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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philosophy , 哲學) ***
(요약)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 개설
철학이란 용어는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철학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한 가지 개념으로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갖는 포괄성과 다의성 때문에 철학 앞에는 관념론적 철학· 경험론적 철학· 실존론적 철학· 과학철학 내지 언어철학 등 각 철학의 주제와 특징에 따른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또 지역적으로는 서양철학· 동양철학 및 한국철학이라는 명칭이 함께 쓰이기도 한다.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문이 이와 같이 다양한 주제와 광범위한 영역을 갖게 된 것은 이 학문이 오랜 역사를 통해 발달해 온 데다가, 철학을 행하는 방식이 철학의 개념을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생겨났고, 초기에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철학이라는 용어의 발단 및 성격
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뜻한다. 필로소피아는 필로스(philos, 사랑함)와 소피아(sophia, 지혜)라는 두 말을 합성한 것이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 또는 ‘애지(愛智)’를 뜻한다.
그러나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당시는 아직 철학이라는 말과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철학자라기 보다는 현자로 불렸고, 자신들의 활동을 철학이 아니라 역사(historie)로 규정하였다. 후대의 가필로 여겨지지만, 처음으로 자신을 철학자(philosophus)라고 소개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로 전해진다.
** 피타고라스(Pythagoras , <그>Πυθαγόρας) (요약) 피타고라스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철학자로서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였다. 그가 이탈리아 남부 크로톤에 설립한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 피타고라스의 생애와 업적 피타고라스 흉상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69년경 그리스 남부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공부한 후 당시 선진국인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폭군 폴리크라테스로부터 사모스를 구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그리스 본토는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남부 크로톤에 정착하여 피타고라스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는 수학, 음악, 천문학, 철학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는데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나 지식은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간소한 생활, 엄격한 교리, 극기, 절제, 순결, 순종의 미덕 증진을 목적으로 단체 행동을 하며 살았고 따라서 학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적 결사 단체이기도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음악 이론, 수의 이론 등 많은 수학적 업적을 남겼다. 피타고라스는 계산술과는 다른 ‘수(數)’ 그 자체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론(數論)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홀수, 짝수, 소수, 서로소인 수, 완전수, 과잉수, 부족수, 친화수, 피타고라스수 등은 모두 피타고라스가 생각해 낸 개념이다. 그들은 심지어 우주가 수 또는 수들의 관계(비율)에 의해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물은 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신념은 플라톤에게 계승되어 그에 의해 철학적으로 다듬어졌으며, 코페르니코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으로 이어지는 서양 사상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주의 피타고라스가 젊었을 때부터 이집트, 바빌로니아를 두루 여행하면서 40세쯤 되어 세운 학교는 이른바 별꼴 오각형의 배지를 달고, 피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엄격한 규율로 단결되어 연구 결과도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만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교의 학생들은 엄격한 규율에 의해 통제되었다. 처음 5년 동안 그들은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는 것, 콩이나 고기를 먹는 것, 불을 뒤섞기 위해 쇠막대를 이용하는 것, 하얀 수탉을 만지는 것, 항아리에 재를 남기는 것 등이 금지됐다. 이렇다 보니, 이 학교(학파)는 자연히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고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귀족주의적인 이 학파는 때마침 일어난 민주화의 풍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그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마침내 피타고라스는 학살당하고 말았다. 3. 피타고라스 학파의 여자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던 시절, 피타고라스 학파는 여자들을 과학과 수학의 여러 분야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대등한 자격으로 수용했다. 피타고라스는 여권론자로 알려져 있는데, 여자들이 학생 또는 교사가 되도록 격려했다. 인생의 말엽에 그는 가장 뛰어난 학생 중 한 면인 테아노(Theano)라는 학생과 결혼했다. 뛰어난 우주론자이자 의사였던 테아노는 피타고라스의 사후에 학파을 이끌었다. 또한 그녀와 그녀의 딸은 정치적 박해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그리스와 이집트 전역에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4. 황소 100마리를 잡아 바치다. 피타고라스가 이집트를 여행하던 중 어느 웅장한 사원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무심코 바닥에 깔려 있는 대리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를 보다가 직각삼각형의 세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작은 두 정사각형의 넓이의 합이 나머지 한 개의 큰 정사각형의 넓이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세 변의 길이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 정리를 발견했을 때 “이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신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라고 기뻐하여 황소 100마리를 잡아 신에게 공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피타고라스 정리’로 불리는 이 사실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이집트, 인도, 중국, 메소포타미아 등 전 세계에서 발견되었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건물, 도로, 다리 등에서 직각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을 짓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으로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5. 현의 길이와 소리의 관계 ‘모든 것의 근원은 수’라고 주장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어느 날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쇠를 칠 때 어떤 때는 어울리는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현의 길이와 소리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프의 현의 길이가 짧을수록 높은 음이 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음의 높이는 현의 길이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하프의 줄을 튕겼을 때 ‘도’소리(음계)를 냈다면 그 현의 길이를 으로 줄였을 때는 ‘도’보다 4도 높은 음인 ‘파’소리가 나고, 로 줄였을 때는 ‘도’보다 5도 높은 음인 ‘솔’소리가 나며, 로 줄였을 때는 ‘도’보다 8도 높은 음인 한 옥타브 위의 ‘도’소리가 난다. 피타고라스는 현의 길이의 비가 4 : 3, 3 : 2와 같이 간단한 정수의 비로 표현될수록 어울리는 소리가 나고, 그 비가 복잡할수록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6. 명언 만물의 근원은 수이다. |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이전인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네의 폴리스 공동체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덕”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인 활동 및 지적인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지혜 혹은 지식을 사랑하다”(philosophieren)라는 뜻의 “철학하다”라는 동사형 및 “지식을 사랑하는” 뜻의 “철학적”이라는 형용사가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이후 명사형으로서의 철학은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등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인 크세노폰·이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글에서도 이러한 용례가 발견된다. 초기의 철학이라는 용어는 폴리스 시민의 “교육”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소피스트들이 상품처럼 지식을 돈을 받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파는 행위도 일종의 철학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및 플라톤은 철학을 단순한 “지식의 전달” 내지 “지식의 과시”로 보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철학을 참다운 앎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지식의 과시”보다는 “참다운 지식”을 얻기 위해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을 중요시했다.
대화를 통한 검토와 반박의 과정에 의해서 참다운 앎을 획득해 가는 자기 비판적 탐구정신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이미 삶의 태도와 관련되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서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자기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판단해서 나온 참다운 앎에 따른 행위가 바로 자율적이고 이성에 근거한 윤리로 정초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참다운 “지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은 ‘이론적 지식’ 뿐만 아니라 선악의 인식을 내용으로 삼으며, 비판적 자기 검토를 통해 올바른 실천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뜻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지행합일”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출발했던 “철학”의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인간 바깥의 자연세계 및 우주에 대한 이론적 앎, 그리고 인간의 올바른 행위를 다루는 실천적 앎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은 서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것은 아니어서 이 양자는 철학의 용어로 통합되었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초창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 내지 추구”로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자기 비판을 통한 참다운 앎의 추구와 그 앎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서양철학의 발달과정
철학의 ‘용어’가 원래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안다고 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단적인 대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철학은 ‘개별 학문’이 추구하는 현실의 한 영역이나 단면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성과 근원성을 문제로 삼는다. 또한 무전제성에서 출발한다는 근본적 특성이 있다. 그러기에 철학의 방법과 대상은 미리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전체적이고도 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철학의 방법과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며, 그 시대가 제기한 근원적 과제에 답하였다.
철학사는 각 철학자들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철학함을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에,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1. 그리스철학
고대 그리스는 ‘철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지역이면서 동시에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규정지은 서양철학의 요람이다.
칸트(I. Kant)는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리스라는 경탄할 만한 민족이 희망봉(希望峰)을 도는 항로를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고방법의 혁명을 가져왔다.”
서기전 7세기경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에 살았던 최초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만물의 원인과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철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살던 지역은 중계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집트, 페르시아 등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고, 또한 물질적 풍요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그 때까지 지배했던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물질적 풍요로 인한 넉넉한 생활은 사물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schole-]나 “한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적 세계관을 벗어나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의 근원(arche-)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 근원은 모든 사물을 이루는 원재료이자 사물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자들은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인 근본법칙[logos]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흔히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학파, 엘레아학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쏘스], 헤라클레이토스, 다원론자인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로 언급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의 원질(原質, arche-)에 대해 각각 다른 해답을 찾았다. 탈레스는 물[水],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무한정자(無限定者)인 아페이론을,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불[火], 피타고라스는 수(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일자(一者),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흙·물·불·공기의 4원소, 아낙사고라스는 많은 씨앗[種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원자 등을 각기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지적하였듯이, 탈레스를 위시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자연(physis)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적으로 자연이 스스로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는 물활론적 입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해답보다는 그들이 품었던 세계에 대한 물음과 합리적 설명 방식의 시도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원질에 대한 추구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향한 새로운 애지 활동의 성과였던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정치·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아테네 시민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졌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세련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가를 받고 웅변술을 가르치거나 교육을 해주는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지금은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 소피스트들은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철학사에 기여한 공로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 탐구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전승된 도덕관념을 의문시하고 비판함으로써 윤리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언어와 인간의 사유를 철학적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도 소피스트의 공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활동이 없이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고전기를 생각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등장한 이후에는 철학의 관심은 인간영혼, 선(agathon)과 덕(arete)과 같은 인간의 본성과 윤리적 문제로 더욱 집중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모든 성과들을 자신의 철학체계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창조했다. 플라톤 철학의 중심은 이념을 뜻하는 이데아론이다.
이념은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의 본질”로 설명되며, 이념의 세계는 가시적 세계와 구분된다. 가시적 세계는 지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이지만, 이념의 세계는 모든 직관을 넘어 순수이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념 중에서도 ‘선의 이념’을 철학적 문제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에게 선이란 존재의 목적과 원천을 묻는 윤리학적 의미를 넘어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태양이 모든 것들에게 가시성과 생명과 성장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은 선의 이념에 의해 존재하며, 전체 세계에 ‘질서’와 ‘척도’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 선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영역을 “체계적”으로 건축하고 “학문적”으로 정초하려 했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념은 이념에 참여한 사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원론에 기초한 플라톤의 이념론과 결별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사물 그 자체”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참다운 실재는 바로 개개의 특수한 사물이라고 보고 이것을 실체[ousia]라고 하였다. 이데아에 해당하는 보편으로서의 본질은 결코 특수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 속에 그것들의 공통적 성질로서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실체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로서의 질료(質料, hyle)와 이 질료를 일정한 종류의 사물로 현실화시키는 원리로서의 형상(形狀, eidos)과의 결합체라고 보았다.
질료는 일정한 실체로 나타날 가능성을 가진 가능태(可能態, dynamis)이며, 이 가능태가 형상을 실현한 것을 현실태(現實態, energi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나아가는 이 운동원리를 엔텔레키(Entelechi 완전성을 향한 활동원리)라고 불렀다. 모든 사물의 본질[ousia]은 그 본질의 현실적인 전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를 자신의 형이상학의 중심적 입장으로 삼아, 세계[우주]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체 자연이 연쇄적인 계열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이 구조에 있어 가장 낮은 영역인 순수질료[제일질료]로부터 단계적으로 질료가 형상을 실현시켜가면서 가장 높은 영역인 순수형상으로 상승한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른바 제일철학(第一哲學)의 주제로 본 제일원리로서의 순수형상은 전혀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순수형상이기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 데서 ‘부동의 원동자(原動者)’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만물이 움직여가는 궁극의 목적인 동시에 모든 생성의 궁극원인으로서의 완전자로 규정되는 순수정신 또는 신이다.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정복은 동방의 여러 문화를 그리스 본토로 전래하게 하여 ‘헬레니즘(Hellenisim)’이라고 불리는 혼합문화를 형성시켰다.
이 문화는 후에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갈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 때의 철학은 이미 도시국가(polis)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국가를 바탕으로 한 세계시민적 철학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은 스토아학파(stoics)의 금욕주의,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의 쾌락주의, 그리고 회의학파(懷疑學派, sceptics) 등이다. 스토아학파는 신적(神的)인 세계법칙인 로고스(logos)가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성은 이 로고스의 분유(分有)로 있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이 우주적 이법인 로고스를 따라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성에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으로 모든 쾌락과 충동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금욕을 통한 충동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적 평정(平靜), 부동심(不動心)의 상태를 무감동(無感動, apatheia)이라 부르고, 이 경지를 인간이 목적하는 참다운 행복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賢者, sophos)로 보았다. 여기서 철학은 자신의 이성에 기초해 필연적 세계이성에 대한 통찰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초기 스토아학파로는 스토아철학의 정초자라 할 수 있는 크리톤의 제논과 크리시포스를 들 수 있다. 중기 스토아학파는 그리스 철학을 로마로 가져왔던 파나이티오스와 초기의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엄격성을 고수하려 했던 포세이도니오스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후기 스토아학파는 로마 시대의 세네카(Seneca), 에픽테토스(Epictetos)·아우렐리우스(Aurelius)황제 등으로 대표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다르게 인간을 보편적인 세계법칙으로서의 로고스와의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고립적·자연적 존재로서 파악하였다.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쾌락과 고통을 모든 실천의 기준으로 보고, 쾌락은 선이며 고통은 악으로 여긴다.
