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포기버블(Unforgivable)'이라는 영화가 있다. 경찰관에게 총격을 가해 죽게한 혐의로 20년을 복역한 한 여인의 삶을 다룬 영화다. 만기 출소했으나 공무 중인 경찰관을 죽인 사람이라는 딱지가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닌다. 그녀가 만나는 사회는 차갑고 삭막하며 거칠다. 용서 대신 증오의 시선이 그녀를 쫓는다.
차라리 감옥이 마음은 편했을 것이지만 그 냉대를 견뎌내면서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날 같은 현장에 있었던 5살짜리 여동생이다. 그 아이는 괜찮을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뿐이다.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자신을 비난하고, 혐오를 퍼붓는 사람들 속에서도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의 삶이 완전히 파괴된다고 해도 견뎌낼 생각이다.
아무도 그 사정을 몰라준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없다. 동생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동생이 보호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화는 누가 누굴 정죄하고 비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용서 없는 마음을 정의라 생각하는 이웃들의 위선과 경솔함을 드러낸다. 경찰관은 5살짜리 여동생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요, 언니는 그 어린 동생이 감당 못 할 짐을 지고 살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자신이 대신한 것이다.
영화가 보여준 그 반전 앞에 몸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보는 것이 부정확하고, 우리의 판단은 자주 성급하고 경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말 못 할 사연에 귀 기울이며 그 형편을 돌아볼 마음이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살펴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뜻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라는 것과 아무리 답답한 사정이라도 그분께 가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 40:27)
도피성을 만들라 하신 이유다.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 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전케 하기 위함이라”(신 4:42) 의도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의 딱한 사정을 헤아리시는 아버지시다.누가 아버지의 이 마음을 알까?
아담의 죄가 유전되어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다. 사람이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억울한 것인가? 마치 그런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짐을 지고 가게 하는 대신에 직접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 깨닫게 된 것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말 못할 사정을 아셨다는 증거시구나, 하는 것이다. 아셨을 뿐 아니라 친히 해결해 주셨구나, 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구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