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박미림
‘뒷개’는 외갓집 마을의 펄이다. 마을 뒤쪽을 꿰찬 이 뒷개는 올망졸망 이마를 맞댄 산과 산을 나무울타리 삼아 빙 둘러쳤다. 산골짝처럼 깊숙한 이 뒷개에 썰물이 지면, 밀물 속에 잠겼던 펄이 건너편 갯바위까지 쭉 기지개를 켠다. 그 가장자리를 에돌아 싹튼 파래며 이름 모르는 해초에도 파르라니 생기가 돈다. 펄 사이로 난 갯골은 앞바다로 빠져나간 썰물의 뒤꽁무닌 양 나직한 곳을 따라 굽이돈다. 젠 걸음 같은 잔물결이 수르르 갯골에 인다.
펄은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이 뒤섞인 곳이다. 하루에 두 번 밀물이 들락날락 하는 바다의 영역이라 썰물 때도 옴폭한 웅덩이마다 짠물이 고인다.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햇볕을 쬐고, 한밤중 교교한 달빛에 얼비쳐도 막 밀물이 빠진 것과 진배없이 질퍽하다. 그렇듯 옴폭한 웅덩이의 짠물, 햇볕과 달빛으로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을 염장하고 발효시킨다. 부글부글 괸 진회색은 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빛깔이다. 한 발 디디면 무릎까지 쑤욱 빨려 들어가 바닥에 착 달라붙고, 그 발을 빼내려면 뒤뚱뒤뚱 다리를 치대야 할 만큼 차진 힘을 함유하고 있다. 펄은 바다의 장독이다.
가리맛, 낙지, 피조개, 쏙, 참꼬막, 비단짱뚱어, 흰발농게 등 펄은 다양한 생명을 품고 키운다. 이 생명들은 밀물과 썰물의 부침에 맞장 뜨면서 먹이활동이 가능한 때를 숨죽여 기다린다. 조개류는 관자를 이용해 한 쌍의 껍데기를 열고 닫으며 밀물 속 유기물을 걸러 먹는다. 야행성인 낙지는 밤에 활동하며 밀물 속 게와 조개를 잡아먹는다. 반면에 비단짱뚱어와 흰발농게는 썰물이 돼야 꼬물꼬물 펄 구멍에서 기어 나와 부산을 떤다. 펄을 통째로 삼켜 유기물을 걸러먹고 나머지 펄은 경단처럼 둥글게 말아 다시 게워낸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교차하는 절반의 삶터, 펄의 생존법은 곧 물때를 맞추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간 나는 언니와 동생,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뒷개에 나가 놀았다. 펄 가운데 솟은 모래 등에 올라 썰물이 남긴 물결무늬를 밟으며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 쳤다. 발뒤꿈치에서 모래알들이 퉁퉁 튕겨 올라 장딴지를 때렸다. 그 뜀박질이 지치면 털썩 모래 등에 퍼질고 앉아 백합조개를 캤다. 손바닥을 모래 위에 대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은 다음, 손등에 모래를 퍼 올려 다독다독 두꺼비집도 지었다. 그 집 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펄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칠게 흉내를 냈다. 야, 하고 칠게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칠게가 순식간에 펄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조금 후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칠게를 향해 연거푸 야, 하며 친한 척 성가시게 굴었다. 노는 내내 갯바람을 마시고 갯냄새를 홀짝거리며 짭조름해졌다.
나는 바다하면 항상 펄이 떠오른다. 설 추석 휴가 때나 연말이면 한나절 짬을 내 들리는 곳도 순천만 갈대숲이다. 자연생태공원이 생기기 이전엔 논과 펄의 경계인 흙둑에 올라서면 바로 무성한 갈대숲이 펼쳐졌고, 지금은 나무 덱 탐방로를 따라 갈대숲을 산책 할 수도 있다. 찾는 시기 때문인지 몰라도 갈대는 늘 선물처럼 반갑고 설렌다. 갯바람과 동고동락 하는 갈대도 잎과 줄기를 사르륵사르륵 흔들고, 자갈색 갈꽃을 피우고, 시나브로 솜털 단 씨앗을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갯가를 따라 무리를 지어 서로 모나지 않고 수수한 생김새가 조화로운 멋을 더한다. 밀물 속에 서 있을 때도 뿌리 쪽 줄기만 잠겨 꿋꿋하게 잎들을 서걱댄다. 밀물과 썰물을 모두 품은 바다의 숲, 갈대는 전혀 딴판인 망망대해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올랐을 때다. 야간산행을 한 덕분에 희붐한 새벽녘 평야처럼 드넓은 펄과 조우하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펄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건 처음이었다. 그 펄은 낮은 곳에서 바라보던 편편한 모습과는 달리 요동치듯 움푹움푹 꺼지고 또 솟구치며 첩첩 뻗어가는 퇴적암지대처럼 옹골찼다. 펄의 굴곡 사이사이에는 가는 물길이 촘촘히 연결되어 조금 넓은 곡선의 물길을 만들고, 또 그 물길들이 만나 절벽처럼 가파르게 깎인 갯골을 이루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역동성은 펄 끝자락까지 거침없이 뻗어가 아스라이 가물거렸다.