*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로마의 철학자, 정치가, 극작가 이다. 1. 개요 1세기 중엽 로마의 지도적 지성인이었고,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62년에 동료들과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2. 초기생애와 가족 세네카는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Seneca the Elder)는 로마에서 수사학교사로 유명했다. 어머니 헬비아는 훌륭한 성격과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형 갈리오는 52년 아카이아에서 성 바울로와 만난 적이 있었다. 남동생은 시인 루칸의 아버지였다. 세네카는 어릴 때 큰어머니를 따라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를 혼합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세네카는 병에 걸렸으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그곳에 있는 그의 큰어머니는 사령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다.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황제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변론 때문에 그만두었다.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 자신의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부적합한 환경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 Consolationes〉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의 영향력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돈많은 여자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신임 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 강력한 친구 집단을 만들었고 훗날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되자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친구들은 게르만과 파르티아 국경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권을 장악했다. 네로는 세네카가 초안을 쓴 첫 대중연설에서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자유민과 여성의 영향력을 끝장내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그밖에도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네카와 부루스는 비록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 출신이었지만 로마 세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한 좀더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했다. 그들이 임명한 코르불로가 파르티아군을 이겼다. 영국에서는 부디카의 반란이 진압되자 좀더 계몽된 통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역사가 타키투스(56경~117)가 말했듯이, "인간사에서 뒷받침할 자기 힘이 없는 권력보다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은 없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폭군이 총애한 인물들이었다. 59년에 그들은 아그리피나의 살해를 묵과하거나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은퇴를 허락받고 남은 해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65년에 세네카의 적들은 그가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자살을 명령받고 꿋꿋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3. 철학 저작과 비극 〈신성한 클라우디우스의 바보만들기 Apocolocyntosis divi Claudii〉는 세네카의 남아 있는 다른 저작들과 매우 다르다. 빈정거리고 무엄한 정치적 풍자인 이 글의 주제는 클라우디우스를 신으로 만드는 것 또는 바보만들기이다. 그밖의 저작은 철학책과 비극으로 나누어진다. 철학 책들은 '중기' 스토아 철학의 절충적 견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견해는 로도스의 파나이티우스(BC 2세기)가 로마 시장을 겨냥하여 채택했고 그와 같은 나라의 포세이도니오스가 BC 1세기에 발달시켰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세네카가 자연과학에 관해 쓴 〈자연의 의문들 Naturales quaestiones〉에서 소개하는 인물이다. 이 책에서 자연 연구에 관한 매우 고귀한 일반적 주장들은 사실에 관한 빈약한 설명 때문에 빛을 잃고 있다. 위로문 가운데 〈마르키아에게 보낸 위로문 Ad Marciam de consolatione〉에서는 아들을 잃은 부인을 위로하고, 〈헬비아에게 보낸 위로문 Ad Helviam matrem de consolatione〉에서는 그가 추방당했을 때 어머니를 위로하고, 〈폴리비우스에게 보낸 위로문 Ad Polybium de consolatione〉에서는 아들을 잃었으나 코르시카에서 로마로 돌아오려고 아첨하며 애걸하는 강력한 자유민 폴리비우스를 위로한다. 〈분노에 관하여 De ira〉는 분노의 정념, 그 결과, 조절 등을 길게 다룬다. 〈관용에 관하여 De clementia〉는 네로에게 충고하는 편지이며 자비를 로마 황제의 군주 자질로 권유한다. 〈영혼의 평정에 관하여 De tranquillitate animi〉·〈지혜의 불변성에 관하여 De constantia sapientis〉·〈행복한 삶에 관하여 De vita beata〉·〈여가에 관하여 De otio〉 등은 스토아주의적 현인의 삶과 자질의 여러 측면을 살핀다. 〈자선에 관하여 De beneficiis〉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눈으로 본 자선을 산만하게 다룬다. 〈삶의 짧음에 관하여 De brevitate vitae〉는 드문 일이지만 사람의 일생은 시간을 적절히 쓰기만 하면 충분히 길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장 잘 썼고 설득력 있는 글은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에 관한 서한 Epistulae morales〉이다. 이 책에 실린 124편의 빛나는 논문은 하나의 정식으로 줄이기 힘든 폭넓은 도덕문제를 다룬다. 10편의 '세네카'의 비극 가운데 〈옥타비아 Octavia〉는 분명히 가짜이고 〈용맹한 헤라클레스 Hercules Oetaeus〉도 아마 가짜일 것이다. 나머지는 세부적인 면에서 독창성도 조금 있지만 그리스 비극의 유명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 작품들을 스토아주의 '교훈극'이라는 도식적 취급방식에 따라 정리하려는 노력은 이해하기 어렵다. 공개상연보다 연극독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음조는 매우 단조로우며, 무시무시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강조한다. 일련의 인상적인 연설과 성가곡이 있지만 배우들은 정지상태로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이 연극들은 르네상스 세계에 알려진 고전 비극 중 대표적인 것들이며 특히 영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셰익스피어의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존 웹스터의 〈The Duchess of Malfi〉, 키릴 투어너의 〈Revengers Tragaedie〉는 유령, 마녀, 잔인한 폭군, 복수라는 주제 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세네카 비극의 자손이다(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 (참조) 엘리자베스 시대 문학(Elizabethan literature) <요약>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때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 필립 시드니 경, 에드먼드 스펜서, 로저 애스컴, 리처드 후커 주교, 크리스토퍼 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들이 활약했다. 엘리자베스 시대 문학이라는 용어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생긴 것으로, 영국 문학의 커다란 생명력과 풍부함을 뜻하며 작품의 어떤 특성을 설명하는 말은 아니다. 이 시기에 소네트, 스펜서식 연, 극적 무운시 등의 시문학이 꽃피었으며, 특히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황금시대를 맞았고, 역사 이야기, 성서 번역본, 소논문, 문학비평에서 최초의 영어 소설까지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산문이 쏟아져나왔다. 대략 17세기 초반부터 거의 모든 문학양식, 특히 희곡의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이런 변화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1603~25년의 영국 문학은 새로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 1세 시대 문학이라고 해야 하지만, 16세기의 주제와 형식이 17세기에도 이어졌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임스 1세 시대 초기에 나온 작품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를 합쳐 부르는 용어(Jacobethan)를 써서 '재커베스 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 4. 인물과 영향 세네카에 대해서는 악의 있는 선전이 뒤따라다녔다. 1세기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세네카의 교육적인 영향을 비판했다. 타키투스는 세네카의 역사적 지위에 관해 이중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군주정과 그 임무에 관한 세네카의 견해는 안토니네스 시대(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 138~192)의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그동안 스토아주의가 널리 퍼지는 바람에 그의 철학은 계속 살아 있었다. 그의 철학이 그리스도교와 유사성이 있다고 밝혀지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그가 성 바울로를 알고 있었다는 믿음과 이 믿음을 실증하기 위한 가짜 편지 모음도 있었다. 아우구스틴과 제롬의 연구에 따르면 세네카의 저작은 감옥에 있는 보에티우스를 위로했다. 세네카의 사상은 흔히 선집으로 걸러지지만 중세 라틴 문화의 한 구성요소였다. 단테·초서·페트라르크에게 알려진 그의 도덕 작품들은 에라스무스가 편집했다. 영어 완역본은 1614년에 나왔다. 16~18세기에 세네카의 산문은 내용과 문체 면에서 모국어 문학이 발달하는 데 수필·설교·교화의 모범으로 이바지했다. 칼뱅·몽테뉴·루소 등이 그 예이다. 최초의 '스페인' 사상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에서는 항상 강했다. 19세기에 전문화의 바람이 불자 세네카는 철학자·과학자·영사가·문학도 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65년에 그의 죽음 2,000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학문적 연구와 관심은 세네카 부활이 진행중임을 보여주었다. |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철학을 개인의 쾌락(hedone-), 즉 행복을 얻는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쾌락을 ‘마음의 평정(平靜, ataraxia)’으로 보았고, 이 이상적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현자라고 하였다.
퓌론(Pyrrhon)에 의해 창시된 회의학파는 위의 두 학파를 모두 독단론이라고 배격하고, 일체의 이론을 단념함으써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을 누리려고 하였다.
외계의 사물은 단지 불확실한 지식을 줄 뿐이며, 사물의 진상(眞相)이 아닌 데서 사물에 집착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고 보고, 불확실한 지식밖에 주지 못하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판단중지(判斷中止, epoche-)에 의해 무감동이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일의 선악과 진위(眞僞)를 구별하려면 반드시 타인과 대립하게 되어 결국 마음의 평정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헬레니즘시대의 철학은 불안한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윤리 중심의 처세철학의 경향이 짙었다. 이에 반해 로마제국의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초월적인 신의 힘에 의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종교적인 경향이 농후해진다. 이 시대의 대표적 철학은 플로티노스(Plotinos)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일자[hen]로부터 유출[Emanatio]되었다고 한다. 일자는 스스로의 충만함으로 인해 모든 것을 방출해 낸다. 이렇게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단계는 정신, 영혼, 물질의 순서로 진행되고,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통일성과 완전성의 정도가 떨어진다.
정신은 만물의 영원한 원형상인 일자를 관조할 수 있는 영역이며, 영혼은 우주와 물질계의 개별적 사물들에 스며들어 생기와 조화를 부여한다.
모든 만물은 일자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상인 일자를 지향한다. 인간의 개별적 영혼은 물질과 결합해 있기 때문에 일자의 영원한 원형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을 방해하거나 흐리게 한다. 따라서 일자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정화”가 필요하다.
신플라톤주의에서 철학은 영혼이 물체의 그림자 세계를 극복하고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일자를 직접 관조할 수 있는 “망아”(ekstasis)의 경지에서 최고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러한 면모를 지닌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신 중심의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려 했던 중세 기독교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2.2. 중세철학
중세철학의 특징은 기독교와 철학의 결합에 있다. 중세철학의 시작은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유스티누스 황제에 의해 폐교된 529년으로 잡는다.
초창기 중세철학을 지배했던 기본적 주제는 “믿음”과 “앎”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기독교를 그리스철학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중세 기독교철학에 있어서 “믿음”과 “앎”의 관계는 필연적인 문제였다.
교부철학 중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그노시스(Gnosis)학파의 클레멘스(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는 신앙에 대한 지식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다같이 이성주의(理性主義)편에 섰다.
