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가깝다. 신정 때는 느끼지 못했던 허전함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달맞이꽃 피듯 소리 없이 툭툭 터진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타국에서 보냈지만 가을바람에도, 이지러짐 없이 무심하게 뜬 보름달에도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것이 고국이요 고향이다.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잠 27:8)는 말씀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유다.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을 몸살 같은 것이다.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출옥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그가 그리던 고향은 산업화 바람에 실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후였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있는 고향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추억으로나 남은 옛 사진 같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본향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사정이야 어떻든 오래 자란 나무를 통째로 뽑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같다. 야곱도 본향을 떠나야 했고, 요셉도 마찬가지다. 훗날 야곱 일가도 모두 본향을 떠났고, 더 먼 훗날에는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태어나서 자란 본향을 떠났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는 룻도 본향을 떠났다. 본향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태어나자마자 또 본향을 떠나 애굽으로 피하셔야 했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사셔야 했다. 예수님도 때가 되어 본향을 떠나셨고 그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떠나오신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진정한 본향으로 가셨다.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장모님은 제주로 거처를 옮기셨다. 출가한 딸들에게는 사시던 곳이 아니라 제주가 친정이 되었다. 장소가 아니라 어머니가 계신 곳이 고향이었다. 외국에 살면서 경험하는 일도 그렇다. 부모님이 건너오셨을 때 우리 가족은 고향이 옮겨왔다며 기뻐했다.
본향은 이 땅 어딘가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최초의 부부가 그 본향을 떠난 후로 인류는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 나라는 이러이러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나그네인 것을 상기 시켜 주셨다. 본향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신 그대로 오셔서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을 알면 자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요. 본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45년 전 지구를 떠난 보이저호처럼 본향을 떠나 한없이 멀어져가는 여행을 하는 중이 아니라 본향을 향해 점점 나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지난주, 갑작스러운 부음을 받았다. 20여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정을 가꾸어 오던 분, 늘 필리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시던 분이 코로나바이러스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것이다. 지난주 수술 받는 아내를 위해 함께 기도하던 분이요, 2주 전에는 가족사진으로 만든 2022년 달력을 비싼 항공 요금을 아낌없이 지불하며 보내오신 분이다. 종종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오셔서 산마리노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며, 힘을 주시던 분이시고. 나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 키다리와 난장이라 할 정도로 키도 크고 마음도 넉넉한 분이었다.
그분을 떠나보낸 요 며칠, 사고를 통해 나도 모르게 조심하게 된 운전처럼 내게 주신 삶을 낮은 마음으로 바라본다. 어느 사이 회갑을 넘긴 세월이다. 많이 충격이 되었고 마음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지만, 평생을 주님을 향해 직진하고, 주님의 뜻에 단순히 순종하셨던 그분의 삶은 오래도록 아름답게 남아 위로와 힘을 줄 것이다. 남은 나의 길을 응원하며, 먼저 간 아버지 집, 본향에서 기다려 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아프고 슬펐다.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외롭고 쓸쓸했다. 비겁하기도 하고 부끄러워도 했다. 허세를 부리기도 했고 무시도 당했다. 잘난 체도 했고 착한 척도 했고 아는 척도 했다. 속으로는 불안하고 염려하면서도 겉으로는 믿음이 있는 척도 했다. 원치 않는 이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맞고 보내는 하루하루 어둡고 차디찬 곳이 아니라 빛으로 가득한 곳을 향해 간다. 슬픔도 눈물도 거짓도 불의도 없는 아버지 집이다. 아버지가 팔 벌려 기다리시는 곳, 본향이다.
젊은 날 성가대석에서 ‘본향을 향하네’을 부를라치면, 나그네 된 삶의 깊이를 모를 상실감이 어디선가 뜨겁게 밀려오곤 했다. 칼 융이 말한 것처럼, 본 적 없고 살아본 적 없는 본향에 대한 집단 무의식 같은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걸음은 아버지 집을 향한 여행이다. 나태주 시인의 ‘행복’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오늘도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그리운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 길에 동행하시는 주여, 감사합니다. 감사만 합니다.
본향을 향하네
이세상 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늘 항상 못 부르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 강 맑은 물가에 백화가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세상 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본향을 향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