사람도 펄의 생명이다. 펄이 삶터인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밀물과 썰물의 물때에 맞춰서 일상을 꾸린다. 썰물 때면 뻘배를 끌고 펄에 나가 참꼬막과 가리맛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는다. 펄 범벅이 된 분주한 일손도 밀물이 찰 시간이 되면 서둘러 펄을 빠져 나와야 한다. 나 또한 펄의 생명일 게다. 살아가면서 겪는 이직과 병고 등 삶의 밀물에 부대끼다 보면,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는 난감한 상황이 한두 번 뿐이겠는가. 통장잔고에 찍힌‘0원’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꾹 깨문 적이 있다. 매사에 차지지 못한 난 마음마저 쪼들리는 삶의 물때를 맞추느라 늘 동분서주했다. 나를 쥐락펴락하는 삶의 밀물에 등 떠밀리고 허둥대며 눈칫밥이나 얻어먹기 일쑤였다.
조도(鳥島)다. 외갓집 마을은 그 이름이 말하듯 겨울철새들이 월동하는 보금자리였다. 초겨울 무렵 청둥오리와 쇠기러기 떼 등 겨울철새들은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뒷개로 날아왔다. 겨울방학 때 봤던 그 철새들은 종일 뒷개를 들쑤시며 해초를 뜯고 펄을 쪼며 먹이사냥을 했다. 혹시, 둑길 밑에 웅크려 매의 눈으로 훔쳐보는 내 호기심을 눈치 챘을까. 느닷없이, 서너 마리가 뒷개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 많은 철새들이 덩달아 떼 지어 날아올랐다. 나를 감시하듯 허공에 점점이 흩어졌다 모이고 또 흩어졌다가 모여들었다. 그 군무는 뒷개 하늘을 단숨에 펄 색깔로 물들였다. 이윽고, 내 호기심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을까. 철새들은 나지막이 허공을 두어 바퀴 더 돌면서 날개를 접고 사뿐히 뒷개에 내려앉았다.
비단 월동뿐이랴. 펄은 번식지에서 월동지로 이동하는 나그네새인 개꿩, 안락꼬리마도요가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다. 또한 텃새인 검은머리물떼새의 변함없는 서식지다. 정화능력이 뛰어난 펄의 생명들은 건강한 먹이사슬을 형성한다. 사철 텃새들을 먹이고, 나그네새와 철새들이 머물다 떠난 후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올 만큼 풍요롭다. 물론 철따라 날아오는 새들도 펄을 풍요롭게 퍼덕인다. 그 무리 속엔 천연기념물이며 세계적 희귀조인 흑두루미도 있지 않은가. 펄에 깃든 새들의 날갯짓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그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먼 미지의 세상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물들인다.
오며가며 들리는 남해의 바닷가였다. 한번은 썰물 때라 막 펄이 드러나는 참인데 그 물 빠짐이 매우 빨랐다. 펄로 내려서기도 전에, 맞은편 섬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초승달처럼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 등 마냥 도드라졌다. 그 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만져보니 몽땅 패각이었다. 형체 없이 잘게 부서진 것, 아직 형태가 남아있는 소라 껍데기가 뒤섞인 채 햇빛과 물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패각은 들고나는 물살에 점점 더 잘게 부서질 터, 또 다른 생명을 품고 키우는 펄로 거듭나고 있었다.
뒷개는 툭 튀어나온 산봉우리에 가로막혀 앞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감쪽같이 산봉우리 뒤로 돌아앉아 앞바다를 잊은 듯 외톨이지만, 어릴 적 추억이 오롯한 내 가슴속 같은 곳이다. 나는 성장한 후 드넓은 세상을 품으려 뒷개를 떠났다가, 나이 들수록 소중해지는 어린 날을 찾아 말없이 돌아왔다. 여태 모래 등을 뛰어다니는 어린 나에게 내밀 성취의 꾸러미는 없다. 그것도 모르고 집게발에 묻은 펄을 조몰락조몰락 비벼대는 칠게가 반갑다. 빈손이나마 두 팔을 활짝 벌려 뒷개를 품어 본다. 모래 등이 최고였던 어린 날의 뒷개가 사실은 앞바다로 이어지는 드넓은 세상이었음을 비로소 안다. 이 뒷개에 아쉬움이 알알이 박힌 내 지난날을 부려놓고 포용과 순리의 물때를 맞춰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