* 영지주의(Gnosticism , 靈智主義) 영지주의는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지만, 초대 그리스도교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쳐 교회법·신조·주교조직이 생겨나게 했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한 교부들(185경 이레네오, 230경 히폴리토, 375경 에피파니오)의 글과 영지주의 저작들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윤리학·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영지주의 분파들은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하다. 1. 역사 학자들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기원을 이란의 종교적 이원론, 중기 플라톤 철학자들의 알레고리적 이원론, 특정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묵시적 사상에서 찾는다.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종교혼합주의가 충분히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고 난 다음이었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몬 마구스이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그러나 시몬의 '그노시스'는 〈신약성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유대교와 유일신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영지주의가 널리 보급된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확립되었으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하위의 신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을 빌려왔다. 이러한 주장은 〈요한의 외경 Apocryphon of John〉(2세기초), 1940년대에 상(上)이집트 나지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문서들(통속적인 '영지'를 다루었음), 3세기 콥트어 영지주의 저서 〈신앙의 지혜 Pistis Soph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렌티누스, 바실리데스와 이들 학파가 제시한 지적인 '영지'론은 통속적인 '영지'를 전제로 삼았지만, 그것은 철저히 헬레니 즘과 그리스도교로 채색되었으며, 때로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견해에 매우 가까웠다. 동방의 영지주의는 조금 다른 과정을 겪었다. 전통적인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반영지주의적인 마니교는 영혼과 물질의 절대적인 우주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2. 성격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무의식적 자아는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타락했기 때문에 진정한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본질·초월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계몽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성서에 의해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름이나 설명을 초월하는 심연과 침묵이고, 절대자이며, '플레로마', 즉 빛의 영역을 형성하는 선한 영들의 원천이다. 2세기 영지주의 분파들은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종교 저서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의미들을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영지주의 집단은 학파를 구성하여 권위 있는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해석하며 비밀을 보존한 듯하다. 의식도 분파에 따라 달랐다. 3. 영향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은 대체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조를 작성하고,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확정하고, 주교(감독)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사상체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체계화되도록 자극했다. 그외에도 그들은 자유·구속·은총 등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활성화시켰다. 훗날 아우구스티노 신학은 그가 초기에 마니교도로서 경험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
* 플로티노스(Plotinos) 플로티노스(Plotinos) 1. 개요 신플라톤주의 철학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2. 출생과 교육 플로티노스의 삶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가 스승의 글을 모아 편집한 책 〈엔네아데스 Enneads〉에 서문으로 붙인 전기(傳記)가 유일하다. 이것 이외의 고대 자료는 거의 없는데, 이 점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포르피리오스의 〈플로티노스의 생애〉는 현존하는 최고의 자료이지만 중요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플로티노스의 삶을 설명하면서 설명의 틈을 메우는 데 독창적인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의 생애〉는 정직하고 꼼꼼하며 영웅을 떠받드는 진지한 정신을 지닌 동료이자 숭배자가 쓴 작품이다. 이 저작은 플로티노스 삶의 전반기에 대해 말해주는 몇몇 흥미로운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플로티노스의 생애 마지막 6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6년 동안 포르피리오스는 스승과 함께 로마에서 살았다. 따라서 65세로 세상을 떠난 플로티노스의 삶을 제대로 그려볼 수 있는 기간은 바로 이 6년간이다.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도 노년의 삶만이 알려져 있다. 플로티노스 자신의 저작은 어떤 자전적인 정보도 담고 있지 않으며 젊은시절의 정신이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도 전혀 없다. 플로티노스는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에 모든 저작을 썼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부모·동족·조국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4세기 후반에 활동한 에우나피오스와 그후의 작가들은 플로티노스가 태어난 곳이 이집트에 있는 리코 또는 리코폴리스라고 썼는데, 이곳은 현재 북이집트의 아슈트 또는 나일 강 연안 델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인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플로티노스의 생애〉나 플로티노스 자신의 저작 어느 구석에도 이집트에 대해 특별히 말하거나 친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 없다. 그리고 플로티노스가 세계적인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철학을 연구했다는 사실도 그가 이집트인임을 입증할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가 3세기에 라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가 어디 사람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되지 못한다. 매우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그가 대체로 그리스 말을 사용했고 그리스어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플로티노스는 매우 독창적이지만, 사유방식과 지적·종교적 충실성으로 보면 헬레니즘 전통에 서 있다. 플로티노스는 28세가 되던 해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지만 곧 실의에 빠졌다. 마침내 그를 잘 이해하고 있던 한 친구의 권고로 독학한 철학자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플로티노스는 암모니우스의 강연을 듣고 나서 이렇게 외쳤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그는 암모니우스와 11년 동안 함께 살았다. 암모니우스는 고대 철학사를 통해 가장 신비스런 인물이다. 그는 물론 아주 불확실한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이단 교파를 신봉한 것 같다. 한두 마디 전해지는 그의 말을 보면, 그는 전통적인 플라톤주의와 아주 비슷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플로티노스를 그처럼 사로잡을 수 있었고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인 오리게네스의 철학 스승이었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제자들에게 많은 사상을 이야기했겠지만 확실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플로티노스가 그와 함께 11년 동안 살았다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어떤 철학학파에 들어가 배움을 마치기까지 대부분 일생을 통해 진리와 선을 추구하고 마침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3. 동방원정 암모니우스와의 생활을 청산하고 난 다음 플로티노스는 페르시아와 인도철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242~243)에 참여했다. 그러나 고르디안 황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아랍의 필립이 황제로 추대되는 일이 벌어져 원정은 비참하게 끝났다. 플로티노스는 간신히 도망쳐 안티코크로 되돌아왔다. 40세 되던 해에 다시 로마로 가서 거기에 정착했다. 그리스 철학자가 동방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일은 흔했는데, 그 당시에는 특히 그러했다. 이 원정이 실패한 탓으로 동방의 현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사상은 인도 종교철학과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철학적 전통 아래 교육받은 인도인과의 교류가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어쨌든 플로티노스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인도 사상과의 유사성은 플로티노스가 물려받은 그리스 전통의 자연스런 귀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원로원 출신의 고르디안 황제가 지휘한 동방 원정에 플로티노스가 참여했다는 사실, 그가 로마로 갔다는 사실(로마는 대개 철학자들이 잘 정착하지 않던 도시였음), 그로부터 19년 후 포르피리오스가 원로원 귀족출신의 많은 친구들과 제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플로티노스를 만났다는 사실 등은 그 자신이나 그의 가문이 로마 원로원 귀족들과 매우 긴밀한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을 뜻한다고 해석되어왔다. 4. 로마 생활 처음 로마에 왔을 때부터 263년 포르피리오스와 만난 무렵까지 그의 환경이 어떠했든지간에 플로티노스는 상당히 검소한 생활태도를 지키면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실제 사회활동과 가르치는 일로 사회에서 그의 명성은 높았다. 그는 논쟁에서 심판자처럼 행동했으며 그러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에 임박한 귀족가문의 친구들이 플로티노스를 자손들의 후견인으로 지목하는 일도 많았다. "그의 집은 언제나 어린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포르피리오스는 쓰고 있다. 그는 매우 양심적이고 로마 법률에 따라 친구 자손의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재산을 관리해주었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플로티노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친구 부인의 보석목걸이를 훔쳐간 자를 찾아내는가 하면, 포르피리오스가 우울증에 걸려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분위기를 바꾸어 새로운 교류를 쌓도록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보내기도 했다. 포르피리오스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이 충실하며, 그와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마음 편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친구들의 세속적인 욕망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어떤 것과 통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사귄 친구들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 출신자, 로마의 원로원 회원 및 그 부인들과 과부들로 이루어진 세계시민주의자였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플로티노스를 존경하고 후원한 사람들 가운데는 갈리에누스 황제(253~68 재위)와 그의 아내 살로니나도 있었는데 이 덕분에 그는 한때 거창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었다. 그는 황제에게 캄파니아에 있는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여 그 주변의 땅을 하사해주도록 청했다. 그는 복구된 도시를 플라토노폴리스라 부르고, 그 도시 주민을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법과 관습에 따라 살게 할 계획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직접 거기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살겠노라고 공언했다. 플라톤 사상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며, 또 공직 생활에서 은퇴하겠다고 설교하고 다니던 철학자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사정이 닿는다면 플라톤이 말한 도시를 세우는 것이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황제는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사실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그 제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원로원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군사적 지휘권을 빼앗았으며, 원로원은 황제가 죽고 난 다음 황제를 먹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황제가 플로티노스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몰라도, 플라토노폴리스를 장차 원로원의 세력 거점이자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반의 중심지로 본 것은 황제로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5. 플로티노스의 가르침과 저작 플로티노스는 온 힘을 쏟아 가르치는 일에 매달렸고, 로마에서 첫 10년을 보내고 난 다음에는 저술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교수 방식이 다소 스콜라적이긴 하지만 그의 '학파'에는 아카데믹한 면이나 고도의 조직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앞선 철학자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붙인 주석서의 구절을 낭독하게 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은 친숙한 분위기에서 허물없이 진행되었으며, 플로티노스는 토론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일단 제기된 문제는 끝이 날 때까지 논의하곤 했다. 이 학파는 집단적인 조직을 갖추지 않고 가까운 친구와 숭배자로 이루어진 느슨한 형태의 모임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이들을 위해 글을 썼으며, 이 글들이 바로 포르피리오스가 모아 편찬한 <엔네아데스>이다. 이 중 어떤 글은 그 난이도로 보아 학파 내부에서도 포르피리오스, 투스카니의 아멜리우스 겐틸리아누스(학파의 연장회원), 플로티노스의 의사였으며,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을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에우스토키우 등 절친한 친구와 공동 철학연구자를 위해 쓴 듯하다. 〈플로티노스의 생애〉의 몇몇 이야기와 〈엔네아데스〉의 어떤 구절을 보면 플로티노스가 당대의 종교적·미신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종교적 태도를 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도 마술을 믿었으며, 별의 운행으로 미래의 일을 점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성술사에 대한 기괴하고 비도덕적인 맹신은 비난했다. 그가 비술(秘術)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실용적인 목적보다 철학적인 관심 때문이었으며, 그가 실제로 마술을 부렸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다. 한번은 올림피우스라는 사람이 플로티노스에게 마술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가 마술을 부려 불러낸 저주의 힘은 오히려 플로티노스로부터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 플로티노스는 이집트의 이시스 사원을 방문해 주문을 외워 수호신령을 불러내려고 한 적이 있다. 포르피리오스에 따르면 보통의 수호천사 대신 신이 나타났는데, 주문을 잘못 외는 바람에 신에게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고 한다. 플로티노스 개인이 주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거기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플로티노스가 전래의 이교도 집단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가 보여준 존경할 만한 초연한 자세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철학자인 아멜리우스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에 참석하기를 좋아했다. 플로티노스는 그러한 제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멜리우스는 열렬한 신도였지만 변함없이 플로티노스의 친구였으며 협조자로 남았다. 플로티노스가 교류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노시스 학파(이단적인 그리스도교 이원론자들로서 秘義的인 복음 지식을 강조했음)의 추종자들도 있었다. 이들에게서 자극을 받은 플로티노스는 이들의 신념을 공격하는 글을 줄기차게 썼을 뿐만 아니라, 포르피리오스와 아멜리우스를 중심으로 이들을 논박하는 논쟁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플로티노스가 그노시스 학파를 공격한 이론적 근거는 어느 정도 정통 그리스도교에 의존해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교에 정통했다거나 로마 교회와 접촉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보기에 그노시스 학설은 야만적·통속적·비합리적·비도덕적·비그리스적이며, 정신 나간 오만한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플로니노스에게 종교가 있었다면, 순수한 지성에 의지해 선(善)과 신비적으로 합일하려는 소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고 가르쳤다. 6. 말년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건강이 매우 나빠진 플로티노스는 고통스럽고 비참한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포르피리오스가 묘사한 그의 증세는 너무도 모호해서 오늘날에는 의사에 따라 결핵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나병으로 보기도 한다. 플로티노스가 병에 걸리자 친구들은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한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캄파니아 지방의 시골농장에 은거했는데 거기서 1년도 못 되어 죽었다(270). 동료 모임은 이미 해체되었고, 포리피리오스는 우울증을 치유하도록 플로티노스 자신이 시실리로 떠나보낸 터였으며, 아멜리우스는 시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치료하던 에우스토키우스만이 플로티노스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플로티노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너의 신이 만유(萬有)의 신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라", 또는 "나는 우리의 신이 만유의 신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라는 말이었다. 어느 경우든 그 말은 고대 후반기를 살았던 신앙심이 깊은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품고 있던 신념을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
클레멘스는 하느님이 철학을 원하며, 철학의 이성적 사용은 구원을 가져온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호교파(護敎派)측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철학이란 이교도의 것이며,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말로 신앙을 강조하였다.
철학은 교회의 신앙과 서로 대립하여 논란을 거듭하다가 서서히 교리의 체계화와 변신론의 필요를 위해 기독교 안으로 수용되어 갔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황제에 의해 로마제국 내에서 하나의 종교로 공인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신인론 및 원죄론이 공식적인 교리로서 결정되기에 이른다.
교부철학의 대표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St.)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인간의 ‘믿음’은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전개시킬 수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명제화했다. “인식하기 위해서 믿으라. 그리고 믿기 위해서 인식하라.”(Crede ut intelligas, intellige ut credas).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인식의 확실성을 자기 존재의 확실성에서 찾았다. “내가 속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enim fallor, sum)라는 말로서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의식함으로써 그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데카르트와 달리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통해 자기 안에 거처하는 진리, 즉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리는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대략 정비되었고, 그 뒤 철학의 역할은 그 교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 논증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할은 대개 교회 소속 학교(schola)나 수도회 소속 학원(schola)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 강론한 학자나 교사들에 의해서 수행되었고 이에 스콜라철학이 정립되었다.
선구자는 에리우게나(Eriugena)였다. 그는 “진정한 종교는 진정한 철학이요, 진정한 철학은 진정한 종교이다.”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의 유출설과 기독교의 창조설을 결합시키고자 했고, 만물은 신으로부터 전개되고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논증하였다.
이성은 계시의 의미를 해명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으며, 교부들의 “권위”인 교리는 받아들여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성에 맞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St.)는 “참된 이성”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신앙의 진리로 이끈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 내용을 교부의 권위나 성경의 도움 없이도 순전히 이성을 근거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프로스로기온』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을 통해 필연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 안셀무스 사망(스콜라철학의 시조)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해 스콜라철학의 기초를 놓은 안셀무스가 잉글랜드에서 죽었다. 그는 북이탈리아 출신으로 젊었을 때 그리스 ・ 로마의 철학 고전을 많이 접한 인물이었다. 스콜라철학이란 ‘학교의 철학’이란 뜻으로,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발달했던 신학 중심의 철학을 말한다. 캔터베리 대성당캔터베리 대주교로 생을 마감한 안셀무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
스콜라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T.)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그는 철학의 영역은 이성에 속하고 신학은 신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하여 이성과 신앙의 영역을 엄밀히 구별하였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은 다같이 진리로서의 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이른바 신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 원인은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이며, 모든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존재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질서의 계열이라고 하면서, 만물이 갖고 있는 상대적 완전성의 차이는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최고의 완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필연적 존재로서 논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철학은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이고도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며, ‘자연의 빛’인 이성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을 규명하고 지식을 획득하는데 반해서 삼위일체(三位一體)나 신의 육화(肉化)와 같은 신앙의 오묘성은 신의 ‘은총의 빛’에 의해서만 파악된다.
그는 경험적인 자연과 그것을 넘어선 초자연의 독자성을 구분하면서도 “은총은 자연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완성시킨다.”는 관점에서 큰 조화를 도모하였다.
후기 스콜라철학의 중요한 문제는 보편논쟁(普遍論爭)이었다. ‘보편’은 ‘개체’에 앞서 존재한다는 견해가 스콜라철학의 정통론이었다. 가톨릭교회란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개개의 신자들 내지는 개개의 교회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실재로서의 존재이며, 지상에 있는 신의 나라라였다.
이에 대해 요하네스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J.)는 보편자는 오직 “말”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오캄(Occam,W.) 역시 “보편은 단순한 개념에 불과하며 단지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여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입장을 대표한다. 그는 보편이란 단지 개체를 대표하는 추상적 명사에 지나지 않고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체라고 하였다.
