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뱃전을 흔들고 닻줄에 묶인 배가 출렁거린다. 물길 따라 떠나려는 배와 그것을 잡아두려는 닻의 끊임없는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뇌 과학자와 여행 작가가 함께 서해랑 길을 걷는 기사를 읽다가 “녹슨 닻들이 켜켜이 쌓여 길을 만들었다. 마치 닻 무덤 같은 길.”이라는 문구에 마음이 끌려 결국 여기까지 달려왔다.
서천의 홍원항이다. 항구 한쪽에는 닻이 줄지어 누워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 많은 닻을 수명이 다했다면 버리지 않고 왜 여기 쌓아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고 있을 때 선원 한 사람을 만났다. 안강망에 쓰일 닻이라는 그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닻이 고기잡이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닻들은 언젠가의 쓰임을 기다리며 휴식을 하고 있던 것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류가 빠른 해역에 전개 장치를 부착해서 자루 모양의 그물을 닻으로 고정해 두고 조류에 밀려 그물 안으로 들어온 어류를 잡는 어업이란다. 듣다 보니 TV 프로그램 극한직업에서 본 적이 있다. 그물망에서 젓새우나 멸치, 고등어가 무진장 쏟아져 나오면서 선원들이 환호하던 그 장면이 안강망 방식이었다. 이렇게 녹슨 쇳덩이로 누워있다가 일단 바다로 들어가면 제 역할을 당당히 해낼 것을 생각하니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닻 사이로 바람이 빠르게 빠져나간다. 발걸음을 빨리 내딛건만 바람은 어느새 저만큼 앞서 달린다. 한곳에 머무르는 바람이 어디 있겠나. 태풍이야 말할 나위 없지만 따스한 볕 아래의 미풍조차 살랑거리다가 이내 떠나버리지 않던가. 떠도는 바람은 때로는 물건의 위치를 옮겨버리고, 물체의 형태를 바꾸는 힘이 있다. 그 바람의 힘에 밀리어 떠나려는 선박을 고정하는 것이 닻의 역할이다.
예로부터 사람의 마음에는 바람처럼 떠도는 성향이 있다. 사람에 따라 순례라는 이름으로, 또는 유랑, 방랑, 주유(周遊)라는 이름을 붙이고 떠난다. 유랑하는 사람의 핏속에는 유목민의 DNA가 잠재한다. 유목민들은 기후를 따라 생존을 위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요즘은 떠남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정착하여 지키는 생활을 무료하게 여기고 바람 같이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을 꿈꾼다. 평안함과 안정을 거부하고, 불편과 시련을 겁내지 않고, 설렘과 새로움과 변화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다.
어린 날 보았던 외삼촌도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계절풍처럼 때가 되면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디를 어떻게 떠돌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풍수, 지리, 관상, 산과 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숙모는 남편의 역마살을 눌러보려고 갖은 말로 회유하고 종용했지만 잠시 뜸하다가도 한 줄기 바람이 찾아오면 그 바람을 타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그는 진득이 머물지 못했다. 마치 한 번 잡히면 옴짝달싹 못하는 진흙 벌이라도 되는 양 뿌리 내리기를 거부했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를 닻의 역할이 시원찮아서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그 비난의 화살은 외숙모에게로 돌아갔다. 여자가 바람 든 남자의 마음을 잡아주는 닻의 역할을 제대로 해준다면 배는 때맞추어 고기를 잡을 테지 마냥 떠돌겠냐는 것이다. 더러는 외할아버지의 지나치게 엄한 교육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바람과 닻 이론이 더 우세했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를 타인이 어찌할 수 있으랴. 돛을 높이 내걸고 항해를 꿈꾸는 자는 자신의 닻으로도 그 열망을 중단시킬 수 없다. 닻은 돛이 내려져야 제 기능을 수행한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돛을 세우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은 아무리 쇠닻이라 해도 배 밑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창 바람에 이끌리어 떠도는 방랑벽은 가족이 잡아준다고 쉽게 잡히지 않는다.
외삼촌은 서당 훈장인 아버지의 마음에 반이라도 차려면 다른 친구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힘든 농사일에 몸을 익히지 못했다. 좁은 산골에서 더 큰 배움의 욕구를 채울 수 없었으니 농사꾼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세상을 제대로 항해할 수 있도록 돛을 높이 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주저앉힐 닻도 고장 나 버렸다. 꿈을 이루어 보려고 힘껏 노를 저었겠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를 방황하는 이가 어찌 그만이었을까. 사람들은 일상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수시로 느낀다. 그 떠남은 혹독한 기후를 피하거나 먹을 것을 찾아서 떠나는 유랑이 아니다. 김 삿갓처럼 울분과 낭만으로 떠나는 방랑도 아니다. 대부분 따분한 일상을 접어두고 훌훌 떠나고자 하는 충동이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모두 떠나지는 않는다. 누가 닻이 되어 잡아주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닻이 되어 욕망의 꼬리를 지그시 눌러 주저앉히는 것이다.
떠나려는 욕구와 붙잡아 주저앉히려는 의지의 싸움은 모든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닐까. 이 싸움은 평생을 두고 끝나지 않을 우리 인간들의 숙명이다. 항구에는 눈보라를 수반한 겨울바람이 매섭게 뱃전을 때린다. 배는 돛과 닻이 공존하는 장소이고 때로는 돛과 닻의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선원은 그 싸움을 조절할 수 있어야 배를 순항시킨다. 그래야만 배는 물 위에 뜨고 고기를 잡고 그것을 실어나를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닻이란 뇌 안의 기억 같은 것”이라고 뇌 과학자 장동선 박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기억은 수많은 닻 중 하나가 되어 나를 그 어디엔가 안착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돛을 높이 세우는 열정의 시간과 닻을 내릴 절제의 때를 가름할 줄 알아야 한다.
홍원항의 겨울바람은 유난히 거세다. 여전히 바람과 닻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