. 낭만주의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읽힙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의 결별이었습니다. 고전주의는 질서, 구도, 이념 등 그야말로 고전적 질서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에 비하여 낭만주의는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틀에 갇혀 있는 것들에 대한 원천적인 거부감을 닝만주의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분방함이 한편으로는 무책임하다고 폄하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메타meta 지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바로 이런 '메타' 지향성에서 시작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중에서 가장 완고한 것이 '인과론'因果論입니다. 사물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질서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과관계가 현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因과 과果는 순방향뿐만 아니라 역방향의 화살표도 있습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는 것, 하나의 원인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 그런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이 환원론이며 인과론입니다. 동양적인 사유에는 이런 인과론이나 환원론이 없습니다.
사이버 환경에 갇혀 있는 오늘날의 비현실적 정서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시경]의 사실성과 진정성, [초사]의 낭만과 창조적 사유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문사철이 바로 개념과 논리로 압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에 대한 온당한 인식틀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필요한 능력이 바로 이 추상력입니다.
추상력과 나란히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한 마리의 제비를 보면 천하에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능력, 즉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 하나하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입니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思考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品性의 문제입니다.
끝으로 귀곡자鬼谷子의 시론을 소개합니다. 기원전 350년 전후에 종횡가로 알려진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스승입니다. 전국시대는 전환기였습니다. 종법사회,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사士, 객客, 군자 같은 '신지식인', 즉 '유세가'遊說家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열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꿰뚫고 있는 이들 신지식인층이 외교사절(行人)로 파견되었습니다. 귀곡자가 이런 사람들의 스승입니다. 그는 "병법은 병사의 배치이고, 시는 언어의 배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적인 레토릭rhetoric과 문법을 중요시합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설說'자는 '열'悅로 읽습니다. 귀곡자의 주장은 '설說이 열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듣는 상대가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공자도 그런 점에서 정치 영역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14년간 여러 나라를 유랑했지만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공자는 말씨와 외모를 꾸미는 것(교언영색巧言令色)은 인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곡자는 반대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
언어에는 분명 언어 자체의 개념적 의미와 함께 언어 외적인 정서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언술言術이 더 중요합니다. [출처] 담론/신영복/돌베개/2015|작성자 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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