*** 오컴(William of Ockham) 오컴(William of Ockham)-스콜라 철학 사상가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1. 개요 유명론의 형식을 창시한 인물로 여겨지는 후기 스콜라 철학 사상가이다. 유명론이란 '아버지' 같은 보편 개념이 그 보편자나 일반명사가 가리키는 개체들과 따로 실재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상 학파이다. 2. 초기생애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 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수도회의 핵심 관심사이자 교회에서 벌인 논쟁의 주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수도회 안에서 실천해야 할 엄격한 청빈생활에 관해 세운 생활규칙에 대한 해석문제였다. 오컴이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받은 초기 교육은 주로 논리학에 대해서였다. 오컴은 명사에 관한 학문이 신·세계·교회기관·시민기관 등 사물에 관한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데 기본적이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생애를 통해 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모든 논쟁에서 논리학은 상대에 맞서는 주된 무기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 교육을 마친 뒤 오컴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전통적 과정을 이수했고, 1317~19년에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센텐티아〉에 관해 강의한 듯하다. 롬바르두스는 12세기 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16세기까지 대학에서 신학의 공식 교과서였다. 또 롬바르두스의 강의는 주석서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그중 〈센텐티아〉의 제1권에 대한 주석서(〈오르디나티오 Ordinatio〉라고 알려짐)는 오컴이 직접 썼다. 오컴의 견해는 신학부 성원들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신학부 학위도 받지 못한 채 대학을 떠났다. 그러므로 대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학부 재학생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용어로는 인케프토르('초보자'라는 뜻), 파리대학교의 용어로는 '바칼라우레우스 포르마투스'였다. 오컴은 잉글랜드 수도원에서 학문활동을 계속한 듯하며 동시에 자연철학의 핵심 논리학을 연구하고 신학 논쟁에 참여했다. 1324년 가을 교황의 초청으로 조국을 떠나 프랑스 아비뇽으로 갈 때 그는 대학의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학 환경은 논쟁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사람들의 도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특히 교리 문제에서 주교들의 도전과 대학 총장 존 루서럴의 도전이 대표적이었다. 루서럴은 1322년 교수진의 요청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했다. 오컴의 글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개인감정을 섞지 않은 문체로 되어 있지만 그의 지적·정신적 태도 중 적어도 2가지 측면을 잘 드러낸다. 즉 그는 신학자 논리학자(theologicus logicus : 이 말은 루터가 사용한 용어임)였다. 한편 그는 논리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합리적 평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구분, 증거와 개연성 사이의 차이 등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과 인간 본성을 크게 신뢰하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 신학자로서 그는 교의에 나온 그대로의 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이 전능한 신이 인간을 은혜롭게 구원한다고 말했다. 즉 신의 구원행위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데 있고 이미 자연을 창조한 데서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쓸데없이 복수의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중세에 나온 경제원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알려져왔다. 오컴은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많은 것을 제거하기 위해 이 원리를 사용했다. 3. 요한 22세에게 바친 소논문 오컴은 아비뇽에서 존 루서럴과 다시 만났다. 루서럴은 교황 요한 22세에게 바친 소논문에서 〈센텐티아〉에 관한 오컴의 가르침을 공공연히 비난했고, 56개의 명제를 뽑아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때 루서럴은 6명의 신학자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이 위원회는 오컴의 해설서에서 뽑아낸 글을 바탕으로 2편의 연속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중 2번째는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오컴은 교황에게 약간 수정한 〈오르디나티오〉의 사본을 바쳤다. 오컴은 그의 가르침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을 듯했으나 유죄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아비뇽에 있을 때 머문 수도원에서 오컴은 베르가모의 보나그라티아와 만났다. 보나그라티아는 민법과 교회법 박사였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청빈문제에 관해 요한 22세에게 반대했다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빈곤). 1327년 12월 1일 프란치스코 수도회 총회장인 체세나의 미켈레가 아비뇽에 도착하여 같은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도 청빈에 관한 논쟁 때문에 교황의 부름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재산을 소유했는지, 즉 그들이 사적이든 집단적이든 모든 소유권·재산권·재산사용권을 포기했는지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미켈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든 소유권과 재산권을 포기했으므로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도 소유권과 재산권을 포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요한네스와 미켈레의 관계는 점점 더 나빠졌고 급기야 미켈레는 1328년 5월 26일 보나그라티아와 오컴을 데리고 아비뇽을 탈출했다. 오컴은 미켈레가 4월 13일 비밀리에 기초한 호소문의 증인이었으며 9월 피사에서 그 호소문에 공개적으로 서명했다. 피사에서 3명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가 바이에른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루트비히 4세는 1324년 파문당했고 요한 22세로부터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3명의 수사는 루트비히 4세를 따라 1330년 뮌헨으로 갔고 그때부터 오컴은 교황권에 맞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엄격한 청빈 개념과 바이에른 제국을 옹호하는 글을 열심히 썼다. 오컴은 1328년 상급 총회장의 지시를 받고 청빈에 관한 로마 교황의 교서 3편을 연구한 결과 이 교서에서 요한 22세가 자신의 이교 때문에 성직수여권을 이미 상실한 이단자임을 보여주는 많은 오류를 발견했다. 오컴은 1330~31년에 설교를 통해 요한 22세가 사이비 교황임을 증명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혼이 죽음 직후에 신을 볼 수는 없으며 이 영혼이 최후의 심판에서 육체와 다시 결합한 뒤에야 비로소 신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전통과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거부되었다. 그러나 오컴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여전히 청빈 문제였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는 종교적 완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는 이론 분야가 필요했다. 성 프란키스쿠스의 복음주의 율법 아래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이며 따라서 우주의 왕이지만 소유권을 포기하고 세속적 권력을 내어놓고 오직 자기에게 부여되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군림하려 한 가난한 사람으로 나타났다. 이 군림은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교회는 교황이든 종교회의든 절대무오류의 권위없이 구성되고 본질적으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설사 일시적으로는 몇 사람 또는 한 사람으로 줄어들더라도 수백 년 동안 버텨왔고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버틸 것이다. 지위와 성(性)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오컴이 보기에 교황의 권력은 복음과 자연법으로 확립된 그리스도교인들의 자유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교황권에 맞서 제국을 편든 것이나, 오컴이 1339년 교회 재산에 세금을 물릴 수 있는 잉글랜드 왕의 권리를 옹호한 것은 정당하고 복음과 일치한다. 1330~38년 오컴은 이 논쟁의 한가운데 서서 15~16편의 다소 정치적인 책을 썼다. 그중 몇 편은 공동집필했지만, 가장 방대한 〈90일간의 일 Opus nonaginta dierum〉은 혼자 썼다. 4. 파문 아비뇽에서 탈출한 뒤 파문당한 오컴은 1334년 요한 22세가 죽은 뒤, 베네딕토 12세의 재위기간(1334~42), 클레멘스 6세의 선출, 1347년 루트비히 4세가 죽은 뒤에도 똑같은 기본견해를 유지했다. 이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논리학에 관한 2편의 소논문을 쓸 시간을 얻었다. 이 논문은 그가 논리학에 일관되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입증한다. 또 교황 클레멘스가 제안한 중재절차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오컴은 1349년경 흑사병으로 추측되는 병으로 뮌헨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
이와 같은 관점은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보편적인 신의 존재나 성질에 관해서는 엄밀한 의미의 학문이 성립될 수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보편을 대변하는 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독자적인 자기 주장을 하게 된 당시의 시대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오캄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으로 연결되는 학파의 “고대의 길”(via antiqua)과 반대로 형성된 “근대의 길”(via moderna)을 형성한다. 유명론에 의해서 지식과 신앙, 철학과 종교가 점차로 분리되고, ‘개인’과 ‘경험’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2.3. 근대철학
근대 초기에 유럽사회는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달’로 문화사적 격변을 겪는다. 화약은 전쟁기술의 변화를 초래해서 기사 신분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나침반에 의한 항해술의 발달은 유럽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밖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소수에 국한되어 있었던 지식과 글을 널리 빠르게 전파함으로써 지식층을 확대시켰다.
이제 폐쇄적이고도 배타적인 중세 교회의 지배로부터 역동적인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되었고, 유럽의 학문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인문주의자들에 의한 개인주의적 ‘인간의 재발견’이 강조되고,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등에 의해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철학 역시 근대로 접어들면서 교회의 독단적 진리나 어떠한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안 것만을 진리로 믿는 경향을 띠게 된다. 경험 또는 이성을 통한 지식과 사상만이 참다운 진리로 간주되었다.
근대철학은 프랑스· 네덜란드 및 뒤늦게 발달한 독일 등 유럽대륙에서 발전한 합리론(合理論, rationalism)과 영국에서 발전한 경험론으로 대표된다.
합리론의 철학은 감각적 인식이 아닌 순수 이성만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띤다. 근대 합리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데카르트(Descartes, R.)이다.
그는 철학도 수학처럼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하고도 명증적인 인식(certe et evidenter cognoscere)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명제를 연역(演繹)해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장 확실한 인식의 출발점인 아르키메데스점을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는 자아의 존재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원리이자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원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확실한 현실의 구조를 밝혀 내려 했다.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만이 진리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기존의 주장이나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이성에 부여하는 결정적인 역할 때문에 그의 철학과 그를 추종하는 철학에 “합리론”(Rationalis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은 경험에 근거하여 외계의 개별적 사실을 관찰하고, 개별적인 감각적 인상에서 출발하여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하였다. 합리론이 선천적 이성을 중심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중요시한 데 비해서, 경험론은 후천적 경험을 존중하고 관찰과 귀납적 방법을 중요시한다.
경험론의 선구로서 영국의 베이컨(Bacon, F.)은 종래의 학문을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학문의 혁신을 도모했다. 학문의 목적은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함으로써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유명한 명제는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앎을 뜻하고 이 앎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식을 방해하는 선입견이나 편견, 즉 우상(偶像, idola)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가 네 종류로 분류한 우상은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인간이라는 유적 본성에서 나오는 편견.),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개인이 가진 성벽, 교육, 습과 경향 등에서 나오는 편견.), 시장의 우상(idola fori: 언어로 인한 오해와 혼란에서 나오는 편견),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 잘못된 원칙이나 학설에 의한 편견)이다.
그는 학문 연구는 먼저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사실이 수집, 정리되고, 다음에 그 사실의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방법이 바로 귀납법(歸納法, induction)으로 자연 인식의 참된 방법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학문을 인간의 정신능력인 기억·상상· 이성 세 가지에 상응하는 역사·문학·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에게 있어 철학은 최상위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에 공통되는 기초를 대상으로 삼는 제일철학(Prima Philosophia)를 의미한다.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경험적 인식론을 창시한 학자는 로크(Locke,J.)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본유관념을 부정하면서 생득적인 관념이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관념들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원래 백지(白紙, tabula rasa)와 같은 것으로, 태어날 때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로크는 인간의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 진 관념들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를 지각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에 있어서는 “순수이성”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중요하다.
흄(Hume D.)은 경험론의 논지를 더욱 철저화해서 회의주의에까지 이르렀다. 흄은 단순관념의 결합이 유사(resemblance), 시공의 인접(contiquity in time and space),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의 세 가지 연상법칙에 따라 이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도 사물에 속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A와 B의 연계를 여러 번 관찰하면서 얻어진 습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인과법칙에 기초하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객관성이나 확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었다. 더욱이 사실에 관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사실로부터의 추리도 아닌 형이상학은 필연성은 고사하고 개연성조차 없는 공허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합리론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선천적 지식체계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경험의 직접성을 외면한 데서 공허한 독단에 빠지기에 이르렀다.
경험론 또한 감각 내지 주관적 경험에 기초한 인식의 객관적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했으면서도 흄에 이르러 회의론에 이르고, 자연과학의 확실성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 극단의 철학은 어느 누군가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연적 과제이었다.
이러한 과업은 칸트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그는 흄에 의해 ‘독단의 꿈’을 깼다고 한다. 그것은 종래의 모든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흄의 회의론에 반대하여 수학과 자연과학이 참된 지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근거를 밝히려고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참된 지식이란 객관적 필연성 내지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선천적 종합판단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칸트철학의 중심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지식 또는 인식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하거니와, 그 내용이 된 소재(素材)는 감성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식은 소재만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소재를 가지고 인식을 구성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소재가 경험적이고 후천적(a posteriori)인데 반하여 형식은 인식 주관에 선천적으로 갖추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형식이다. 이 선천적 직관형식에 의하여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소재는 표상으로 얻어진다.
표상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잡다(雜多)에 불과한 것으로 아직 인식이 될 수 없다.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사유능력인 오성(悟性)에 의하여 또 하나의 선천적인 형식인 오성형식 내지 사유형식이 따라야 한다. 이 형식을 칸트는 순수오성개념 또는 범주(範疇)라 하여 이것을 12개로 나누었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감성이 직관형식을 통하여 받아들인 잡다한 소재를 오성이 사유형식에 의하여 종합, 통일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때 비록 소재는 경험적·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종합, 통일하는 형식들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인식은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이라고 하여 인식의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는 근거를 해명하였다.
칸트는 인식이 주관의 능동적 활동에 의하여 구성된다고 보았으므로 이를 구성설(構成說)이라 하고, 이와 같은 인식론을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불렀다. 칸트는 감성을 촉발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분하였고 물자체의 세계는 인식될 수 없다고 하여, 이른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 섰다. 칸트가 현상계와 물자체를 다같이 인정함으로써 남겨 놓은 이원론은 이후 독일관념론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제대로 쓰는 말일까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서의 매너리즘을 깨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영어로 옮기면 ‘Copernican Revolution’,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이니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과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뜻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독일의 과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이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은 소위 저명인사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즐겨 입에 담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작센 주의 전 총리 쿠르트 비덴코프는 《손자들에 대한 착취》라는 책에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말을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손자 세대를 관찰의 중심에 놓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썼다. 미래에 우리의 손자 손녀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정도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전향적인 경제정책을 운용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생각에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작용하지 않는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슈뢰딩거의 고양이》 중에서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는데 무엇이 잘못됐다는 걸까요. 이유는 바로 앞의 문장,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에’에 있습니다. 지금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16세기 중반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은 모든 사람이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긴, 상식을 뒤엎은 혁명적 발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서 루크가 다스베이더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를 능가할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원수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반전! 천 년이 넘도록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고있다고 믿었는데 우리가 중심이 아니라니! 지동설은 인류를 단단히 감싸고 있던 자기중심의 유아적 발상을 깨트려버렸습니다. 그 후에 인류는 지구가 아니라 우주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커다란 진화지요. 무엇보다 지구가 무엇이라고 더 특별해서 우주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품은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이 놀랍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였습니다. 인간을 객체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았던 그의 인식론 역시 그때까지의 철학을 뒤엎은 것이었지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렇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논의하고 전복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이 주는 무게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을까요. |
피히테(Fichte,J.G.)는 칸트의 ‘물자체’의 설정이 수미일관하지 못하다고 보고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이성에 대립하는 인식대상인 비아를 절대적 자아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비아로서의 자연을 자아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지나치게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 치우쳤다.
*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독일 고전철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 1. 개요 초월적 관념론자이다(칸트주의, 선험적 관념론). 2. 초기생애와 경력 리본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774~80년 포르타 초등학교, 1780년 예나대학교, 1781~84년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튜터로 일을 시작했다. 튜터 자격으로 1788년 취리히에 갔으며, 1791년에는 바르샤바에 갔으나 2주 동안 견습만 마치고 떠났다. 이때 그의 사상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칸트의 사상이었다.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 가치에 관한 칸트의 학설은 피히테의 성격과 딱 들어맞았다. 그는 참된 철학을 완성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으며, 이 참된 철학의 원리는 선천적 격률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피히테는 바르샤바를 떠나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를 직접 만나러 갔지만 이 최초의 면담은 실망만 안겨 주었다. 나중에 피히테가 칸트에게 그의 논문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 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를 제출했을 때 칸트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고 출판업자를 구하는 일을 도왔다(1792). 초판에서 피히테의 이름과 서문을 우연히 빠뜨리게 되었는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재빨리 읽은 독자들은 칸트의 글이라고 여겼다. 칸트가 이 글을 추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자 피히테의 이름이 알려졌다.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에서 피히테는 계시 종교가 가능한 조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의 설명은 도덕 법칙의 절대적 필수조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 자체는 이 도덕 법칙을 신성한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실천적 요청이며, 도덕법칙에 힘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 도덕성의 신성한 성격은 낮은 차원의 충동을 바탕으로 법칙에 대한 경외심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 이같은 경우라면 계시는 도덕 법칙에 위력을 더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궁극적으로 실천이성에 의존하며 인간이 도덕 법칙 아래에서 있는 한 인간의 욕구를 채워준다. 이러한 결론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피히테는 실천적 요인을 부각시켰으며 자아의 도덕적 요구를 실재에 대한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1793년 피히테는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만난 요한나 마리아 란과 결혼했다. 같은 해 익명으로 2개의 주목할 만한 정치 저작을 출판했다. 그중 〈프랑스 혁명에 관한 대중의 판단을 교정하기 위하여 Beitrag zur Berichtigung der Urteile des Publikums über die französische Revolution〉가 더 중요했다. 이 저작의 의도는 프랑스 혁명의 참된 성격을 설명하고, 자유권이 지성적 행위자로서 인간의 존재 자체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논증하고, 국가의 본질적인 진보 경향과 개혁이나 개정의 필연적 결과를 지적하는 데 있었다.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처럼 이 저작에서도 인간의 합리적 본성과 이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정치 철학을 위한 표준이 되었다. 피히테의 철학은 윤리를 강조한 예나 시기(1793~98)와 신비적·신학적 존재론이 나타난 베를린 시기(1799~1806)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시기는 철학적 기본 견해에서도 차이를 갖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이성을 능가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본래의 견해를 재빨리 바꾸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사상이 낭만주의로 발전하는 일반 추세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존재, 형이상학). 3. 예나대학교 시절 1793년 예나대학교에는 철학교수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고 피히테에게 그 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대학교수로 취직한 뒤 아주 중요한 철학 저작이 나왔다. 이 시기에 출판된 저작으로는 수준높은 지적 문화의 중요성과 이러한 문화가 부과한 의무들에 관한 강의록인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가지 강의 Einige Vorlesungen über die Bestimmung des Gelehrten〉(1794), 피히테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정하고 가다듬은 지식학에 관한 여러 저작, 예컨대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자연법의 기초 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6)와 의무 개념에 기초한 그의 도덕 철학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지식학의 원리에 따른 인륜이론의 체계 Das System der Sittenlehre nach den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8) 등이 있다. 1794년의 체계는 피히테가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이고 특징있는 저작이었다. 이 체계는 칸트의 비판철학, 특히 〈실천이성 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자극받았다. 이 저작은 칸트의 비판철학보다 더 체계적이었지만 지식학과 윤리학이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는 완벽한 학설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칸트의 비판철학보다 덜 비판적이었다. 피히테의 야심은 칸트가 암시만 하는 데 그친 점, 즉 실천(도덕)이성이 참으로 온전한 이성의 뿌리이고 인류 전체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의 절대적 근거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피히테는 최고의 원리, 즉 독립적·절대적이라고 가정된 자아에서 출발하여 모든 다른 지식을 연역했다. 피히테는 이 최고의 원리가 자명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순수 사고에 의해 요청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피히테는 순수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칸트의 학설을 따랐지만, 칸트의 합리적 신앙을 자신의 과학론과 윤리학을 뒷받침하는 사변적 지식으로 변형하려 했다. 1795년 피히테는 〈철학 잡지 Philosophisches Journal〉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1798년 피히테의 친구인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젊은 철학자 F. K. 포르베르크가 피히테에게 종교 관념의 발전에 관한 글 한 편을 보냈다. 이 글을 인쇄하기 전 피히테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 믿음의 근거에 관하여 Ü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eine gottliche Weltregierung〉라는 짧은 서문을 썼는데, 이 서문에서 신은 세계의 도덕적 질서이고 모든 인간 존재의 기초인 영원한 정의 법칙이라고 정의했다. 무신론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프로이센을 제외한 독일의 모든 주들이 추종하는 작센의 선제후 정부는 〈철학 잡지〉의 출판을 금지했고 피히테의 추방을 요구했다. 피히테는 2개의 변호문을 출판한 후 징계가 내릴 경우 사직하겠다고 했으나 그 위협은 사직하겠다는 제의로 받아들여져 정식으로 수락되었다. 4. 베를린 시절 1794년의 예나대학교 강의에 대해 긴 설명을 달면서 에를랑겐에서 지낸 1805년 여름을 제외하고 피히테는 1799~1806년에 베를린에 거주했다. 친구들로는 독일 낭만주의 지도자들 A. W. 슐레겔, F.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인간의 천직 Die Bestimmung des Menschen〉(1800)에서는 신을 개인들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세계의 무한한 도덕 의지로 정의했다. 〈폐쇄적 상업국가 Der geschlossene Handelsstaat〉(1800)는 보호관세 무역제도를 찬성하는 아주 사회주의적인 논문이다. 1801, 1804년에 각각 썼으나 유작으로 출판된 〈지식학 Wissenschaftslehre〉에 관한 두 신판은 학설의 성격이 크게 변했음을 보여준다. 〈현대인의 특징 Die Grundzüge des gegenwärtigen Zeitalters〉(1806)은 1804~05년의 강의록으로서 계몽주의를 분석하면서 일반적 인간 의식의 역사적 전개에서 계몽주의의 지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결함도 지적하고 이성적 삶의 최고의 양상으로서 신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신앙을 기대하고 있다. 〈복된 삶을 위한 지침 또는 종교이론 Die Anweisung zum seligen Leben, oder auch die Religionslehre〉(1806)에서는 〈요한의 복음서〉를 생각나게 하는 아주 종교적인 양식으로 유한한 자기의식과 무한한 자아 또는 신 사이의 결합을 다루고 있다. 신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삶의 목적이라고 선언한다. 신은 모든 것이다. 독립적인 대상들의 세계는 반성 또는 자기의식의 결과이다. 이 반성 때문에 무한한 통일이 해체된다. 이와 같이 신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을 넘어서 있다. 인간의 지식은 무한한 본질의 반영 또는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5. 말년 1806년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꺾고 승리하자 피히테는 베를린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코펜하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두 곳에서 잠시 동안 강연을 했다. 1807년 8월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출판된 저작들은 그의 실천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유작 Nachgelassene Werke〉·〈전집 Sämmtliche Werke〉 등이 발간되기 전까지는 이 마지막 사상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았다. 1807년 그는 이미 제안되어 있던 베를린대학교 창설 계획을 작성했다. 1807~08년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국권의 회복과 영광을 위하여 유일한 올바른 길에 관한 실천적 견해들로 가득 차 있다. 1810~12년 베를린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1813년 국가 독립을 위하여 독일이 고투하고 있는 동안 〈참된 전쟁 개념에 관하여 Über den Begriff des wahrhaften Krieges〉를 강의했다. 1814년초 피히테는 자발적으로 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에게서 악성 발진티푸스에 전염되어 얼마 후 죽었다. |
쉘링(Schelling,F.W.von)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을 비판하고 동일성의 철학(Identit○tsphilosophie)에서 절대자(絶對者, das Absolute)를 상정하였다. 이 절대자는 자아와 비아, 혹은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의 구별 이전의 대립적 차별이 없는 ‘절대적 동일성’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완전한 무차별적 동일성에 기초한 쉘링의 ‘절대자’는, 절대자로부터 현상세계에 나타나는 유한자의 차별상을 해명하기 어려운 난점을 안고 있다.
*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칸트 이후 독일 철학에서 발달한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였으며 1806년 귀족작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루터 교회 목사로, 1777년 튀빙겐 근처 베벤하우젠에 있는 신학교에서 동양어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곳에서 셸링은 기초 교육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으며 이미 8세 때 고전어를 배웠다. 지적 성장이 빨랐기 때문에 15세의 나이로 튀빙겐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 신학교는 뷔르템베르크 지역에서 유명한 목사 양성학교였다. 셸링은 1790~95년 이곳에서 살았다. 당시 튀빙겐의 젊은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전통을 거부하고 교리신학을 외면한 채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셸링은 철학을 고도의 비판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 요한 피히테의 관념론 체계, 17세기 합리론자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의 범신론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19세 때 셸링은 첫번째 철학 저서인 〈철학 일반의 한 형식의 가능성에 관하여 Über die Möglichkeit einer Form der Philosophie überhaupt〉(1795)를 썼다. 그는 이 책을 피히테에게 보냈고 피히테는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다. 그뒤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에 관하여 Vom Ich als Prinzip der Philosophie〉를 썼다. 이 두 저서에 공통된 한 가지 기본주제는 절대자이다(절대적 관념론). 그러나 이 절대자는 신으로 정의할 수 없다. 각 개인이 절대적 자아로서의 절대자이다. 이 자아는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감각적 직관이 아니라 지적 성격을 갖는 직접적 직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1795~97년 셸링은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이 귀족은 자기 아들들이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들을 셸링에게 맡겼다. 라이프치히에서 보낸 시간은 셸링의 사상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는 물리학·화학·의학 강의를 들었다. 셸링은 이전까지 자기 철학의 본보기로 존경한 피히테가 그의 철학체계에서 자연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피히테는 항상 자연을 인간에게 종속된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셸링은 자연은 그 자체로 볼 때 정신을 향해 능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형이상학). 셸링이 독자적으로 성취한 첫번째 업적인 이 자연철학 덕분에 그는 낭만주의자 모임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798년 셸링은 예나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당시 예나대학교는 독일의 학문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 시기에 셸링은 지나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책을 썼으며 자연철학에 관한 저서들을 쉴틈없이 출판했다. 유명한 저서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1800)에서 드러난 셸링의 소망은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는 피히테의 철학을 자신의 자연관과 통일하는 것이었다. 셸링은 예술작품에서 자연적인 것(또는 무의식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또는 의식적인 것)이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예술이 자연영역과 정신영역 사이를 매개한다고 생각했다.(예술철학). 자연성과 정신성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절대자 속에 가라앉아 있는 무차별의 원초 상태에서 출현하고 점점 더 높은 수준의 연속 단계들을 거치면서 떠오른다고 설명했다(범신론). 그러나 피히테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두 문필가는 격렬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날카롭게 공격했다. 예나에서 보낸 시간은 셸링에게 개인적으로도 중요했다. 예나에서 셸링은 독일 낭만주의의 가장 재능 있는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인 카롤리네 슐레겔과 만나 1803년 결혼했으나 결혼에 뒤따른 불쾌한 구설수와 피히테와 벌인 논쟁 때문에 셸링은 예나를 떠났고, 뷔르츠부르크대학교의 교수 임명을 받아들였다. 처음에 셸링은 이 대학교에서 동일철학에 관해 강의했다. 동일철학은 예나에서 마지막 몇 해 동안 생각해낸 것으로, 이 철학을 통해 그는 절대자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통일로서 모든 존재에서 자신을 직접 표현한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G.W.F. 헤겔은 셸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셸링과 피히테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을 때 헤겔은 처음에는 셸링 편을 들었고, 1802년 셸링과 함께 〈철학 비평 Kritisches Journal der Philosophie〉을 편집할 때에는 두 사람 사이에 완전한 의견일치를 본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뒤 헤겔의 철학사상은 셸링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의 〈정신현상학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은 셸링의 체계를 강하게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절대자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구분 없는 통일이라는 셸링의 정의에 대해 헤겔은 그러한 절대자란 "모든 황소가 검게 보이는" 밤에 비유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헤겔에 따르면 그밖에도 셸링은 어떻게 우리가 절대자로 상승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고, 이 절대자를 마치 "권총에서 발사된" 것처럼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비판은 셸링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튀빙겐 신학교에서 함께 생활한 시절부터 헤겔과 맺어온 우정도 깨졌다. 셸링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나오기 전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여겨졌으나 이제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셸링은 공적 생활에서 물러나 1806~41년 뮌헨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1806년 조형예술 아카데미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820~27년 에를랑겐에서 강의했다. 1809년 9월 7일 슐레겔의 죽음을 계기로 영혼불멸에 관한 철학책을 썼다. 1812년 슐레겔의 친구인 파울리네 고터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잘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셸링은 슐레겔에게 느낀 뜨거운 열정을 또다시 느낄 수 없었다. 뮌헨에서 사는 동안 셸링은 자신의 철학 연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강화하려고 애썼고 헤겔의 비판을 받아들여 자신의 해석을 수정했다. 셸링은 세계가 스스로 합리적인 우주로 드러난다는 가정에서 나온 모든 관념론적 사변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세계에는 비합리적인 것도 있고, 오히려 악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아닌가? 〈인간 자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über das Wesener menschlichen Freiheit〉(1809)에서 셸링은 인간의 자유란 선과 악에 대한 자유일 때에만 진정한 자유라고 선언했다(악의 문제, 자유의지). 이러한 자유가 실현될 가능성은 모든 생명체에서 작용하는 2가지 원리를 기초로 삼는다. 하나는 육체적 욕망과 충동에서 나타나는 숨어 있는 원초적 기초이고, 또 하나는 구성력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명석한 분별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지성에 대해 힘의 원천으로만 쓰이도록 되어 있는, 충동의 숨어 있는 층을 지성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지성을 충동에 종속시켰으며 이제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순서의 역전이 바로 성서에서 악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은총의 상실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그리스도교). 그러나 인간의 이 타락은 신이 철회한다. 신은 그리스도로 인간이 되어 원래의 순서를 재건한다. 자유에 관한 저서에서 개진한 관점은 1810년부터 죽을 때까지 셸링의 후기 철학의 기초가 된다. 그의 후기 철학은 1811년 저술한 〈우주의 역사 Die Weltalter〉라는 미발표 저서의 초고와 후기 강의의 수고들을 통해 겨우 알려져 있다. 〈우주의 역사〉에서 셸링은 신의 역사를 설명하려 했다. 본래 고요한 동경 속에 빠져 있는 신은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관념들을 자신 속에서 어렴풋이 봄으로써 의식을 되찾게 된다. 자유와 동일한 자기의식 덕분에 신은 이 관념들을 자신으로부터 투사할 수 있고 달리 말해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 셸링은 1841년 베를린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자신의 견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기회를 다시 한번 얻었다. 당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셸링이 베를린에서 헤겔주의로 무장한 이른바 용의 새끼들과 싸우기를 기대했다. 베를린대학교는 헤겔이 1831년 죽을 때까지 일한 곳이었다. 베를린대학교에서 셸링이 한 첫 강의에서 그는 자기의식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셸링은 젊은시절에 자기가 철학사 책에 새 장을 열었으며 이제 원숙기에 접어들어 이 책장을 넘기고 더욱 새로운 장을 열고 싶다고 선언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쇠렌 키에르케고르,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미하일 바쿠닌 등 유명한 사람들이 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셸링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한 반대자가 그의 강의를 도용한 일로 셸링은 괴로움을 겪었다. 이 반대자는 강의에서 마침내 드러난 셸링의 적극 철학을 대중에게 제시해 검토해보고 싶어했다. 셸링은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그는 사임했고 강의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강의의 내용은 셸링의 창작활동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셸링은 철학을 '소극' 철학과 '적극' 철학으로 나누었다. 소극철학은 이성만으로 신의 관념을 설명했으며, 반면 적극철학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그 창조자로서 신이 있다는 점을 후천적으로 추론함으로써 신관념의 실재성을 증명했다. 그 다음 셸링은 자유에 관한 자신의 저서를 언급하면서, 신과 똑같아지고 싶어한 인간은 신에게 저항하여 죄를 짓고 타락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은 곧 원리의 지위로 다시 상승했다. 신화의 시기에 신은 숨어 있는 힘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계시의 시기에 신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매우 생생하게 역사에 등장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완전한 역사는 철학사상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고 했다. - 셸링에 대한 평가 셸링은 땅딸막한 체격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었고, 잘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시원한 앞이마와 반짝이는 두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헤겔의 제자인 카를 로젠크란츠 등 셸링의 철학에 반대한 사람들은 그의 인상이 날카롭고 표독하다고 말했다. 그의 성격은 불안정했다. 셸링은 신경이 날카롭고, 예측할 수 없으며, 자신의 옷차림에 매우 민감한 인물로 묘사되어왔다. 특히 놀라운 점은 철학을 완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흔들림 없는 의식이었다. 셸링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당시 철학의 상황은 셸링의 몇 안 되는 제자들이 아니라 헤겔주의자들이 결정했다. 좌파 헤겔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철학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헤겔 체계의 전통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좌파 헤겔주의자들은 헤겔 체계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헤겔 철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독일 관념론의 발달을 탐구하면서 초기와 중기의 셸링, 즉 자연철학과 동일철학을 제시한 셸링을 자아에서 출발하는 피히테의 관념론과 헤겔의 절대적인 체계 중간에 놓았다. 철학에서 셸링의 독자성과 중요성은 절대이성의 철학에 반대한다고 자처하는 실존주의 철학, 철학적 인간학 등과 관련하여 오늘날에야 비로소 인정받고 있다. 후기의 셸링은 오늘날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사상가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인간이 이성뿐만이 아니라 숨어 있는 자연적 충동에 의해서도 규정된다는 셸링의 통찰은 오늘날 헤겔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인간의 현실을 이해하려 한 긍정적 시도로서 가치가 있다. |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머리말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쉘링의 절대자를 “모든 소를 까맣게 보이게 하는 밤”으로 비판했다. 헤겔(Hegel,G.W.F.)은 쉘링철학의 ‘절대자’ 개념의 한계를 의식하고 유한자의 피안에 있는 절대자는 참다운 절대자가 아니요, 유한자도 자기 속에 포함하고 이 유한자와 대립되는 무한자까지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절대자이며, 이것은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구체적인 보편이라고 하였다. 모든 차별을 자기 속에 포함하는 절대자를 파악하는 것이 헤겔철학의 본질을 이룬다.
헤겔은 절대자를 이성활동으로서의 로고스(Logos) 혹은 이념(理念, Idee)이라 하고, 세계를 이 이념의 발전으로 보았다. 그는 이념은 스스로 발전하는 이성적·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계이성(世界理性, Weltvernunft) 또는 절대정신(der absolute Geist)이라고 불렀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은 처음에 자연 속에서 소외되어 부자유한 상태에 있다가 역사를 거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이러한 정신의 발전에 따라 진행되며, 역사는 “일인의 자유”로부터 “만인의 자유”로 향한 필연적 발전을 한다.
헤겔이 역사철학을 통해 입증하고자 한 이성의 자기실현은 자연적 폭력과 낡고 불합리한 정치체제로부터 인간의 해방과 자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헤겔에게 있어 철학이란 역사와 자연 속에서 이성의 필연성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2.4. 현대철학
현대철학은 대체로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갈래의 철학을 통칭한다. 19세기 철학은 한편으로는 헤겔의 거대한 사변적 체계에 대한 반발의 양상을 띠며, 다른 한편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산업혁명’의 폭발적 발전에 자극과 도전을 받는다.
19세기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주요한 철학들로는 변증법적 유물론(Dialektischer Materialismus)· 생철학(生哲學, Lebensphilosophie)· 실존철학(實存哲學, Existenzphilosophie)·현상학(Ph○nomenologie)과 해석학(Hermeneutik),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분석철학(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 비판이론(Kritische Theoire) 등이 있다.
현대철학 중에서 중요한 철학적 입장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철학을 “과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그들은 헤겔의 철학을 전도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철학을 정초하려 하였다. 그들이 정초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은 인간의 의식과 독립적, 객관적으로 변화 발전한다는 입장을 띤다.
물질의 변화발전의 법칙은 양에서 질(質)로의 전화(轉化)법칙, 대립물의 침투법칙, 부정의 부정법칙 세 가지로 정리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존재에 타당한 사고방식이라 하고, 이것을 자연과 역사에 적용함으로써 자연변증법과 유물사관 또는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으로 구분한다.
자연변증법이란 자연현상 내에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유물사관이란 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물사관은 역사가 사회의 물질적 기초, 즉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하여 전개되어왔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고,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즉 공산주의사회로 이행해간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철학의 과제는 “세계해석”이 아니라 “세계변혁”이었다.
이미 헤겔이 생존하고 있을 때, 쇼펜하우어(Schopenhauer,A.)는 헤겔의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에 반대해 인간의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를 말함으로써 이성에 기초한 낙관주의적 인간관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던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극복하고, 활동적인 생명력 자체인 “힘에의 의지”를 역설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기독교적 진리를 포함한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그 뒤에 올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모색을 자신의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니체는 삶의 근원인 힘에의 의지를 체현한 존재인 ‘초인(超人, übermensch)’의 이념을 내세워 낡은 도덕 대신에 새로운 도덕을, 현실적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부르짖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 마련된 생철학적 기초는 베르그송(Bergson,H.)에게서 새롭게 생철학으로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진실로 실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를 일관하여 있는 근원적 생명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생명의 특징은 자기로부터 새로운 것을 부단히 산출해 가는 창조적 진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실재의 참된 모습은 기계론이나 목적론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실재 자체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직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직관은 개념적, 과학적 사유와 구별되는 것으로써 오직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서 그 대상의 고유한 것, 즉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지적 공감(共感)이라 하였다.
생철학의 정신사적 의의는 한마디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있다. 합리적인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피안(彼岸)을 지양하고, 추상적 이상주의에 불만을 느끼며, 형식주의적인 체계철학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의지, 생명의 자유,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비합리주의·직관주의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해탈·직관 등에 의한 신비체험을 호소하는 생철학은 종래의 이성적 형이상학에서와는 다른 의미에서 또 하나의 관상적 사유의 방향을 취하였다. 또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실증과학적 사고경향을 외면하는 데서 현대를 짊어질 철학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현대철학의 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존철학은 생철학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 경향이면서 어디까지나 인간의 개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실존철학의 연원은 일찍이 19세기의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S.A.)와 니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으로 불안에 직면한 독일에서 야스퍼스(Jaspers,K.)와 하이데거(Heidegger,M.)에 의해 주장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사르트르(Sartre,J.P.)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실존으로 파악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존이란 현실적으로 ‘지금·여기’에 있는 존재로서 본질적 존재와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인간은 참으로 독자적인 데서, 결코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지는 특수성을 다른 사람에 의해 대치할 수 없는 데서, 본질적 존재와 구별한다.
인간도 역시 모두가 인간이라고 불리는 한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존재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추상적인 것이기에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구체성은 파악되기 어렵다.
따라서, 실존철학에서 실존이란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는 인간의 내적 주체성이 강조되고, 각자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단독자·개별자로서의 존재를 뜻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실존철학은 자기자신이 타인과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 실존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용주의는 19세기 말엽 미국에서 퍼스(Peirce,C.S.)에 의하여 제창되어, 제임스(James,W.)에 의하여 보급되고, 나아가 듀이(Dewey,J.) 등에 의하여 대성된 철학이다.
실용주의도 다른 경험주의적·실증주의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을 신뢰하고 모범으로 삼아서 건설하려는 철학이다. 실용주의는 주장하는 철학자에 따라 관점과 내용이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입장은 경험 내지 실생활을 중시하고, 지식을 본래 경험·실생활에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상통한다.
실용주의는 이성주의 철학처럼 절대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에 대한 효과와 유용성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용주의는 상대적 진리의 입장을 취한다. 특히, 듀이는 자기의 입장을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 혹은 실험주의(實驗主義, experimentalism)라고 불렀다. 듀이에게 관념·사상·사고는 보다 나은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는 행동을 위한 도구이고, 그 조작은 자연과학의 실험에 견주어졌다.
실용주의와 함께 현재 영·미를 중심으로 하는 각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철학은 이른바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은 초기의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al positivism)와 근래에 유력하게된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 ordinarylanguage school)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논리실증주의철학은 원래 마하(Mach,E.)의 실증주의 정신을 계승하려던 빈의 철학자 슐리크(Schlick,M.)·카르납(Carnap,R.) 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비인 학파의 학자들이, 영국의 러셀(Russell, B.)이나 같은 비인 출신이지만 영국에 거주하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L.) 등의 영향을 받아 주장하였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천재가 도착했다, 신이 도착했다) 1. 재능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는 수려한 외모에 깡마른 체격, 이글거리는 눈빛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허름한 옷차림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와이셔츠 첫 단추를 풀고 다녔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까다로운 취향을 고집하기도 했다. 그는 타인의 잘못을 사정없이 몰아치면서 성자처럼 남들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으며, 가장 엄격한 철학을 위해 전력투구 하는 가운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예언자처럼 행동했다. 그는 숱한 유대인 부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숱한 유대인 천재 가운데에서도 가장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포퍼도 대단한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부자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성은 그의 증조부인 모세스 마이어가 고용주였던 독일의 대귀족 자인-비트겐슈타인에게 받은 것이다(그가 그 가문의 사생아였다고도 한다). 이후 이 집안사람들은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유대인이라는 배경을 지우고 오스트리아에 동화하려고 애썼다.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카를은 반항적 천재 기질의 소유자로서 젊은 시절 가출해 미국에서 뜨내기 생활도 했지만 이후 사업가로 종횡무진 활약, 비트겐슈타인 가문을 로스차일드가나 카네기가에 버금가는 굴지의 재벌로 끌어올렸다. 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리 유대계인 레오폴디네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외가 쪽으로 오스트리아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가톨릭교도였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중 막내아들로 1889년에 태어났다. 큰누나 헤르미네와는 15세 차이였다. 포퍼의 부모가 고급 예술을 수시로 감상하기 충분한 여유와 지성을 누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부모는 예술을 후원하고 육성했다. 빈에 있던 그들의 대저택에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 발터 등이 찾아와 공연했으며, 저택 곳곳에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그림이나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조각이 널려 있었다. 막내 루트비히는 어려서는 별로 뛰어나지 못한 자식으로 여겨졌는데, 가장 재능이 많다고 기대를 받던 맏아들 한스가 음악에 몰두하기보다 사업을 이어받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옛날 아버지가 그랬듯 미국으로 달아났다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부모는 14세가 된 루트비히를 형제들처럼 김나지움에 보내거나 가정교육을 시키는 대신 린츠의 실업학교로 보내게 된다. 실용적 학문을 배우고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을 익히도록 한 것일까?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학교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감정적으로도 우울한 날이 많았다. 곱게 자란 귀족 도련님이 갑자기 거칠고 지저분한 서민 가정 청소년들과 부대끼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학우들에게 처음 받은 인상은 ‘쓰레기들’이었다. 학우들도 이 유별난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빈의 자택에서 굳어진 누구에게나 경어를 쓰는 말버릇은 그를 일찌감치 왕따로 만들었다. 그를 유대인이라며 욕하는 소년도 있었는데, 앞뒤 정황을 추정해볼 때 소년은 마침 그 학교에 다니고 있던 히틀러(린츠 태생이었다)였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욕지거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대 초에 겪은 이런 경험은 그를 내향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뚜렷이 아로새겨진 경험이 하나 더 있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 그가 아직 빈 저택의 막내 도련님이던 시절의 경험. 어느 날 그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꼭두새벽에 잠을 깼다. 아래로 내려가보니 맏형 한스가 자작곡을 피아노로 치고 있었는데, 하도 몰입해서 동생이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를 정도였다.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건반을 두드리는 형의 모습은 그에게 말로 다 못할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 훌륭한 형의 죽음. 형들(셋째형 루돌프도 루트비히가 린츠로 온 지 1년 만에 자살했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범하지만 닮고 싶지는 않은 아버지. 웅장한 저택 문 밖에 펼쳐져 있는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인 세상. 유대인이라는 ‘열등한’ 배경(그는 스스로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은 창조력이 없고 오직 모방만 할 줄 아는 열등 인종이라고 한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에게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젊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영혼에게 구한 답은 이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 재능을 불사르며 살아야 한다. 그런 재능이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런 재능을 살리지 못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천부적 재능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그는 우선 공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린츠를 떠나 베를린과 맨체스터에서 항공학 공부를 할 때는 독창적인 항공기 엔진을 개발하고, 프로펠러를 개량해 특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익혀야 했던 수학은 그에게 응용수학이 아닌 순수수학, 나아가 논리학과 철학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러셀의 『수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는 그의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논리학을 수학으로 풀이하려고 한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와 그의 취지에 찬동하면서도 ‘러셀의 역설’을 제기해 프레게 이론의 허점을 묘파한 러셀은 당시 유럽 학문의 최전선에 있었다. 이들을 본받아 자신만의 수학적 철학을 수립하려는 야망에 불탄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를 접고 1911년에 예나로 찾아가 프레게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헬레네와 친구(1920년 가족 저택에서 촬영한 사진. 비트겐슈타인(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누나 헬레네와 친구 사이에 앉아 있다.) 그러나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이 아직 미숙하다고 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 거절했다. 먹구름 같은 실망과 비애에 사로잡히면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최후의 희망을 붙잡기 위해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갔다. 케임브리지의 러셀을 찾아간 그는 수강을 허락받았고, 한 학기 동안 누구도 따를 수없는 열의를 지니고 러셀의 강의를 들었다. 러셀은 수업 중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으며 서툰 영어로 토론을 요청하는 독일인이 처음에는 성가실 뿐이었지만, 점점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고 감탄하게 되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겁먹은 목소리로 쭈뼛거리며 러셀에게 질문했다. “제게는…… 철학의 재능이 전혀 없나요?”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좌우명을 알 리 없던 러셀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하다 싶었지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들려주었다. 만약 그가 프레게처럼 호된 반응을 보였다면, 철학사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남지 않았으리라. 비트겐슈타인은 얼마간 자신감을 얻고 방학에 들어갔고, 돌아온 그가 괄목상대했음을 보고 러셀은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학기를 마칠 무렵에는, “그가 내게 더 배울 것은 없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2. 철학의 한계 그리고 침묵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교류는 평생 이어졌다. 러셀은 한때 자신보다 17년 어린 그를 수리철학의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아름답고 훈훈한 사제관계’에서 자꾸만 멀어져갔다. 1910년대에 들어 러셀은 수리철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면서 노력과 영감이 전만 못해졌고, 한창 그 분야에 열정을 보이며 몸이 달아 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 점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나아가 한때의 우상이던 이 노대가가 자신보다 떨어지는 두뇌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품기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의심을 마음에만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었고, 영국식 에티켓은 개나 물어가랄 사람이었다. 그의 끝없는 독설과 직설에 러셀은 지쳐갔고, 조지 무어(George Moore)나 존 케인스(John Keynes) 등도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손사래를 치게 되었다. 특히 무어는, 제자이던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을 ‘불러서’ 자기 원고를 ‘받아 적도록’ 하고는 그 원고를 학사학위 논문으로 통과시켜달라고 했다가, 주석이나 참고 문헌 등이 없기 때문에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을 전하자 몹시 화를 내며 “그따위 바보 같은, 쓰레기 같은 이유라니! 내 글이 특례를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진정 생각한다면, 지옥에나 가버려요!”라고 몰아붙인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학자들과 교류하느니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노르웨이에 가 있기로 했다. 러셀이 다시 생각해보라고 붙잡았지만 들을 턱이 없었다. “그곳은 어두운 날이 많을 텐데.” “햇빛을 싫어해요.” “……많이 외롭기도 할 테고.” “여기 사람들과 떠들고 있는 것보다는 낫죠. 그럴 때마다 제 정신을 팔아먹는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자넨, 미쳤네.” “그게 신의 바람입니다. 신은 제가 제정신이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건 그럴 테지, 하고 러셀은 속으로만 뇌까리고는 한때의 애제자를 보내 주었다. 1913년이었다. 이후 그는 스키올덴이라는 작은 마을에 틀어박혀 지내다 관광 시즌을 피해 오스트리아의 가족들을 보러 나왔는데, 마침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반전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까지 되는 러셀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열렬히 전쟁에 참여했다. 조국에 대한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윤리 의식뿐만 아니라, 끝없는 회의와 우울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자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탈장 때문에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자원한 끝에 입대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동안 후방에서 비전투 병과에 복무했다. 병영에서 틈만 나면 철학 연구를 했고,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i Tolstoi)의 『요약성경』에 심취해 외워버릴 정도로 되풀이해 읽기도 했다. 죽음과 운명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는 생활 속에서 종교적 감성에 관심이 부쩍 높아졌기 때문이다. 1916년 말에 마침내 전투부대에 배속되었을 때는 훈장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지만, 동료 병사들과 부대끼느니 위험한 단독 임무를 맡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뜸할 때는 다듬어낸 철학적 명제를 엮어 훗날 『논리철학논고』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될 원고를 써나갔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봄, 그는 마침내 『논리철학논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얼마 뒤 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깊은 절망에 휩싸이는데, 조국이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케임브리지 시절에 만나 유일하게 흉금을 터놓을 수 있었던 벗, 데이비드 핀센트(David Pinsent)가 죽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월 말, 비트겐슈타인은 패전국 포로로 이탈리아군이 운영하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용소 생활 도중 ‘초등학교 교사로 남은 삶을 살자’고 결심한다.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모든 숙제는 풀렸으며, 자신이 철학자로서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논리철학논고』에 제시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무엇인가. 이 책은 여느 사상서처럼 명제의 논증 과정이 전혀 없고, 짧은 머리말을 제외하면 명제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다. 머리말에서 그는 “이 책은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 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 스스로 이미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고 ‘주의’를 준 다음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명제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생각, 아니 생각의 표현에 한계를 긋는 것이며”,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다”. 그는 철학이란 언어를 분명하게 바로잡는 일이 전부이며, 철학자는 무리한 언어를 선 바깥으로 내던져버리고 가능한 한 언어를 명확히 다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책에 이루어놓은 자신의 작업을 “진리성에서 불가침이고 결정적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나는 (철학적)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과연 그럴까? “(명제 1) 세계는 사실의 총체다.” 『논리철학논고』의 본 내용은 이 명제로 시작된다. 세계는 원자, 분자, 개인 등등의 사물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창 밖에 산이 보인다”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런 사실들의 인식을 통틀어 세계를 이해한다. 하지만 산이라는 사물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언이나 확신을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말이다. 이는 버클리 같은 극단적 경험론을 떠올리게 하나, 비트겐슈타인은 감각 경험만이 의미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 경험으로는 의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제 4.1212)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창 밖에 있는 산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산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박목월처럼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예술가의 은유일 뿐, 산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산을 볼 수 있을 뿐, 말을 들을 수는 없다. 다시말해서, 어떤 의미를 전달받을 수는 없다. 이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같은 논증은 우리에게 일정한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처럼 현명한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다.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라거나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값진 인생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같은 의미를 이끌어내는 일은 논리적이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그런 해설은 비철학적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명제6.13) 논리학은 선험적이다”, “(명제6.421) 윤리학은 선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리학이 구체적인 경험이나 생활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칙 체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윤리학은?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 역시 선험적인 규칙 체계라고 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규칙은 어떤 증명도 필요 없는 규칙이다. 칸트처럼 추론을 통해 이런 규칙을 절대적 정언명령으로 제시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선의의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되는가?” 등의 반론은 윤리 규범 역시 상대적 가언명령임을 폭로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는 이렇든 저렇든 별 상관이 없다. 그런 반론은 일반 윤리 명제를 수식하는 특수 명제(가령, 정당방위 조건에서의 살해)를 추가할 뿐 윤리 규칙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는다. “(명제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철학을 통해 구하려는 인생의 의미, 존재의 이유 등은 논리학에서도 윤리학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삶이 무의미하다거나 가치관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매진한 사람이 아닌가? 다만 삶의 의문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철학자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철학의 의미를 통상적으로 이해해온 사람은 실망할지 모른다. 마르크스나 트로츠키도 입맛이 쓰리라.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그뿐인가? 바른 말 고르기에 불과하다고? 철학이 세계를 변혁할 수는 없어도,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대로라면 철학이 있다고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비트겐슈타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논리철학논고』의 머리말을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이 작업의 가치는 문제의 해결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적은지 보여주는 데 있다.” 분명 언어의 오용 여부에만 몰두하는 철학은 많은 꿈을 꾸도록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철학이 준수된다면 히틀러나 플라톤처럼 꿈꾸는 사람도 없어지리라. 그것이야말로 철학의 가치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포퍼와 비슷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3. 세계가 되어버린 천재 제1차 세계대전이 패배로 끝나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몰아치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많은 부자가 길거리에 나앉을 지경에 몰렸다. 포퍼의 집안은 몰락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재력은 건재했는데,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재산의 대부분을 해외에 투자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루트비히가 집에 돌아오니 대저택은 전보다 썰렁해 보였다. 아버지는 이미 1913년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형 콘라트도 전쟁 중에 자살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로서는 세 번째 맞는 피붙이의 자살이었고, 바로 위의 형인 파울은 전쟁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을 잃은 채로 피아니스트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어쩌면 집안사람들은 루트비히가 집안을 관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상속분을 그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주고는, 수용소에서 결심한 대로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니더외스트라이히로 갔다. 비트겐슈타인이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지은 집(그는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으며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했다.) 교사로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적어도 상냥한 선생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때렸다고도 한다. 학생 비트겐슈타인, 병사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교사 비트겐슈타인도 주변 동료나 마을 사람들과 도통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장학사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가 써낸 초등학생용 철자법 사전도 어떻게든 어린 제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1926년, 37세의 비트겐슈타인은 마침내 교사를 그만두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빈에 머물며 정원사로 일하고, 누이 마르가레트를 위한 집을 설계하는(그는 거의 완성된 집의 천장을 ‘3센티미터 높여라’라고 주문해 일꾼들을 황당하게 했다) 일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1929년에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얻고(박사논문은 『논리철학논고』로 대체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논문 자격 심사 중인 교수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하나도 모르겠죠? 이해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펠로 교수가 되면서 다시 학계에 발을 디뎠고, 10년 뒤에는 무어의 뒤를 이어 정교수직을 얻었다. 그가 교사와 정원사 일을 전전하는 동안 『논리철학논고』가 그를 학계의 전설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 그를 인간적으로는 반기지 않던 케인스도 비트겐슈타인이 기차역에 내렸다는 소식에 “신이 도착했다!”라고 외쳤다고 하며, 예전의 앙금이 남아 있던 무어도 자신의 교수직을 이을 사람으로 누구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에게 물리학 교수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나 같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 머리말에서 “진리성에서 불가침이고 결정적”이라고 밝혔던 점을 회의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어떤 천재가 10년 전에 이룩한 업적에 마냥 만족하고 있겠는가? 비트겐슈타인이 새롭게 주목한 것은 언어의 다양성과 사회성이었다. 가령 몸짓언어인 큰절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예의의 표시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굴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린츠에서 급우들에게 경어를 쓰자 급우들은 오히려 불편해하지 않았는가? 『논리철학논고』만 해도 독일어 원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해 난해성을 가중했는데, 수학기호였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명제가 대상과 정확히 대응한다는 『논리철학논고』의 입장을 버린다. 『논리철학논고』의 방식대로 한계가 그어진 명제는 무언가를 보여주지만, 과연 무엇을 보여주는지는 명제를 구성하는 언어에 따라 달라져버린다. 이는 자신이 한때 그토록 공들여 만든(그리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열심히 따라했던) 엄격한 기술언어가 일상언어에 여전히 지배받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가 이미 더하거나 빼거나 할 필요가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철학자들이 사로잡히는 난문제란 일상언어의 용법을 오해하거나 곡해한 결과라는 생각에 도달한다("철학적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말장난이 있을 뿐”). 이제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기에 앞서 언어의 구성물이며, 언어는 환경에 지배된다. 결국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일상적인 언어를 쓰면서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과제이며, 철학을 연구한다고 특별히 좋은 점은 없다("철학은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한다”). 다만 언어 분석으로서 ‘철학적 탐구’를 통해 철학자에게나 중요한 말장난을 풀이하고, 철학에 씌워진 환상을 벗겨낼 따름이다. 이런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러셀 같은 원로 철학자들의 반감을 사는 한편(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이 하는 말만 빼고 모든 말이 옳다고 한다!”라고 한탄했다), 열광적인 추종자 집단을 만들었다. 그가 범상치 않은 용모로 독일어 악센트가 뚜렷한 영어를 써서 “케임브리지가 5시라면 태양에서도 5시인가?”, “나는 남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말은 모른다” 따위의 아포리즘을 내뱉는 모습은 나치당 대회에서 열변을 토하는 히틀러 이상의 카리스마 효과를 냈다. 이렇게 ‘비트겐슈타인 앓이’를 하고 있던 케임브리지에 ‘철학이 말장난밖에 안 된다니, 무슨 망발을!’ 하는 생각을 품고 있던 포퍼가 초청 연사로 찾아왔고, 흥분한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위협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열광이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두고 온 고향에서 익숙했던 것들이 맹목적인 열광 때문에 상처 입고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유대인을 차별하는 뉘른베르크법이 적용되면서 유대인들의 지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빈에 남아 있던 비트겐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 높은 평판을 믿고 설마 했지만, 나치의 마수는 곧 그들에게도 뻗어왔다. 파울은 먼저 망명해버렸고,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누이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는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화려했던 가문도 오스트리아의 영광도 영원한 과거가 되었음을 절감한다. 또 다른 ‘상실’도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열렬한 추종자면서 오스트리아 논리실증주의 학파를 이끌던 슐리크가 학생이 쏜 총에 맞고 죽은 것이다. 범행 동기는 철저히 사적이었지만, 나치는 슐리크가 유대인이라는 점에 착안해 범인을 ‘민족 영웅’으로 포장해 선전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 자체를 분쇄해버린다. 가문이나 학파나 철학자인 그가 일찍이 업신여겨 마지않았던 것들이었지만, 이런 상실에 인간 비트겐슈타인이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부상자 구호나 병원 잡역부 일 등을 한 다음, 전후에 잠깐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가 1947년에 교수직을 내던진다. 그 뒤로 아일랜드, 노르웨이 등을 전전하며 틈틈이 철학 서적을 끼적이는 조용한 삶을 살다가 1951년 4월, 의탁하고 있던 주치의 베번 박사의 집에서 숨을 거둔다. 마지막 말은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세요”였다. 영광을 회피함으로써 멋진 삶을 완성한 비트겐슈타인. 그가 사후에 받은 영광은 생전의 영광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의 성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는 현대 영미철학의 주류가 되었다. 러셀이 말한 대로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었던 그의 캐릭터는 학계의 경계를 넘어 문학과 영화, 심지어 자기 계발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회과학에서도 그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체계 분석만 할 뿐 목적이나 의미를 ‘말하지 않는’ 구조기능주의다.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고 철학의 역할을 현저히 축소한 그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야말로 현대의 대중사회에 철학의 가치를 가장 강렬히 부각한 사람이 아닐까? 철학을 한없이 난해하게 하고, 한편으로 무척이나 단순하게 함으로써? 그도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 방랑할 운명을 타고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세계가 되어버렸다. |
이들은 자연과학적 명제들의 정확성과 검증가능성을 이상으로 여겼다. 이들은 선천적 지식으로는 수학이나 논리학만을 인정했고, 경험적 지식은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검증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선천적 지식에도 포함되지 않으므로 애매하고도 혼란한 것으로 거부된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사실에 관한 연구는 모두 과학이 수행하는 것이므로, 다만 철학은 언어구조의 논리적 분석을 행하여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보통의 언어표현이 지니는 애매성을 제거하고 그것의 진위(眞僞)를 검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언어학파는 논리실증주의의 결함이 자각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학파이다. 이 학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무어(Moore,G.E.)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이다.
근래에는 라일(Ryle,G.)·오스틴(Austin,J.L.) 등의 옥스포드 철학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상언어학파 역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적인 분석에 있다고 본다.
***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 (요약) 영국의 철학자. 일상언어를 세심하게 연구하여 인간 사고를 개별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분석철학). 슈루즈버리 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초기교육을 받은 뒤 올솔스 칼리지(1933)와 매그덜린 칼리지(1935)의 펠로가 되었다. 그곳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 고전을 공부했고, 이것은 나중에 그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정보부대에서 복무한 뒤 옥스퍼드대학교로 돌아와 1952~60년 화이트좌(座) 도덕철학교수로 일했고 일상언어 운동의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언어 분석이 철학적 수수께끼에 많은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형식논리학의 언어는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이 언어가 부자연스럽고 부적합하며 때로는 일상언어만큼 복잡·미묘하지 않다고 보았다. 언어 검토는 일반적으로 현대철학의 한 분야로 여겨질 뿐이지만, 오스틴이 신봉한 분석운동은 철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그의 학술 논문과 강의는 사후에 〈철학 논문 Philosophical Papers〉(1961)·〈감각과 감각가능한 것 Sense and Sensibilia〉(1962)·〈어떻게 말로써 행위하는가 How to Do Things with Words〉(1962)로 출판되었다. |
그러나 그 분석은 이제 더 이상 논리실증주의처럼 감각적 지각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명제를 모조리 인식론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일상적인 애매한 언어표현으로 나타나 있는 문장을 의미가 확실한 명제로 바꾸고, 이것에 의해 상이한 형태의 언어표현에 대해서 각기 독자적인 논리구조를 발견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즉, 역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윤리에 관해서 말하는 경우의 언어 등은 비록 그것들이 감각적 지각에 의하여 검증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고 그 독자의 용법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해석학은 논리실증주의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석학(Hermeneutik)은 “과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세계의 자연적 언어와 “이해”의 조건에 관심을 기울인다. 딜타이(Dilthey.W)는 정신과학을 자연과학과 구별해 정신과학의 학문의 기초가 되는 “이해의 역사성”과 그 방법으로서 “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가다머(Gadamer)는 하이데거를 따라 “이해”를 방법이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해의 조건”으로서 “선입견”을 재해석하고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논리실증주의가 자연과학적 명제의 정확성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의 영역을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버린 것에 반해, 해석학은 텍스트와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행위의 모든 표현 형태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영역을 넓혀 놓았다.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초상화 현대 해석학에 영향을 미친 『진리와 방법』의 저자로, 고전 연구를 진척시키고 원전 해석의 문제를 추구한 독일의 철학자다. 22세에 척수성 소아마비를 앓았던 경험이 소개되기도 한 『고통』에서 그는 현대인이 화학적 진통제에 익숙해지면서 몸이 잘못 길들여져 갈수록 더 많은 진통제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의학계와 반대 입장에서 고통을 저주가 아닌 삶의 일부로 바라보는데, 고통이란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의 경험이 유한한 주체성을 가진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고유한 인생에 더 가까이 접근하도록 하여 다른 인식의 지평으로 확장하는 길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M.), 아도르노(Adorno,W.)로 대표되는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은 현대의 산업문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거부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들은 주어진 현실과 조건을 긍정하고 그것을 또한 재생산하는 전통이론과 구분해서 자신들의 이론을 “비판이론”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현대 사회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본다. 자연과 불합리한 권력으로부터 인간해방을 목표로 했던 계몽적 이성은 현대산업사회에 있어 “해방적 기능”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도구처럼 사용해서 자연을 지배하고 그것에 의해 생존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 소외와 심각한 자연 파괴를 동시에 경험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도덕, 문화, 산업, 학문은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고, 이 도구적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면서 위협하는 양상을 띤다.
그들은 더 이상 계몽이나 맑스주의가 가진 “혁명적 주체”, 즉 프롤레타리아를 믿지 않으며, 끊임없는 비판과 미적인 것에서 해방적 가능성을 발견하려한다. 80년대에 들어 서구적 근대사회와 이성지배적 담론에 대한 자기비판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 [푸코, 데리다 등]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졌다.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요약)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Michel Foucault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개념과 약호(略號), 특히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하는 것처럼 사회를 규정하는 '배타 원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60~68년 클레르몽페랑대학교와 독일(당시의 서독)·스웨덴 등지에서 강의했다. 그후 파리 뱅센대학교에서 2년을 보냈고, 1970년부터 죽을 때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사상사 교수를 지냈다. 초기에는 주로 정신병과 그 치료의 역사에 관해 연구했다. 〈광기와 문명:Folie et Déraison: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1961)은 17세기에 정신병이 어떻게 분류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Naissance de la prison〉(1975)에서는 현대 형벌 체계의 기원에 대해 탐구했다. 이런 여러 저작에서 푸코는 정신병원·병원·감옥 등은 배타를 실행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고 주장했고 이들 장치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관찰함으로써 권력의 발달과 행사를 엿볼 수 있다고 보았다. 푸코의 또다른 저작으로는 〈사물의 질서:인문과학의 고고학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1966)·〈지식의 고고학 L'Archéologie du savoir〉(1969) 등이 있다. 〈성(性)의 역사 Histoire de la sexualité〉(3권, 1976~84)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인이 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를 추적했는데, 이 책으로 프랑스 지식인의 선두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명성을 굳혔다. |
2.5.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과제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 서양철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흄의 경험주의나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그리고 칸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로크로부터 밀까지 이르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도 개인은 합리성의 담지자로서 나타난다. 인식하는 주체는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계몽의 주체였다. 독립적으로 행위하고 인식하는 주체, 계몽, 진보, 과학, 이성은 근대의 표어였다. 계몽의 목표는 자연적 폭력과 무지와 선입견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성의 계발과 계몽에 기초한 근대학문은 기술적 자연지배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과학화와 기술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유 또한 더욱 증대되었다.
계몽과 진보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확대해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의 붕괴를 가져왔고, 기술적 자연지배로 인한 심각한 자연파괴를 가져왔다.
오늘날 서구철학에서는 모든 행위의 최종 근거로서의 “개인주의”와 그것이 가진 가치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심각한 자연파괴에 직면해서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 이성의 도구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 온다.
매킨타이어(MacIntyre, A.)같은 철학자는 원자화된 “개인주의”에 기초한 윤리학은 결국 개인의 “느낌”이나 “취향”에 그 근거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윤리적 행위와 가치는 인간이 관계 맺고 있는 공동의 삶의 장, 즉 공동체로부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요나스(Jonas H.)는 “책임의 원칙”을 통해 인간의 자연정복에 의한 생태학적 위기를 지적하고, 자연의 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윤리적 원칙으로까지 요청한다.
이처럼 현대의 위기와 근대 이성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 서양철학의 여러 시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단순하게 서양문명의 모방과 학습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과 현실적 지반에 다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전통과 현실 속에는 인간을 “공동체적 연관”속에서 파악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 등 오늘날 되살릴 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울타리에 매여있거나 맹목적으로 전통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대 세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철학하는 출발점으로서 한국의 역사적 현실을 자각하고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 사상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 본 철학사가 가르쳐 준 철학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